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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아이들이나 잘 키웠으면 좋겠어요

구걸해서 먹고사는 시각장애우 현종렬 김양심 씨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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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이야기]

 

아이들이나 잘 키웠으면 좋겠어요


구걸해서 먹고사는 시각장애우 현종렬 김양심 씨 부부

 

 

  부부는 서럽다. 왜? 내외가 모두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는 않다. 부부가 서러운 건 단지 장애 때문만은 아니다.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없는 이 시각장애우 부부의 유일한 삶의 수단은 지하철에서 승객들을 상대로 구걸을 해서 먹고사는 것이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부부의 직업에서 짐작했겠지만 부부가 서러운 건 구걸 일을 하면서 겪게 되는 온갖 어려움 때문이다.
  "지금은 나아졌지만 예전에는 지하철 안에서 신문 파는 아이들한테 매도 많이 맞았어요. 우리를 가로막고 발로 차고, 욕을 하면서 지하철을 못 타게 하는 거예요. "이 년, 너 계속 지하철을 타면 뼈다귀를 추려 버린다"고 그러면서 주먹으로 때리는데 그 서러움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예요. 어떤 날은 하루종일 구걸해서 번 돈을 바구니 째 뺏긴 적도 있었어요." 아내 김양심(55세) 씨 말이다.
  

