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우리 신랑만 잘 먹일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 함께 사는 세상


[사람사는 이야기] "우리 신랑만 잘 먹일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주부 이정희 씨

본문

[사람사는 이야기]

 

 

"우리 신랑만 잘 먹일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주부 이정희 씨

 

 

  남편은 정신지체 장애 이급, 그녀는 지체장애 일급의 장애우이다. 이렇듯이 가난한 부부의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애틋하기 그지 없다. 그녀에게 꿈을 물어보자 그녀는 “꿈은 없어요. 가난하지만 먹고 살 수만 있으면 되고, 우리 신랑만 잘 먹일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어요.”라고 대답한다. 그녀는 말 끝에 “나 보다도 남편이 더 불쌍하죠. 우리 신랑 아니면 나 같은 여자 누가 좋아나 하겠어요. 나같은 여자를 만나 고생하며 사는 남편이 훨씬 더 불쌍하죠.”라고 강조한다. 그녀의 작지만 간절한 소언이 이루어질 날은 그 언제일까.


 

 

▲이정희씨와 남편

 

올해 마흔 네 살인 이정희 씨는 버림받은 장애우이다. 그녀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의 얼굴은 물론 이름도 모른다. 그녀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것은 세 살 때 가족에게서 버림받아 그 나이 이후 삼육재활원에서 자랐다는 것 정도이다.
  그녀는 왜 가족에게서 버림받았을까?
미루어 짐작하건대 직접적인 원인은 아마 그녀의 장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구루병이라는 장애를 자지게 됐다. 이 장애는 비타민 디의 부족으로 뼈의 발육이 불충분하여 척추가 구부러지고, 무릎과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장애이다.
 여느 장애우들과 마찬가지로 이 장애는 그녀의 삶을 심하게 왜곡시켰다. 부모에게서 버림받아 시설에 수용된 그녀는 나이가 차 더 이상 아동시설에 있을 수 없게 되자 다시 성인시설로 옮겨가야 했고, 그 시설에 있으면서 직업재활이라는 명목으로 몇 군데 공장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다.
 그녀가 성인이 돼 옮겨 다닌 공장은 전자부품 공장과, 가방공장, 봉제완구 공장 등이다. 이 공장들에서 그녀는 단지 장애우라는 한가지 이유로 차별을 당하는 설움을 맛보며 한세월을 살았다. 비장애우가 받는 월급의 반도 못 받고, 그나마 해고 당할까봐 가슴을 졸이며 근근히 삶을 이어가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인생유전은, 그녀에게는 가혹한 말이겠지만, 그다지 특별한 경우는 아니다. 옛말을 한다면, 그 시절(지금으로부터 삼년 전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해야하나), 주위를 둘러보면 그녀처럼 삶을 버거워하는 장애우들이 부지기수였다. 보는 관점의 차이겠지만 그녀보다 더한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고, 그녀보다 더한 고생을 한 장애우들이 차고 넘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녀의 고생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어두기로 한다.
  대신 그녀에게서 희망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대충 그녀의 이력을 살펴본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무슨 밝은 이야기를 기대하겠느냐고 반문을 할지 모르지만 사람 사는 게 그런 게 아니다. 흔히 하는 말로 진흙덩어리에서 연꽃이 핀다고 하지 않는가. 그녀에게서 연꽃은 바로 결혼이다.
  다시 한 번 무지와 몰지각한 편견을 드러내 보자. 사람들이 보기에 그녀는 도저히 결혼하고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바로 그녀의 심한 장애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 그녀는 엄연히 가정주부이다. 슬하에 아이는 없지만 부천에 있는 영구임대주택에서 남편과 가난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사람 사는 이야기는 결혼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에 있었던 이야기다.
