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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장애우 차별이 없어지는 사회가 제 꿈이에요”

공동작업장 ‘기지무나’ 운영하는 오니시요오꼬

본문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는 비장애우가 장애우와 더불어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의 모습을 말하는 걸까?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비장애우지만 유난히 장애우 문제에 관심을 갖고 수시로 주위에 있는 장애우에게 도움을 주며 사는 삶을 장애우와 더불어 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생활형편이 어려운 장애우들을 거둬 소규모 공동체를 꾸리며 물심양면으로 장애우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며 사는 비장애우도 장애우와 더불어 사는 한 모델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이상은 없는 걸까? 한 마디로 자신의 삶을 장애우와 일체화 시키는, 그래서 눈높이를 장애우에게 맞춰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는, 그런 삶의 모습은........
  지난 칠월 일본 오사카시에서 열린 다섯 번째 한일장애우교류대회에서 한 일본 여인을 만났다. 사십대 후반인 그이 이름은 오니시 요오꼬다. 그이는 지금 오가카시 니시나리구에서 ‘기지무나’라는, 차도 팔고 술도 팔고 음식도 파는 작은 카페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 여기서 그이가 그냥 카페를 운영하는 게 아니라 책임지고 운영한다는 말에 주목하기 바란다. 즉 그이는 카페 주인이 아니다. 기지무나라는 장애우 공동작업장의 대표 직원일 뿐이다.
  당장 떠오르는 의문, 아니 어떻게 카페가 장애우 공동작업장이 될 수 있나? 담, 현재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장애우 고용 형태가 가능한 곳이 일본이다. 몇 년 전 함께걸음에도 썼지만 일본은 비단 카페 뿐만 아니라 이미용실, 헌 책방, 재활용품 가게 등 모든 자영업을 장애우 공동작업장으로 인정해 일본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매년 지원금을 주고 있다. 지원금 규모는 오사카시를 기준으로 장애우 다섯 명이 한 가게에서 일하고 있으면 한 곳 당 일 년에 육백삼심만엔 (약 육천삼백만원)을 지원한다.
  거의 모든 공동작업장에는 공통적으로 일반고용이 힘든 정신지체, 뇌성마비 등 중증장애우가 고용돼 있으며, 이런 형태의 공동작업장이 일본 전국적으로 수천 개에 이르고 있고, 이렇게 자영업으로 중증장애우에게 직업을 갖게 해주는 것이 일본 장애우 복지의 근간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번째 의문, 일본에서 장애우 공동작업장은 어떤 과정을 거쳐 생겼을까? 답, 지금의 공동작업장이 있기까지는 지난한 투쟁의 역사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잇비 오년 전, 일본에서는 사회운동의 하나로 장애우 해방운동이 크게 이슈화됐다고 한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지금도 그러는지 아니면 과거의 일에 지나지 않는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 나라처럼 중증장애우들이 사회에서 격리돼 수용시설에 보내져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는데, 이들 중증장애우들을 수용시설이 아니라 사회에서 살게 해주자는 것이 거칠게 요약하면 장애우 해방운동의 이념이었다.
  이 장애우 해방운동에는 물론 장애우들이 앞장섰지만 의식있는 비장애우들도 어깨를 같이 걸었다, 여기서 일본에서 장애우 해방운동과 공동작업장 설립이 어떻게 연결됐는가를 아는대로 조금 더 설명해 보면, 일본 장애우 해방운동은 ‘똑같은 사람인데 왜 중증장애우들은 사회에서 살지 못하고 수용시설에 가야 하나?’ 라는 문제게기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이는 명백한 차별이며, 장애우도 사회에서 비장애우와 똑같이 살 권리가 있다. 그런데 중증장애우가 시설이 아닌 사회에서 살 수 있는 권리를 누리려면 당연히 사회에서 살 수 있는 여건이 말7us돼야 한다는 것이 해방운동 그룹의 생각이어고,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 게 사회에 중증장애우들이 일할 수 있는 소규모 장애우 공동작업장을 많이 만들자는 운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서 장애우 해방운동에 함께 했던 비장애우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설립 자금을 마련한 것은 아니지만, 낮에 공사장에서 막 일을 하는 등 갖은 고생을 하며 장애우 공동작업장을 마련하기 위한 돈을 모았다고 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 만든 공동작업장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지원은 당연히 초기에는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차별에 반대하는 이념을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살았고, 지금은 그 이념을 좀 더 발전시켜 장애우와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라 아예 중증장애우와 똑같이 사는 삶을 현실에서 실현하고 있다.
