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이야기] 우리 서로 바라보며 걷다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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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미경
자정을 넘긴 밤 시간, 조용하게 음악을 틀어놓고 모처럼 홀로 고독해 봅니다.
당신과 함께 걸으며 내 걸음이 얼마나 가벼웠나 모릅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당신이라는 사실이 내내 행복했습니다. 손을 잡으나 놓으나 늘 가득함으로 느껴지는 당신의 존재, 그 넉넉한 동행이 있음에 기대어 나 어디까지라도 그렇게 가벼운 걸음을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이, 오늘은 많이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당신과 함께....
나를 일어서게 하고, 걷는 의지를 솟게 하며, 건강하기를 노력하게도 하고, 또 모든 것에 더욱 신중하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사람. 당신이 나에게 그러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안에 자리잡은 사랑입니다. 내가 당신의 사랑을 늘 염려함이나 의심 없이 느끼고 받아 안는 것 같이 당신도 나의 사랑에 대해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언제나 당신이 확신할 수 있는 위치 위치에 내 마음은 놓여있을 것이므로...
그러나 나 당신에게 용서를 받아야 할 것들이 남아있음을 말합니다. 이젠 숨겨야 할 비밀도 아니요. 감춘다고 감추어지는 그런 부끄러움이 될 수도 없는 것들이지만, 진작 용기를 내어 떨쳐버려야 했을 생각들을 공연한 고집으로 당신을 괴롭게 했었지요. 울게 만들었지요.
그저 오기였노라고, 한 순간에 변화하기엔 너무 오래 익숙한 내 방식이었기에 털어 버리기 아쉬웠노라고 변명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에게서 되돌아오는 것은 아무런 책망도 아닌, 그저 너그러운 마음일 뿐인 것을 압니다. 그게 얼마나 큰 사랑인가를 압니다. 용서보다 깊고 넓은...
대체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만나고 헤어짐이 잦은 이 세상 인연 속에서 당신은 어쩌면 이리도 익숙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전엔 모르던 사이였던가요? 대체, 당신은 어떤 세월을 살아와 내 앞에 섰습니까? 자신의 세월을 송두리째 나의 그것과 주저없이 이어버리는 그 신비한 인연은 정말 어디로부터입니까?
우리의 생을 합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나의 모든 장애의 반은 당신 것이 되었습니다. 불안한 걸음을 지켜보아야 하며, 그 곁에서 느껴야 할 설움도 당신의 몫이겠지만, 나는 내가 줄 수 있는 한 기쁨만을 들려주려 애쓸 것입니다. 당신은 재 장애의 절반을 나누어 가졌지만, 나는 당신의 아름다운 마음의 전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쁜 마음에 동화되기 위하여 어려운 걸음이지만, 힘써 걸어 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미경.
둘이 같이 할 세월들에 얼마만한 행복이 쌓일는지, 세상적인 행복의 기준이나 기대보다는 하늘에 쌓을 보화를 생각하면서 기뻐하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늘 넉넉한 마음일 수 있기를, 언제나 풍성한 사랑을 가꿔갈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아는 우리는....
어느새 음악이 그치었고 새벽이 깊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홀로 맞이하는 새벽에도 당신을 생각함으로 더없이 흡족한 마음에 이제, 더는 고독하지 않아도 좋은 새벽입니다. 고이 자고 있을 당신 얼굴이 생각나는군요. 새근새근...
from :덕명
누구나 명 "카수" 바로 다음 차례로 노래부르기가 꺼려지듯이 이 아름다운 편지글 다음에 무언가를 덧붙여 말한다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래도 사실 입이 근질근질하긴 하다. 이들이 이 편지글보다 더 예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손덕명 조미경 씨 부부는 이제 만 삼 년간 같은 방을 쓰며 살고 있다. 굳이 설명을 덧붙인다면 남자의 나이가 서른 셋에 뇌성마비 장애가 있고 이제 한남대학교 컴퓨터공학과 2학년생이고, 여자는 올해 서른 하나이고 평범한 주부이다. 늘 함께 걷고 싶어했던 두 사람은 이제 한남대학교의 명물로 꼽힐 정도로 그렇게 늘 함께 한다. 조금만 많이 걸어도 금방 녹초가 되어버리는 남편을 위해 운전기사로 나선 조미경 씨가 덕명 씨의 수업이 시작되고 끝나는 시간에 맞춰 나타나 함께 정답게 걷는 모습은 교정에서 쉽게 눈에 띄곤 한다.
