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장애우부부 김대근 조헌숙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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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누구나 하는 고생이니까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내외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그들이 가는 곳은 성남시 단대동에 있는 어느 주택 지하실이다. 햇볕도 들지 않는 좁고 어두침침한 공간에서 부부는 하루종일 납 연기를 들이마시며 머리핀을 조립한다. 힘들고 위험한 그 작업.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김대근 조헌숙 부부가 여전히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도 밝은 내일이 찾아 올까?
올해 서른다섯살인 김대근 씨, 그리고 서른일곱살인 조헌숙씨, 이들 부부는 똑같이 소아마비 장애를 가지고 있다. 이들이 결혼한 것은 올해로 십 일년을 헤아린다. 결혼에 이르기까지 장애우로서 누군들 사연이 없을까마는 이들 부부도 나름대로 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다.
먼저 남편인 김대근 씨의 성장 과정을 들어보자.
김대근 씨는 자신의 부모가 누군지 모른다. 이 말은 그가 부모에 의해 버려졌다는 말이다. 그는 핏덩이 상태로 거리에 버려져 부산시내에 있는 한 장애우 시설에서 자라야 했다. 그 곳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청소년기를 보낸 다음 그는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그의 나이 이십대 초반, 그때부터 그는 여러 곳의 공장을 전전했다. 처음 그가 들어간 곳은 벽시계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그 공세서 얼마 안 있다 나온 그는 조각공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다시 그 곳에서 나와 봉제공장에 들어갔다. 이런 식으로 그는 십여 곳의 공장을 전전했다.
처음 그가 들어간 곳은 벽시계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그 곳에서 얼마 안 있다 나온 그는 조각공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다시 그 곳에서 나와 봉제공장에 들어갔다. 이런 식으로 그는 십여 곳의 공장을 전전했다.
그가 한 공장에 오래 머물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차별대우 때문이다. 가족이 없고 거기다 장애우다 보니, 그는 대우에서 많은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남들과 똑같이 일하고, 오히려 비장애우 공원보다 더 열심히 일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얇디 얇은 월급봉투 뿐이었다.
당시만 해도 그에겐 차별에 저항 할 만한 힘이 없었다. 그래서 공장을 옮겨 다녔다. 좀 더 많은 월급을 쫒아 이리저리 고단한 몸을 이끌고 다녔지만 결국 그는 바라던 돈을 모으는데 실패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성남시에 정착해 자포자기 상태에서 악세사리 일을 시작했다. 그러기 전 그가 잠시 몸담았던 공장이 바로 서울 구파발에 있는 실크인쇄 공장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지금의 아내 조헌숙씨를 만났다. 그때가 팔십삼년이었다.
조헌숙 씨는 어떻게 고향인 거제도를 떠나 멀고 먼 타향인 서울 구파발까지 오게 됐나? 조헌숙씨 역시 답답한 삶을 살았다. 집이 시골이고 부모들이 내놓기를 꺼리다보니 그녀는 달리 하는 일 없이 성인이 되어서까지 밥이나 짓고 조카나 보며 지냈다. 그러던 중 그녀가 "내가 이렇게 살아선 안되겠다"라는 생각을 키울 즈음 마침 우연히 듣게 된 라디오에서 앞서 말한 공장에서 사람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두 손만 쓸 수 있으면 된다는 말에 솔깃해진 그녀는 서울에 전화를 했고, 공장에서 올라오라고 해서 그녀는 난생 처음 집을 떠나 서울에 발을 딛게 되었다.
화장품통 인쇄를 하는 그 공장에는 장애우가 꽤 많았다. 그런데 유독 그녀의 눈길을 끈 장애우가 바로 김대근 씨였다. 그렇게 된 데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냥 친밀감이 생기고 마음이 끌려서 그녀가 먼저 김대근 씨에게 말을 걸었다. "아마 첫사랑의 감정이 그런 건가 봐요. 그이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웬지 보고 싶고 나도 모르게 안절부절 못하게 되더라구요" 당시를 회상하는 그녀의 말이다.
