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당신들에게 지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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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당신들에게 지지 않겠다."
특례입학으로 대학에 들어간 윤두선 씨
무학이라는 최악의 조건을 가진 그는 정확하게 이십 개월 만에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거기다 대입 수능시험까지 합격했다.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니면 십이 년이 걸리는 과정을 단 일 년 만에 끝마친 그의 집념은 어쨌거나 보기 드문 경우가 아닐 수 없다.
그가 전화로 일러준 대로 아현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북아현동 종점에 내렸다. 오른쪽으로는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빈민촌이 펼쳐져 있다. 반대로 왼쪽으로는 빈민촌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성과 같은 으리으리한 집들이 언덕 너머로까지 빼곡히 들어차 있다. 그를 소개한 신문지상에서 그가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후였으므로 당연히 그 집은 오른쪽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의심스러워 슈퍼 앞에서 전화를 걸자 그는 왼쪽 언덕으로 올라오라고 분명하게 길을 일러 주었다.
별수 없이 그가 일러준 대로 왼쪽 언덕, 성채 같은 집들을 마주보며 한참을 걸었다. 그렇게 언덕을 넘자, 이럴 수가. 거기 또 다른 빈민촌이 펼쳐져 있었다. 산꼭대기까지 다닥다닥 달라붙은 슬래브 집들이 오후의 햇살 아래 앙상하게 추한 뼈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부촌 뒤에 빈촌이 기가 막혀 쉽게 눈길을 거둘 수가 없다 그렇게 얼마를 서 있었을까. 한 골목에서 노파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윤두선 씨의 어머니였다.
일흔이 훨씬 넘은 그의 어머니는 길을 안내하며 서너 번 걸음을 멈춘다. 언덕을 오르는 게 힘이 들어서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어머니에게 "아들이 자랑스러우시겠다."고 인사말을 건넨다. 아무런 대답이 없다. 대신 어머니는 "내가 살아 있으니 그 애 수발을 들지, 내가 죽으면 그 애가 어떻게 학교를 다닐지 걱정이야……."라고 혼잣말을 한다.
장애우 대학 특례입학 제도가 실시된 후 윤두선 씨 만큼 언론의 각광을 받은 장애우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가 연대 인문학부에 특례입학 합격이 확정된 날, 텔레비전과 신문은 앞 다투어 미담기사로 그를 소개했다. 그런 언론의 극성은 낯선 것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언론은 예의 "인간승리" 표본으로 장애우를 소개해 왔다. 언론의 보도 태도는, 과정은 생략된 채 장애우가 뭔가 특이한 일을 하거나 성취를 이루면 인간승리라는 잣대를 대고 덤벼들었으므로 많은 평범하게 사는 장애우들의 반감을 사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윤두선 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장애우가 어렵게 공부해 대학에 들어간 게 무슨 인간승리인가? 장애를 가지고 안 가지고의 차이로 인간승리 여부가 결정된다면 그야말로 불합리한 처사가 아닌가?
그런데 윤두선 씨의 경우는 조금은 다르다. 여기서 다르다고 하는 것은 특이하게 서른이 넘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해 2년 만에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대학에 들어간 그의 뛰어난 두뇌가 남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가 대학에 들어간 사실보다는 대학 입학이 확정된 날 방송 인터뷰 때 드러난 그의 도발성이다.
관심 있는 사람이면 기억하고 있겠지만 텔레비전 뉴스 시간에 아마 그의 모습이 비춰지자 그는 "절대지지 않겠다. 나는 당신들한테 육체는 지지만 머리로는 절대 안지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공부를 해왔다고 밝혔다. 그가 언급한 당신들은 물론 비장애우이다. 말하자면 그는 비장애우를 적으로 상정하고, 비장애우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런 그의 도발성은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그를 오늘에 이르게 한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도발성 얘기가 나왔으니까 한 마디 덧붙인다면 사람들은 흔히 "죽을 각오로 무슨 일을 하면 못 이룰게 없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은 윤두선 씨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차이가 있다면 죽을 각오가 아니라 가슴속에서 불타오른 적의가 그를 추동질 했지만 그 비장함은 마찬가지다.
