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부름의 전화 김정희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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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자원활동은 장애우 스스로 할 수 있게
지켜봐 주는 것입니다.”
부름의 전화 김정희 대장
사회복지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 44년, "부름의전화"에서 8년. 김정희 대장에게 자원활동은 곧 삶이다. 가난하고 서러운 장애우들의 삶을 함께 짊어지고 나아가는 그의 발걸음에선 보석보다 빛나는 광채가 난다. "생활속에서 이루어지는 자원활동"의 토대를 마련하고, 자원활동을 통한 장애우복지를 한 차원 더 성숙시킨 의미에 대해서 들어보았다.
<우리들의 누이, 우리들의 어머니>
"대장님, 며칠동안 따라다니겠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죠?"
"왜그래? 뭐할려고? 내가 하는 일 뻔 한 건데 취재는 무슨 취재야. 나한테서 무 나올게 있다고?"
취재가 목적임을 밝혔더니 그는 대뜸 핀잔을 주었다. 그냥 따라다니기만 하겠다고 졸랐더니 픽 웃으며 허락했다. 마음대로 하라며....
그는 장애우 단체에서 일하는 실무자들과 아주 친한 사람이다. 너무 친숙하고 편해서 취재대상에서 늘 제외되곤 했다. 장애판에서 일하고 밥먹고 사는 식구로 그저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만 느끼고 있던 존재였다.
그는 그랬다. 단 한마디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 우리들 표정만 보고서 "힘들지? 장애우 단체에서 일하는거 참 힘들어"라며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어느 날 문득 예고도 없이 찾아가면 사무실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어설픈 주방에서 손수 찌개를 끓이고 따뜻한 밥을 지어 먹여주었다. 어떤 때는 그냥 서러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라며 넋두리라도 할라치면 자식 응석 받아주듯 무심히 받아주었던 그다.
정말 그는 그랬다. 늘 마음으로 위로와 격려를 부어주었던 우리들의 대모였다. 때로는 고민을 나누는 친구가 되어 주었고 때로는 지친어깨를 기댈 수 있는 누이가, 어머니가 되어주었다.
취재대상으로서 그를 생각하자니 오히려 어색하고 부담스러웠다. 취재를 하는 기자도 취재를 당하는 당사자도 적당히는 포장할 수 없으니, 친밀함에서 오는 식상함을 어떻게 극복할까가 전의 고민이었다. 그런데 그를 며칠 동안 따라다니고 지켜보면서 그 고민은 쓸데없는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한사람과 친밀하다는 것이 그 사람을 잘 아는 것하고는 차이가 있음도 금새 깨달았다. 그에 대해 안다고 여겼던 것은 선입관에 불과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의 일은 단순히 말로써 설명되는 것이 아니었고, 그의 생활, 아니 그의 삶 전체와 어우러져 있는, "무엇"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장애우단체에서 일하는 우리 실무자들의 고충을 이해해주는 존재로 그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기자는 "그는 보석을 품고 있다"고 표현하고 싶다. 가난하고 서러운 장애우들의 삶을 짊어지고 함께 한걸음한걸음 나아가는 발걸음에서 보석보다 빛나는 광채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의 삶의 전부인, 지금도 그가 손발이 되어 일구어 내고 있는 "자원활동"이라는 텃밭, "부름의전화"를 통해 자원활동의 진정한 의미를 새롭게 일깨워준 그의 노력은 보석보다 귀한 것이었다. 이 토대 위에서 장애우복지는 한 단계 더 앞으로 성큼 나갈 수 있을 것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나 이런 맛으로 일해">
그를 따라나섰던 둘째 날, 이런 일이 있었다. 가끔 부름의 전화를 이용하는 천호동의 한 할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올해 연세가 예순 하나인 그 할아버지는 87년 2월 집앞에서 넘어져 경추5,6번에 손상을 입고 전신마비 장애우가 되어 3년4개월 동안 누워만 지냈다고 한다.