 오니시 요오꼬,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이도 장애우 해방운동에 몸담은 비장애우다 그리고 그이는 일본에서 생산시설이 아닌 카페 형태의 장애우 공동작업장을 처음 만든 당사자이기도 한데, 그이가 장애우 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한지 오해로 삼심년 째다.
 그이에게 장애우 문제는 우연한 계기로 다가왔다. 그이가 교사의 꿈을 안고 오사카 교육대학에 다닐 무렵, 한 뇌성마비 장애우가 교육대학에 들어오려고 했는데 장애우는 교사가 될 수 없다는 입장으로 가지고 잇던 학교측의 불허로 입학이 거부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소위 운동권 학생이었던 그이는 이 사건을 장애우에 대한 명백한 차별로 규정했고, 그래서 주도적으로 나서 교내에 뇌성마비 장애우의 입학 헐가를 돕기 위한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이 적극적으로 활동한 덕분에 결국 뇌성마비 장애우는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었고, 현재 오사카시 한 일반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그이가 장애우 문제에 눈을 떴다는 것이다. 그이는 곧 교내에 장애우해방연구회를 만들어서 활동했다. 그런 다음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교사가 될 수 있었던 평탄한 길을 거부하고 한 장애우 시설에 직원으로 들어가는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그이가 직원으로 이 년을 일했던 시설은 우리나라로 치면 장애우 수용시설이었는데, 그이는 현장에서 장애우 문제를 좀 더 자세하게 알고 싶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시설근무를 시작했고, 시설 근무를 그만 두면서 내린 결론은 장애우 수용시설은 사회에 절대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시설을 그만둔 그이가 두 번째로 들어간 곳은 한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소규모 구두 제조 공장이었다. 그이가 난데없이 구두 만드는 공장에 들어간 것은, 구두 만드는 기술을 직접 배워 장애우 공동작업장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삼 년을 구두공장에서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일 자체가 노동집약적이다 보니 너무 힘들어서 중증장애우가 일을 하기에는 여러모로 어렵겠다는 판단을 내려야 했다.
 그이는 미련없이 구두공장을 그만 뒀고, 사회에 나와서 세 번째로 들어간 곳이 통합 보육원이었다. 일본은 맞벌이 부부가 많기 때문에 부모 대신 자녀를 돌봐주는 보육원이 곳곳에 많이 설치돼있다. 그런데 일반 보육원에서는 장애아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장애우 해방운동은 차별 반대 차원에서 통합교육과 아울러 통합보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런 주장이 사회에서 관심을 모아 그때 막 통합 보육원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 중 한 군데에서 그이에게 같이 일하자고 제의를 해온 것이었다.
 통합보육원에서 일하게 되면서 그이는 본격적으로 장애우 대변자로 나서게 된다. 그이는 주로 오사카시 복지담당 공무원을 상대로 싸움을 벌였는데, 그 이유는 오사카시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보육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장애우 연령을 초등학교 사학년으로 제한했기 때문이었다. 현실은 정신지체 장애우들의 경우 달리 갈 데가 없기 때문에 보육원에 올 수 있는 연령을 훨씬 넘긴 장애우들이 계속 보육원을 찾아 오고 있었다. 심지어 보육원을 찾아 오는 장애우 중에는 마흔이 넘은 장애우도 있었다. 문제는 오사카시에서 이런 열악한 장애우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비장애아에게 적용하는 원칙을 똑같이 장애우에게도 적용해 초등학교 사학년 연령을 기준으로 그보다 나이가 많은 장애우는 보육 혜택을 줄 수 없다고 통보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이는 시 공무원을 찾아가 “장애우들은 갈 데가 없어 보육원을 찾아 오는데 시에서 보조금을 주지 않으면 장애우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느냐”며 대들었다. 그뿐 아니라 통합 보육원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처우 개선을 해줘야 할 거 아니냐는 요구를 내걸기도 하면서 틈만 나면 시청을 찾아가 공무원들과 마찰을 빚었다.