  그녀가 정신지체 장애우인 지금의 남편을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칠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그녀는 인천에 있는 한 성인 장애우 시설에 수용돼 있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 서른일곱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그녀의 처지는 바람부는 강가의 갈대같이 춥기 그지 없었다.
  시설에 다시 들어가기 전 그녀는 서울에 있는 봉제공장에서 숙식제공을 받으며 삼년을 꼬박 일했었다. 하지만 워낙 저임금을 받다보니 손에 쥔 돈 없이 빈털터리 신세였다. 그게 불만스러워 그만두고 인천에 내려와 있던 그녀에게 시설 총무는 자극을 주기 위해서였는지 모르지만 수시로 "일 안다니면 다른 시설로 보내 버린다." 고 협박을 했다. 그래서 그녀는 늘 불안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지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생필품을 사기 위해 자주 들려 인연이 있던 가게 여주인이 그녀를 붙잡고 뜻밖의 제의를 했다. "아가씨, 선 한 번 보지 않을래? 내가 아는 참한 남자가 강원도에 살고 있는데 상처해서 지금은 혼자 살고 있어, 이혼의 충격으로 머리는 약간 모자라지만 사람은 멀쩡하고 아주 착해, 보아하니 아가씨 처지도 딱한 것 같은데 이참에 가서 한 번 만나보고 좋으면 결혼해서 팔자를 고쳐보지 그래."
  가게 여주인의 지적대로 딱한 처지에 놓여 있던 그녀는 그 제안이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즉시 가겠다고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며칠 후 가게 여주인을 찾아가 "한번 가보겠다."고 여주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녀가 선을 보러 가겠다고 하자 가게 여주인은 "그럴 줄 알았다."고 좋아하며 옷도 한 벌 사주고 차비하라며 돈 오만원도 찔러 주는 등분에 넘친 친절을 베풀었다.
  이렇게 해서 그녀의 강원도행은 이루어졌다. 버스를 타고 차창 밖의 풍경들을 바라보면서, 그때 어느새 그녀는 결혼만이 그녀를 답답한 삶 속에서 구원해 줄 유일한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그녀가 선을 보기 위해 물어물어 찾아간 곳은 강원도 홍천군 재야리라는 외진 마을이었다. 인가도 몇 채 없고, 가게도 없는 동네 시골집 안방에서 그녀는 열 살 차이가 나는 마흔일곱 살의 지금의 남편인 김성훈 씨와 생전 처음 선을 봤다. 그런데 문제는 김성훈 씨를 처음 만나게 되자마자 발생했다. 소개해준 여주인의 말과는 달리 김성훈 씨는 한 눈에 보기에도 지능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남자였다. 말도 정확하게 하지 못하고, 저녁을 같이 먹는데 먹는 폼이 그녀가 시설에서 익히 보아온 여타 정신지체 장애우들과 똑같았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김성훈 씨는 신고 다니던 신발을 소중하게 보자기에 싸서 옷장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게 되자 그녀는 누가 머리를 내려치는 것 같은 큰 충격을 맛보았다 단박에 속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녀는 그 즉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게 여주인이 사준 옷을 벗어 놓고 돈 오만원도 내놓고 그 집을 빠져나왔다. 김성훈 씨의 열 살 먹은 딸이 "우리 아빠가 머리는 모자라지만 착하니까 제발 가지 말고 여기 있어 달라."고 울면서 매달렸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차가 없어 외진 버스 정류장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겨우 새벽차를 타고 도망치듯 다시 인천으로 돌아온 그녀는 가게 여주인을 찾아가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모자란 남자를 소개해 줬느냐."고 대들며 따졌다. 그녀가 거칠게 항의하자 가게 여주인은 "없었던 일로 하자 미안하게 됐다."고 그녀에게 사과했다.

