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내 인생은 한으로 가득 차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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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한으로 가득 차 있어요
- 장애우 노인 최명실 -
올해 예순 네살인 최명실 할머니는 지금 서울 시흥동에 있는 연립주택 단칸 지하셋방에서 혼자 산다. 장애로 인해 몸이 많이 불편한 할머니는 설상가상으로 생활의 곤란까지 겪고 있다. 그래서 이제 할머니에게는 희망이 없어 보인다. 그러면 무엇이 할머니를 이토록 비참한 처지로 몰아 넣었을까? 장애를 가졌지만 할머니는 그동안 일제 강점 시기와 민족 최대 비극인 6.25를 꿋꿋이 헤쳐 나왔다. 그런 할머니가 노년에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낳은 유일한 혈육인 딸 때문에 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 누가 봐도 폐륜 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딸의 박해로 인한 피맺힌 사연, 쉽게 공개할 수 없는 내용을 털어놓은 할머니의 사는 얘기를 들어본다.
최명실 할머니가 장애를 가지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사십칠년전, 평양 정의여고에 이학년에 다닐 때이다. 육상선수였던 그녀는 높이뛰기 연습을 하다가 착지를 잘못해 엉덩이뼈를 다치게 되었다. 이게 나중에는 결핵성 관절염으로 발전했고, 그 후 할머니는 오른쪽 다리를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심각한 장애를 가진 채 살게 되었다.
당시 비교적 넉넉한 재산을 가지고 있던 그녀 부모는 딸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딸을 의사로 성공시키기 위해 서울로 이주해 경성여전의 의예과로 그녀를 입학시켰다. 아마 이 의과대만 제대로 다녔어도 오늘날의 불행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장애로 인한 후유증을 앓아 학업을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일년을 쉰 후 그녀가 다시 들어간 곳은 남산 예술학교 성악과였다.
이때부터 그녀에겐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어느 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그녀는 깜짝 놀라야 했다. 아침만 해도 멀쩡했던 집이 화재로 인해 잿더미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집이 잿더미로 변했다는 것은 전 재산이 날라 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들이 없어 부모님의 유일한 자식이었던 그녀는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녀는 학교를 그만두고 일자리를 찾아 헤맨 끝에 주둔군으로 와있던 미군정청재무부 이재국 손해보험과 고문관실에 영문타이피스트로 취직했다. 여기서 그녀는 장차 그녀가 겪게 될 혹독한 시련의 계기가 되는 통역관 이아무개씨를 만나게 된다. 말하자면 결혼을 전제로 한 남자를 사귀게 된 것이다.
그랬는데 결국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자의 부모가 그녀의 장애를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그녀는 "다시는 결혼은 생각하지 않고 수녀가 돼 사회에 봉사하고 살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이아무개씨와의 악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녀를 깊은 수렁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일천구백오십년 육이오가 발발한 그 해,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 서울에 남아 있던 그녀에게 어느 날 이아무개씨의 어머니가 찾아왔다. 이씨 어머니는 그녀를 붙잡고"우리 애가 인민군에게 잡혀갔어요. 나를 야속하게 생각하는 것은 알지만 죽은 사람 구해주는 셈치고 도와주세요"라고 사정했다. 그녀는 "제가 무슨 힘이 있어야죠. 불안에 떨고 있기는 저도 마찬가지인걸요"라고 대답했다.
"그냥 놔두면 인민군이 그 애를 죽이고 말텐데. 색씨, 어떻게 해볼 길이 없을까?"
"무슨 수가 있어야 어떻게 해보죠?"
"이런 부탁을 하면 나를 욕하겠지만...색씨가 눈딱감고 연극을 좀 해줬으면 하는데..."
"연극이라뇨?"
"육이오가 나기 전에 색씨가 빨갱이 일을 해서 여러 번 경찰성에 잡혀갔는데 우리 애가 구해준 걸로 꾸며대면 어떨까? 마침 우리 애가 경찰전문학교 교관도 한 경력이 있으니 그걸 팔아 그럴듯하게 꾸며보면 될 것 같은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눈앞이 아찔했다. 너무나 엄청난 연극이었다. 그녀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군정청 통역관으로 근무했던 이아무개씨이고 보면 죽음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눈앞에 이씨의 비참한 모습이 어른거리자 그녀는 한때 사랑했던 남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다.
