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걸음이 만난 사람] 소외된 이들과 천금같은 꿈 나누는 "10원짜리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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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걸음이 만난 사람] 두밀리자연학교 채규철교장
소외된 이들과 천금같은 꿈 나누는
"10원짜리 인생"
올해 10월 10일로 한벗장애인 이동봉사대 채규철 대표는 회갑을 맞았다. 그가 일찍이 농업을 살리는 교육, 그리고 자연과 함께 하는 교육을 위해 풀무학교 교사를 거쳐 갖은 어려움 속에 가평 두밀리 자연학교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교통사고 후 전신 50%에 3도 화상, 특히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은 후 잦은 사회적 냉대에 "나는 문둥이가 아니다"라고 외쳐야 했던 채규철 교장, 그러나 이렇게 그의 삶은 장애우와 빈민을 비롯한 소외된 계층과 함께 나누고 자연과 어린이를 살리는 교육에 바쳐지고 있다. 채규철 교장을 만나 그런 그의 삶 속에서 느끼는 보람과 미쳐 이루지 못할 꿈을 들어본다.
지난 10월 10일에 회갑을 넘기셨는데, 11일 가평 두밀리 자연학교에서 마련됐던 회갑연 겸 출판기념회에 연극계, 교육계, 한벗회를 비롯한 많은 자원활동가 뿐만 아니라 일본인, 호주인 등 각계각층에서 백 여분이 넘게 참석하신 걸 보고 놀랬습니다
그 자리가 단순한 회갑잔치라기보다 몇 달 전에 나온 책이긴 하지만 「ET할아버지와 두밀리 자연학교」라는 책의 출판기념회도 겸한 것이었어요. 그래서 경기도 가평까지의 먼 길이긴 하지만 자연학교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나 또 제가 그냥 좋아하는 사람들을 좀 오십사하고 청했지요. 그분들이 또 지인들을 데리고 와 숫자가 그렇게 늘어났을 뿐이에요. 제가 존경하는 함석헌 선생님이나 장기려 선생님도 가시고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떠나는 때인 것 같아 더 늦기 전에 한 사람 두 사람 얼굴을 만나고 싶어 그냥 출판기념회를 빙자해서 자리를 만든 거지요, 뭐.
실례지만 얼굴로 봐서는 연세를 전혀 짐작할 수 없겠는데요. 자동차전복사고로 전신에 심한 화상을 입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현재 몸의 상태가 어떠신 건가요.
남들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전 불편한 데가 하나도 없어요. 자동차사고는 68년에 났으니 벌써 30년 가까이 됐군요. 척수신경이 다칠 만큼 큰 사고는 아니었는데, 불행히도 그 차에 신나가 두 통이나 실려 있어서 차가 전복되면서 차 전체에 큰불이 난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얼굴을 비롯해서 전신 50%에 심한 화상을 입게 됐는데 같이 차에 탄 사람 중에 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또 한 사람은 다음날 그 불길 속에서 사망했으니 그나마 나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해야겠죠. 그 사고로 귀랑 손가락 일부를 잃었지만 그렇지만 다행히 아무 문제없이 들을 수 있고 글도 쓰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이렇게 안경도 쓰고 내가 좋아하는 담배도 피고 술잔도 잡을 수 있고 강연을 그렇게 다녀도 제 발음을 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으니 됐죠. 다만 한 쪽 눈을 잃고 또 한 눈은 지금 의안을 했는데 점점 안보여서 좀 걱정이에요. 그래도 "삼일동안만 볼 수 있다면"하고 바랐던 헬렌 켈러보다는 훨씬 행복하지 않아요?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외모 때문에 정말 웃지 못할, 서글픈 해프닝도 많이 경험하셨겠습니다.