그의 어머니를 따라 들어가 허름한 집안으로 들어가 만난 윤두선 씨는 세 평 남짓한 방에서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그의 손을 받치고 있는 낮은 책상 하나, 그의 뒤편으로 컴퓨터가 놓여 있었고, 컴퓨터와 나란히 텔레비전과 시디 박스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전화 말미에 상대편에게 그의 은행 온라인 번호를 불러주고 있었다. 그날 아침에 그는 모 텔레비전 방송국 아침 방송에 출연했는데, 그 방송을 보고 후원자가 성금을 보내주겠다고 한 모양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여러 분들이 도와줘서 등록금은 된 것 같은데 학교생활에 드는 비용이 걱정이에요."라고 말한다. 그런 그의 표정은 서른여섯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게 해맑다.
대학 입학이 확정된 그에게 던지는 의례적인 질문 하나, 중증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은 대학에서 공부하기가 힘들지 않겠느냐는 염려에 그는 "안 그래도 누나가 학교에 가봤는데 앞 건물은 엘리베이터도 있고 경사로도 있는데 그 건물에서는 거의 강의를 안 하고 뒤에 있는 오래된 건물에서 강의가 주로 이루어진대요. 그 건물은 계단만 있는데, 다행히 경사로는 있대요. 그렇지만 걱정은 안 해요. 내가 가서 보여주면 아, 저 사람이 편의시설이 필요하구나, 그래서 학교 측에서 조금씩 개선을 하겠죠. 어떤 사람은 장애우를 입학시켜놓고 편의시설을 갖추지 않았으니까 위선이라고 그러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완벽한 걸 원한다면 백년이 가도 안 될 거예요. 사람은 자기일이 아니면 실감을 못하잖아요."라고 대답한다.
그는 대답 끝에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말 꼬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빠르게 "낙천적인 성격은 어떻게 형성됐느냐?"고 다시 묻는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아마 어렸을 때부터 누나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그렇게 됐을 거예요."라고 대답한다.
그는 일남 사녀중의 막내다. 남자가 귀한 집안의 막내이고 보면 누나들이 무척이나 그를 귀여워했을 법하다. 하지만 누나들의 귀여움을 빼고 나면 그의 어린시절은 암흑 그 자체였다 그는 두 살 때 뇌막염을 앓아 두 다리와 한쪽 팔을 사용하지 못하는 중증의 장애를 가지게 됐다. 그나마 성하다는 왼쪽 팔도 손목 아래 손가락 세 개 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이런 완벽에 가까운 중한 장애 때문에, 집안 형편이 어려운 것이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학교는 다닐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면 그는 긴긴날을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별다르게 하는 일 없이 지냈다."는 게 그의 대답이다. 다행히 아홉 살 때 조카의 그림책을 보고 깨우친 한글 덕분에 책을 읽을 수 있어서 그렇게 심심하지는 않았다고 그는 말한다. 그 긴 세월 그와 외부세계를 이어준 유일한 통로는 텔레비전이었다.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는 방에서 마치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웅크리고 하루하루를 지냈다.
그렇게 지낸 기간이 무려 삼십 일년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 기간동안 그는 장애우 수첩을 만들기 위해 한 번 외출하고, 앞서 병원에 한 번 가본, 이 두 번의 바깥나들이 말고는 문밖으로 나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왜 그랬을까? 심한 장애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한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틀을 하나 만들어 놓으면 그 틀을 절대 못 벗어나는 것 같아요.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절대 옷을 못 벗잖아요. 그렇듯 나도 끊임없이 자기 암시를 걸었어요. 밖으로 나가는 것, 이건 절대 못할 짓이다. 나는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이렇게 나는 못 나간다고 정해놓고 그 안에서 사고를 한 거죠. 그러다보니 나가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가 처음으로 바깥나들이를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서른두 살 때였다. 그때 그는 가슴의 심한 통증 때문에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병원에 가볼 생각조차 못하고 끙끙거리던 그는 우연히 방송에서 서울 남부 장애인복지관이 순회 진료를 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남부복지관에 전화를 걸었다 순회 진료를 받고 싶다는 그의 말에 남부복지관에서는 "우리는 강남만 담당하다."며 대신 신내동에 있는 원광장애인복지관을 소개해줬다. 그는 원광장애인복지관에 전화를 걸었다. 이렇게 해서 그와 원광장애인복지관의 인연은 시작됐다.
원광복지관의 순회 진료를 받고 난 후 그는 그 해 연말에 원광장애인복지관에서 개최한 송년 행사에 참석을 권유받고 바깥나들이를 한다. 그 외출이 인연이 돼 자원활동자를 알게 되고, 자원활동자가 데려다 줘 한달에 한번 정기적으로 열리는 원광장애인복지관의 자원활동자 월례회에 참석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만나고, 같은 처지의 장애우들을 사귀면서 그 중 몇 사람하고는 친해지게 된다. 그에게 컴퓨터와 등록금을 대준 뇌성마비 복지관을 안 것도 이때였다.