그녀는 다음날 이씨가 잡혀간 궁정동의 인민위원장을 찾아가 진정서를 제출하고 이씨의 석방을 간절하게 탄원했다. 그녀의 연극이 주효했던지 처음엔 긴가 민가 믿지 않던 인민위원장은 그녀가 눈물로 애원하자 "동무의 말을 듣고 보니 이씨가 우리 동지였구먼, 내가 힘을 써볼 테니 염려 마시오"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이아무개씨는 죽음 일보직전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이씨를 살려낸 후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인민군을 위한 음악가동맹에 가입해서 활동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었던 것이다. 몇 달 후 그녀는 이 경력과 이씨를 살리기 위해 빨갱이 행세를 한게 빌미가 돼 감옥에 가게된다.
구일팔 서울수복이 이루어지고 나서 보름 후, 그녀는 한 형사에게 붙잡혀 경찰서로 끌려갔다. 경찰서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그녀는 음악가동맹에 가입해 활동한 것은 벌을 받을 만 하지만 사랑하는 남자를 살리기 위해 빨갱이 행세를 한 것은 정상이 참작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그녀의 오산이었다. 형사가 내민 조서에는 그녀가 "빨갱이의 앞잡이가 되어 갖은 노략질을 하고 유명한 애국지사들을 밀고해 사망케 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녀는 조서 내용을 완강하게 부인했지만 소용없었다. 누군가가 그녀를 매장하기 위해 일을 꾸몄기 때문이었다.
누구일까? 그녀가 없으면 이익을 볼 사람은?
골똘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는 그녀 눈앞에 그녀를 다그치고 있는 형사 얼굴이 크게 다가왔다. 분명 안면이 있는 얼굴이었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아 맞아! 그 사람이야.
다음순간 그녀는 무릎을 쳤다. 그 형사는 다름 아닌 자신이 구해준 이아무개씨 집 아랫방에 세들어 살던 사람이었다. 언젠가 궁정동 이씨 집에 놀러갔을 때 그녀는 그 형사와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을 꾸민 사람은 바로 이아무개씨 어머니! 그래 그럴지도 몰라. 이 기회에 나를 매장하지 않으면 병신 며느리를 맞아 들여야 하니까 이씨 어머니가 형사에게 부탁해 일을 꾸몄구나, 그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는 충격에 실신할 수밖에 없었다.
전시하라 즉심에 넘겨진 그녀는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 칠년형으로 감형 받는다. 이때가 그녀 나이 스물일곱살 때였다. 그런데 그녀의 감옥생활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충격으로 인한 중한병을 앓게된 그녀는 복역한지 일년 육개월만에 형집행정지로 가석방 되었는데, 그 후 포천으로 가 고아들을 돌보는 사회사업을 하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부모님도 이미 돌아가시고 난 후라 세상에 의지할 곳이 없어진 그녀는 다시 감옥으로 돌아간다.
그랬는데, 감옥에서 절망에 몸부림치고 있던 그녀에게 난데없는 면회소동이 벌어졌다. 각계각층에서 편지를 보내오고 사람들이 그녀를 만나기 위해 면회를 온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면회 소동은 그녀가 감옥에 들어간 다음 날 "다시 감옥으로 돌아간 비련의 여인"이라는 제목 하에 그녀 이야기가 동아일보에 크게 보도가 됐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이 신문기사가 계기가 돼 그녀는 또 다시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잔여 형기 육개월을 남겨두고 지병인 폐와 심장병이 재발해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감옥에서 나온 그녀는 신문기사가 계기가 돼 알게 된 부산의 고아원 원장으로부터 제의를 받고 고아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휴양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남자가 그녀를 찾아왔다.
"저는 신문기사를 보고 선생님께서 자주 편지를 보냈던 성아무개입니다"
"아, 네. 해군에 계신다던 그 분이군요"
"기억해 주셨군요. 한 달 전에 제대를 하고, 이제 막 시골에서 올라오는 길입니다"
"저를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일부러 저를 찾아오신 거예요?"
