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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걸음이 만난사람] "제일 큰 장애는 장애를 이겨낼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시각장애우 정치학 박사 미영순

본문

[함께걸음이 만난 사람]

 

 

"제일 큰 장애는 장애를 이겨낼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시각장애우 정치학 박사 미영순

 

 시각장애우 정치학 박사 미영순씨

대담; 오숙희(여성학자, 방송진행자)

 

 

   열일곱살에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각장애우가 된 후 뒤늦게 시작한 정치학 공부로 92년 박사학위를 받고 장애우 여성 정치학 박사로 많은 관심을 모았던 미영순 박사, 그녀가 최근 자신의 생을 담은 수필집을 발간했다. 현재 한·중 관계를 중심으로 한 북방문제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를 여성학자이며 장애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는 오숙희 씨가 만나 마흔아홉의 인생을 함께 이야기했다.
 

정치가 꿈 키워


오숙희 ; 대학에 강의도 나가시고 북방문제 전문가로 활동하시면서 최근에는 "눈물 고인 가슴에 눈물 대신 품은 뜻"이라는 수필집을 발표하셨죠. 특별히 마흔아홉의 세월을 한 권의 책에 담아내신 동기가 있으신가요?

미영순 ; 고등학교 3학년때 망막염으로 시력을 잃게 되었지만 제 스스로는 장애우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남보다 좀 모자란 부분이 있어서 그만큼 노력하며 그냥 남들처럼 살았을 뿐인데 92년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을 때 각종 매스컴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시각장애의 어려움을 딛고 박사가 되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라는 질문을 하더군요. 그때서야 제가 장애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걸 깨달으면서 장애 때문에 아파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되었고 그들에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던 제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장애우 무임승차인 지하철 요금을 모아 양로원에 보내고 있었는데 그것보다는 책의 수익금을 모아 장애우 복지기금으로 사용하면 더 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어 시작한 일이기도 합니다.

오숙희 ; 열일곱살이면 한참 꿈이 많을 시기에 장애를 가지게 된 것인데 그만큼 아픔도 크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저한테 다섯 살 때 교통사고로 장애를 갖게 되어 휠체어를 사용하는 조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점점 크면서 사람들 만나는 것을 기피하는 심리적인 자폐증세를 보여 한동안 크게 걱정을 했습니다.

미영순 ; 저 역시 시력을 잃게 되면서 많은 좌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항상 최선과 최상만을 생각하며 긍정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애써왔죠, 결코 짧지 않는 세월속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단지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만으로 울어 본적은 없었습니다. 물론 하고 싶은 일이 많았던 열일곱 소녀에게 아픔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오숙희 ; 장애라는 커다란 벽을 만나게 된 열일곱살에 어떤 꿈을 갖고 계셨나요.

미영순 ; 제가 아홉 살 때 최은희 씨가 주연한 "어느 여대생의 고백"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은 변호사고 그 아버지는 국회의원이었는데 그걸 보면서 저거 괜찮다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 이후에 세운 꿈이 법대에 들어가서 4학년때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10년 동안 무보수변론을 하면서 사회적인 위치를 쌓은 후에 국회의원으로 출마하고 쉰살쯤에 통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대한민국에 초대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오숙희 ; 될성부른 나무들은 역시 꿈부터 다른건가요(웃음), 아홉 살짜리가 그 정도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정치학을 선택하신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까?

미영순 ; 정치만큼 재미있는 쇼는 없습니다. 그래서 공부해볼만한 것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무남독녀 외동딸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저희 부모님의 헌신적인 교육이 없었다면 지금 이렇게 당당하게 서있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그 교육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아홉 살에 그런 맹랑한 꿈을 꿀 수 있었고 이제는 마흔아홉의 정치학박사인 미영순을 이해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오숙희 ; 우리나라에서 여성과 장애우리는 두 가지 사회적 핸디캡을 극복하는 것에는 개인의 노력과 능력도 중요하지만 가족이나 남편 등 주변 사람의 헌신적인 배려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형제가 없이 무남독녀로 자라셨다면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배려도 특별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미영순 ; 두분 다 제가 박사가 되는 모습을 보지 봇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맹모삼천지교와 다를 바 없는 정성으로 저를 키우셨지만 제가 맹자보다 형편없이 모자라는 탓에 부모님의 훌륭한 교육을 빛내지 못하는 불효를 드린 것이 지금까지도 못내 마음이 아픕니다.
  저희 부모님은 몇 가지 원칙을 가지고 교육을 시키셨습니다. 가장 강조하신 것 중에서 하나가 "율기"였습니다. 어머니는 극기는 모지게 자신을 이겨내면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독해지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 대신 자기가 자신을 다스리는 "율기"를 통해 지나치게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항상 절제된 행동과 표정을 갖게 하셨습니다. 6개월의 실명 상태와 기적적인 시력회복, 그 이후 10년간 병과 싸우면서도 부모님과 저를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이 바로 그 "율기"였습니다.