이 사람, 손덕명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이제 더 이상 보기 드물지 않은 장애우 남편과 비장애우 부인이 결혼하기까지의 얘기가 펼쳐지겠구나 하고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기자의 관심을 끈 것은 이들이 만난 곳이 바로 장봉혜림원이라는 장애우시설에서였다는 점이었다.
인천 장봉도에 있는 장봉혜림원에서 보육사로 있던 조미경 씨와 컴퓨터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던 손덕명 씨는 같은 직원으로 만나 남모르게 사랑을 키워갔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이 손덕명 씨의 이력이다.
그 무렵까지 덕명씨는 변변한 학교 졸업장도 없었다. 스물 두 세살 때까지 그에게 세상이란 집에서 부모님과 형제들에게서 듣는 얘기들과 책과 텔레비전을 통해 듣고 보는 것으로 투시되는 정도의 크기였다. 심한 언어장애를 갖고 있는데다 보행도 완전하지 않은 큰아들이 과연 앞으로 성장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봤을 때 답을 찾을 수 없었던 부모님은 뭐라도 많이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보다 결혼도 못하고 혼자 늙어갈 아들의 앞날을 위해 돈이나 많이 벌어놓자는 생각밖에 없으셨다고 한다. 아들의 지능정도는 얼마나 되는지 알아볼 수도 없었다. 세상밖으로 나갔을 때 받게될 상처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커서 뭐가 되겠다는 어떠한 희망이나 포부도 품을 수 없이 그저 책과 텔레비전 속의 세상에 갇혀 지내던 덕명 씨에게 88년 무렵 아버지를 졸라 처음 다루게 된 컴퓨터는 그의 삶에 혁명과도 같은 변화를 계속해서 가져다주고 있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것도 독학일 수 밖에 없었지만 그저 컴퓨터전문서적과 월간지를 통해 하나씩 하나씩 넓혀가는 컴퓨터의 세계는 무척이나 경이로웠다. 그래서 어느 사이 혼자 프로그램도 짤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다 덕명 씨의 집이 원래 인천인지라 인천 어느 장봉도라는 섬에 있다는 혜림원에 대한 얘기를 듣고 그 시설로 한 번 나들이 삼아 나가봤다고 한다.
사실 그는 시설이란 곳에 대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은 기억을 하나 갖고 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아들의 장래를 위해 차라리 시설에 보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여 충주에 있는 시설에 보내신 적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낯선 곳에 부모님께 내버려진 듯한 절망감을 새기면서 부모님이 다시 찾아와 주시기만을 기다리며 보냈던 사흘간의 시간은 지금도 그에게 다신 꺼내보기 싫은 상처로 남아있을지 모른다. 자신들도 눈물바람으로 사흘을 보내다가 아무래도 안되겠어서 다시 데리러 갔더니 덕명이가 정말 너무 너무 좋아하더라는 얘기를 미경씨도 나중에 시어머니께 들은 적이 있다. 다시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집으로 함께 오는 길에 부모님은 살아도 같이 살고 같이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시설에 보내지 않겠다고 그에게 약속을 하셨고 그 약속은 지키셨다.
그랬던 터라 시설은 덕명씨가 살아오면서 기피하고 싶은 곳 중 하나였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머리가 굵어지면서 그도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고 그래서 우선 자신이 완전한 이방인은 아닐 수 있는 시설부터 부담없는 발걸음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 때가 구십일년도의 일이다.
"제가 잘난 척을 잘 하거든요. 그래서 혜림원에 가서도 컴퓨터 앞에 앉아서 좀 만지작거렸죠. 그런데 그걸 원장님이 본 거예요."
덕명 씨는 어눌한 말투에 웃음을 함빡 담아 그 때를 회상한다. 그 날 범상치 않은 덕명씨의 컴퓨터실력을 눈치챈 혜림원 원장은 함께 일해볼 생각이 없냐는 획기적인 제안을 해왔다. 컴퓨터프로그램을 관리하는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일하기 시자가해 지난 해 대학에 입학하기 직전까지 그곳의 직원으로 일했다. 일도 재미있고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게 되어 즐겁게 일하기 시작한 몇 년 후에 부인 조미경 씨를 만난 것이다.
원주민선교의 꿈을 접고
조미경씨는 원래 신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열명의 형제자매 가운데 목회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도 여럿이었고 그런 집안 분위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신학을 전공했는데 졸업 후에는 해외선교, 그것도 원주민선교를 하리라는 꿈을 갖고 있었다.