"네, 선생님을 뵙고 싶어서 일부러 왔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 오셨는지 이유가 궁금하군요?"
"명실씨,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뭐라구요!"
그녀는 남자의 느닷없는 구혼에 깜짝 놀랐다. 남자는 그녀가 놀라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구구절절이 자신의 처지를 설명했다. 자기는 삼대 독자로서 외로운 처지고 고생도 많이 했다. 명실 씨도 피차 외롭기는 마찬가지 일테니 나를 도와 새로운 출발을 하자는 것이 남자의 제의였다.
"말은 고맙지만 저는 결혼할 수 없어요" 그녀는 남자의 구혼을 거절했다. 그러자 남자는 "그럼 결혼 얘기는 없었던 것으로 하고 공기 맑고 물 좋은 우리 집으로 가서 명실 씨 몸이 완쾌될 때까지 휴양이라도 하십시요"라고 간청했다. 그녀는 남자의 휴양 제의에는 선뜻 마음이 움직였다. 고아원에서 편히 쉬는 것은 일이 많아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며칠 후 남자가 일러준 대로 전남 여수에서 배를 타고 다섯시간이나 걸리는 소리도로 갔다. 소리도는 외딴 섬이었지만 늘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녀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녀 나이 서른일곱살 때의 일이었다.
그런데 명목은 휴양이었지만 그녀의 소리도행은 사실상 성아무개씨와의 결혼을 의미했다. 묵는 곳도 성아무개씨 집이었고 성아무개씨 어머니도 그녀를 며느리로 생각하는 듯 했다. 소리도에서 그녀는 하루 종일 바닷가를 서성거리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성아무개씨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명실 씨, 저는 명실 씨를 사랑합니다. 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이성간에 어떻게 형제처럼 지낼 수 있습니까? 전 지금 일자리도 없고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명실 씨를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당초 약속하고 틀리잖아요. 그러니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명실 씨 제 마음을 이젠 어쩔 수 없습니다. 사랑 하는 게 죄가 아니라면 절 위해 명실 씨가 희생해 주십시오"
주변이 너무 조용해서였을까, 아니면 불길 같은 성아무개씨의 정열을 감당하기에는 그녀가 너무 약해서 일까, 그녀는 성아무개씨의 강한 포옹에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성아무개씨의 아이를 임신한 그녀는 이제 꼼짝없이 붙잡힌 몸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성씨 집안의 며느리로서 집안 살림도 거들어야 했다. 그녀의 시집은 너무나 가난했기에 들일도 나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녀는 우연히 남편과 시어머니의 대화를 듣게 된다.
"저 여자와 결혼만 하면 네가 출세할 수 있다더니 출세는커녕 저 여자가 들어와서 밥만 축내고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 내가 보기에는 몸뚱이 하나뿐인 것 같은데 서울에 감춰둔 재산이라도 있단 말이냐?"
"그럼 데리고 왔을 때 돌려보내시지, 결혼하라고 강요한 게 누군데 이제 와서 그러시는 거예요"
"결혼하면 저년이 뭔가 내 놀 줄 알았지. 네 말을 믿은 내가 잘못이지...."
"지금 와서 역정을 내면 뭐해요. 엄마보다 내가 더 속이 탄단 말이에요"
"아무튼 난 모른다. 이제 더 이상 병신 꼴은 못 보니 네가 알아서해!"
그녀는 다시 한번 충격에 몸을 떨어야 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이상 그녀는 운명을 받아 들여야 했다.
얼마 후 만삭이 된 그녀를 놔두고 남편 성아무개씨는 훌쩍 집을 떠났다. 시어머니에게 남편의 행방을 물었지만 시어머니는 "이게 모두 네년 탓이야. 잘 살아 보겠다고 결혼한 것이 순 알거지를 받아 들였으니 남편이 떠난 거지"하며 오히려 그녀를 책망했다. 남편이 집에 없자 시어머니는 책망에만 그치지 않고 노골적으로 그녀를 학대하기 시작했다. 욕설을 퍼붓는 것은 물론 매질까지 해댔다.
