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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장애우의 삶을 연기하고 싶어요”

연기자 김주상씨

본문

 그 이를 처음 만난 건 올해 사월이십일 장애우의 날이었다.
  잠실 올림필경기장에는 장애우의 날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그중 한 공연장에는 십대들의 인기를 끌던 댄스그룹 G.O.D, 클론, 이글 파이브, 클레오 등이 출연하기로 돼 있어 올림픽경기장 내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 아나운서가 무대 아래에서 관람을 하고 있는 한 뇌성마비 장애우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면서 즉석인터뷰를 요청했다. 노란 염색을 한 머리에 색깔있는 머리띠를 하고 귀까지 뚫어 연애인 못지 않은 튀는 외모가 아나운서의 눈에 얼른 들어왔던 모양이다. 직업을 묻자 그이는 ‘연기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잠시 연기를 보여달라고 아나운서가 부탁을 하자 그이는 자신이 직접 쓴 시나리오 대사라며 별로 빼는 기색 없이 곧바로 연기를 시작했다.
  “왜 날 찾아왔어요. 날 버렸으면 됐지 뭐 하러 찾아왔어요. 내가 아프고 힘들고 보고 싶을 때 당신들은 내 곁에 없었잖아요. 이제와서 나보고 당신들을 받아들이라고 하면 난 어떡하나요. 당신들을 여지껏 미워하고 증오하면서 살아온 난데 왜 이제 와서 혼란을 던져주나요. 가세요. 나는 당신들 필요 없으니까.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그땐 내가 당신을 보지 않을테니까요.”
  그이의 연기가 끝나자 댄스가수들의 현란한 춤과 노래로 들떠 있던 공연장 분위기는 어느 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이가 연기를 시작한지 불과 삼십초만에 굵은 눈물을 흘리는 열연을 했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김주상이라는 무명 연기자에게 자꾸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세 살 때부터 고아원에서 생활

  그이에 대한 이력을 먼저 간단히 소개하자면 그이는 올해 스물 다섯 살이고 일급 뇌성마비 장애가 있고 현재 강동구 고덕동에 있는 성인장애우생활시설인 우성원에서 살고 있다. 지난 해 강동구 국립극단이 두 번째 정기 공연한 ‘이수일과 심순애’에 출연해 주제가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이는 고아다. 보통 사람들은 세 살 이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 기억이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을지는 모르지만 현실에서는 인식하기는 어렵다고 하는데 김주상 씨도 세 살 때 가족과 헤어져 가족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다만 주상 씨가 다섯 살 때 자신의 할머니라는 사람이 고아원을 찾아와서 “식구는 많은데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할 수 없이 널 버렸다.” 며 “형편이 좋아지면 꼭 다시 널 찾으러 오마. 늦어도 네가 초등학교 사학년이 되기 전에는 올테니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며 건네 준 가족 사진 한 장잉 주상 씨의 가족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은 모두 고아원 선생님을 어머니라고 불렀지만 주상씨만은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초등학교 사학년이 될 날만 기다렸다.
  그렇게 일년 이년이 지나고 어느새 주상 씨는 초등학교 오학년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할머니한테서는 아무런 소식이 오지 않았다.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 기다림을 포기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주상씨는 칠년을 고이 간직해왔던 가족사진과 함께 가족에 대한 미련을 그이 가슴 속에서 찢어서 불태워버렸다.
  그 후 주상 씨에게 가족은 항상 아픈 추억으로만 남게 된다. 가족이란 말에 유난히 민감해져서 같은 반 아이 중에 누가 가족 때문에 못살겠다, 자살하고 싶다는 말을 하면 주먹부터 나가고 육년을 사귄 친구와도 절교를 선언했다.
  “중학교 때부터 사귄 일반학교에 다니던 친구가 있어요. 제가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친구였는데 그 친구가 어느 날 술에 취해서 절 찾아왔어요. 영장이 나왔대요. 군대에 가야 하는데 여자친구랑 가족과 떨어지는게 서럽다며 우는데 저는 그게 너무 화가 났어요. 저는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두 가지를 모두 가졌어요. 장애와 고아, 그래서 다른 사람은 다 울어도 그 친구만은 절 보면서 그런 아픔쯤 별 것 아니라고 여길줄 알았는데 그렇게 우늘 걸 보니까 마치 절 놀리는 것 같았어요. 군대는 고작해야 이년이고 저는 이십 년을 넘게 이 곳에서 생활해 왔는데... 차라리 군대가 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 친구와 대판 싸우고 절교해버렸어요.”
   그 때 그 친구와 절교한 일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가족에게 버림받은 아픔이 아직도 주상씨 가슴 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스물 다섯 살이 된 지금 주상 씨는 많이 성숙해져 있고 자기를 아낄 줄도 안다.
  “이제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믿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제가 여기 이렇게 살고 있지 않을텐데 돌아가셨기 때문에 약속을 지킬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야 제가 사는 동안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있었다고 기억할 수 있고 가족에 대해서도 덜 아플 것 같아요.”