오숙희 ; 미박사님께서 어린시절을 보내신 때라면 여자애들에게는 깊이 있는 교육을 시키지 않는 것이 사회적인 분위기였는데 지금까지 결혼하지 않으시고 뒤늦게 시작하신 공부를 끝까지 해내신 것 보면 부모님께서 상당히 진보적인 교육방침을 갖고 계셨을 것 같습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진 분들이셨나요?

미영순 ; 그 시대에 이미 두분은 제게 완벽한 남녀평등을 몸에 익히도록 하셨습니다. "계집애가 ..", "시집이나 잘 가면..." 같은 말을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었고 어떤 일이든 제가 하고 싶은 일은 다 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5살때부터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당시 상황이 전쟁 직후였기 때문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 혼자 남게 되어도 살아갈 수 있도록 강한 사람으로 키우셨죠, 그 덕분에 어린시절에는 동네에서 소문난 골목대장이었답니다.(웃음) 그밖에도 부모님은 제가 자만하게 될까봐 칭찬을 아끼셨고 "돌멩이 하나도 제 값이 있으니 친구를 가려서 사귀지 마라"는 말씀을 자주하셨습니다. 지금도 사람과 쉽게 사귀는 편입니다. 그리고 시력이 떨어지면서 같이 있는 사람의 손을 붙들고 걸어야 하니까 더 쉽게 사람들과 친해지게 되더군요.

오숙희 ; 박사님 이야기를 듣다보니 두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물론 박사님께서는 어린시절에 장애가 없으셨지만 저는 제 조카를 보면서 장애를 가진 아이에게 가정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조카아이이가 그런 심리적인 자폐증세를 보이면서, 지방에 살고 잇는 아이를 서울 저희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손님이 올 때마다 방으로 숨어드는 아이를 불러내어 인사를 시키고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과 접하도록 했죠, 그렇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장애가 있으니까 넌 가만히 있어" 하면서 보호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굴러가는 놈이 빠르니깐 네가 갔다 와라" 하면서 집안밖의 심부름을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이 그 아이의 장애를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면 아이도 자신의 장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가족이외의 사람을 만났을 때에도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상처받지 않을 것이구요. 그런 훈련이 되풀이 되면서 점점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미영순 ; 저는 스스로 장애를 담담하게 인정했기 때문에 그런 식의 배려는 필요 없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저희 가족들의 가장 큰 배려는 장애로 인해 절망하거나 슬퍼하는 모습을 제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저도 울지 않았지만 어머니 역시 한번도 제 장애로 인해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거든요. 그렇다면 역시 장애아동을 둔 부모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장애우들의 공감 얻는 운동 펼쳐야


오숙희 ; 부모의 역할을 얘기하셨는데 저희 작은 딸아이가 병명은 확실히 나오지 않았지만 여섯살인데 아직도 말을 하지 않아요, 정서불안 현상인 것 같은데 이런 때 무슨 생각이 드냐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장애에 대해서 선입견적으로 일단 거부감을 갖고 딱 차단을 해버리니까 우리 애가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이 들 때 가장 가까이에서 그 애들을 도와야 할 부모들이 먼저 아이 당사자보다 더 중한 장애의식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런 부모들이 일단 상황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부모들을 교육할 수 있는 모임도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여서 고민을 이야기하고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 방법을 찾아서 당당히 세상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미영순 ; 조금씩 그런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약시 협회 같은 곳을 봐도 요즘 어머니들의 교육수준이 높아져서 부모들끼리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요구해야 할 일들은 당당히 요구하면서 아이들을 자신 있게 키우려고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어머니들이 점점 더 현명하게 방법을 찾아나가게 되겠죠.

오숙희 ;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과거에 비해 장애아동의 부모도 그렇지만 장애우들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고 요구하면서 장애우 복지가 많은 발전을 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여성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여성운동과 장애우운동은 사회의 기득권층이 두 계층의 권익에 대해 관심을 가지도록 끊임없이 반론을 제기해야만 우선순위에서 제외되지 않고 발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는 아이 젖 준다고 싸워야 얻어낼 수 있는게 아닐까요

미영순 ;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장애우 문제를 알리는 방법에도 테크닉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회에 저항적으로 주장한다면 오히려 비장애우들한테 거부감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투쟁이 아니고 우리사회의 발전 단계를 보면서 장애우들의 어려움을 일반인들에게 알려주고 함께 대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장애우들로 하여금 "미처 몰랐는데 그렇겠구나" 라는 공감을 얻을 수 있도록 전달이 되어야지 아우성하는 것으로 보이면 좋은 뜻이 왜곡될 수도 있겠죠

오숙희 ;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저는 장애우운동은 장애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비장애우들이 함께하면서 만들어나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여성운동하고 굉장히 비슷한 것입니다. 여성운동이 여자들끼리 모여서 남자를 다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주의적인 남성들을 설득해서 운동에 동참시켜 같이 하거든요. 그러면 외부에서 너무 공격적이다. 여성들이 무섭다. 이런 생각이 많이 완화 되더라구요. 장애우운동도 비장애우들이 함께한다면 박사님 말씀처럼 더 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미영순 ; 그래서 제 나름대로 하고 있는 장애우운동 중에 하나가 제가 다니는 절의 청년회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인식을 개선시키는 일입니다. 요즘은 시각장애우들의 법회를 돕고, 기독교 선교단체에서 운영하고 있는 중복장애시설을 방문해 자원활동을 하고 소년원을 방문합니다 그밖에 소년원도 청년들과 함께 이런 곳을 방문하면서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을 배우고 미래에 청년회원들이 사회의 주역이 됐을 때 복지를 고려할 수 있게 된다면 이것 역시 장기적으로 꽤 바람직한 운동이 되리라고 봅니다.

