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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운동가 김록호 회장

"원진문제,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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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8년 원진레이온에서 근무하던 노동자 중 한 명이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한 것을 계기로 구성된 원진직업병가족협의회가 10여 년 넘게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싸워 얻어낸 보상금으로 세운 원진녹색병원의 개원식이 지난 5일 있었다.
  이 날 원진녹색병원을 비롯해 노동환경건강연구소와 복지관도 함께 개원식을 거행했는데 환자들의 요구로 이런 종합센터가 만들어진 것은 다른 나라에서 그 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한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의미를 부여하자면 소아마비 장애우로서 80년대 중반 사당의원을 세워 빈민, 노동운동을 활발히 벌이다 원진문제가 터지자 직업병문제 해결에 투신한 김록호 원장이 원진병원과 연구소의 총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90년대 초반 직업병에 대해 보다 전문적인 공부를 하고 돌아오겠다고 미국으로 떠난 후 6년만에 직업병해결사로 우리 곁에 되돌아 온 의료운동가 김록호 원장을 만나보았다.

 

 

▲의료운동가김록호원장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S스포츠센터 건물의 지하와 6층에 자리하고 있는 원장실과 사무실은 개원한지 얼마 안돼서인지 뭔가 비어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들여올 물건과 함께 일할 사람이 아직 다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원장실은 작았다. 한 세 평쯤 돼 보이는 공간에 책상과 컴퓨터, 의자, 전화 한 대가 전부인데 전화를 받거나 커피를 타 내오는 여직원이 따로 없다는 것도 다른 병원 원장실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불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주류에 안주하지 않는 청년의 패기와 어려운 상황에서도 원진 문제와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전문인으로 되돌아 온 결단력과 추진력 있는 모습은 김록호 원장의 외모만큼이나 신선했다는 것이다.

 

 

 

 

 

 

  "농성장에서 일하는 기분이에요" 


  김정열     원진녹색병원 초대원장으로 취임한 것에 대한 소감부터 한 말씀 해주시죠.
  김록호     소감을 물으니 원장이라는 자리가 마치 뭐가 된 것 같아 부담스럽네요.
  김정열     그럼 표현을 바꿔 묻겠습니다. "감회"가 어떻습니까?
  김록호    감회가 깊습니다.(웃음) 88년도 민주화 과정에서 의사로서 환자들을 대하는 책임감과 전문가로서 직업적 관심이 중복되면서 원진 환자들의 의학적인 자문 내지는 후원자 역할을 해 왔습니다. 녹색병원은 투쟁의 산물이고 녹색병원의 야전지휘관 역할을 맡기까지는 결자해지(結者解之)란 말처럼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한다고 원진 문제의 시작을 같이 했듯이 해결까지 같이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작용했습니다. 우연찮게 맺게 된 원진과의 인연이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행로의 방향을 잡도록 해 주었습니다.
  덧붙여 김록호 원장은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정서는 지금도 91년 김봉환 씨의 직업병 인정을 둘러싸고 1백37일동안 사체농성을 하던 그 농성장에 와 있는 기분"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원진녹색병원에는 원진 한자 가족 중에서 여섯 명이 실제로 근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김 원장도 현재 무보수로 녹색병원의 원장직을 맡고 있다.

 


  "진짜로 싸우기 위해 유학을 떠났죠"