 

돈이 없어서 연기학원에 못 다녀

  주상 씨가 연기를 처음 한 것은 여덟 살 때다. 사람들이 학교 강당에 모여 있어서 가 봤더니 영화에 출연할 학생을 뽑는다고 했다. 카메라맨이 커다란 카메라를 매고 있는데 보통 카메라 보다 훨씬 크고 좋아 보였다. 거기에 나오면 장애가 있는 그이였지만 근사해 보일 것 같아서 주상 씨는 카메라맨을 따라다니면서 카메라 앞에 가서 괜히 웃기도 하고 만져보기도 했다. 그러자 카메라맨은 주상 씨가 똘똘하다며 주상 씨에게 연기를 시켜보고 싶다고 했다. 그 때 그 영화 제목은 생각이 잘 안 나지만 주인공이 가수 인순이 씨였다는 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인순이씨가 주상 씨를 목욕 시켜주다가 끌어안고 우는 장면이었는데 그 때 인순이씨는 눈에 안약을 넣고 연기를 했는데 어린 주상 씨는 진짜 우는지 알고 따라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 때부터 학교에서 영화나 드라마를 찍게 되면 주상 시는 단골로 출연을 하게 돼 영화 두세 편에 출연을 한 경력까지 생겼다.
  그리고 중학교 일학년 때에는 고아원에서 하는 성탄맞이 행사인 연극에서 꽤 비중있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주인공 역을 밭은 아이가 우는 연기를 못해서 공연 올리기 일주일전에 주상 씨가 주인공역을 맡게 됐다. “성경에 나오는 눈 먼 바디메오가 연극 맨 마지막에 눈을 뜨면서 환희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인데 제가 눈물을 흘리는 걸 보고 사람들이 진짜로 울고 박수를 치더라구요. 내가 이 사람들을 울릴 수도 있고 웃길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연기에 매력을 느끼고 정식으로 학교 연극반에 들었어요.”
  담임선생님도 주상 씨가 연기에 관심 있어 하는 것을 알고 매달 소년중앙이라는 학생잡지를 사주었다. 거기에 엠티엠이라는 연기학교에 대한 광고가 실렸는데 주상 씨는 그 연기학교에 가서 정식으로 연기를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재미삼이 원서를 넣었는데 아치까지 합격을 했다.
  마지막으로 삼차 면접만 보면 최종합격인데 갑자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가봤자 주상 씨가 장애우라는 사실을 알면 떨어뜨릴게 뻔했고, 학원에 다니려면 돈도 낳이 든다고 들었는데 고아인 그에게 그런 거액을 대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시간이 없다고 둘러대고 삼차시험을 보러 가지 않았다.
  그 후엔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 연극영화과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성적이 안돼서 이 꿈도 이루지 못했다. “제가 다니던 특수학교에서 제가 아무리 전교 일들을 해도 일반 고등학교하고는 차이가 많이 나요. 제가 다닌 학교에는 지능지수가 유치원생보다 못한 학생이 대부분이거든요. 그런 사람들 틈에서 자랐으니까 제 수순도 잘해봐야 중학교 이삼학년 수준밖에 안돼죠.”
  그래서 대학진학도 포기하고 있다가 경희대학교에서 그룹사운드 보컬을 뽑는다고 해서 출전을 했는데 합격을 해서 일년 반 정도 보컬활동을 했다. 그 때 작사, 작곡하는 것도 배우고 글쓰는 것도 배워 시나 시나리오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과 같이 장애가 심한 장애우를 뽑아 줄 극단이 어디 있을까 싶어 그 동안 썼던 시나리오를 모두 불태워버리고 말았다.


 

“장애우역은 장애우 연기자가 연기해야죠.”

