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걸음이 만난사람] "꺼지지 않는 촛불로 당당히 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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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걸음이 만난 사람]
"꺼지지 않는 촛불로 당당히 서겠습니다."
- 양정신 목사 & 이영호 영화인 -
우리나라 최초의 시각장애우 여목사로 기독교시에 이름을 남긴 양정신 목사, 식민지 시대와 육이오 전쟁을 겪으면서 시각장애우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이중의 아픔을 극복하고 용기 있는 삶을 개척해온 양정신 목사의 칠십육년 인생을 역시 시각장애우로서 연극영화인과 라디오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는 이영호 씨가 만나서 함께 되돌아보았다.
여섯살 때 고열로 시력을 잃어
이영호 ; 저도 시력을 잃은 사람입니다.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병 때문에 완전히 시력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어두운 데서 못보고 지금도 계속 눈이 나빠지고 있습니다.
양정신 ; 저는 여섯 살 때 시력을 잃었어요. 집안이 어려울때라 열이 많이 오르고 아픈데도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 있다가 결국에는 그해 봄에 진달래 분홍빛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이영호 씨도 거기서 더 나빠지지 않으면 좋을 텐데요.
이영호 ; 그런데 계속 나빠질 수밖에 없는 병이에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완전히 못보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다 저도 이제 나이가 마흔다섯쯤 됐거든요. 그래서 점점 더 빨리 나빠지는 것 같습니다. 아직 목사님이 사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어린아이인데(웃음) 목사님 연세가 벌써 일흔여섯이신데 아직도 목회는 계속 하고 계신가요?
양정신 ; 제가 90년도에 목회에서 은퇴를 했습니다. 은퇴했으니까 지금은 놀고 있는 것인데 고맙게도 아직은 여기저기서 불러줘서 강연도 하고 제가 개척한 삼일교회가 멀지 않아서 교인들이 자주 찾아와 줍니다.
이영호 ; 건강은 어떠신가요? 뵙기에는 아직 정정하신데요.
양정신 ; 얼마 전에 디스크를 앓아서 수술 받고, 당뇨가 있어서 인슐린 주사도 계속 맞고 있습니다. 수술한 다음에도 허리가 아파서 잘 걷지를 못하니까 그냥 집에서 러닝머신 가지고 운동을 합니다.
이영호 ; 목사님 지금 말씀하시는 데 러닝머신 이라는 단어를 말씀하시는 것이 발음이 참 좋으십니다(웃음) 지금목사님 정도의 연배에 계신 분들은 배우지 못해서 영어를 잘 못하시잖아요.
양정신 ; 제가 미국에서 6년 정도 유학을 했습니다. 이제는 단어도 많이 잊어서 잘 생각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이영호 ; 저도 뉴욕에서 한 8년 공부를 했습니다. 그때는 눈이 아직 괜찮아서 영화를 만드는 영화감독이 되려고 대학과 대학원을 거기서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눈이 많이 나빠져서 감독이 되기는 힘들어졌고 요새는 EBS 교육방송에서 장애우를 대상으로 하는 "사랑의 한 가족"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잉크병을 던져서 떠나게 된 미국 유학
이영호 ; 목사님 아까 러닝머신 발음하신 것처럼(웃음) 미국유학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미국 가신 것이 언제인가요?
양정신 ; 제가 53년부터 미국에 공부하러 가고 싶어서 애를 쓰다가 56년도 2월에 겨우 한국을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영호 ; 56년도에 미국유학을 가셨으면 신여성이셨어요. 여성은 교육받기도 힘든 시절에 유학을 가셨으면 어려움도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양정신 ; 그때 여성이고 맹인인 사람이 유학 가는 일이 거의 없을 때였죠. 그래서 떠나게 되기까지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답니다. 유학 갈 수 있는 시험을 그때는 문교부에서 영어시험을 보고 외무부에서 또 보고 미대사관에서 다시 봐야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교부는 아무 말 없이 받아줬는데 외무부에서 시험을 안 받아주겠다는 것이었어요. 당신 같은 사람이 미국에 가면 한국에는 맹인이 얼마나 많아서 여기까지 왔느냐고 할 것이기 때문에 망신스럽다는 것이었죠.
이영호 ; 말도 안되는 억지를 썼군요. 그래서 목사님 뭐라고 하셨나요?