조헌숙씨가 이처럼 김대근 씨를 좋아하게 된 데는 이런 사랑의 감정뿐만이 아니라 연민의 감정도 작용했다.
"공장 근처에 농원이 있었어요. 그이랑 거기 놀러가서 이야기를 나눌 때가 많았는데, 그때 거기서 그이가 부모 없이 어렵게 산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그이가 참 안됐다,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죠"
몇 차례 둘만의 시간을 가진 후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런데 한 차례 위기가 찾아왔다. 김대근 씨가 공장을 그만두고 성남으로 간 것이다. 조헌숙 씨는 김대근씨가 떠나가자 마음이 아팠다. 그날부터 조헌숙 씨는 김대근 씨가 찾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지냈다. 각도를 바꿔 김대근 씨의 회상을 들어보자.
"공장을 그만두고 나서 혹 가다 한번씩 놀러간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마다 공장 아가씨들이 헌숙이가 아무래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밥도 안 먹고 매일 눈물만 흘린다고, 놀리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집사람을 불러서 물어 보았어요. 너 나 진짜 좋아하냐? 나는 가진게 하나도 없는데 나랑 결혼 하겠느냐? 그랬더니 집사람이 그러겠다고 대답을 했어요. 그렇게 해서 결혼에 이르게 됐죠" 두 사람은 팔십사년 가을 결혼했다. 결혼하고 나서 자리를 잡은 곳은 성남시 단대동이었다. 그곳에서 백오십만원짜리 전세방을 얻고 내외는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때 김대근 씨는 직업이 악세사리 공장공원이었는데 월급이래 봤자 십오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그 작은 돈으로 조헌숙 씨는 빠듯한 살림을 꾸려가느라 신혼의 달콤한 행복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결혼한 지 일년 후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 세종이가 태어났다. 세종이가 태어나자 부부는 기뻐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세 식구가 살 일이 걱정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 시기 조헌숙 씨는 조여 오는 생활고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 되었다. 생활고 외에 그녀를 절망에 빠뜨린 것은 다름아닌 그녀의 장애였다. 살아오면서 장애로 인한 현실적인 어려움을 별로 느끼지 못한 그녀가 세종이를 키우면서 비로소 자신의 장애를 뼛속깊이 인식하게 된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그이는 공장에 가고 없고 나 혼자 세종이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세종이 몸이 불덩이 같아지면서 아이가 금방이라도 자지러질 듯이 울어대는 거예요. 어떻게든 세종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야 했는데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가 세종이를 유모차에 태워 유모차에 끈을 연결해 끌고서 병원까지 갔어요. 병원이 언덕위에 있었거든요. 내가 목발을 짚고 어떻게 유모차를 끌고 올라가겠어요? 하지만 아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깐 다급해져서 간신히 끌고 올라가긴 햇죠 그런데 문제는 의사한테 세종이를 보이고 나서 언덕을 내려오는 길이었어요. 올라갈 때처럼 끈을 매서 끌고 내려왔는데 언덕 중간쯤에서 내가 그만 끈을 놓쳐버린 거예요.
아이가 탄 유모차가 내 손을 떠나 언덕 아래로 멀어져 갔어요. 그 순간 나는 아이가 죽는 줄 알았죠. 정신이 아득해졌어요. 다행히 유모차가 길 옆 나무에 부딪쳐 멈추는 바람에 세종이가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그때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장애를 심하게 비관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의 세종이가 소년으로 자란 지금, 그녀는 여전히 세종이 때문에 자신의 장애를 의식하고 산다. 무엇보다 장애로 인해 세종이에게 엄마 노릇을 제대로 못해준다는 죄의식이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들 내외는 재작년 한 해를 제외하고는 장장 십이년째 악세사리 일을 해오고 있다. 조헌숙 씨가 남편을 도와 같이 일하게 된 지도 벌써 팔년을 헤아린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김대근 씨는 처음 남밑에서 악세사리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팔 년전 하청공장을 직접 차려 독립했는데, 멋모르고 기술자를 두고 시작한 공장은 얼마안가 파산했다. 악세사리 경기가 좋았음에도 기술과 경험 부족으로 반품이 쌓이고, 설상가상으로 수금할 돈도 떼여 이들은 빚마저 진채 거의 빈털터리 상태로 공장을 작파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떼인 돈만해도 상당해요. 모르긴 몰라도 떼인 돈만 제대로 받았으면 전세방 하나는 충분히 얻을 수 있었을 거예요. 차라리 공장을 차리지 말고 월급은 얼마 안됐지만 남 밑에서 그냥 더 있었다면 지금보다는 더 좋아졌을텐데...."