  기다리고 기다리면 기회가 온다고 말이 있듯이 지난 해 강동구립극단에서 단원을 뽑는다고 해서 우연히 원서를 냈는데 합격을 했다. 그리고 지난 삼월 극단에서 공연한 ‘이수일과 심순애’에서 주상 씨는 김중배에게 배신당한 심순애의 심정을 노래했는데 그 때 부른 노래가 바로 김건모 씨의 ‘잘못된 만남’이다. 워낙 템포가 빠르고 랩도 있어서 웬만한 노래실력으로는 소화하기가 어려운데 학창시절 그룹사운드에서 보컬을 맡았던 실력을 발휘해 합격을 한 것이다. 그러나 뇌성마비장애의 특성상 부정확한 발음 때문에 가사전달이 잘 안될까 걱정이 돼 볼펜을 물고 가사를 읽은 연습을 수차례 했다.
  공연 때 그이는 그 노래를 잘 소화해 내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의 반응이 아주 좋았다.
  그리고 그 후 몇몇 언론에서 그이를 인터뷰해 가기도 했다. 장애우가 역경을 딛고 극단의 정식단원이 되어 연기자의 꿈을 이루었다며 그이를 한국의 ‘포레스트 검프’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아직까지 작품 섭외가 들어오지 않고 있다. 극단에서 올 시월 올리는 공연에서 조차 아직 캐스팅이 되지 못한 채 주제가인 뱃노래만을 연습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이유에 대해 주상 씨는 우리나라는 장애우가 출연할만한 작품도 그리 많지 않고 또 극중에 장애우역이 있다고 해도 모두 비장애우 연기자가 맡기 때문이라고 본다.
  “장애우가 나오는 영화나 연극, 드라마는 장애우가 직접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미세한 부분까지 보여줘야 감동이 오는데 비장애우들이 장애우에 대해 알 수가 없기 때문이죠. 외국에는 ‘포레스트 검프’. ‘제 8요일’. ‘레인맨’ 등의 영화가 있는데 영화를 보다보면 허점이 보여요. ‘포레스트 검프’의 경우 주인공이 어렸을 때 아이들에게 쫓기는 장면이 있어요. 아이들이 돌을 던지는데 다리에 보칠을 한 주인공이 막 뛰어요. 사실 보철이란게 쇠로 만들어서 상당히 무겁고 각이 져 있어서 균형을 잡기가 어려워서 뛰더라도 곧 넘어지고 말죠. 더군다나 영화에서처럼 보철이 엉덩이까지 오는 경우라면 백퍼센트 넘어질 수 밖에 없어요. 한 번 넘어지면 누군가 도와주기 전에는 절대로 혼자 일어날 수가 없는데 주인공은 끝까지 뛰죠. 정말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에요. 저 같았으면 다르게 썼을 것 같아요. 도망치다 넘어졌어요. 그러면 울 것 같아요. 안 울 수가 없죠. 도망은 가야되지, 일어나지는 못하겠지 어쩔 수 없이 울부짖으면서 기어서 가겠죠. 그러면 주이 아이들은 계속 놀릴 것이고 발로 차거나 주먹으로 때리겠죠. 그게 더 현실적인 거 아닌가요? 아무리 영화라고 해도 장애우가 봤을 때 감동이 없다면 그건 훌륭한 영화라 할 수 없죠. 흥행도 좋지만 장애우가 등장하는 영화는 장애우와 그들의 삶을 바로 보여줄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조리있게 자기 의견을 말하는 주상 씨의 표정이 참 진지해 보인다. 그러면서 포레스트 검프의 허점을 지적하는 부분에서는 무척 날카롭다는 생각이 드는데 실은 주상 씨도 그런 경험을 실제로 겪었다고 한다.
  “제가 어렸을 때 교회에 다녔어요. 신앙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밖을 나갈 수가 없어서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가는 게 낙이었는데 제가 장애가 제일 심하다 보니 교회를 오고 갈 때 늘 저 혼자 남아요. 제가 걸음도 느리거나와 걷는 모양도 이상해서 저랑 가면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니까 창피하다고 다들 먼저 가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절 쳐다보고 놀려대요. 그러면 저는 혼자 가다가 멈춰서죠. 어떻게 할지를 몰라요. 가야하는데, 눈물이 나오는데, 속 시원히 울 수도 없고 그러다가 아이들한테 맞아서 상처가 나고 피범벅이 돼서 고아원에 들어갔어요. 어쩔 때는 다리가 부러져서 기어 들어간 적도 있는데 어느 날 고아원 선생님이 머리에 무스를 발라줬어요. 전 안바른다고 했는데 잘 생긴 얼굴 드러내야 한다면서 옷도 괜찮을 걸로 입혀주시더라구요. 그러고 나가니까 사람들이 제 다리부터 안보고 얼굴 먼저 봐요. 그게 신기했고 옷도 괜찮을걸 입고 외모에도 신경을 쓰는 버릇이 생겼어요. 그리고 졸업 후에는 머리에 염색도 하고 귀도 뚫고 옷도 요즘애들만 다 제가 살아가는 전략이에요.”
 

