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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대인지뢰피해장애우고준진씨와 그의 아내 이두리씨

“저 같은 지뢰 피해자가 또 생기는 걸 막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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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준진(49) 씨는 천구백칠십이년 십이월 이십팔일을 잊을 수가 없다. 이 날은 고 씨가 군 입대를 일주일 앞두고 마을사람들과 함께 마을 근처 산에 올랐다가 지뢰사고를 당해서 두 발목을 잃은 날이기 때문이다.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토성리에 사는 고준진 씨는 군에 입대하기 전 베트남전에 참전한 이후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는 아버지와 어린 동생들을 돌보느라 애쓰시는 어머니를 두고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려 입대하기 전 나무라도 해 놓고 가야겠다는 생각에서 산에 나무를 하러 갔었다.
  산에 지뢰가 묻혀 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민간인의 출입이 불가능했었지만 영농증을 갖고 있는 주민에 한해서는 출입이 가능했다. 그래서 평소와 같이 고준진 씨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나무를 베러 산에 오르기 위해 오솔길을 걷다가 그만 지뢰를 밟고 말았다. 굉음과 함께 고준진 씨는 바로 쓰러져 정신을 잃었고 깨어보니 다리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한쪽 다리의 발목이 신고 있던 농구화와 함께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다음이었고 놀란 마을 사람들이 그이 주변을 삥 둘러 서 있었다. 그이는 다시 혼절했고 마을사람들에 의해 바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군 입대 일주일 앞두고 지뢰 사고 당해
  병원에서 진찰 결과 다른 한쪽 발목도 힘줄이 끊어져 두 다리를 모두 절단해야 한다고 했다. 그이는 병원에서 바로 발목 절단수술에 들어갔다. 그 당시만 해도 시골병원은 발달된 수술기구도 없었고 의술도 발달하지 못해서 수술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양쪽 발목을 톱으로 자르고 다시 꿰매고 붕대로 감아놓고 열흘이 지난 후 풀어보니 소독이 제대로 되지 않아 수술 부위에 커다란 물주머니가 생겼고 그래서 다시 대퇴부 아래 부분까지 절단을 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맏아들인 그이가 몇 차례에 걸쳐 수술을 하고 일년여를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이 가세는 점차 기울어갔다.
  “그 당시만 해도 고등학교까지 나온 사람은 동네에서 저 한 사람 뿐이었는데 사고를 당하고 나니 할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게다가 수술받느라 있는 땅을 다 팔아 농사를 지을 땅도 없었죠. 농사꾼 집안에서 땅을 다 팔고 나니까 남는 게 뭐가 있겠어요? 저 때문에 동생들 교육도 제대로 못시켰죠. 거기다가 아버님은 제가 두다리를 다 잃게 되니까 충격으로 몸져 누우시더니 오년만에 돌아가셨어요.”
  고준진 씨는 일년 후 가까스로 퇴원을 했지만 그 후로도 삼년동안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두다리가 남아 있을 때는 다리 무게가 있어서 팔에 힘을 줘서 몸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대퇴부까지 절단한 후에는 남들이 일으켜 줘야만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게다가 통증도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또 용변도 혼자 볼 수 없어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십여년을 그렇게 누워지내니 고 씨는 가족들 볼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그이는 도장 파는 기술을 혼자 익혔다. 용돈이라도 벌어볼 생각이었지만 시골이라 도장 파는 사람도 흔치 않아서 그저 담배 사서 필 정도만 벌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휠체어라는 걸 몰랐죠. 시골 동네에서 고작해야 교통사고를 당해 목발을 짚고 다니는 사람을 본 게 다였으니 까요. 말 못하는 사람은 수화라도 하면 되지만 나 같은 사람은 아무런 쓸모도 없다 싶어 매일같이 술만 마셨어요. 술 마시면 잠시라도 괴로운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 이런 세상 살아 뭐하나 싶어 동맥도 수차례 끊었죠. 그러나 사람 목숨이란게 참 질긴가 봐요 아무리 죽으려고 해도 안 죽어지는 거예요. 어쩌겠어요. 죽지도 못하는 인생 살아볼 수밖에요.”