양정신 ; 온 세계 맹인이 지금 미국에 와서 공부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갔다고 해서 한국이 맹인 많은 나라로 유명해져서 창피스러운 일이라는 것은 오해다. 그냥 시험만 받아줘라 외무부에서는 할 일이 그것밖에 더 있느냐고 항의를 했죠. 만약에 시험치고 미국에서 비자내주면 가고 안내주며 못가는 것인데 해보지도 않고 그럴 수 있느냐고 설득 시키려고 하는데 안 들어주는 것이에요. 너무 화가 났어요 그래서 앉아서 얘기하던 책상을 더듬어 보니까 잉크병이 잡히길래 그것을 냅다 던졌답니다. 그랬더니 앞에 앉아서 이야기하던 사람에게 잉크가 확 튀고 야단이 났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당황해서 왜 그러시냐고 참으시라고 하길래 막 책상을 두드렸어요. 사람 같지 않은 것들 너희 같은 것들이 여기 앉아 있으니까 우리나라가 이꼴이라고 하면서 막 소리를 질렀더니 국장이 나오더라구요.
이영호 ; 잉크병 던져서 미국유학 가시게 된 것이네요(웃음)
양정신 ; 그렇게 됐죠. 결국 잉크 맞은 사람은 들어가 숨고 국장이 나와서 자초지정을 얘기했더니 시험을 받아주더군요.
이영호 ; 그렇게 힘들게 출국하셔서 배타고 두주일 만에 도착하신 곳이 어디였습니까?
양정신 ; 간호학생 두 사람이 동행해 주어서 샌프란시스코에서 내렸습니다. 제가 가는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은 그때까지 기숙사가 없었어요. 그랬는데 학교에서 하숙집을 잡아주어 그곳에서 생활했습니다.
아홉살 장마비에 찾아온 손님
이영호 ; 목사님 여섯 살때 실명하시고 나서 점자같은 것은 어떻게 배우셨습니까?
양정신 ; 그러니까 제가 아홉 살 난 여름에 장마 때였습니다. 비가 막 내리쏟고 있는데 우리 어른들은 다 들판에 나가서 일하고 계시고 혼자서 동생을 업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남자가 막 뛰어들어 왔는데 그 분이 보시더니 얘 너 눈을 못 보는구나 하시면서 참 안됐다. 그러시면서 앉아계셨어요. 계속 비가 그치지를 않아 일하시던 아버지가 돌아오시고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비가 안 그치니까 우리집에서 주무시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주무시면서 얘기를 나누다보니 그분이 평양 맹아학교의 서무선생이었어요.
이영호 ; 정말 대단한 인연이군요. 그 인연이 아니었으면 한참 후에나 교육을 받으실 수 있거나 또는 교육을 못 받으실 수도 있었을 것 아닙니까?
양정신 ;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보내주신 소중한 인연이었지요. 그리고는 그분이 돌아가서 내가 학교에 갈 수 있도록 수속을 해보겠다고 하면서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집은 너무 가난해서 나 하나 기숙사에 두고 공부시킬 형편이 못 됐습니다 그래서 밥값은 학교에서 주기로 하고 수업료만 내고 옷 같은 것은 집에서 해다 입기로 하고 그 해 10월 평양맹아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일본점자와 한국점자 두가지를 두주일만에 다 익혔습니다.
이영호 ; 20년대에 있었던 맹학교였다면 선교사가 세운 곳이었겠군요.
양정신 ; 평양맹아학교도 닥터 홀이라는 선교사가 세운 학교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무엇을 주장했냐 하면 맹인을 따로 맹아학교에서 격리시켜서 공부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통합교육을 주장하셨던 것이죠. 그래서 맹아학교는 기숙사만 하나 세우고 교실은 자기가 세운 정진소학교 안에다 만들었습니다.
이영호 ; 우리는 이제야 통합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데 그 옛날에 벌써 그렇게 깨우친 분들이 있었다니 대단합니다.
양정신 ; 그래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생활교육과 안마 등을 2년 정도 교육한 후 보내고 저같이 나이가 어린 사람은 맹아학교 교실에서 1학년 2학년 교육만 받은 후 3학년부터는 정진학교 학생들 하고 통합으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졸업은 정진학교로 졸업을 하게 되었죠.