제가 그럽니다. 10원짜리 인생이라고, 이제는 화폐가치가 올랐으니 100원짜리는 됐을까요. 내가 다방이나 사무실을 처음 들어가면 구걸하러 오 사람인줄 알고 다들 동전 한 닢 주면서 제발 나가달라고 그래요. 그런 날은 그냥 부수입 잡는 날이죠. 돈주면 받아서 호주머지에 넣고 제 볼일 다 보고 갑니다. 어떤 다방 마담은 내가 나가면 소금을 뿌리면서 "아침부터 문둥이가 와서 재수 없다"고 그러질 않나, 소록도 나병환자로 안 이웃사람들 등쌀에 몇 년간 6개월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녀야 했던 적도 있어요. 가장 미안했던 건 자식들한테죠. 제가 아들 둘하고 딸 하나를 두고 있는데 아이들이 어렸을 때 친구들이 놀러와서 나를 보고는 놀래서 다 가버리는 거에요. 큰애가 그런 일을 겪으면서 눈물이 맺히는 것을 처음 봤을 때는 혹시 아이가 내가 죽는 걸 바라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더라구요. 그날 실제로 죽으려고 약도 사 모았는데 다시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지금 죽으면 나중에 그냥 아빠는 차 사고로 불구자가 된 것을 절망해서 약을 먹고 자살했다는 지저분한 이야기를 평생 되풀이해야 할거다, 이렇게 비굴하게 죽기보다 누구보다 떳떳하고 보람있게 살다가 죽었다는 얘기를 자랑스럽게 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다른 사람들은 정식 박사학위도 없는 날보고 박사다, 교육부 인가도 받지 않은 자연학교지만 교장이라고들 부르는데 자연학교 오는 어린 학생들은 날보고 ET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제 얼굴이 ET랑 조금 닮은 데가 있나보죠. 아무튼 그게 제일 맘에 드는 호칭이에요.
한벗회장애인 이동봉사대 대표로도 활동하고 계신데, 처음에 한벗회와는 인연이 어떻게 맺어지게 된 건가요.
한벗회는 당시에 지금 한벗금고 이사장을 맡고 있는 백진앙씨가 주도해서 그러니까 78년도에 처음 만들어진 자원활동 단체예요. 나는 부천에 있는 한 재활원에 강연을 갔다가 그곳 직원이던 한벗회원 한 분이 백 선생한테 소개를 해줘서 만났는데 금방 의기투합이 됐지요.
한벗회의 저력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초창기부터 장애우관련 봉사활동만 해오신 겁니까?
지금은 한벗회가 장애우를 위한 차량이동봉사활동을 하는 봉사대와 한벗금고와 같은 사업을 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소외된 지역 사람들을 위해서 "골목무대"같은 문화공연도 했었어요. 지금 힐튼호텔 자리가 예전에는 양동이라고 구걸해서 먹고사는 시각장애우들이 많이 살던 지역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애 키우는 일 뿐만 아니라 먹는 것도 문제예요. 그래서 무료밥집도 열고 시각장애우 자녀들을 위한 어린이집도 열고 그랬죠. 구걸해서 모은 돈을 술이나 노름으로 다 날리는 걸 보고 자립능력을 키우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서 "협심회"라고 신용협동조합도 만들었고요.
한벗회에서 출발한 자원활동단체가 많다가고 들었습니다만.
한벗회의 일하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면서도 그들이 자립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 주는 거죠. 그렇지만 그 조직을 한벗회의 안으로만 끌어들이지는 않습니다. 때가 되면 독립할 수 있도록 하고 그러면서 한벗회도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찾아나서는 거죠. 대구 참길회나 대전의 애육원도 81년부터 한벗회가 소록도봉사활동을 나가면서 만들어진 소록도자원활동단체죠. 병원이동 도서관이나 양로원 빨래 봉사대, 김정희 선생이 이끌고 있는 부름의 전화, 또 제가 현재 대표를 맡고 있는 한벗장애인이동봉사대나 지난해 가을 출범한 "장애인 편의시설촉진시민모임"도 그렇게 생겨난 단체들입니다.
고 장기려 박사님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로 의료보험운동을 펼치기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당시 상황을 좀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장기려 박사님이 부산 복음병원 원장으로 계셨을 때, 돈 없는 환자들이 비싼 수술비 때문에 제대로 치료를 못받는 걸 그냥 지나치지를 못해 사재를 털어서 도와주시곤 하다가 개인적으로 곤란한 일도 많이 겪으셨죠. 저는 박사님과 성서모임에서 만나곤 했었는데 덴마크의 의료조합운동이나 미국의 청십자, 청방패운동에 대해서 얘기를 하다 의견일치를 보고 우리도 건강할 때 병자를 돕고 병들었을 때 도움받자는 취지로 의료보험운동을 시작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1968년부터 부산 복음 병원을 중심으로 그 기틀을 잡아가게 됐죠. 서울에서는 70년도에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의료보험과 관련된 세미나를 마친 후에 결성됐습니다. 어떻게 운영했냐면 일인당 이백원, 가족은 매월 천원을 회비로 내면 엑스레이 촬영, 혈액검사, 치아검진을 무료로 해주는 거죠. 서울에 10개 지정병원이 있었고, 나는 청십자의료협동조합 이사로 최일선에서 실무를 총괄했었습니다.