직접 해외선교를 나가기 전에 자신을 단련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찾은 곳이 바로 장봉혜림원이었다. 장애우를 접해본 경험은 별로 없었지만 해외선교를 목표로 한 그의 포부를 알고 있는 선배 언니가 권해주었기에 선뜻 그곳을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선배는 그 시설에 갔다가 도저히 하룻밤도 있을 수 없어 도망치듯 나왔지만 너는 잘 생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부끄러운 듯 털어놓기도 했다.
자신이 잘 해낼 수 있을까, 조금은 자신을 시험하는 마음으로 처음 혜림원을 찾았다. 그런데 아무런 사전지식없이 성인 정신지체장애우들과 이십사 시간을 생활 속에서 맞부딪치게 되자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숙소에서 나는 향기롭지 않은 냄새에서부터 자신이 보는데도 성기를 만지작거리는 다 큰 정신지체 남자원생들과 같이 먹고자는 일은 구역질이 솟을 정도로 참기 어려웠다. 그런 마음을 그곳 원생들이 눈치챌까봐 그것이 또 미안하고 스스로가 죄스러워서 몸둘 바를 모르겠는 상태에서 그 역시 도망치듯 그 곳을 나왔다.
가족들에게도 그곳에는 안가겠다고 아니, 못가겠다고 발표를 한날 미경 씨는 자신의 앞날을 제시하는 듯한 묘한 꿈을 꿨다. 꿈에서 깬 후 그 메시지를 보다 확실히 받아안기 위해 행한 7일 단식기도 중에 신은 그 시설로 돌아가라는 것이 분명한 메시지를 그에게 보내왔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부랴부랴 원에 전화를 했더니 보육사 정원이 다 차서 더 이상 채용할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 기도에 응답을 주셔도 뭐 그런 엉터리응답을 주시냐고 하나님께 화풀이도 하면서 다른 장애우시설을 알아보려고 나섰던 그 날 우연히 집에 전화해보니 혜림원에서 연락이 왔다는 전갈이었다. 보육사가 급하게 필요하게 됐으니 당장 내일이라도 들어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조미경 씨도 보육사로 생활을 시작했고 그곳에 이미 직원으로 일하고 있던 덕명 씨를 만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우리 두 사람을 만나게 하시려고 저를 그렇게 이끄신 것 같아요."
미경 씨가 구십오년 일월에 들어가 구십육년 이월에 결혼했으니 두 사람은 일년간 정말 불같은 사랑을 했나 보다. 그런데 누가 먼저 신호를 보냈냐고 했더니 조미경 씨가 "제가요"한다.
"사실 이 사람이 언어장애가 있어서 말을 해도 잘 못알아듣겠더라고요. 무슨 말을 해도 제가 자꾸 "예?" 하고 대꾸를 해야 하니까 미안해서 사실 처음엔 가까이 못갔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같은 직원이고 식군데 부딪쳐보자 하는 생각이 들어서 먼저 다가가서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죠.
그래서 같이 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니깐 같은 직원들이 둘이 사귀냐고 농담처럼 물어요. 그러면 저희도 농담처럼 "그래 사귀고 있어"하고 답하곤 했죠. 그러다 정말로 정이 든 것 같아요."
실은 사슴목장 앞에서 또 식당 앞 화단 근처에서 늘 책을 읽고 있는 덕명 씨의 모습에 미경 씨는 어느 새 적지 않은 호감을 갖게 됐다고 했다.
"전 배우자가 늘 책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다른 조건은 어떻든 간에. 근데 이 아저씨가 늘 그렇게 책을 읽고 있잖아요. 그리고 늘 밝게 웃으면서 장난도 잘 치고, 암튼 내가 이 사람 너무 좋아했어요"
그런데 덕명 씨는 이렇게 다가오는 미경 씨를 완전히 가슴 열어 환영해 주지만은 않았다.
조금 가까워졌다 싶다가도 곧 돌아서 버리고 또 조금 다가왔다가 다시 더 굳게 마음을 닫아버리는 덕명 씨 때문에 미경 씨는 마음 고생을 하느라 살이 십사킬로그램이나 빠질 정도였다.
추석 연휴때 쯤에는 자꾸만 뒷걸음치는 덕명 씨에게 자신이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또 삼일간 단식기도를 하기도 했다. 기도를 마치고 희망과 용기를 얻어 혜림원으로 돌아왔으나 덕명 씨의 마음은 전에 없이 완강히 닫혀 있었다.