일본 의전에서 만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영호 ; 목사님 지금까지 결혼하지 않고 혼자사신 이유가 있습니까? 물론 계속 공부하시느라 시간도 없으셨겠지만 젊어서 누구 좋아하신 분도 있을 텐데 그런 사랑이야기 좀 해주세요.
양정신 ; 있었어요. 일본에 미시마와 의학전문학교에서 공부할 때 잠깐 좋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영호 ; 목사님이 혼자 좋아하신 건가요. 아니며 두 분다 좋아하신 거였나요?
양정신 ; 사랑이 혼자서 좋아해서 이루어질 수 있나. 둘이 서로 좋아한 것이었죠(웃음) 그때 그 분이 한 학교에 다니면서 날 많이 도와줬어요. 그렇게 도와주다 보니 미운정 고운정 다 들게 되었죠.
이영호 ; 일본 남성이 조선에서 온 맹인 여성과 함께 다녔다면 주위 학생들로부터 말도 많이 들었을 것 같은데요?
양정신 ; 그렇죠. 다른 보이는 학생들이 그 분을 많이 놀렸어요. 왜 안 보이는 사람하고 보는 사람하고 같이 다니느냐, 어디 좋아할 사람이 없어서 조선에서 온 매쿠라(맹인)를 좋아하느냐고 아무리 놀려도 그분은 놀리려면 놀려라 하는 식이었어요. 제가 미안해하면 너는 네 생각보다는 주변의 생각을 너무 많이 한다고 하면서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맨날 도와줄 것은 없느냐 필요한 것 없느냐 하면서 교실에서도 꼭 내 곁에 와서 앉았어요.
이영호 ; 요즘도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사랑하는 것이 어려운데 참 대단한 분이었네요.
양정신 ; 그만큼 좋아했어요. 제가 못 보는 것을 어떻게 해주지도 못하고 또 고쳐줄 가능성도 없으니까 참 마음 아파했습니다. 달이 밝게 떠오를 때면 나 혼자 봐서 뭐하냐면서 피할 정도였어요. 그러다가 구혼을 했습니다. 하지만 난 결혼은 안하겠다고 했어요.
이영호 ; 그렇게 사랑하셨는데 왜 결혼을 안 하시려고 하셨습니까?
양정신 ; 결혼은 원래 안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혼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는 속국이었고 나라도 없고 우리아버지도 일본인하고 결혼한다고 하면 가만히 계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게 되면 그 아이를 잘 보살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영호 ; 굉장히 강한 성격이신가봐요. 요즘 제가 만나는 시각장애우 여성들 중에는 결혼하면 좀 편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결혼하려고 하는 사람이 많던데요. 눈이 아주 좋은 사람하고 결혼해서 자동차도 얻어 타고 혼자 다니기 힘드니까 그런 생각까지 하거든요. 그런데 목사님 그 당시에 시각장애우가 의전에 입학하는 것이 가능했었나요? 그곳에서는 무엇을 전공하셨습니까?
양정신 ; 소아과를 전공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받아주지 않았죠. 처음에는 청강생으로 듣기 시작했는데 학교에서 어떻게 생각했는지 마지막에 정식으로 받아줬습니다. 사실 그때 우리 애인의 이름이 심보인데 심보가 아니면 어찌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이가 워낙 손과 발이 되어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해낼 수 있었습니다.
이영호 ; 지금 그 분은 일본에서 의사로 일하고 계시겠네요?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지 않으세요?
양정신 ; 다 늙어가지고 뭐 하겠습니까
육체를 고치는 의사에서 영혼을 인도하는 의사로
이영호 ; 일본 대학에서 소아과를 공부하셨으면 한국에 돌아오셔서 의사로서 일도 하셨나요?
양정신 ; 그곳에서 인턴을 못하고 왔기 때문에 평양에 있는 도립병원에서 인턴생활을 했습니다. 문진하고 청진을 주로 하고 사진이 필요할 경우에는 옆에 의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황해도 사리원에 자혜의원이라는 조그만 병원을 한 1년 반 정도 운영하다가 소련군들이 자꾸 사리원으로 무리를 지어서 올라오는 것을 보고 폐업하고 이남으로 넘어왔습니다. 조금 남은 돈으로 남쪽에서 다시 병원을 차리겠다고 생각했는데 사리원에서 벌었던 돈을 모두 사기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영호 ; 여자 분 혼자이신데다가 보이지도 않는 분이라고 마음놓고 사기를 쳤군요.
