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이혼하는 남자, 권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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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이혼하는 남자, 권진오
권진오씨는 가끔 낙원상가를 찾는다. 당장 살 돈은 없지만 새로 들어온 올겐이랑 기타들을 매만지다 보면 행복했던 옛날이 되살아 오는 것만 같다.
악사, 그도 한때는 고향인 상주에서 "잘 나가는" 올겐 연주자이자 기타 연주자였다. 물론 큰 무대가 아니라 야간업소에서 손님들의 노래를 반주해주는 일을 주로 했었지만 개업을 하면 가게 주인들은 성실하고 실력 있는 그를 서로 데려가려고 할 만큼 지역 내에서는 인정을 받았었다.
그때는 모든 게 제대로 되어 갔었다. 손님들이나 업주들한테 인정을 받고 집에 들어가 부인에게 그 날치 수입인 돈 다발을 가져다줄 때는 뿌듯함에 자신이 으쓱해지기도 했었다. 남들이 다 그러는 것처럼 아들, 딸 낳고 마누라랑 고만고만하게 사는 평범한 일상이 소중하기만 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소아마비로 장애를 갖게 됐고 결혼하기 전까지는 여자는 물론 친구 사귀기도 쉽지 않은 외로운 나날들이었다. 자신이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일도 이 세상에는 드문 것 같아 방황도 했다. 사춘기 때는 남들처럼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굉장히 절망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래도 아주 특출난 것은 아니지만 자신에게 다소나마 있는 듯한 음악적 재능이 감사할 따름이었다. 누구한테 특별히 교습을 받지도 않았고 혼자 책보고 배우다가 막히면 친구한테 잠깐씩 물어보는 수준이었지만 금방금방 실력이 늘어갔다.
자신이 만들어내는 선율을 듣고 있다 보면 자신의 앞날에 대한 걱정이 하나둘 사라져 가는 듯 했다.
경상북도 상주에서 나서 자란 그는 올해 마흔 두 살이 됐다. 그리고 그는 이제 더 이상 악사가 아니다. 일 년 전에 서울에 올라와 장애인고용촉진공단에 구직등록을 하기도 했다. 공장에서라도 일해보려고 하는데, 악기 다루는 재주 외에는 다른 기술이 없고 나이도 많은 그에게 일자리는 쉽게 구해지지 않고 있다.
안간힘을 쓰고 유지해보려고 했던 가정도 풍비박산 일보직전에 있다. 보고픈 아이들 곁을 떠나 어쩔 수 없이 홀홀 단신으로 서울로 올라와 형님이 모시고 계신 부모님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부모님이 안 계셨다면 나는 굶어 죽었을 기다"라는 힘없는 푸념이 절로 나온다.
특히 요즈음 권진오씨는 가슴에 주먹 같은 응어리가 생겨 붙어 있는 것 같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내렸다 하는 증세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 한방에서는 화병이라고 했고, 신경외과에서는 강박장애라는 진단을 받기도 했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분통이 터져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판이어서 편안한 잠을 잔 기억도 까마득하다.
그 이유는 최근에 그가 부인으로부터 이혼소장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 이전부터 예전에 단란했던 부부 사이로 되돌아가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이 부인과의 사이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험악하기만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이혼을 하고 완전히 남남으로 갈라지게 될 줄은 몰랐다. 그냥 주변 사람들 얘기에 휘둘려 잠시 사람이 달라진 것이겠거니, 결국 자식들을 생각하면 꾹 참고 다시 살게 될 거라고만 생각했다.
"이혼소장을 펴 보는데 손이 벌벌 떨리고 가슴이 벌떡벌떡 뛰는 거예요. 그 이혼소장에 나와있는 이혼사유와 요구조건들이 기가 막히기만 해요. 지가 결혼 초부터 술을 먹고 행패를 부렸고 정신이상이기 때문에 이혼을 원한다는 겁니다. 결혼생활 중에는 손찌검도 안하고 술은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마신 적도 없어요. 부끄러운 말이지만 오히려 제가 마누라한테 맞아 전치 이주의 진단을 받기도 했었단 말입니다."
부인은 이혼하면 위자료로 삼천만 원과 두 아이의 양육비로 매달 육십만 원을 달라고 요구하고 나왔다.
과연 사람이 얼마만큼 변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질 것 같다. 처음 만났을 때 스물 두 살의 그 여자는 현재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수줍고 예쁘기만 했었다.
부인과의 인연을 가져다 준 것도 바로 음악이었다. 공부에는 별다른 재능도 취미도 없었던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이 학년 때부터 만지기 시작한 기타를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집에서 수강을 원하는 사람을 불러 가르치기도 하다가 친구와 함께 기타학원을 시작했다. 그러다 먼저 가 자리를 잡게 된 친구의 권유로 인천에 올라와 야간업소에서 5인조 밴드를 하게 됐다.
계속 서서 연주를 해야 하는 기타연주는 몹시 피곤하기도 했지만 그때는 젊음 하나로 낮에는 기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돈을 벌었다. 그가 강사로 있던 반의 수강생 중의 한 명이 바로 현재의 처였다. 그의 나이 스물 여섯이었을 때다.