▲현종렬,김양심씨부부

남편 현종렬(49세) 씨도 자신이 당한 서러움을 토해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점심을 지하철역 안에 있는 구내 식당에서 먹었어요. 그런데 역무원들이 우리들이 있는데서 맹인들이 입댄 컵은 더럽다고 멀쩡한 컵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식당 아주머니에게 왜 더러운 맹인들한테 밥을 파냐며 난리를 치는 거예요. 결국 구내식당에서 쫓겨나야 했지요. 역무원뿐만 아니라 의경들도 우리를 못 살게 할 때가 많아요. 젊은애들이 반말하고, 내리라면서 내가 넘어지건 말건 막무가내로 밀어내기도 해도. 한 번은 신도림 역에서 이런 일도 있었어요.
  한 의경한테 붙잡혀서 역 구석진 곳으로 끌려갔는데 가진 것을 다 내놓으라고 그래서 왜 그러냐고 반발했죠. 그랬더니 "에이 씨팔, 여태 점심도 못 먹었다" 그러면서 돈을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점심을 못먹은 건 당신 사정이지 왜 나한테 돈을 달라냐고 하니까 막 화를 내면서 돈을 안 주면 경찰서로 넘긴다고 위협하는 거예요. 할 수 없이 돈 오천원을 주고 풀려났죠......"
  현종렬씨의 울분에 찬 토로는 계속 이어진다. 그야말로 직접 구걸을 해본 사람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생생한 서러움들이다.
  문제는 이렇게 온갖 수모를 다 겪으면서도 부부는 여전히 지하철을 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답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세상에서 부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은 곧 직업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안마나 침술업이 있긴 하지만 그 직업을 가지고 있는 시각장애우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대다수의 시각장애우는 생계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구걸을 해서 먹고사는 밑바닥 사람들 중에 유난히 시각장애우들이 많은 건 불가피한 현상이다.
  이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현종렬 김양심 부부의 과거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정말 부부는 살아오면서 지금보다는 나은 삶을 꾸릴 기회가 없었던 것일까, 시각장애우에게 주어진 삶은 정녕 척박한 삶 뿐이었던 것일까, 이런 의문들에 대한 해답이 부부의 다음과 같은 굴곡 많았던 삶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여기 한 사내가 있다. 이름 현종렬, 고향은 충남 부여이고 세 살 때 실명했다. 오 남매 중에 아들로서는 막내로 태어난 그이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 지내다가 나이 여덟 살 때 대전 맹학교에 갔다. 그런데 부모는 그이를 맹학교 기숙사에 떼어놓고 찾지 않았다. 그이는 "나를 창피하게 생각한 거예요. 내가 집에 있을 때 부모님은 내가 집 밖으로 못 돌아다니게 가둬놓고 키웠어요"라고 회상한다. 부모는 어린 그를 떼놓고 연락은커녕 학비도 대주지 않아 그이는 맹학교에서 알선해 준 외국인 후원자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학교를 다녔다. 육학년이 됐는데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그때 마침 후원자의 도움이 끊어졌고, 그걸 계기로 그이는 학교 다니는 것을 그만뒀다.
  갈 데가 없어 부여집으로 돌아간 그이에게 아버지는 동네 무당에게 경을 배우라고 강요했다.
  점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 그이가 싫다고 버티자 아버지는 매를 들었다. 그이는 할 수 없이 이년 동안 무당에게서 점치는 법을 배워야 했다. 하지만 애초에 점술에 흥미가 없었던 그이는 진도가 나가지 않아 점술 배우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때 마침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형뻘되는 한 장애우가 "교회를 다니면 눈을 뜰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꼬드겨 그이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이는 집에서 주는 밥 먹고 달리 하는 일없이 교회만을 오가는 생활을 이십여 년 동안 했다. 그러던 중 그이 나이 서른 살 때 집을 나와 평택으로 갔다.