 그렇게 악받쳐 지내던 중 그이가 만난 사람이 바로 모리모도라는 이름을 가진 중증 뇌성마비 장애우였다. 지금으로부터 십오년전 일인데 장애우 모리모도를 만나면서 그이는 구체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어 했던 일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 곧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상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관계에서 같이 일을 하며 같이 산다는 이념을 현실에서 구체화하기 위해 만든 이 빵 공장에서 그이는 사 년을 일했다.
  그런 다음 그이가 만든 작업장이 기지무나였다. 그이의 회고에 따르면 그이가 카페 형태의 장애우 공동작업장을 만들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통합 보육원에 있을 때 만났던 장애우들이 그 때 인연으로 뽀뽀에 많이 들어 왔어요. 정신지체 장애우들이 많아지니까 장애우들을 위해 별도의 생활공간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우선 들었죠. 그리고 또 하나 기지무나를 만들게 된 이유는 빵공장 역시 노동집약적인 사업이다 보니까 일이 굉장히 힘들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정신지체 장애우들이 여가를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오사카시 복지담당 공무원이 나를 찾아왔어요. 오사카시에 장애우들이 늘어나서 공동작업장을 늘려야 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상의하러 왔길래 내가 제의했죠. 내가 생각하는 공동작업장은 생산적인 일은 못한다, 대신 하고 싶은 작업장은 카페다. 그랬더니 아주 쉽게 해보라고 응낙해 줬어요. 그래서 오사카시에서 개업자금으로 사백팔심만엔(사천육백만원)을 받아 기지무나를 만들 수 있었지요.”
 떠오르는 의문 세 번째, 그이가 장애우 십여명과 함게 십일년전 문을 연 기지무나는 (강조하지만) 카페이면서 정신지체 장애우 공동작업장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통념상 정신지체 장애우들이 손님을 접대하고 서빙을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답, “기지무나가 처음 문을 열었을 때 서빙을 하는 장애우 손톱 밑에 때가 끼어 있다든가
손님 커피잔에 장애우 손가락이 들어가기도 해서 그걸 보고 음식을 하나도 못 먹고 나가는 손님이 많았어요.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싫어하는 손님이 오면 장애우들이 갑자기 굉장히 난폭해져서 가게에 있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는 바람에 가게가 엉망친창이 되는 적도 많아요. 이렇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보니 그 동안 가게를 안정적으로 운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기지무나를 만든 것을 후회하지는 않아요. 이제는 손님들도 장애우들의 행동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이해를 많이 하는 편이죠. 그리고 긍정적인 면은 기지무나를 통해 비장애우들과 장애우들이 인간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거예요. 또 장애우 부모들이 손님으로 찾아와서 부담없이 자녀 문제를 상담할 수도 있죠. 장사가 잘 되는 편은 아니자만 이런 긍정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기지무나 문을 연 건 옳은 선택이었다고 믿고 있어요.“
 그런데 그이의 관심은 단순히 장애우와 같이 사는데만 머물지 않는다. 그이는 장애우 운동에도 관심이 많다. 그이와 모리모또가 창립 멤버로 참여한 일본 장애우 운동 모임이 바로 약칭 공동련(장애우 차별과 싸우는 전국 연합)이다.
 그이는 공동련을 만들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 마디로 장애우 공동작업장을 좀 더 많이 만들기 위해 공동련을 만들었죠.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장애우 의무고용 제도가 있어서 기업이 장애우를 공용하지 않으면 미고용 부담금을 내고 있어요. 우리의 요구는 그 부담금을 중증장애우들도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거예요. 즉 기업이 낸 부담금을 활용해서 중증장애우 고용을 시켜야 한다는 거지요. 구체적으로 부담금으로 중증장애우 공동작업장을 많이 만들어 나가자. 이게 우리 공동련이 추구하는 장애우 운동 목표예요.”
 공동련의 운동이 활발했던 덕분일까. 그이가 처음 장애우 공동작업장을 만들어던 십오년 전에 비해 지금 일본에는 앞에서도 잡시 언급했지만 소규모 중증장애우 공동작업장이 전국적으로 수천개에 이르고 있다. 그이가 모리모또와 함께 뽀뽀 빵공장으로 시작한 공동작업장도 지금은 일곱 개로 늘어 어느새 그룹 공동체 형태를 디고 있다.