사람들과 사귀게 되면서 그의 생활은 아연 활기를 띠게 된다. 그렇지만 곧바로 공부를 시작하지는 않았다. 이 년여 세상구경을 하고 난 후인 구십사 년 사월, 그는 원광복지관 사회복지서 김진국 씨의 권유로 초등과정 검정고시에 대비한 공부를 시작한다. 그런데 사실을 말하자면 그전에도 그는 검정고시에 대비해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한글을 깨우치고 난 후 집에 배달돼 오는 일일공부 학습지를 보며 혼자 공부를 했는데. "곱하기. 나눗셈이 지나고 분수가 나오고 방정식까지 가자 복잡해져서, 내가 공부해서 특별히 나아질 것도 없는데 뭐 하러 공부를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집어 치운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때 김진국 씨의 권유로 공부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썩 마음 내키지는 않았다.
조카의 전과를 비려 공부를 시작한 그는 공부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있은 초등과정 검정고시 시험에서 다행히 합격한다. 내친김에 그는 세달 후 팔월에 예정된 중학과정 검정고시 시험을 준비한다. 그런데 중학과정 시험을 보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그의 말이 재미있다. "중학과정 시험을 보지 않으면 사람들이 재는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한 애야. 그렇게 말을 할 것 같았어요. 그전에는 나는 학교 같은 건 못간 게 아니라 안 간다고 그러면 됐는데 그때 시험을 보지 않으면 재는 중학교를 못 간 애다. 이렇게 흉볼 것 같아서 고입 시험 준비를 했죠.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지기 싫어하는 그의 오기는 이때부터 빛을 발한다. 자존심을 구기기 싫다는 오기하나로 공부를 계속한 그는 그로부터 삼개월 만에 고입검정고시 합격증을 손에 쥐게 된다. 연이은 합격으로 공부에 재미가 붙은 그는 다시 대입 검정고시에 도전, 이번에는 약간의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해를 넘긴 작년 오월 그는 대입검정고시에 당당히 합격한다.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니면 십이년이 걸리는 과정을 단 일년만에 끝마친 그의 집념은 어쨌거나 보기 드문 경우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공부를 하면서 그에게 어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특히 그는 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맛보아야 했다. 그의 회고이다. "중학교 과정까지는 괜찮았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과정은 용어를 모르니까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특히 수학과 과학에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부호가 나오는데 무슨 부호인지 읽지를 못하는 거예요. 많이 답답했어요. 결국 수학과 과학은 포기했죠."
그러고도 그는 칠 개월 후에 있은 대입 수학능력시험에서 146.8점이라는 비교적 높은 점수를 받는다. 그 점수는 장애우 특례입학으로 대학에 들어가지 않아도 웬만한 대학교에는 그냥 들어갈 수 있는 합격 점수이다. 그렇지만 신체검사와 본고사 논술시험 때 시간제한이 염려되었던 그는 특례입학으로 대학에 들어가는 길을 택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해 보자. 무학(�j)이라는 최악의 조건을 가진 그는 정확하게 이십개월만에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거기다 대입 수능시험까지 합격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는 이 질문에 "믿는 구석이 있었다." 대답했다. 그가 믿었던 것은 다름 아닌 영어실력이었다. 실제로 그는 고입, 대입 검정고시 영어 시험에서 모두 백점을 받았다. 이번 수능시험에서도 사십 점 만점에 삼십팔 점을 받아 출중한 영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누구나 아는 점이지만 외국어인 영어는 하루 이틀에 완성되는 게 아니다. 문맥을 제대로 알려면 빨라도 삼사년은 족히 걸린다. 그렇다면 그는 오래전부터 영어 공부를 해왔다는 말이 된다. 추측은 빗나가지 않아서 그는 "오래전부터 취미로 영어를 시작했다."고 말을 꺼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가 혼자서 영어 공부를 시작한 이유는 단순하다. 바로 영어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다시 그의 오기론이 펼쳐진다. "스무살이 넘어서 영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영어가 어려우니까 나도 모르게 도전의식과 오기가 생기는 거였어요. 남들은 다 하는데 왜 나는 못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책을 사다가 혼자서 공부했죠. 사전을 찾아서 단어의 뜻을 풀어보면 어느새 암호 같은 단어가 내 단어가 되는 거예요. 그런 다음에는 단어가 말로 다가와요. 예전에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단어인데 의미로 다가오잖아요. 그러면 큰 희열을 느꼈어요."