  결혼으로 답답한 삶의 출구를 찾으려던 그녀의 시도는 이렇게 돼서 물 건너가는 듯 했다. 그녀는 다시 시설에서 답답한 삶을 사는 예전의 그녀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일이 그녀에게 준 충격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일상은 예전보다 훨씬 더 암울해졌다. 그녀는 내가 오죽 못나게 보였으면 그런 모자란 사람을 소개시켜 줬을까 라는 생각을 곱씹게 됐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랬는데 가게 여주인은 그녀 속도 모르고 그녀를 찾아와 "아가씨가 다녀간 뒤로 성훈 씨가 밥도 안 먹고 맨날 울기만 한다지 뭐야, 잠도 자지 않고 아가씨를 기다린다고 버스 정류장에 나가 있다는 거야. 내가 미리 자세한 말을 한 한건 미안하게 됐어, 그렇지만 어떡해, 사람 살려주는 셈 치고 가서 한 번만 더 만나고 와."라고 부탁을 하면서 그녀를 자극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소리치며 화를 냈다.
  그녀가 강원도 일을 잊으려고 직장을 알아보려 애쓰던 어느 날이었다. 이번에는 다른 곳에서 결혼 제의가 들어 왔다 당시 인천시 부개동에는 건설마을이라는 장애우 공동체가 있었다. 이 공동체는 주로 시장에서 바닥을 기며 생활용품을 파는, 속칭 수세미 장사를 해서 먹고 사는 성인 장애우 이십여명이 모여 사는 공동체였다.
  그 공동체에 살고 있는 아는 언니가 그녀를 찾아와 중매를 서겠다고 했다. 그 언니가 소개한 상대 남자는 마흔 살 먹은 소아마비 장애우로 아들 한 명이 혹처럼 딸려있었다. 그녀는 소개를 받자 이 남자와의 결혼에 주저하지 않았다. 어차피 결혼을 통해 지겨운 시설에서의 삶을 벗어나기로 마음먹은 이상 상대가 누구든 맞춰 살 자신이 있었다. 결과가 안 좋아서 그렇지 지능이 모자란 사람과도 살 뻔 했던 자신이 아닌가.
  그녀는 짐을 싸서 남자 손에 이끌려 건설마을로 들어갔다. 그런데 한 달여의 기간에 걸쳐 이뤄진 이 결혼은 애초부터 문제가 있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녀가 평생 배필을 만나 오순도순 살고 싶어 남자를 따라나섰던 것과는 달리 남자는 아들을 데리고 살면서 밥 해주고 빨래해 줄 사람이 없어 그런 집안일을 해줄 여자로서 그녀를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동거를 시작한 두 사람은 처음부터 어긋날 수박에 없었다.
  우선 남자는 그녀를 아내로 여기지 않았다. 밖에 나가 돈을 벌어 왔지만 그녀에게 충분한 생활비를 주지 않았다. 겨우 하루에 이천원을 내놓으면서 그 돈으로 고기를 사와 반찬을 하라고 강요하기 일쑤였다. 그녀는 남자의 강요에 못 이겨 모아두었던 얼마간의 돈을 허물어 부식비로 써야했다. 남자가 유독 고기반찬을 선호한 것은 바로 폐결핵을 앍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그녀는 동거가 시작된 뒤에 알았다. 그런데 문제가 단지 생활비와 남자의 병에 그쳤다면 그녀는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태도는 점점 상식을 벗어나고 있었다. 남자는 평균 일주일에 한번 꼴로 외박을 했는데 물어보면 여관에서 자고 온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그런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우연히 남자 호주머니에서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그 쪽지에 적힌 전화번호를 누르자 웬 낯선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남자한테 다른 여자가 있었던 것이다. 저녁에 남자를 추궁하자 남자는 그동안 술집여자인 그 여자와 자고 들어왔다는 사실을 순순히 시인했다. 그러면서 "내 돈 벌어 내가 쓰는데 뭐가 잘못됐냐."고 오히려 화를 냈다. 그녀는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자 정내미가 떨어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신은 밥 해주고 빨래 해주는 가정부에 지나지 않는 신세였다. 그녀는 남자와 헤어질 것을 결심했다. 언제 말을 꺼낼까, 시기를 엿보고 있었는데 계기는 일찍 찾아왔다.
  그날 그녀는 옆방에 사는 한 여성장애우와 심한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다툼의 시작은 그 여성장애우가 그녀더러 "남편 밥도 잘 해주지 않는다"고 참견하면서 비롯됐다. 그녀는 발끈했다. "왜 남의 집 일에 콩 내라 팥 내라 참견하냐."고 그녀는 대들었다. 그러자 옆집 여자도 지지 않고 "남편 잡을 여자."라고 그녀에게 삿대질을 했다. 말다툼으로 시작된 다툼은 금방 몸싸움으로 발전했다. 서로 머리끄뎅이를 잡고, 욕을 퍼부으며 방바닥을 뒹굴었다. 바로 그때 남자가 들어왔다. 당연히 그녀 편을 들 줄 알았던 남자는 옆집 여자는 놔두고 그녀를 짓밟기 시작했다. 이유는 "옆 집 여자한테 덤볐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변명도 못하고 죽도록 매를 맞아야 했다. 남자는 때리는 것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녀를 타고 않아 "죽여 버리겠다."