  김정열     사당의원 하면 김록호 하면 사당의원이 떠오를 정도로 80년대 후반 활동이 대단하셨죠. 사당의원과 김록호 원장은 곧 민주화의 지원세력이면서 주체였는데 그 격동의 시기에 갑자기 유학을 가게 된 이유는 뭔가요?
  김록호     사당의원을 시작한 게 85년이었고 87년이 지나면서 노동 운동이 자리를 잡게 되고, 사당의원이 빈민들의 후원, 지원, 노동운동의 지원역할을 해왔죠. 그 당시에는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사회 전체의 민주화와 노동운동의 확립이었는데 88년을 지나면서부터 각 전문분야에서의 자기 역할이 중요하게 됐죠. 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 누가 노동자 편이고 아니냐가 아니라 누가 제대로 노동자를 도울 수 있는가가 중요하게 됐죠. 또 하나는 정부나 기업들도 과거와 같이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우리 쪽에서 폭로하면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쪽에서 제시한 대안을 비전문적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죠.
  그래서 두 가지를 고민했습니다. 하나는 내가 알고 있는 대학 교수들한테 이 문제를 모두 넘겨주면 해결해 주겠는가인데 "노"라는 대답이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 나갈 수 있겠는가 역시 "노"였습니다. 결국 우리 내부에서 진짜 전문가가 나와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고 그 이후 바로 공부를 하러 떠난 거죠.
  김정열     그런데 가는 도중 비행기 안에서 다시 돌아오셨죠?
  김록호     수배자들을 치료해주고 시위하다가 전경에게 맞으면 진단서 떼 줘서 검찰을 고발하게 하고 경찰들 병원에 못 들어오게 했던 괘씸 죄가 누적돼 사당의원이 공안 검사들과 경찰들에게는 눈에 가시였죠. 결정적으로 출국 금지 당한 계기는 93년 3월 월간 "사회평론"에 기고한 글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공안정국에 운동권이라는 사람들이 과거와 같이 현장에서 희생하기보다는 일종의 운동정치주의가 나타나면서 불필요한 노선투쟁을 벌였죠. 그래서 제가 권두언에다가 "실사구시하자. 사회운동 하는 사람들은 대중이 고통받는 현장에 가서 대중과 함께 싸워나가면서 운동을 해야지 무모한 이론투쟁만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론투쟁은 운동권을 싸잡아서 공격하고자 하는 공안검사들에게 빌미만 제공할 뿐이다"라며 공안 검사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썼죠.
  그러나 검찰은 조사를 하다 보니 뭐 특별히 잘못한 점을 찾을 수가 없었던지 가장 모호한 법 조항인 업무방해죄로 약식기소를 해 유학 등록일을 이틀 앞두고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출국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죠. 억울하지만 타협안으로 벌금 백만 원을 내고 출국했는데 다행이 어떤 판사가 벌금을 십만 원으로 깍아 줬는데 이게 검찰측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검사측에서 약식기소를 취소하고 다시 정식재판을 하자고 했죠. 그 때 오히려 더 잘 됐다 싶었어요. 자기가 진단한 환자를 끝까지 책임지고 대변하는 의사가 어떻게 업무방해가 되는지, 만일 업무방해로 처벌된다면 앞으로 의사들은 업무방해가 두려워서 환자를 못 볼 것이고 내가 한 행동은 히포크라테스 선서에서 규정하고 있는 환자에 대한 의무였다고 법정에서 떳떳하게 항변을 하려고 했는데 97년 여름 검사들이 기각을 해 버렸어요. 그쪽에서 마지막에 안될 것 같으니까 기소를 취하한 거죠.
  이런 우여곡절은 김 원장의 미국 유학 결심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고 그이는 지난 95년 6월, 미국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하버드대 보건대학원 슈바이처 재단이 공동으로 수여하는 올해의 "알버트 슈바이처상"을 받았다. 학사과정이나 입학 전 사회활동을. 슈바이처 박사의 생애가 보여준 "생명에 대한 경외"와 "자신의 신념을 자신의 인생을 통해 나타내려는 노력"을 보여 온 졸업생에게 매년 수여되는 상이다.
  그리고 지난 3월 귀국을 해 현재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환경보건학교 교수로 재임중이다. 이제 그이의 뜻대로 전문인으로서 자격을 갖추었으니 전문인으로서 마음껏 역량을 발휘할 때가 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김록호 원장은 유학시절보다 더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지난 6월 10일자 뉴스위크지와의 인터뷰 내용을 잠시 인용하면 김원장의 연구실 책상 밑에는 침낭이 하나 놓여 있다고 한다. 김 원장은 이곳을 집 삼아 먹고 자고 일하는데 수요일은 경기도 구리 원진녹색병원, 목요일은 서울 혜화동 보건대학원 수업, 금요일은 전북 군산에 들러 공장 주민들의 악취로 인한 호흡기질환 역학조사, 토요일 오전은 마산 창원지역에 들러 요통호소 환자들에 대한 조사 사업을 벌이고, 오후엔 다시 경기도 구리…
  이런 생활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강행군을 계속해도 가정생활이 원만할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김 원장이 가장 바쁜 지금 그의 부인은 하버드대 인문대학 6년차 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어서 아이들도 모두 미국에 있다고 한다.


 

장애우 차별의 근원은 국가보안법

 

  김정열     당시 김록호 원장은 장애운동에도 관심이 많아 함께걸음에도 기고를  해주셨죠. 89년 8월 붓소리에 기고한 글을 보면 사춘기시절 본인의 장애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신 것 같던데 유학을 다녀 온 후 장애문제에 대한 시각에도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김록호     미국에 가서 배운 게 다양성이에요. 다원주의는 직선상에서가 아니라 원형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거죠. 다원주의라든가 우생학적인 접근은 강자, 약자를 구분한 것인데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직선상에 펴놓고 보면 결국 남는 게 없죠 그러나 원 위의 한 점은 보는 관점에 따라 각자가 모두 가장 첨단이 될 수 있고 중심이죠. 그런 다양성이야말로 역사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삶을 더욱 살맛나게 하는 거죠. 장애문제 역시 장애와 비장애를 구분짓고 장애우에 대한 편견을 깨자는 직선 위에서의 논의가 아니라 그런 틀까지도 부인함으로써 장애를 원 위에서의 다양성의 한 부분으로 보자는 것이죠.