먼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것인지, 당시 부인은 그가 어디를 가든 잘 따라왔고, 외롭던 그도 그녀에게 쉽게 빠졌다. 같은 학원생들이나 친구들이랑 여행도 하고 여기저기 그렇게 어울려 다니다 만난 지 5개월만에 부인이 덜컥 임신을 하게 됐다. 부인의 친정 쪽에서는 심하게 반대를 하고 나섰지만 삼 개월 동안의 사랑의 도피행각 끝에 두 사람은 권 씨 집안에서 구해준 전셋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스물 일곱에 결혼해 그렇게 아들이 태어나고 또 딸이 태어나는 동안 권 씨는 가장으로서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했다. 밤무대인 카바레에서 하루에 담배 한 갑도 아껴 피워가며 손님들 팁이랑 하루 번 돈을 모아 부인한테 가져다 주었다. 손님이 노래를 신청하면 한 곡에 천원 정도를 받고 팁 수입도 있었다. 밴드에서 일할 때는 그 날의 수입을 똑같이 나누게 되는데 혼자 벌면서 하루에 2만원도 벌고 잘 가지고 들어갈 때는 하루에 20만원을 벌기도 했다고 한다.
"올겐은 그 음율에 반해서 혼자서 익히기 시작했는데, 서서 일해야 하는 기타와는 달리 앉아서 할 수도 있으니까 저한테도 좋았죠. 올겐 페달을 밟으려면 다리에 힘이 많이 들어가 그것도 쉽지는 않았지만 그 악기 하나로도 노래 한 곡의 화음연주도 가능했기 때문에 혼자서 업소를 뛰기 시작하면서 돈을 더 많이 벌게 됐어요."
일의 성격상 저녁 무렵에 시작해서 새벽녘에 끝나 밤과 낮이 바뀐 생활로 아침부터 자기 시작한다고 해도 잠은 늘 부족해 늘 몸이 피곤하긴 했다. 당시에는 시간제한이 없어 다섯시부터 그 다음날 새벽까지 일하는데, 명절 때는 가족 손님이 많고 해서 쉬는 날도 없이 그렇게 일년 삼백육십오일 꼬박 일했다. 돈을 건네주면 좋아하는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면 더욱 열심히 일하게 됐다. 비록 장애를 가졌지만 돈버는 것만큼은 남 못지 않다는 인정을 부인이나 처가 쪽으로부터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십이 년을 일했다. 그런데 오공화국 시절에는 없던 시간제한이 육공화국 들어 생기면서 열두시 이후에는 영업을 하지 못하게 됐을 뿐만 아니라 또 몇 해 전부터 노래방과 단란주점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굳이 악사들을 사서 연주를 하지 않아도 더 그럴싸한 반주에 가사까지 제공되는 단란주점이 상주에도 구석구석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일을 해야 자신의 용돈으로 쓰기에도 부족할 정도의 수입 수준이 되더니 삼 년 전부터는 스물 다섯 곳에 이르던 상주시내 밤무대들도 하나둘 업종을 바꿔 그는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그렇게 지독하게 벌면서 모아 놓은 알토란같은 돈으로 백 평 가까이 되는 레스토랑을 인수해 운영해오고 있었다. 또 일억원이 넘는 집도 마련해 놓았으니 사실 먹고사는 데는 문제없다는 안도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느긋해 할 상황이 아니었다.
부인은 이전부터 밥도 제때 안해주고 말다툼을 하면 집을 나가버려 아이를 아버지한테 맡겨 놓고 업소에 나가야 했던 상황이 드물지 않았었다. "나나 되니 너랑 살아주지"하는 식으로 안하무인식으로 행동할 때도 많았는데, 이제 경제능력이 없게 된 그를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노골적으로 구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실 장애우인 나하고 살아줘서 고맙다는 생각을 마누라한테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오로지 돈 벌어서 기분 좋게 해주려고만 했었죠. 그런데 레스토랑을 하면서 사람이 변했어요. 그동안 내가 밖에서 벌어온 돈을 다 관리해 인감도 가져간 상황에서 레스토랑에서 적지 않은 돈도 버는 걸로 아는데 가게출입은 물론 외출도 못하게 하는 거예요."
레스토랑 관리에 처갓집 사람들이 관여를 하면서 처가 식구들 모두가 그를 집중적으로 구박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권 씨의 노부모님에게 폭언을 일삼는 등 비상식적인 행동이 계속되자 울화를 참을 수 없던 그는 신경정신과에 일주일 동안 입원할 정도로 정신이 피폐해져 갔다. 처가 쪽에서는 강압적으로 기도원에 들어가라고 그에게 요구하기도 했는데, 부인도 일 년 전부터 사소한 일에도 자꾸 각서를 요구하고 신체적인 위협을 가해오기도 했다. 그 정도에 이르면 그가 먼저 이혼을 요구할 법도 한데 그는 그러지 못했다. 자식들을 생각하고 또 결혼에 실패하고 다시 시작하기도 겁이 나 그래도 같이 살려고 써달라는 대로 "술을 한 번만 마시면 양육권을 포기하겠다", "절대 남하고 만나지 말고 집에만 있겠다"라고 각서에 써버렸다.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오래 전부터 부인은 이론을 차근차근 준비해 왔던 것 같기도 하다.
올해 일흔 하나가 되는 그의 노부는 어처구니없이 이혼소송을 당한 아들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함께 동분서주하고 있다. 아버지는 애초부터 장애우라는 사실 때문에 아들의 처가 쪽에서 이렇게 맘대로 하는 것만 같아 전화번호부를 뒤져 장애우단체를 찾아 상담을 요청하고 다니기도 했다.
만약 일자리도 없고 장애를 가진 현재의 그의 상황에 정신병원에 일주일 입원했던 병력을 몰아 정신이상자에다 알콜중독이라는 처가 쪽의 주장을 판사가 그대로 믿어 버린다면 이혼소송에서 그는 승산이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부인 측이 원하는 대로 재산도 모두 뺏기고 아이들과도 생이별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올까 그는 두렵기만 하다. 십 년 넘게 살을 맞대고 살았던 사람까지 저렇게 변하는데 과연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싶어 새삼 세상이 무서울 따름이다.
글/ 한조현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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