  그이는 왜 집을 나와야 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일차적인 이유다. 할 수 없이 형하고 살았는데 "밥만 축낸다"는 형의 구박이 무척이나 심했다. 거기에다 설상가상으로 형수가 춤바람이 나 집 재산을 다 날리게 되면서, 갈 데가 없어진 그이는 친구 소개로 평택으로 갔다. 평택에서 그이가 한 일은 엠프 지게꾼 일이었다. 엠프 지게꾼 일이란 어떤 일인가.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구십년대 초만 해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 엠프와 스피커를 갖다놓고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하며 구걸을 하는 시각장애우들이 많았다. 주로 여성시각장애우들이 이 일을 했는데, 구걸할 때 쓰이는 엠프와 스피커를 져나르는 일이 그이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그 일을 해서 그이는 하루 이천원을 벌었다. 그 돈으로 여인숙에서 자면서 천오백 원을 숙박비로 주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은 오백 원 뿐이었다. 오백원으로 하루 두끼 밥을 사먹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그렇게 사는 게 아닌, 겨우겨우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척박한 삶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일마저 그만두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엠프와 스피커의 주인인 여성장애우가 구걸 일을 그만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졸지에 삶의 수단을 잃어버리게 된 그이, 그렇지만 죽으란 법은 없었다. 울산에서 역시 노래를 부르며 구걸을 해서 먹고 살고 있던 한 여성장애우가 마침 지게꾼을 구하러 올라 왔다가 그이를 데려가게 된 것이다.
  그 여인이 바로 지금 그의 아내 김양심씨다.
  여기 한 여인이 있다. 이름 김양심, 고향은 전남 신안군 하의면이라는 섬이다. 딸만 육 남매 중에 맏이로 태어난 그이는 여덟 살 때 심한 홍역을 앓아 그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게 됐다. 아주 어렸을 때가 아닌 여덟 살 때 시력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이는 시각장애지만 하늘과 별과 달과 바다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게 유일한 위안일 뿐 그이도 현종렬씨 못지 않게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바다 건너 목포에 맹학교가 있었지만 그때 돈으로 삼천원이나 되는 학비 때문에 그이는 맹학교에 갈 수 없었다. 하는 일없이 집에서 동생들을 돌봐주고 지내다가 그이 나이 열 여섯 살 때 식구들이 모두 목포로 나와 살게 되면서 그이도 대처땅을 밟는다.
  그이가 목포에 살게 되면서 하게 된 일은 점술업이었다. 그이 나이 열 아홉 살 때 점치는 법을 배워 그 후 십여 년을 그이는 전국을 떠돌며 남의 운명에 끼인 화복을 봐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아먹고 살았다. 그러다가 만난 남자가 첫 남편이었다. 당시 맹학교 선생으로 있다가 그만둔 첫 남편은 시각장애우였지만 그이와는 달리 대학을 나온 시각장애우였다. 그 남자와 결혼을 해 십여 년을 살면서 그이는 아이 둘을 낳았다. 비록 남자가 능력이 없어 전적으로 그이 수입에 의존해 살았지만 이쯤 됐으면 그이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남은 생을 행복하게 살만도 하다. 그러나 가혹한 운명은 곧 그이 삶을 비틀어 놓는다. 첫 남편과 헤어지게 된 것이다.
  "첫 남편은 대학을 나오고 나는 국민학교도 못 나왔잖아요. 그러다 보니 첫 남편은 사소한 일로도 나를 무식하다고 구박하곤 했어요. 거기다 내가 점을 쳐서 겨우 먹고 살았는 데도 내가 점친다고 싫어하고, 그러다 내가 조금 벌어놓은 것을 약방한다, 침술원한다, 그러면서 남자가 다 날려버렸죠. 그러는 바람에 여기저기 옮겨다니게 됐고 점집마저 잘 되지 않으면서 먹고 살 길이 막연해지게 되니까 남편이 헤어질 것을 요구했어요. 눈물을 머금고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 줄 수밖에 없었어요."
  이때 그이 나이 서른 여덟 살이었다. 중년의 나이에 혼자가 된 그이, 거기에다 아이 둘을 떠 맡게 된 그이는 황량한 거리로 나서야 했다.
  "이혼하고 난 후 우연히 알게 된 같은 처지의 친구가 울산이 살기 좋다고 해 울산에 갔어요. 집이 없으니까 떠돌아다니면서 잠은 여인숙에서 자고 내내 지하도에서 구걸을 해서 먹고 살았죠. 그 즈음 어떤 사람이 교회를 다니면 도와준다고 해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교회 다니면서 쌀도 타다 먹고 그러다보니 얼마안가 점치는 법은 잊어 버렸어요. 그렇게 주위 사람들이 도와줘서 살았죠. 그러다가 지하도에서 구걸하는 게 지겨워서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엠프를 져날라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수소문 끝에 평택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데려오게 된 거죠"