김대근 씨의 아쉬움이다. 공장을 시작하면서 얻은 빚을 갚기 위해 김대근 씨가 다시 공장에 다닐 수밖에 없었을 때, 이들 내외의 곤궁은 절정에 달한다. 다행히 그 무렵 생활보호대상자로 책정되어 쌀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문제는 부식비였다. 돈이 없어 이들 부부는 거의 반찬을 해먹을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영양실조에 시달리게 되고, 그것은 곧바로 조헌숙 씨가 질병을 앓는 것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조헌숙 씨의 투병생활을 언급하려면 먼저 이들 내외가 다시 악세사리 공장을 차렸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내외는 악세사리 공장을 차렸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공장을 차렸다고 하면 거창하게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별게 아니다. "악세사리 공장은 기술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차릴수 있어요. 땜 도구와 작업 할 공간만 있으면 되니까 집에서도 충분히 할 수가 있죠. 우리가 두 번째 악세사리 공장을 시작할 때 든 비용은 팔만원 밖에 되지 않았어요. "이들이 다시 공장을 시작한 것은 삼년전이다. 그때부터는 기술자를 둘 엄두가 안나 전적으로 둘이서만 일했다. 그리고 나서 일년 후 조헌숙 씨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는 그녀의 질병을 "결핵성 늑막염" 이라고 진단했다. 덧붙여진 설명은 제대로 먹지 못하고 힘든 일을 해서 생긴 병이라는 것이었다. 이때 의사에게서 제대로 먹지 못해서 아내가 병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 김대근 씨는 자신의 무능을 절감했다. 그 말은 비수가 돼 김대근 씨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던 것이다.
"너무 가슴이 아파 며칠을 술만 마셨어요. 아내가 병에 걸린 것도 가슴이 아팠지만 내 무능함이 아내를 고생시키고 있다는 것이 더 마음에 걸려서 죽고만 싶었어요" 사람이 세상을 살다보면 어려운 때를 맞게 되는 법이다. 그때 사람들은 그 순간을 넘기면 좋은 날이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어려움을 참아 넘긴다. 그런데 만약 그런 희망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이들 부부의 고난은 계속 이어진다. 악세사리 일의 특성은 절대 혼자서는 작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드시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일을 하는데 조헌숙 씨의 입원으로 김대근 씨에게는 일을 같이할 사람이 없어졌다. 별 수 없이 김대근 씨는 악세사리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놀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해서 그는 다른 일을 시작했다.
그가 한 일은 길거리에서 장사를 하는 노점상이었다. 그는 서울 가락시장 한 켠을 비집고 들어가 채소장사를 시작했다. 이때가 구십삼년 봄이었다. "한 칠개월 장사를 했을 거예요. 자본이 없어 고작 하루에 집에서 육만원을 들고 나가 장사를 했는데 그 돈으로는 배추 수십 포기를 벌여놓으면 그만이었죠. 그런데, 그것도 장사라도 단속반들이 매일 찾아와서 못하게
하는 거예요. 단속시간이 워낙 길다보니 배추가 시들어 버리고, 그러면 손해보고 팔고나서 그게 속상해서 막걸리라도 한 잔 마시면 그 날은 영락없이 공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장사를 하다 보니 돈을 벌기는커녕 오히려 까먹었어요. 장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그래도 전세 일천만원짜리 방에 살았는데 장사를 하면서 이백만원은 족히 까먹었을 거예요."