그 런 가운데서 그녀는 아기를 낳았다. 딸이었다. 그녀가 딸을 낳자 시어머니는 딸을 낳은 것을 빌미로 그녀를 학대하기 시작했다. 삼대독자에게서 딸을 낳았으니 며느리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시어머니가 돌봐주지 않아 딸을 낳고 사흘만에 꽁꽁 얼어붙은 냇가에 얼음을 깨고 기저귀를 빨아야 했다. 고통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딸을 낳은 지 일주일만에 딸을 시어머니에게 빼앗기고 쫓겨나야 했다. 그녀는 딸을 돌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시어머니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어린 생명을 떼 놓고 섬을 떠날 수 없었던 그녀는 마을 이장과 파출소를 찾아가 사정했다. 결국 마을 이장의 도움으로 겨우 딸을 돌려 받은 그녀는 한 많은 소리도를 떠나 서울 로 왔다.
서울에 온 그녀는 외가 친척집을 전전한다. 그러다가 한 사회복지 단체의 상담원으로 일하게 되면서 그녀는 생활의 안전을 찾게 된다. 그 후 그녀는 서울 시흥동에 정착해 여성단체에서 일하기도 하고, 전력을 희석시키기 위해 반공연맹 간부로도 일하면서 오로지 딸을 위한 삶을 살게 된다.
나이가 들어 사회단체 일을 하지 못하게 되고서는 보따리 장사로 나서기도 하고, 의과대에 다녔던 경험을 살려 몸이 아파도 병원비 때문에 병원에 가지 못하는 주민들에게 주사를 놔주고 약간의 수고비를 받아먹고 살기도 하면서 윤택하진 못했지만 오로지 딸을 공부시키느라고 전 생애를 바쳤다.
그랬는데 유일한 혈육이고 그녀의 전부인 딸이 그녀를 배신한 것이다. 이제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딸은 안양 모 여고를 졸업하고 소질을 인정받아 밤무대 가수로 일하게 됐다. 딸이 가수로 활동하며 꽤 많은 돈을 벌어오자 그녀는 집에서 살림만 했다. 이제 그녀의 고생은 끝난 것 같았다. 주위에서도 "딸의 효성이 지극하다"며 그녀를 부러워했다. 그랬던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 사람들이 "엄마밖에 모르던 애가 왜 그렇게 변했냐?"고 한탄하는 지경이 됐다.
딸은 이제 와서 최 할머니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가 학교도 안 보내고, 식모 살이 시키고, 몸 팔아 들이라고 해서 몸 팔아 엄마를 먹여 살렸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엄마는 정신이상자니까 찾아가도 대문에도 들이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할머니에 따르면 딸이 이렇게 폐륜아가 된 것은 "딸에게 남자가 생겨서이다" 지금으로부터 십 삼년 전 딸은 선배라는 한 남자를, 그것도 유부남을 사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따를 노골적으로 최 할머니를 구박하기 시작했다.
딸의 구박은 처음에는 트집으로 시작됐다. 어느 날 딸은 심각한 표정으로 "엄마가 내 돈 빼돌리는 거 아니냐?"고 물어왔다. 최 할머니는 "내가 서방이 있냐, 다른 자식이 있냐, 나는 너 하나밖에 없는데 내가 왜 돈을 빼돌리느냐?"라고 부인했다. 딸은 " 엄마가 장사 밑천 하려고 돈을 빼돌린다는 소리를 들었다"며 우겼다. 최 할머니는 "누가 그러드냐?" 물었다. 딸은 "아무개가 그러드라"며 사귀고 있는 남자 이름을 댔다. 최 할머니는 "나 그런 적 없다"며 부인했다. 그랬는데 모녀간에 싸움이 벌어져 결국 따른 짐을 싸서 집을 나갔다. 집을 나간 딸은 남자와 동거를 하는 듯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으로 진출해 가수로 일하면서, 일본 남자를 만나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최 할머니는 들을 수 있었다.