  친정에는 찾아가지 않았나요?
  "친정이요? 우리같은 시각장애우 여성들은 친정은 한 번 떠나면 그만이에요. 내 나이 스물 다섯 살 때 목포를 떴는데 그때 친정에서 내가 맹인 남자랑 사는 것을 싫어했어요. 그때 이를 악물고 친정을 나왔죠. 내가 어디 가서 굶어죽고 구걸을 해도 절대 친정쪽에는 연락을 안 하겠다고 마음먹고 나와서 그 후로 십 년이 넘게 친정하고는 담을 쌓고 지냈어요. 나중에 친정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게 됐지만 구걸하면서 전국을 떠돌아 다니다보니 친정 식구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한 세상을 살았네요."
  한 사람은 지게꾼으로, 또 한 사람은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구걸을 하는 사람으로 울산에서 살게 된 두 사람은 만난 지 얼마 안돼 결혼을 하게 된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되기까지는 남자쪽인 현종렬 씨의 적극적인 구애가 있었다. 처음 울산에 내려가 김양심 씨의 판자집방 근처에 방을 얻어놓고 혼자 살던 종렬 씨는 양심 씨에게 "맹인끼리 서로 떨어져 살면 뭐하냐, 서로 의지하고 살자"고 구애했다. 그러나 양심 씨는 종렬 씨의 구애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애 아버지하고는 그냥 누나, 동생 하며 지냈어요. 그랬는데 결혼을 하자고 해서 내가 거절했죠. 우선 나는 아이들도 있으니까 나랑 살면 저 사람이 고생을 하겠구나 생각이 들었고, 그리고 남자한테 한 번 속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남자한테 속지 않고 차라리 혼자 살겠다고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결혼을 거부했죠."
  그랬던 김양심 씨가 종렬 씨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은 "나랑 결혼하면 전세방을 얻어 주겠다"는 종렬 씨의 꼬드김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 아버지가 나를 두 번 속였는데 첫 번째는 결혼하면 전세방을 얻어주겠다는 거였고, 두 번째는 결혼하면 단 둘이 의지하면서 살고 절대 아이 낳으란 소리를 하지 않겠다는 거였어요. 그때는 다 쓰러져가는 판자집에서 살고 있을 때여서 결혼만 하면 집에 얘기해서 전세방을 얻겠다는 아이 아버지 말에 기대를 걸었죠. 하지만 막상 결혼하자 아이 아버지 집에서는 단돈 십원도 도와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약속도 어기고 결혼하자마자 아이가 생기게 만들었어요. 그 아이가 지금 열 세 살이 됐어요."
  듣기에 따라서는 원망같지만 김양심 씨의 표정은 결코 싫은 표정이 아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팔십사년 십일월달에 결혼했다. 막상 결혼은 했지만 종렬 씨 집에서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에 부부는 여전히 구걸을 해서 연명하는 힘든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네 살이 되었을 때 부부는 성남으로 올라왔다. 같은 처지로 성남에 살고 있던 친구가 놀러와 "애들 학교도 보내야 하는데 벌이가 시원찮아서 어떡하냐, 서울은 땅이 넓으니까 구걸해 먹기도 낫다"고 해 맨몸으로 성남으로 왔고, 성남 은행동 산비탈에 있는 무허가 천막집에 살면서 부부는 서울 강남역 근처로 구걸을 나갔다. 울산에서처럼 종렬 씨가 엠프를 지어 나르고 양심 씨가 노래를 불러 먹고 살았다. 그러다가 부부가 지하철을 타고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오년 전이다.
  "엠프 일은 아침에 나가면 저녁 열한시까지 해야 하거든요. 그래야 생활비를 벌 수 있는데 여름에는 햇빛이 너무 따가워 일을 못했어요. 하루종일 땡볕이 쏟아지는데 앉아있으면 머리카락이 타기도 했어요. 겨울에는 눈을 맞으면서 구걸을 하다보니 동상이 걸려서 고생했고, 한마디로 골병이 들었죠." 지하철을 타고 나서부터는 다행히 이런 어려움은 없어졌다.
  부부는 지금 예전에 살던 천막집이 철거되면서 대신 분양받은 성남시 단대동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다. 아침 여덟시에 집을 나서서 저녁 열 시까지 서울 지하철 이호선을 타고 구걸을 한다. 종렬 씨는 하모니커를 불고, 양심 씨는 찬송가를 부른다. 그렇게 구걸을 해서 버는 수입은 예상과는 달리 그렇게 많지 않다.
  "평균 일주일에 삼사일 일을 나가는데 일을 나가면 한 사람이 평균 하루에 삼만원 내지 사만원을 벌어요. 승객들이 갈수록 야박해져서 돈을 잘 안 줘요. 구걸하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나서 이 직업도 경쟁이 치열하죠. 어제 아침에는 열 칸짜리 지하철을 탔는데 고작 오백원짜리 동전 하나 벌었어요." 김양심 씨의 말이다.
  요즘 이 부부에게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다. 그동안 생활보호대상자로 책정돼 정부에서 생활비를 받았는데 부부 호적에 올라 있는, 양심 씨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큰아들이 올해 열 아홉 살이 됐다고, 부부를 부양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 동사무소에서 생활보호대상자에서 탈락시키겠다는 통보를 해온 것이다. "아들 보러 우리를 먹여 살리라는 뜻인데 열 아홉 살 먹은 아이가 무슨 일을 해서 우리를 먹여 살릴 수 있겠어요?" 김양심 씨가 말끝에 한숨을 내쉰다.
  "배운 게 없고 가진 게 없으니 앞으로도 구걸을 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아이 아버지는 나 보다 젊으니까 지하철을 더 오래 타게 되겠죠. 걱정이 많아요. 어떡하든 아이들이나 잘 키웠으면 좋겠는데......"
  부부의 표정에 근심이 가득하다. 이 시각장애우 부부가 활짝 웃으며 살게 될 날은 그 언제일까, 다른 도움은 주지 못하더라도 혹시나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부부를 만나게 되면 따뜻한 인사 한 마디를 건네는 것은 어떨는지.

 

글/ 이태곤 기자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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