  김정열     제가 어제 한 워크숍에 나가  토론을 하게 됐는데 기억에 남은 대목이 과거에는 이혼을 하면 편모쪽에서 위자료를 안 받아도 좋으니 아이를 내가 데려가겠다고 했는데 이제는 서로 안맡겠다고 해 고아원에 보내지는 아이가 요즘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라고 합니다. 사람의 가치보다 물적 가치에 매몰되면서 전 같으면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서라도 아이를 맡으려고 했는데 요즘은 애를 맡으면 교육비가 들어서 못 맡겠다는 식이죠, 그래서 이제는 이런 가치문제가 운동의 중요한 테마로 와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김록호     저는 그 문제의 출발이 국가보안법에 있다고 봐요. 국가보안법이 일부 정치 지향적인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한 사람의 자연스런 사상, 이념을 법으로 제한하고 가두고 죽일 수 있는 법이 있는 한 자연스런 사상의 발전이란 있을 수 없죠. 사람의 생각을 규제하는데 하물며 사람의 외형에 대한 규제, 장애우에 대한 규제 및 차별은 너무나 쉬운 거죠. 장애우 뿐만 아니라 직업병 환자들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죠. 지금 우리의 실정으로는 사상은 물론 신체적 조건, 출신 지역 등 계속해서 차별을 하게 될거고 이렇게 가다 보면 결국 남는 게 하나도 없을 겁니다. 스스로 사회전체를 초라하게 만드는 거죠. 이것은 국가적 경쟁력마저도 약하게 만들고 말 겁니다.

  김정열     국가경쟁력을 말씀하시니까 생각나는데 IMF 이후로 우리 사회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IMF로 오히려 경제 성장 제일주의가 우리 사회에 주요한 세력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어 염려가 됩니다.

  김록호     IMF 사태는 어쩌면 우리에게 좋은 계기가 될뻔했어요, 그런데 불행히도 오히려 역사의 시계 바늘을 10년 정도 거꾸로 되돌리는 꼴이 돼 버렸죠. 80년 이후 민주화 투쟁으로 확보된 것이 상실돼가고 있는데 소위 진보적인 사람들의 발상의 전환이 너무 늦었습니다.
  상투적인 사고 중의 하나를 예로 들자면 그 동안 사회주의 노동운동건에서 얘기해 온 논리들입니다. 공공서비스는 무조건 강화해야 되고 민영화는 무조건 역사의 후퇴라고 한다든지 노동자는 무조건 옳고 곡용의 안정성을 무조건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들은 실사구시 원칙에 맞게 기본적으로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이라는 한 국가 안에서만 경제활동이 이뤄진다면 모르지만 자본과 노동이 국경을 넘나드는 지금은 경제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구조조정은 꼭 필요합니다. 구조조정 결과 나온 인력들에 대해서는 국가에서 책임지고 재 훈련시켜 보다 가능성 있는 부문에 취업시켜야 하는데 진보세력은 아직까지도 같은 주장만 하고 있어요. 그런 주장은 물에 빠지는 시간을 지연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물에 빠진 사람을 살라지는 못하죠.
  이제 각 부분에서 진보주의 지도자들은 21세기 한국 사회의 모델을 그려야 됩니다. 그 동안의 것들은 모두 무시하고 백지상태에서 21세기 중ㆍ후반에 우리 사회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외국의 사례도 연구하면 뭔가 나올 거예요. 그리고 연구 결과가 나오면 미련 없이 따라야지 그 동안 해 온 것을 잘 얼버무리려고 하면 안돼죠. 원진에서 10년 동안 열심히 해봤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직업병 환자는 줄지 않았고 사망자도 늘었어요. 제가 유학 갈 때 30여명이었던 직업병 환자가 지금은 2천7백여 명이에요. 장애우 문제도 근본적인 구도를 바꿔놓지 않는 한 조금 차이는 있겠지만 장애우 입장에서는 옛날과 별 차이가 없을 겁니다.

  김록호 원장은 인터뷰를 처음 시작할 때 원진레이온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것은 원진레이온의 직업병이 선진국의 혐오시설을 우리 나라에 옮겨와 발생하게 된 후진개발독재국가의 비극적 산물이며 우리 나라도 원진레이온 공장을 50억 원에 중국에 매각함으로써 그곳에서 제2의 원진 사건을 불러올 수 있는 과오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진녹색병원과 노동환경건강연구소의 설립은 김 원장의 말처럼 본격적인 투쟁의 시작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 투쟁의 한복판에 전문인 김록호 원장이 서 있는 것이다.

 

정리/노윤미 기자   사진/김학리 기자   대담/ 김정열 편집주간

 

작성자노윤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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