양정신 ; 더구나 교회 장로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었어요.(웃음) 제가 어리석은 것이 그때까지도 목사 장로 그러면 우리 아버지보다 더 믿었어요. 그래서 그때 돈으로 삼만오천원인가 하는 돈을 믿고 다 주었습니다. 결국에는 한푼도 되돌려 받지 못했습니다.
이영호 ; 그래도 참 용감하셨어요. 혼자 몸으로 남쪽에 오셔서 혼자 다니시고 또 그런 큰일을 겪으시고도 강하게 견디신 것을 보면.
양정신 ; 막막했습니다. 돈을 다 잃고 나니 병원을 하기 힘들게 되었고 생각해보니까 보지도 못하는 내가 남의 생명을 오래 다루다 일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 일을 나에게 맡기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가보다 육체적인 의사를 하는 것보다 영적인 의사를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영호 ; 그러니까 여러 가지 일을 하신 후에 목회를 하시게 된 것이군요. 그렇다면 신학대학을 가시게 된 동기가 그것이었나요?
양정신 ; 그렇죠. 51년도에 부산으로 피나가서 한신대를 졸업했습니다.
이영호 ; 목사로 활동하시기 시작한 77년 이전에는 어떻게 생활을 하셨나요?
양정신 ; 전국적으로 부흥회도 다니고 성북교회에 장로로 있으면서 신학대학에 강의를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74년도 9월에 기독교 장로회 총회에서 여자목사 제도가 처음 만들어 졌습니다.
이영호 ; 그래서 목사가 될 수 있으셨군요. 맹아학교도 운영하셨고 의대에서 공부도 하시고, 미국에서는 교육학을 공부하셨는데 결국 가장 마지막에 목회의 길을 선택하시게 된 것이네요. 고민이 많으셨겠습니다.
양정신 ; 굉장히 주저했습니다. 주위의 권유를 받고 밤새워 며칠을 기도하다가 갑자기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사라는 백세가 가까워서 아이를 낳고 키웠는데 너는 여성으로서 세상에 와서 무엇을 했느냐는 물음이 들렸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의 아이, 영적 아이라도 낳아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다가 목사 교시를 시작했습니다. 기독교 장로회에서는 교회가 초빙을 해야 목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자고 맹인이고 나이도 많은 저를 초빙해 줄 것 같지 않아 77년도 4월에 삼일교회를 개척하고 제가 개척한 곳에서 초빙을 받는 형식으로 목사가 됐습니다. 기독교 장로회에 여목사로는 1호가 된 것이죠.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가 필요
이영호 ; 여성으로 시각장우로 살아오신 경험에 비추어 요즘의 젊은 여성장애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양정신 ; 우리 장애우들 가운데 비장애우들이 먼저 자기 안에 다가와서 도와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나는 그런 생각은 찬성할 수 없습니다. 장애우들보다는 아무래도 비장애우들이 더 많고. 내가 살아온 경험에 의하면 내 자신이 뚫고 들어가야지 비장애우들이 내 가까이에 와서 나를 도와주기를 바라면 누가 그걸 하겠어요.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 장애우들은 소수이니까 소수가 다수를 뚫고 들어가서 난 이것이 필요하다. 당신이 조금만 도와 달라 그렇게 부탁한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내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영호 ;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가장 절실하게 느끼신 것이겠죠. 그런 마음가짐으로 여태까지 살아오셨기 때문에 오늘 목사님의 이런 당당한 모습을 뵐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정신 ; 장애우들이 살아가려면 좀 뻔뻔하다 할 정도로 비워도 있어야 하고 또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영호 ; 저는 오늘 이런 자리가 마련되어 목사님을 뵙게 된 것이 정말 기쁩니다. 주말에 시간나는대로 목사님 말씀 들려주고 싶은 친구들하고 함께 찾아뵙고 싶습니다.
양정신 ; 자주 와서 친구해주면 나는 좋죠(웃음) 또 놀러오세요.
이영호 ; 오랜 시간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목사님
정리/ 김상연 기자
사진/ 이정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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