자연학교에 가보니까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고기를 잡을 수도 있는 시냇물도 있고 뒤쪽으로 밤나무며 참 오밀조밀 잘 꾸며졌다는 생각이 들던데요. 자연학교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습니까.
일단 선생님들이 땅을 할당받아 아이들과 함께 각각 농작물을 심습니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에 번갈아가면서 학생들이랑 와서 김매기도 하고 그 땅을 함께 가꾸는 거죠. 5월부터 씨앗심기, 모종심기, 산나물캐기, 수박, 참외 수확하기, 고구마캐기, 밤따기, 사과따기 같은 프로그램을 그때그때 계절에 맞게 진행합니다. 그 밖의 시간에는 저하고 친분이 있는 극단분들이 와서 마임도 하고 그 분야에 관심이 있는 선생님들이 와서 공룡 이야기나 들꽃 이야기, 민물고기 이야기도 해줍니다. 그렇지만 되도록 꽉 짜여진 프로그램에 아이들이 따르도록 하는 것보다 그냥 풀어놓으려고 합니다. 자연 속에서 한껏 자유를 느끼게 하는 거죠. 그래서 자연학교는 어린이 해방기구라는 별명이 있는데, 말하자면 "신나게 노는 학교"라고나 할까요. 분명한 사실은 아이들이 그 속에서 노는 건 아파트 놀이터에서 노는 것과는 다를 것이라는 거죠.
지난해 풀뿌리 환경상도 수상하신 걸로 아는데요, 자연학교에서 학생들이랑 환경운동차원에서 특별히 펼치고 있는 일들이 있으면 간단히 소개해 주십시오.
자연학교에 올 때부터 학생들한테 일회용품은 절대 가져오지 말라고 선생님들에게 지도하도록 하죠. 그리고 설거지는 밀가루로 스스로 하게 합니다. 학교 화장실도 푸세식을 고집하고 있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요. 저는 손이 이래서 못하고 학교 농장장을 맡고 있는 집사람이랑 자원활동자들이 화장실 푸는 일을 일년에 네 차례씩 하는데 거름으로 쓰일 웅덩이를 파는 일부터 시작해서 그 화장실은 자연학교에 어울리지도 않고 거기에서 쏟아지는 오염물을 처리하는 게 더 큰 문제다 싶어 그냥 계속 사용하고 있죠. 자연학교 시설 자체를 전부 되도록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자연학교를 두려고 하는데 아이들 화장실 갈 때 불도 밝혀주어야겠고, 또 학교 앞 시냇가의 물고기들도 수족관 같은데 두면 아이들이 생태계를 공부하는데 더 도움이 될까 싶어 마련해놨더니 선생님들이 더 말려요. 제발 다음에 올 때 그 상태 그대로 놔두라고 저한테 오히려 사정합니다.
자연학교 운영이 결코 돈이 될만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재정상황을 여쭤봐도 될까요.
자연학교에도 등록금은 있습니다. 왕복교통비와 세 끼 식사, 하루 숙박비 등등을 합쳐 1박2일에 1만5천원 정도 내는 거죠. 물론 그 정도 돈으로는 남기는커녕 적자를 면하면 다행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교장선생님들은 혹시 사고라도 나서 곤란한 일이 생길까봐 혹은 이곳을 전교조 야외학습장 정도로 잘못 아시고 자연학교 가는 걸 극구 말리셔서 선생님들은 무순 007작전처럼 학생들과 몰래 만나서 와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 어느 교장 선생님은 참가비가 그렇게 싼 것 도 이상하다면서 선생님한테 시말서를 내라고 했던 일도 있었다고 해요(웃음). 보기에 좁아 보일지 모르지만 일년에 한 1천5백 명쯤의 학생들이 자연학교에 찾아오는데, 참가학생이 점점 많아져서 올해는 처음으로 현상유지를 할 것 같아요. (11년 전 자연학교를 함께 시작했던 한 분은 지난해 처음 채 교장이 처음으로 60만원의 흑자를 봤다고 좋아라 했는데 알고 보니 다른 기관에서 채 교장이 상금으로 받은 5백만원을 모두 털어 넣은 상황이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전국적으로 자연학교와 같은 모델이 계속 생겨나고 있는 걸로 아는데요, 자연학교의 앞날을 어떻게 내다보십니까.