이런 어려움 중에 그들 내외에게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영구임대 아파트에 들어가게 돼 불안하던 주거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장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그 해 여름에 내외는 임대보증금 일백삼십만원을 내고 분당에 있는 열두평짜리 임대 아파트에 입주했다.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돈에 여유가 생기가 내외는 예전에 살던 단대동 주택 지하실을 보증금 이백만원에 월세 십만원을 주기로 하고 얻어 다시 악세사리 일을 시작했다. 막상 악세사리 공장을 차렸는데 이번에는 일감이 없어 고전해야 했다. 작년의 경우 거래처에서 일을 대준다고 말을 해놓고 일감을 주지 않아 오월부터 시월까지 꼬박 오개월을 놀아야 했다.
" 이 일은 일년 내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철을 타요. 원래 여름엔 비철이라 일이 없죠. 하지만 작년경우는 너무 했어요. 이제 이 일도 좋았던 시절 다 지나가고 쇠락기에 접어드나 봐요. 그렇게 된 건 워낙 이 일을 하는 사람이 많기도 해서지만 인건비가 싸다고 중국으로 일감이 옮겨가고 있다는데 더 큰 원인이 있어요. 그런 상황이니 조만간 우리도 손을 놓아야 될 것 같아요." 김대근 씨가 쓸쓸한 표정으로 말한다. 만약 이런 김대근 씨 예측이 맞아 떨어진다면 내외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사나.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동사무소 영세민 담당자가 나보고 이 일 치우고 직업학교에 들어가라고 권유하더군요. 그런데 지금 이 나이에, 더욱이 열 살된 아들이 있는데, 내가 돈을 벌지 못하면 우리 식구는 누가 먹겨 살리겠어요. 이제는 틀린 것 같아요.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이 일을 하다가 정 못하게 되면 그때까지 다른 일을 찾아 봐야죠"
김대근 씨가 내심 생각하고 있는 다른 일은 어떻게든 운전면허를 따서 운전기사로 취직을 하거나, 아니면 트럭을 사서 장사를 하겠다는 것이다. 김대근 씨의 언급에서 보듯 앞날에 대한 이런저런 걱정이 겹쳐서 내외는 요즘 마음이 편치 못하다. 그런데 내외에게 고민이 한 가지 더 늘었다. 바로 아들 세종이 문제다. 세종이는 며칠 전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내외는 학교에서 전화가 와 비로소 세종이가 학교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종이를 불러놓고 다그치자 세종이는 "아이들이 돈을 가져오라고 자꾸 때려서 무서워 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내외가 돈을 벌려고 집을 비운 사이 돌봐줄 사람이 없는 세종이는 멍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조헌숙씨 말을 들어보자. "평소에 세종이가 맨날 혼자 였다 보니 외로워 심심하다니, 친구가 없다니, 하며 칭얼대긴 했어요. 그렇지만 그렇게 심각한 상태인줄은 몰랐죠. 이번 일로 너무 큰 충격을 받았어요. 우리가 이렇게 건강에 치명적인 납 연기를 마시며 힘들게 밤늦게까지 일 하면서 돈을 벌려고 애쓰는 게 누구 때문인줄 아세요? 다 세종이 때문이예요. 우리는 못 배웠으니까 어떻게든 세종이만은 대학에 보내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는데 세종이가 빗나간다면 이제 우리 희망은 없는 거죠. 아무래도 세종이를 위해 저희가 임대 아파트를 나와야 될 것 같아요" 상심한 표정의 조헌숙 씨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이들 내외에게 정녕 희망은 없는 것일까? 현재로서는 희망을 얘기할 수 없다. 그렇지만 든든하게 생각하는 것은 있다. 바로 김대근 씨는 집에서 하루라도 쉬면 몸살이날 정도로 타고난 일벌레이다. 그런 김대근 씨의 생활력이 살아있는 한 최악의 경우에도 밥은 굶지 않을 것이라는 내외는 자위하고 있다.
"누구나 하는 고생이니까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그리고 이렇게 같이 이리하니까 좋은점도 있어요. 내가 항상 따라다니니까 이이가 딴 짓을 하지 못하잖아요"
조헌숙 씨가 말 끝에 희미하게 웃는다. 그 웃음이 함박웃음으로 바뀔날은 언제쯤이나 올 것인가?
글/이태곤 (함께걸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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