 

 

상경해서 수세미 장사 시작
  팔십칠년 고준진 씨는 혼자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다. 고향에 있어봤자 희망도 없고 가족에게도 짐만 될 것 같아 어떡하든 혼자 힘으로 살아 볼 결심을 했다. 서울에 도착한 그이는 먼저 먼 친척 쯤 되는 아는 사람을 찾아갔다. 그 친척 역시 관절염으로 팔다리가 부자유한 장애우였는데 다행히 부인은 비장애우였다. 당장 갈 곳이 없었던 그이는 친척집에서 묵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을 거듭하다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장애우가 바닥을 기며 수세미 장사를 하는 모습을 목격한 게 계기가 돼 보름 후 마장동에 있는 경동시장으로 수세미 장사를 하러 갔다.
  처음 수세미장사를 시작할 때는 창피스러워서 제대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지만 그이로서는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고 또 이 일이 남에게 피해주는 일도 아니기 때문에 어떡해서든 스스로 먹고 살겠다는 신념으로 버텨 나갔다. 그러나 추운 겨울에는 다리가 얼어서 도저히 시장바닥을 기며 장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하철에 들어가서 수세미장사를 했는데, 때마침 팔팔서울올림픽이 개최될 즈음이어서 지하철에서 장사하는 것에 대한 단속이 심했다. 그저 하루 끼니거리를 벌 정도만 일하고 집에 돌아와야 했다.
  “계속 친척집에 얹혀 살수 없겠다. 싶어서 방세가 한 달에 삼만원하는 여인숙에 들어갔어요. 보일러 하나에 사람 두 사람이 간신히 누울 수 있을만한 아주 작은 방이 여러 개 다닥다닥 붙은 집이었죠. 그곳에서 이년 가량 살았어요. 그러다 길에서 우연히 저랑 똑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을 만났죠.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단했는데 형제들이 외면해서 다리 밑에서 가마니 덮고 지내다가 서울로 올라 와서 남대문시장에서 수세미 장사를 하다가 절 만난 거죠.”
  동병상련이라고 처음 만나자 마자 그 장애우는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그런 다음 그이를 자기 집으로 데려걌다. 다음날부터 그이는 독산동에 살게 됐다. 거주지가 생기면서 그이의 생활은 차차 나아져 갔다 돈도 한푼 두푼 모이기 시작했다.
  사년을 악착같이 일하자 꽤 많은 돈이 모였다. 그래서 구십이년도에는 서울시에 중계동에 지은 시영아파트 중 장애우를 위해 특별 분양한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게 됐다. 고준진 씨는 집을 장만하면서 고향에서 어머니도 모셔왔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알고 지내던 친구가 부인과 함께 그이를 찾아왔다. 이제 집도 마련했으니 결혼을 해야 하지 않겠냐며 선 한번 보라고 넌지시 말을 꺼냈다. 소개시켜줄 여자는 친구 부인과 언니 동생하는 사이여서 잘 아는 사람인데 성격도 좋고 수도 아주 잘 놓는다고 했다. 나이는 서른넷이고 소아마비 장애가 있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고준진 씨는 어머니에게 의논을 드렸고 어머니가 승낙을 해 태어나서 처음 선을 보게 됐다.
  선보기로 한 날 약속 장소에 나가보니 여자의 첫인상이 좋았다. 그래서 그 날 바로 여자를 집에 데려와 어머니께 소개시켰다. 두 사람은 그 후 일년여 사귀다가 결혼식을 올렸다.