보는 것, 숨쉬는 것, 먹여주며 받아먹는 것만 할 수 있었을 뿐 손발과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 기간 동안은 바깥구경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세대주택 좁은방 두 칸짜리를 전세 얻어 부인과 함께 살고 있는 그 할아버지의 방에 들어갔더니 할아버지가 앉아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고, 방안에는 온갖 재활기구들이 널려져 있었다. 3년4개월이 지난 후 발끝이 바늘로 찌르듯 신경이 살아오는 것을 느끼고 혼자서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혼자서 조금씩 발가락을 움직여보고 감각이 느껴지자 무릎운동을 시작했고, 자신이 늘 누워있는 곳에 고무줄을 단단히 연결하여 잡아당기면서 팔운동을 하였다. 통증이 어찌나 심한지,운동을 하면서도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래도 이렇게 운동을 해서 일어나지 않으면 영영 이 방안에 갇히게 된다고 생각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천천히 하나씩 훈련을 거듭했다. 훈련 3개월만에 그 할아버지는 마침내 의자에 앉을 수 있었고 , 지금은 벽을 짚고 일어서서 40분 이상은 서 있을 수 있다. 마침내 일어선 것이다.
그 할아버진 그렇게 해서 8년만에 자신의 방 창문으로 바깥세상을 볼 수 있었다. 웬만한 재활기구들이 비싸서 살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신 방 구조를 잘 활용하여 고무끈을 만들고 파이프를 이용하여 평균대를 세워 이용하는 등 혼자서 그렇게 끈질긴 노력을 하고 있었다. 아직은 자유로이 손을 쓰지 못하고 걷진 못하지만 그 손으로 전화를 돌려 부름의 전화에 부탁을 하고, 한자 한자 편지도 쓴다.
그 할아버지 전화의뢰로 심부름도 해주고 또 지난연말에는 보행연습 하는데 필요한 수평대를 구입하라고 생활지원금을 전달하면서, 또 간간이 이렇게 방문하면서 김정희 대장 역시 많이 울었다. 그 할아버지의 피나는 재활의 노력이 너무나도 감격스러웠기 때문이다.
운동이나 훈련은 엄두도 못 내고 영락없이 갇힌 신세가 되어 삼사십년을 방안에서 갇혀서 지내는 장애우도 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바깥에 나오지 못하는 전신마비 중 중증장애우들이 있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 할아버지 같은 분을 만나면 김정희 대장은 힘이 솟곤 한다.
"안돼, 이젠 일어설 수 없어" 라며 지레포기하지 않고 끝내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 작은 가능성에도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사람, 그래서 김 대장은 재활은 기적이 아니라 노력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 힘으로 일어서서 대장님 사무실까지 꼭 갈겁니다"라고 힘주어 말하는 그 할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김 대장이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으며 한마디 했다.
"나 이런 맛으로 일해"
<자원봉사와 자원활동은 구분되어야>
"부름의 전화" 가 하는 일은 단순하게 애기하면 "장애우를 만나는 일"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우, 휄체어를 타거나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우들이 병원을 갈 일이 있다거나 민원업무를 봐야 할 때 또 쇼핑이나 모임을 갈 때 등 혼자서 처리하기 힘들 때 "부름의 전화"에 전화를 하면(701-7411) 자원활동자가 가서 길안내를 해주고 또 제반업무를 제대로 잘 처리할 수 있도록 보조해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아직은 "자원봉사"라는 말을 더 보편적으로 사용하는데,"자원활동"과 같은 개념인지, 아니며 다르게 쓰이는지 개념설명을 좀 해주십시오.
"우리 "부름의 전화"에서는 자원봉사와 자원활동을 엄격히 구분 지으려 합니다. 자원봉사에는"희생"에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봐요. 예를 들어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이런 식이죠. 좋고 거룩한 일이니 무슨 일이든 찡그리지 않고 참으며 무조건 "대신" 해주는 것이죠.
그러나 자원 활동은 장애우의 일을 대신 해주거나 무조건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도 할 수 있다" 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장애우 스스로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노력봉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애우 개개인이 갖고 있는 잔존능력을 스스로 개발하게 하여 궁극적으로는 혼자서도 할수 있게 하는 겁니다. 자원활동자는 그저 옆에서 관심을 갖고 지켜봐주고 할수 있게끔 보조역할을 하는 것이죠. 육체적 재활이 필요 없는 노인이나 소년소녀 가장을 돕는 그런 장원봉사와는 다른 차원입니다"
-장애우도 자원활동자도 이러한 인식을 갖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으리라 생각하는데,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십시오.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밥을 먹여주는 것이 아니라 밥 먹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죠. "너는 장애우니 못해. 내가 대신 해줄게"가 아니라는 거예요. 다해주면 장애우가 할수 있는건 뭐죠? 매일 자원활동자가 붙어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나는 우리 활동자들한테 밥하고 빨래하는 것 절대 못하게 해요.