며 그녀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조금만 남자가 더 오래 그녀 목을 조르고 있었다면 그녀는 죽었을 것이다. 그녀가 사색이 되자 남자는 그때서야 목을 누르던 손을 풀었다. 그러면서 주먹으로 그녀 얼굴을 가격했다. 그녀는 온통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서야 겨우 남자 방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졸지에 오갈데가 없어진 그녀, 설움에 겨운 울음을 토해내면서 하염없이 거리를 걷던 그녀는 밤이 되자 자신도 모르게 발길을 시외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녀 뇌리 속에는 "머리 똑똑하고 돈 벌어도 소용이 없구나,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강원도 남자가 났구나."라는 생각이 맴돌고 있었고, 그래서 강원도 홍천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다음 날 성훈 씨 집에 도착했다. 소식도 없이 나타난 그녀를 성훈 씨는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성훈 씨는 "우리 색시 왔네. 우리 색시 왔어요."하며 그녀를 업고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그녀는 그런 성훈 씨를 보며 작은 행복감을 맛볼 수 있었다. 그녀는 성훈 씨의 등 위에서 비록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성훈 씨를 평생 남편으로 섬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남편과 시어머니를 모시고 외딴 시골집에서 팔개월을 살았다. 그러다가 시어머니와 전처소생의 딸을 놔두고 남편과 둘이서만 부천으로 나왔다. 그녀가 부천으로 이사 올수밖에 없었던 것은 시골에서의 생계가 막막했기 때문이다. 남편집은 일정한 수입이 없었다. 남편이 큰집 농장에 나가 일을 해서 가져오는 월급이 아닌 쌀로 겨우 입에 풀칠을 했을 뿐이었다. 부엌도 없어 마루에 휴대용 가스버너를 놓고 밥을 짓는 등 극심한 가난을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평소 알고 지내던 부천의 한 교회 목사에게 간곡한 편지를 썼고, 그 목사가 부천시 원미동에 보증금 오십만원에 월세 오만원짜리 방을 얻어줘 바라던 시골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다.
  막상 부천으로 이사를 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생계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먹고 사는 문제는, 이제는 남편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실질적인 가장이 된 그녀에겐 큰 짐이었다. 다행히 그녀 사정을 딱히 여긴 집 주인이 월세를 받지 않아 주거 문제는 해결됐지만 먹는 문제는 어떻게 해볼 뾰족한 수가 없었다. 사정이 그런데도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은 한 끼에 꼭 밥 두 그릇을 비웠고, 반찬투정까지 해 그녀 속을 뒤집어 놨다.
  그녀가 하루 밥 세끼를 해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일은 가정 부업이었다. 구슬 끼는 일, 머리빗 포장하는 일, 그리고 납땜 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가져다가 했다. 그러나 가정부업이라는 것이 성격상 주부들이 남는 시간에 하는 부업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 일당이 박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하루 삼천원, 많을 때는 하루 오천원을 벌어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남편이 취직을 했다.
  셋방 입구 골목에 붙어 있는 구인 광고를 보고 찾아간 형광등 만드는 공장에서 남편과 그녀를 채용해 주었다. 그 공장에서 남편은 포장과 짐 나르는 일을 하고 그녀는 형광등에 철사를 삽입하는 일을 했다. 처음 들어갈 때에는 한 사람이 이십오만원씩 오십만원의 월급을 받기로 했는데 나중에 나온 월급은 한 사람이 육만원씩, 합해서 십이만원에 지나지 않았다.
  작은 월급이었지만 그래도 고정적인 수입이라서 생계에 큰 도움이 됐다. 그런데 한 번은 공장 사장이 남편이 일을 못한다고 나오지 말라고 해 중대한 위기를 맞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사장을 찾아가 "제발 다니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그런 그녀가 안돼 보였는지 사장은 해고 의사를 철회했다. 대신 그녀가 공장을 그만뒀다. 일이 힘들었기 때문이기도 해서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부가 둘 다 장애우였기 때문에 그녀 가정은 어렵지 않게 생활보호대상자로 선정됐다. 나라에서 나오는 쌀과 부식비, 그리고 남편이 벌어오는 한달 육만원의 수입으로 그녀는 어렵기는 했지만 밥은 굶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살기를 사년, 살다보니 그녀에게 또 좋은 일이 생겼다. 바로 영구임대주택에 입주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지금 부천시 춘의동 영구임대주택 십이평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녀의 힘든 삶은 마침표를 찍은 것처럼 보인다.