미경 씨는 계속해서 설득을 하다가 지쳐서 모진 이별의 말을 하고 돌아서 버렸는데, 그 다음날 자신이 애써 부인하려고 했던 미경이란 여인의 의미를 새삼 깨달은 덕명 씨는 정식으로 청혼을 했다. 글 첫 부분에 소개한 편지글은 그런 풍파를 다 거친 후 오롯이 애정을 나누게 된 두 사람이 앞날을 축원하며 나눈 내용이다.
"나중에서야 덕명 씨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더라고요. 배운 것도 가진 덕도 없는 자신이 어떻게 한 가정의 가장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두려웠던 거지여. 괜히 저를 고생시킬까봐."
"우리의 앞날은 밝기만 해요"
그제서야 덕명 씨에게 평범하지만 화목하게 살고 계신 부모님이 있다는 사실을 미경 씨는 알았다. 그래서 양가 어른들의 축복을 받으며 또 혜림원 식구들의 커다란 박수와 부러움 속에 행복한 결혼식을 오릴 수 있었다. 결혼과 함께 미경 씨는 보육사일을 그만 두고 부평에 살림을 차렸고 덕명 씨는 주로 재택근무를 하면서 자신이 개발한, 월숙이라는 한 여자원생의 이름을 딴 후원자관리프로그램을 계속해서 보완하기도 하면서 이년 여를 보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대학에 입학해 컴퓨터공학을 기초부터 탄탄히 배우는 것이었기에 올해 한남대에 입학하면서 대전으로 이사해 왔다. 그래서 이제 덕명 씨도 혜림원은 그만 둔 상태다.
"결혼하기 얼마 전부터 덕명 씨가 대학 입학을 목표로 공부를 시작하니까 부모님은 조금은 안쓰럽게 바라보셨지만 저는 이 사람 박사 만들거라고 큰소리 탕탕 쳤지요. 덕명 씨는 검정고시로 삼년 만에 초등부에서 고등부과정까지 다 마쳤어요."
그러나 대학입학 자격을 얻어놓고도 덕명 씨를 받아들여줄 대학교를 찾기 위해 전국을 다 뒤져야 했다. 장애우 특별전형제도를 실시하는 학교에서 조차 덕명 씨를 보고는 원서조차 받지 않으려고 했고 한남대에서도 2년만에 결국 중도에 포기한 휠체어장애우 학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과연 끝가지 다닐 수 있겠냐고 재차 묻기도 했다.
그렇게 가까스로 입학 허가를 얻어 대학교에 가게 된 날 덕명 씨의 가슴은 얼마나 설레였을까.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해 나란히 신입생이 된 조카 민하에게 삼촌도 학교에 간다고 자랑하고 싶었던 그의 심정은 "민하야 삼촌도 학교간단다"라는 한 편의 시에 그대로 담겨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무엇이든 늘 끝도 없이 알고 싶은 그의 소망은 대학입학으로 한 단계 더 큰 비약을 했다.
그가 부인 미경 씨로부터 "뉴스중독자"라는 놀림을 받을 정도로 매기간의 방송뉴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속내에는 또래 비장애우들보다 몇 걸음 늦게 시작한 자신의 인생길에 대한 조바심과 세상을 알고 싶은 허기가 담겨있을 것이다.
덕명 씨가 대학을 졸업할 때쯤이면 나이 서른 일곱이 된다. 사회복지와 컴퓨터데이터베이스를 결합시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사회복지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작업을 하는 것이 꿈이기 때문에 사회복지를 복수전공하고 싶은데 그러면서도 졸업한 후에 나이가 너무 많아서 거기다 장애가 있어서 과연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지 내심 걱정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럴 때 현명한 아내 미경 씨는 이렇게 남편을 격려한다.
"걱정마, 왜 미리 걱정하고 있어요. 우리 앞날은 아주 아주 밝을 거예요. 난 한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어요"
컴퓨터키보드에서 가장 많이 누르는 키가 바로 백스페이스바(←)라는 손덕명 씨.
그의 인생길에서 나타날 수 있는 조그만 "에러"들은 부인 미경 씨가 바로 잡아주고 또 미경 씨의 에러는 덕명 씨가 바로 잡아주면서 그렇게 천천히 조심스럽게 두 사람은 좋은 길벗으로 인생길을 함께 걸어갈 것이다.
글/ 한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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