자연학교는 나랑 집사람이 계속 운영하는 건 나이가 들어서 사실 점점 힘에 부쳐요. 실질적으로 자연학교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안팎의 일들은 집사람이 거의 다 하는 형편인데, 고생하는 게 안쓰럽긴 하지만 앞으로 5년만 더 계속하자고 말하고 합니다. 앞으로는 이 자연학교의 설립취지에 동의하는 젊은 사람이 이 학교를 계속 운영했으면 좋겠어요.
자연학교에 다녀간 학생 수가 점점 많아지고 또 대학생이 돼서 자연학교를 찾아서 후배들을 이끌고 가르치기도 하고 자원활동을 하는 학생들까지 계속 나타나고 있는 걸 뵌 계속 잘 되겠다는 안심은 됩니다. 다만 자연학교 주위의 환경이 정말 더 이상은 훼손이 안됐으면 좋겠어요. 자연학교가 있는 가평 두밀리가 경치가 좋아서 벌써 카페다 낚시터다 해서 여기 저기 파헤쳐지고 있는 데다 도로도 뚫릴 계획이 발표되면서 식당이 다섯 개나 새로 만들어진다고 하는데 자연이 다 망가져 버리면 자연학교가 그곳에 있을 수가 없지 않겠어요.
선생님이 처음 크게 감명을 받으셨던 덴마크의 자유학교만큼 정부에서 정책적인 지원을 받는 것은 아니어도 그 학교와는 또 다른 전형을 어느 정도 우리나라에 세우셨던 보람도 크실텐데, 혹시 못다 이룬 꿈이 있으시다면서요.
앞으로 전국에 두밀리 자연학교와 같이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자연을 느낄 수 있는 학교들이 1천여 개가 생기는 걸 죽기 전까지 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농작물 키우는 것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서해 아이라면 갯벌주변에 세워지는 갯벌학교가 있을 수 있고, 또 나비를 공부하는 나비학교, 들꽃학교 뭐 이렇게 얼마든지 가능하잖아요. 문제는 그런 학교에 뜻을 가지고 아이들을 지도할 선생님이 부족하다는 거지요. 제가 살아있는 날까지는 그 선생님들에게 제 지식을 전해주고 싶어요. 그게 마지막 제 숙제이자 꿈입니다.
대담 및 정리/ 한혜영 기자
약력 1937년 1월 함북 함흥시에서 출생한 두밀리 자연학교 채규철 교장은 서울시립농업대학을 거쳐 75년 서울대 보건대학원을 졸업했다. 60년부터 풀무농업기술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외무부 장학금으로 65년에는 고 장기려 박사와 국내 최초로 의료보험조합운동에 뜻을 같이해 부산청십자의료보험협동조합 이사로 일하던 중 그 해 10월 자동차전복사고로 전신 50%에 3도 화상을 입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70년부터는 간질환자진료사업모임인 "장미회"를 창립하는 데 힘을 쏟고, 현재는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 창립이사이자 한벗장애인이동봉사대 대표 일을 맡아 하면서 맹렬한 사회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75년경부터 새마을연수원이나 각종 기업연수원에서 자신의 체험과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주제로 많은 강연을 계속 하면서 86년 가평 두밀리 자연학교를 세워 부인 유정희 여사와 함께 운영해오고 있다. 1996년에는 UNEP글로벌500한국인회가 시상하는 제1회 풀뿌리 환경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수기집인 「저 높은 곳을 향하여」와 「사명을 다하기까지 죽지 않는다」, 수필집 「사람은 두 번 죽지 않는다」 외에도 킹 목사 설교집을 번역한 「마틴 루터 킹의 사랑의 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가 있다. 또 최근에는 어린이들과 교사들이 자연학교의 설립취지와 운영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쓴 「ET할아버지와 두밀리 자연학교」를 출판했으며, 「그룹하우스 핸드북」을 준비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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