  여기까지가 대략적으로 들어본 그녀 사십삼년의 삶의 풍경화이다. 그녀 삶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참 옹케도 살아왔다는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러면 과거는 그렇다치고 지금 그녀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요즘 그녀에겐 또 다른 커다란 걱정거리가 생겼다. 남편이 작년 십이월 이십일 교회를 다녀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해 있기 때문에 생긴 걱정거리다. 남편은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당분간 걸어 다닐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다행히 병원 치료비는 가해자 차주가 대고 있어 큰 걱정은 없지만 다시 생계를 이어가는 것이 큰 고민이다. 남편이 작장에 나가지 않고, 또 당분간 일을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으니 어디서 벌어 밥을 먹을지 막막할 따름이다.
  지금 그녀 가정의 유일한 수입은 생활보호대상자에게 주는 정부의 생계 보조금이다. 한 달 이십여만원도 안 되는 그 생계보조금으로 아파트 임대료와 관리비를 내고 나머지로 먹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돈으로는 채 남편의 식성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남편은 병원에 입원해서도 식성은 여전히 왕성하다. 한 달에 사십킬로의 쌀을 먹고 일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고기반찬을 해다 줘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편은 토라진다. 그녀는 남편이 토라지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라 남편이 안쓰러워 남편이 해달라는 대로 해준다. 남편에게 고기반찬을 해다 주면 그녀는 김치와 간장으로만 밥을 먹어야 하는데 그래도 그녀는 불만이 없다.
  그녀에게 불만이 있다면 그건 남편이 자주 토라진다는 것이다. 남편이 사달라는 반지나 잠바 같은 것들을 사주지 않으면 남편은 집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서성거리며 그녀 속을 썩인다. 그리고 강원도 홍천에서 살 때는 자기 양말은 자기가 빨았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그녀가 방청소 좀 하라고 시키기라도 할라치면 남편은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는지 "밥 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것은 여자들이 다 하는거다."라며 도망을 간다. 그녀가 화를 내면 "당신은 마음이 약하지, 내가 다 알아."라며 웃는다. 그러니 그녀는 화도 낼 수 없다. 또 한 가지 남편과 살면서 그녀가 애태우는 것은 남편이 길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한번은 밤 열 시가 넘어는 데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다. 공장에서는 퇴근했다고 하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자정이 돼서야 그녀는 파출소에서 남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그녀는 혼자서는 외출을 할 엄두도 못 낸다. 어딜가든 꼭 남편을 데리고 다닌다. 남편도 그녀 곁에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우리 남편은 꼭 애기 같아요. 사람들이 다 그래요. 애기 같다고. 애기처럼 어딜가도 안 떨어지고 쫓아다니니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죠." 그녀의 말이다.
  남편은 정신지체 장애 이급, 그녀는 지체장애 일급의 장애우이다. 이렇듯이 가난한 부부의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애틋하기 그지 없다. 그녀에게 꿈을 물어보자 그녀는 "꿈은 없어요. 가난하지만 먹고 살 수만 있으면 되고, 우리 신랑만 잘 먹일 수 있으며 소원이 없어요."라고 대답한다. 그녀는 말끝에 "나보다도 남편이 더 불쌍하죠. 우리 신랑 아니면 나 같은 여자 누가 좋아나 하겠어요. 나 같은 여자를 만나 고생하며 사는 남편이 훨씬 더 불쌍하죠."라고 강조하다.
 그녀의 작지만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질 날은 그 언제일까

 

 

글/ 이태곤 기자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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