 

“후배들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죠.”

 
  “우리나라에 사는 장애우와 고아들의 삶은 대부분 가려져 있어요. 같은 사람인데도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건  알지만 어떻게 사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기분인지 뭘 느끼는지 그런 건 몰라요. 누군가가 나서서 그 사람들의 인생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이대로 세월이 자꾸 흐르면 고아나 장애우들의 삶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잊혀질 것 같아요. 내년이면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데 장애우들과 고와의 삶은 더욱 뒤처져 아예 안보이겠죠.”
  그래서 주상 씨는 요즘 다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주상 씨가 연기할 작품이 없다면 스스로 작품을 쓰겠다는 것이다. “내년에 공모전이나 방송국에 낼 계획이에요. 방송하기로 결정되면 작가인 저도 회의에 참여하게 되겠죠. 그 때 주인공을 절 시켜달라고 할거예요. 제가 쓰는 시나리오의 주인공은 저밖에 할 수 없어요. 왜냐면 주인공이 장애가 심해서 비장애우 연기자는 연기할 수 없어요. 그리고 주인공의 사십퍼센트는 저랑 비슷한 점을 집어 넣었거든요.”
  그러나 그런 활동을 하려면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밖에 많이 다녀야 하는데 우성원에서 생활하는 그이에게는 수입이 전혀 없다. 그러나보니 활동에 많은 제약이 따르고 극단생활도 원만하지 않다.
  “공연이나 모임 끝나고 나서 남들은 나이트에도 가고 술 마시러 가는데 저는 안끼워줘요. 맨 처음에는 같이 가지고 두세 번 얘기 했어요. 저도 가려고 했는데 여기(우성원) 규정에 따라서 일찍 들어가야 되지 않냐고 해서 할 수 없이 들어가야 된다고 말해버리고 그냥 왔더니 그 다음부터는 얘기를 아예 안하더라구요. 그런 규정이 있긴 있는데 전화하고 말씀드리면 통과가 돼요. 또 나이로 보면 제가 청년부에 속해야 하는데 나이보다 어리게 보인다고 해서 지금 청소년부에 속해 있어요. 거기에는 중학교 삼학년 남자아이가 둘이 있는데 저보다 나이가 많아 보인다고 절 막내라고 부르면서 맞먹어요. 그럴 땐 솔직히 화가 나죠. 회의를 할 때도 제가 뭘 하자고 의견을 내놓으면 일단은 재미없다고 무시하고 자기네끼리 얘기하다 끝내요. 우리 극단에서 저하고 얘기하는 사람 거의 없어요. 인사도 가끔씩 가다 기분 좋을 때는 하고 잘 안 받아주죠.”
  극단 사람들도 장애우단원이 처음이기 때문에 특히 생활시설에서 생활하는 그이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고 주상 씨 역시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속시원히 못하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누구든 그 분야에 처음 뛰어들 때는 그런 어려움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주상 씨 역시 장애우연기자 일호로서 지금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서 포기하거나 좌절하면 그 이상 오를 수 없을텐데 다행히도 주상 씨 역시 그이의 뒤를 이어 연기자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올라오는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이런 어려움은 참고 견딜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사람들이 절 연기자로 보기 힘들 거예요. 출연작도 고작하나고 주제가를 부른 것밖에 없고 그 이후로는 섭외가 들어오지 않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계속 연기할 거예요. 그래야 장애우도 새로운 직업이 생기고 그 직업에서 활동을 하면서 견문도 넓혀가고 후배들은 그런 거를 보고 꿈을 꾸고 올라올 거 아니겠어요.”
  주상 씨는 한국의 포레스트 검프가 아니다. 그이는 아직 꿈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 겨우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관문 하나를 통과했을 뿐이다. 주상 씨가 그 길을 끝까지 무사히 통과하고 그이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상 씨 개인의 노력 외에도 그이를 진정한 동료로서 받아줄 단원들과 그이가 연기력만 갖추었다면 주저하지 않고 캐스팅할 공연문화가 정착해야 될 것이다.

 

글/ 노윤미 기자    사진/ 김학리 기자

작성자노윤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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