“생활보호대상자 될 방법 없을까요?”
  고준진 씨 부인 이두리(40) 씨는 수를 잘 놓는다. 그냥 취미삼아 놓는게 아니라 장애우기능경기대회에 나가 여러번 수상도 했고 인간문화재가 수제자로 키우고 싶어했다고 할만큼 실력이 특출하다 그러나 그 좋은 기술이 실생활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아 지금은 부부가 길에서 옷을 파는 노점을 하고 있다.
  “아이 아빠는 두 다리가 없으니까 할 수 없다 치더라도 저는 수 놓는 기술이 있으니까 뭐든 하면 될 것 같지만 값싼 중국자수가 들어와서 국내 자수는 거의 팔리지 않아요. 물론 이름 있는 사람들 작품은 고액에 팔려나가기도 하죠. 저도 한 때 인간문화재 선생님 밑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어요. 선생님이 지시를 하면 제가 작품을 만들어서 대회에 출품하기도 했는데 그게 장관상도 받고 대통령상도 받았죠. 갈수록 선생님 명예는 높아졌지만 밑에서 일하는 저희들에겐 아무 것도 돌아오는게 없었어요 그래서 다른 가게로 옮겼는데, 옮긴 곳에서 제가 만든 작품이 대회에서 또 대통령상을 받았어요. 제가 가는 곳마다 큰상을 받으니까 선생님께서도 절 계속 밑에 두고 싶어하시면서 인간문화재협회에 수제자로 올려주겠다고 했죠. 그래서 서류를 냈는데 장애우는 수제자로 등록이 안된다는 말에 하도 속이 상해서 다 그만둬 버렸어요. 지금은 추미로만 수를 놓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이두리 씨는 집에서 틈틈이 수놓은 신사임당의 조충도가 그려진 병풍을 보여줬다. 자수에 대해 잘 모르는 기자가 보기에도 정말 잘 만든 작품이었다.
  부부에게는 종현이라는 이름을 가진 외동아들이 있다. 모든 가정에 아이는 특별한 존재지만 몸이 불편한 이 부부에게 종현이는 더욱 특별한 존재다. 두 사람이 발의 되어주기 때문이다 부부가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돌아올 때나,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어야 할 때 종현이가 큰 도움을 준다. 아직 여섯 살밖에 안된 아이에게는 무리일 수도 있지만 종현이는 나이에 비해 몸집도 크고 의젓한 편이어서 종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도 어른스럽다는 칭찬을 듣곤 한단다. 뿐만아니라 길에서 아버지 고준진 씨같이 휠체어를 타고 가는 사람이 있으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달려가서 휠체어를 밀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종현이는 보기와 달리 건강이 안 좋다. 어렸을 때 중이염을 앓아서 청력이 손상됐기 때문인데 귀수술을 두 번이나 했지만 청력이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두 부부는 본인들도 몸이 안 좋은데 종현이마저 귀에 이상이 생길까봐 요즘 가장 고심하고 있다.
  그리고 종현이가 수술을 받은 후 한 달에 네 번씩 특진을 받을 때마다 특진비가 사오만원씩 나와서 생활도 많이 어려워졌다. 종현이 뿐만 아니라 부인 이두리 씨도 무릎에 이상이 와서 다리 수술을 받았다. 또 고준진 씨도 워낙 고된 일을 하다보니 후유증으로 병원엘 자주 같다. 이렇게 가족 모두 병원을 자주 드나들다 보니 노점을 해서 번 돈이 대부분 의료비를 나가고 만다.
  그래서 고준진 씨 부부가 모든 일급장애우일 경우 생활보호대상자가 될 수 없을까 해서 동사무소에 문의해 보았지만 고향에 그이 명의로 돼 있는 선산이 있고 현재 살고 잇는 시영아파트 때문에 생활보호대상자가 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생활보호 대상자가 될 수 있다면 아파트는 당장 팔 수 있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서산은 처분할 수가 없다. 이번에 국민 기초생활보장법이 통과됐다고 하니 혹시 생활보호대상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가져볼 뿐이다.

 

 

“대인지뢰 금지 활동 열심히 해야죠”
  이런 어려운 형편인데도 고준진 씨는 최근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 일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그 동안은 생각해봐야 속상하기만 하고 개인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도 없으니 잊고 지냈는데 대인지뢰로 사고를 당한 사람들을 위한 시민단체가 생겨서 피해 당사자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고 나서 모른체 할 수가 없었다.
  “지난 삼월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그 동안 조사한 대인지뢰피해자 실태를 사회에 알리고 피해자보상에 대한 요구를 정부에 한다고 참석해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일을 하루 쉬고 한 번 가봤죠 기자회견장에 도착해서 다른 지뢰피해자들과 악수를 하는데 다들 술을 먹었는지 몸에서 술 냄새가 나더라구요. 그 분들을 보니까 이십년 전 제 모습이 생각났어요. 제가 지금까지 시골에 살았다면 그 분들과 똑같았을 거예요 농사짓는 사람들이 다리를 다치니까 농사도 못 짓고 애들 교육도 못시키고 병원비는 자꾸 들어가고 가세는 계속 기울고, 몸은 여기저기 쑤시고... 그러니 그 고통을 술로 달래는 거죠. 그렇다고 시골에 사는 분들이 나서서 운동하기 쉽겠어요? 누가 시골에서 차비 들여가며 여기까지 오겠어요. 서울에 사는 제가 그분들 대신해서 부지런히 다녀야죠. 하루 이틀 일 좀 빠지더라도 저와 같은 동료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제가 좀 희생해서라도 나서야죠.”
  고준진 씨 역시 이십칠년 전 있었던 지뢰사고에 대해 국가로부터 어떤 사과의 말이나 보장도 받지 못했다. 특히나 고준진 씨의 경우 사고 후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국방부에 냈음에도 국방부에서는 시효가 지났고 자료가 말소 됐다는 이유로 아무런 책음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 때 사고만 아니었어도 고준진씨의 인생은 지금과 백팔십도 달라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준진 씨는 이미 지나버린 일에 미련을 갖지 않는다. 다만 앞으로 또 발생할 지뢰사고로 인해 또 다른 사람이 그이와 같은 길을 걷지 않게 하기 우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대인지뢰반대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어찌보면 고준진 씨가 가려는 길은 직업 운동가 보다 더 힘든 일일 수도 잇다. 최저생활도 안되는 형편에서 하루 일을 포기하고 자기 돈을 들여가며 다녀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고준진 씨를 보고 있으면 대인지뢰금지운동에 장애우단체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고 자꾸만 미안해진다.

 

 

글/ 노윤미  사진/ 김학리 기자
 

작성자노윤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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