그 소식을 듣게 되자 최 할머니는 어느 날 딸을 불러다 놓고 "네가 아무리 좋지 않은 길을 가더라도 한 남자하고 살아야 할 것 아니냐, 이제 뭐냐 일본 놈 애까지 낳고, 제발 그러지 말아라"라고 책망을 했다. 그러자 딸은"내 인생 내가 사는 건데, 엄마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간섭을 하느냐"고 오히려 대들었다. 최 할머니는 결국 딸을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혼자 살면서 최 할머니는 딸이 보내주는 월 삼십만원으로 생활을 했다. 부족하긴 했지만 그래도 집이 있어서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당시 최 할머니가 살고 있던 연립주택의 명의는 딸 이름으로 되어 있었지만 사실상 최 할머니가 고생 끝에 겨우 마련한 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을 나간 딸이 최 할머니를 찾아왔다. 딸은 대뜸 "엄마 나 좀 도와주세요"라고 말을 꺼냈다. 최 할머니는 "뭘 도와주니?"라고 물었다. 딸의 부탁은 혼자 살면서 아이를 키우기가 힘이 드니까 다시 합치자는 것이었다. 최 할머니는 "난 혼자 사는 게 좋으니까 너하고 합치지 않겠다"고 딸의 부탁을 거절했다. 그러자 딸은 "자기 속으로 난 자식인데, 자식이 좀 도와달라는데 말을 안 듣는 부모가 어딨느냐"며 울먹였다. 말을 듣고 보니 최 할머니는 딸이 불쌍했다. 그래서 "합치는 건 좋다. 하지만 한가지 조건이 있다. 합치돼 나는 물질적으로 바라진 않는다. 대신 마음 하나만이라도 편하게 해달라"고 말하며 딸의 부탁을 받아 들였다. 이렇게 해서 최 할머니는 다시 딸과 같이 살게됐다. 아이를 최 할머니에게 맡긴 딸은 돈을 벌러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렇게 이년이 지나고 난 어느 날 딸은 국제전화를 걸어와 "아이가 보고 싶으니 일본으로 건너와 달라"고 최 할머니에게 부탁했다. 최 할머니는 곧바로 일본에 갔다.
일본에서 최 할머니는 사실상 파출부 노릇을 하며 한동안을 지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최 할머니가 밥과 빨래를 제대로 못해주자 딸은 대놓고 최 할머니를 구박했다. 최 할머니는 딸의 구박을 견디지 못해 다시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최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오자 얼마 후 딸도 일본에서 나왔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환갑잔치를 하자"고 최 할머니를 졸라댔다. 최 할머니는 "환갑잔치를 하려면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데 그러냐, 난 싫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딸은"엄마가 삼십여년 여기 살면서 뿌린 돈이 얼마나 많으냐, 그걸 받아먹어야 할 게 아니냐"고 채근했다. 딸이 환갑잔치를 하려는게 부주돈을 받아먹기 위한 것임을 안 최 할머니는 생전 처음 딸에게 욕을 퍼부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모녀 관계는 끝장이 났다. 최 할머니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딸은 어느 날 최 할머니가 지병으로 몸져눕게 되자 수발을 들지 않고 "내 집에서 나가라!"며 최 할머니를 내쫓았다. 졸지에 딸에게 얻어맞은 최 할머니는 죽으려고 쥐약을 먹었다. 최 할머니는 병원에서 간신히 살아났는데, 그 후 최 할머니에게는 더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졌다.
딸이 최 할머니에게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집을 팔아버리고 일본으로 가버린 것이다. 최 할머니는 집을 딸 명의로 해 논 것을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졸지에 길에 나앉게 된 최 할머니는 그래도 살기 위해 가평 꽃동네를 찾아갔다. 하지만 호적에 부양의무자로 딸이 있기 때문에 입소를 거부당했다.
오갈 데 없어진 최 할머니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친 것은 최 할머니 친구들이었다. 친구들이 "그래도 사람은 살아야 할 거 아니냐"며 돈을 모아줘 지금 살고 있는 연립 지하를 얻었다.
지금 최 할머니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겨우 삶을 지탱하고 있다. 최 할머니에게 남은 소망이 있다면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장사라도 하면서 딸에게 보란듯이 살고 싶다는 것이다.
"내가 장애를 가졌고, 가진 것이 없으니까 하나 뿐인 자식이 나를 무시한 거죠. 이게 한이 되요. 한평생 장애를 가졌지만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사연을 털어놓은 최 할머니는 말미에 회한에 찬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태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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