 그이가 속한 장애우 공동작업장 그룹은 뽀뽀와 기지무나 외에도 피스클럽이라는 이름의 재활용센터, 뉴웨이브라는 이름을 가진 또 하나는 이 카페, 그리고 장애우 구룹홈 등 일곱 개 장애우 작업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장애우 삼십 명과 비장애우와 열다섯명이 한 공동체를 이뤄 같이 살고 있다. 놀라운 것은 공동체 구성원간에 수입과 분배를 똑같이 나눈다는 것이다.
 즉 중증장애우와 비장애우가 같은 수준의 월급을 받고 있다고 하는데(장애우들은 일본 정부에서 지급하는 장애우 연금을 월급에 포함시킨 액수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비장애우와 똑같은 월급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런 똑같은 분배는 한 공동체 안에서 장애우와 비장애우의 생활수준이 차이가 나면 안 되기 때문에 공동체 설립 초기부터 적용한 원칙이라고 한다.
 그래서 공동작업장에서 십오년째 일한 오니시 그이가 받는 월급은 장애우와 똑같이 십오만엔(백오십만원)밖에 안 된다. 일본의 평균 직장인 월급이 삼십만엔(삼백만원)에서 사십만엔인 것에 비하면 무척 적은 액수의 월급을 받고 있는 셈이다.
 의문 네 번째, 그이도 사람인데 인간의 본성인 ‘풍족함‘에 대한 갈망은 전혀 없나? 답, “우리 그룹은 예산을 공동으로 써요. 월급은 기본으로 받고 그 외 개인적으로 필요한 돈은 공동체에서 지원해 주죠. 예를 들어 장애우 교류대회에 참가한다든지, 작년엔 알레스카에 다녀왔는데 그때도 예산을 공동체에서 지원해 줬어요. 요즘도 우리 식구들은 공동체 예산으로 매달 한 번씩 여행을 떠나곤 하죠. 이런 식으로 사는데 꼭 필요한 돈은 공동체에서 지원해 주기 때문에 저를 포함해 우리 식구들은 돈에 대한 욕심이 없어요.” 바꿔 말하자면 그이가 속한 공동체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켜가고 있다는 것이 그이 설명이다.
 의문 다섯 번째, 그러면 삼십년을 장애우와 함께 살면서 그이에게 좋았던 일만 있었던 것일까, 어렵고 힘들어서 고민해 본 적은 없었을까. 답, “이 일을 하면서 그 동안 제일 힘들었던 것은 나는 끝가지 데리고 있고 싶었는데 장애우 부모와의 견해 차이 때문에 식구가 공동체를 나가버렸을때 정말 마음이 아팠어요. 그리고 이 일을 하면서 도대체 내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는데, 어떤 때는 내가 장애우와 같이 살면서 대변자 역할을 하는 것도 같지만 어떤 때는 장애우들로 인해 내가 인생의 즐거움을 맛보며 살기 때문에 나 자신을 위해 이 일을 하는 것 같아서 혼돈을 많이 느꼈죠. 지금도 혼돈이 가시지는 않았지만 현재는 장애우들과 일하다 보면 내 자신이 너무 자유롭기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이 일을 하고 있어요.”
 그이가 장애우들과 같이 살면서 꿈구는 사회는 가치관이 변화해서 장애우들도 비장애우가 누리며 사는 삶을 똑같이 당연하게 누리며 사는 정상화가 실현되는 사회라고 한다. 그렇다고 이런 꿈을 이루가 위해 그이는 휴머니즘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지는 않는다. 그이는 휴머니즘 보다는 차별에 반대하는 이념을 갖고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같이 운동하는 것이 정상화 사회를 앞당길 수 있다고 강조한다.
 동료와 친지들이 “오니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처음 그대로다.”라고 말해줄 때 가장 기쁘다는 그이, 그이의 요즘 관심은 온통 일본의 변방 오키나와에 쏠려 있다. “시간이 나면 오키나와에 자주 가고 싶어요. 오키나와는 보수적인 도시라서 장애우에 대한 차별 굉장히 심하거든요. 그런 오키나와에 장애우를 데리고 가서 자연스런 상태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오키나와 사람들의 장애우에 대한 인식이 바뀔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지요.”
 장담은 못하지만 이십년 후에도 장애우와 같이 사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이, 오니시 요오꼬는 일본 장애우들의 진정한 친구임이 분명했다.

 

글/ 이태곤 기자   사진/ 노윤미 기자  

통역/ 이채식 (장애인고용촉진공단 근무)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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