오숙희 ; 박사님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대로 장애우운동을 하고 있을텐데 아직 우리나라는 선진국들에 비해 배려가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저희 가족들은 매년 가을 여행을 떠나는데 외출이 어려운 조카에게 문화유적지를 보여주고 싶어서 해인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해인사로 올라가는 길에 전부 차돌 같은 것을 섞어서 콘크리트를 깔았더라구요. 그것이 걸어서 올라가는 사람 입장에서는 다리에 피로도 줄이고 아스팔트가 주는 무미건조함도 없앨 수 있어서 좋았는데 휠체어가 걸려서 올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에 식구들이 4인교를 들듯이 들고 올라가야 했습니다. 한쪽으로 판판한 길 하나만 만들어 주었으면 자전거나 유모차나 휠체어나 편하게 올라갈 수 있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영순 ; 저도 등산을 좋아하는데 지금 말씀하신 것 같은 길은 울퉁불퉁해서 저같이 잘 보이지 않아 더듬거리는 사람은 발이 걸려 넘어지기 딱 좋죠.
 해인사 같은 곳은 자연물이니까 그렇지만 요즘 새로 지어지는 건축물들 또한 점점 미학적인 것이 강조되어 편의시설이 별로 고려되고 있지 않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돈 들여서 깔아놓은 대리석이 저한테는 아래위로 번쩍거려 눈 들 곳이 없고 분간하기가 어려워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답니다. 병신을 보면 재수 없다. 이런 식의 생각은 많이 고쳐졌지만 그 이상 같은 사회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장애우를 바라보는 공동체 의식은 아직 부족한 것 같습니다.

오숙희 ; 우리나라에서 편의시설이 배려가 안된다는 것은 결국 장애우들을 소외시키겠다는 것밖에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시설에 대한 불편함이 장애우들로 하여금 나는 여기서 어울려 살지 못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저도 실제로 조카를 보면서 독일 같이 장애우가 살기 편한 곳으로 이사를 가볼까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의식의 문제중요


미영순 ; 아직은 장애우들이 풀어야 할 문제가 너무나 많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선택된 한경 속에서 공부도 많이 하고 박사라는 위치도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사치스런 이야기라고 할지 모르지만 , 저는 장애우가 풀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스스로 갖고 있는 의식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장애우를 장애우로 만드는 것은 "내가 장애가 없었다면 무엇을 했을 것이다."라며 장애라는 현상에 모든 문제를 연결시켜서 스스로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잃는 것이 있으면 무엇인가 얻게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제일 큰 장애는 이겨낼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하게 되는 것이며 잃은 만큼 얻은 것을 찾으려고 노력한다면 현명하게 자신을 다스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자기만의 고통으로 생각하지만 누구나 자기 몫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결국 장애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받아들이기 나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통이라는 것은 저항할수록 커지는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고 약간은 즐길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숙희 ; 말씀을 듣고 보니 장애를 갖게 되면서 얻게 되는 것은 어쩌면 정신적인 성숙함인지도 모르겠네요. 이제 휠체어를 타고 있는 조카가 열여덟살인데 가끔은 어쩌면 얘가 인생에서는 선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작은 딸아이 때문에 걱정을 하면 조카가 하는 말이 얘가 문제가 아니고 자꾸 문제라고 생각하는 이모가 문제일지도 모르니까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며 어른스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미영순 ; 인생철학이라면 거창하지만 제가 살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젓갈처럼 사람도 삭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장애도 속에서 삭아서 장애라는 틀 속에서 나를 위해서만 남과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정신적인 성숙을 이루어 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숙희 ; 장애우 자신과 더불어 사는 모든 사람들이 젓갈처럼 삭아서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 된다면 장애우 복지는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겠죠. 마지막으로 앞으로 계획하고 계신 일이 있으신지요?

미영순 ; 국민대학교에 강의도 계속 나가야 하고 전공과 관련한 책도 써야 하고 할 일이 많은데 의사가 이제 제 나이부터는 더 이상 눈을 쓰면 안된다고 경고를 하더군요. 결혼을 안했으니 남편도 없고 먹여 살려 줄 가족도 없는데 학자에게 눈을 쓰지 말라고 하니 걱정입니다.

오숙희 ; 더욱 건강 조심하시고 오늘 긴 시간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 ; 조철근 / 정리 ; 김성연 기자

 

 

작성자김성연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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