내친김에 그는 자신처럼 혼자 공부를 시작하는 비법을 알려주겠다고 한다. 그처럼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과목을 하나 잡아서 집중적으로 파고들면 그 다음에는 믿는 게 있어 공부에 자신감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에게 뛰어난 집중력을 선사한 그의 오기는 거의 천성적이다. 그리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느끼게 되는 자신감 넘쳐하는 약간의 오만함도 마찬가지로 천성적이다. 이야기가 그 대목에 이르자 그는 서슴없이 말한다. "사람이 사는데 있어서 오만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너무나 저속하면은 사람이 비굴해지고 그러면 그 사람의 인격이 없어져요.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왜 내가 너희들한테 지니, 너희들이 하는 것만큼 나도 할 수 있다. 이런 오만함으로 버틴 거죠."
그가 가지고 있는 오기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보면 거의 병적이다. 그는 시를 좋아한다. 그래서 한때 시를 쓰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는데 "아 장애우는 글씨만 알면 모두 시를 쓰네, 신경질 나서 나는 안 쓴다." 그래서 그는 시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그의 집안은 기독교를 믿는다. 장애 때문에 교회는 나가지 않았지만 그도 사실상 기독교 신자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를 보고 "틀림없이 기독교 신자일 것"이라고 단정하는 바람에 오기가 생겨 "장애우는 모두 다 기독교 믿으라는 법이 있어, 신경질 나서 나는 안 믿는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가 아침 일직 일어나는 것도 그의 표현에 따르면 "장애우는 밤에 늦게 자고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것이 무슨 법칙처럼 돼 있는데 그게 싫어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는 것이다. 오기 외에 그를 오늘로 이끈 것은 그의 지적 호기심이었다. 그는 특히나 시를 좋아했다. 여기서 잠시 그가 잠언처럼 좋아하는 엘리어트의 시 몇 구절을 옮겨 보자.
"지적으로 사는 것 왜냐하면 그것 밖에 길이 없으므로"
"잠자고 있다고 슬퍼하는 자는 절대 잠자고 있지 않다."
"나는 런던교 위로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죽음이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데려간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싯귀를 읽으면 그는 가슴이 뭉클해져 왔다고 한다.
그는 대학에 간 이유를 자신의 지적 호기심과 연결시켜서 얘기하고 있다. 그는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을 때만 해도 방송통신대에 들어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계획이 바뀌었다. 그렇게 된 것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단 하나의 이유, 오직 "대학의 아카데믹한 분위기를 맛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바깥세상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제가 뭘 느꼈냐면 세상이 참 통속적이라는 거였어요.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하다가 내가 진지한 얘기를 꺼내면 사람들이 피하더라구요. 골치 아픈 얘기를 왜 하느냐는 거였어요. 내 성격이 전투적이라 따지기를 좋아하는데, 내가 논리적으로 얘기하면 논리적으로 대답해 주지 않고 장애우들은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폄하하는 거예요. 장애우들은 세상물정을 모르고 사람 사는 세상을 몰라서 자기만 잘났다고 떠든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말을 하지 않고 있으면 이번에는 장애우들은 남하고 어울리지 못한다. 장애 때문에 거리감을 두고 산다.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결국은 너는 장애우니까 그런 거야. 너는 장애우이기 때문에 우리랑 같이 어울리지 못하는 거고 우리랑 못 노는 거야. 좋은 말로는 사회성이 없으니까 재활교육을 받아야 해, 너 많이 깨져야겠다. 이런 말들을 하는데 정말 듣기 싫었어요. 그래서 대학에 가자, 대학에 가면 아무래도 지적인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것 아닌가, 그 분위기라도 느껴보자. 이런 생각이 들어 대학 진학을 결심하게 됐어요."
이유야 어찌됐건 이제 대학생이 된 그는 무사히 대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글을 쓰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많은 사람들이 그 장애우 어떻게 됐을까 궁금해 할 텐데, 그 장애우 지금 에프 맞고 있어 그러면 안 되죠. 지원해 주는 사람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도 열심히 공부할거에요."
그는 각오를 새삼스럽게 다지며 예의 해맑은 미소를 얼굴에 떠올렸다.
글/이태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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