내가 아는 몇몇 시각장애우는 밥하고 빨래하는 건 물론 재봉틀로 옷도 만들고 칼국수를 능숙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어요. 또 한 전신마비 장애우는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자살을 하려고 장롱 위에 얹혀 있는 쥐약을 내리려고 몸부림치다가 손발을 움직이게 되어 재활에 이르게 된 사람도 있어요.
바로 이게 자원활동이에요. 죽을힘을 다해 움직이게 하는 것, 바로"최악을 최선으로 바꾸는것"이죠"
김대장은 이러한 자원활동의 진정한 뜻과 방향이 사실은 요즘 많이 희석되었다고 덧붙였다. 자원봉사 한다는 봉사자들이 한때는 봉사활동을 무작정의 "희생활동" 으로 강요하고, 또는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돈 몇푼 던져주고는 생색내기에 열을 올리는 모양새가 늘어나고 있다. 시설에 있는 아이들이나 노인 또는 장애우들이 무엇을 원하고 필요로 하는지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고, 자기만족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식의 잘못된 사고방식이 관행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모자라 급기야는 유급이니, 학점으로 인정된다느니, 승진자격의 필수요건이라느니 떠들며 자원봉사 붐을 조성하고 있는 형편이니, 선거철을 앞두고 그 본래의 의도를 숨긴 채 요즘 한창 무성하게 논의되고 있는 자원봉사 진흥 운운하며 법제정을 해야 한다고 왈가왈부하는 일도 그중의 한 예라고 김대장이 일침을 가했다.
<가난한 중증장애우 많아>
-87년 10월에 "부름의 전화"가 생겼으니 올해로 8년째가 되는군요. 처음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어려움이 있었다면 어떤 것입니까.
"돈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니까 운영비가 가장 큰 문제였어요. 처음부터 굳게 마음 먹은 것이 있다면 장애우 들먹이면서 후원금이니 모금운동이니, 이런 짓은 절대로 하지 말자는 것이었어요. 우리 자원활동자들은 차비나 제반 활동경비를 모두 자비로 하고 있어요.
운영비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정말 육체적인 도움만으로 되지 않는 일 때문이에요. 너무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장애우들이 많아요. 생활보호자나 거택보호자로 선정되어 있지 않은 가난한 장애우들 말이에요.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중증장애우들이 많아요. 전기세가 아까워서 방의 전기를 끄고 사는 정도이니, 이런 사람들의 일을 보조해준다고 병원을 데리고 가고 구청에 함께 간다고 해서 이들의 정말 절박한 문제가 해결되나, 하는 갈등 때문이에요. 자원활동을 하겠다고 찾아오는 젊은 청년들이나 대학생들 가운데는 몇 번 하다가는 이러한 문제에 부딪치고 회의에 빠져서 그만두는 사람도 꽤 있었지요.
또 하나의 어려운 게 있다면 교통문제죠. 워낙 체증에 시달리다 보니 제시간에 활동이 끝나지 않아요. 약속을 못지키는 경우도 종종 있죠. 의뢰하는 장애우가 하루나 이틀 전에 신청을 하는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지만 교통문제가 참 심각합니다."
-장애우를 만나다보면 장애우 복지의 산적한 문제들을 대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가장 심각하게 여기는 게 있다면.
"우선 이동권의 문제인데, 이 문젠 위 "부름의 전화" 앞으로의 계획과 관련해서 조금 있다가 얘기하기로 하고 두 가지만 얘기할께요.
중증장애우의 문제인데, 중증장애우가 집안에 있으면 가족전체의 문제가 돼죠. 가족 중의 누군가는 꼭 붙어있어야 하니까요. 늙은 부모가 자식을 돌봐야 할 경우는 같이 장애를 입은 거나 마찬가지 격이 되는 거지요. 집은 편안하게 지내는 공간이 아니라 감옥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1,2년이 아니라 평생 이어지다 보면 자식이라도 지겨워지는 거죠. 이런 것을 대비해서 "장애우 일시보호소" 가 있었으면 합니다. 가족이 잠시 외출할 때도 맡길 수 있고, 며칠동안 외출할 때도 맡아주는 역할을 하는 곳이지요. 정책적으로 정말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큽니다.
또 하나는 장애우 주택문제인데, 혼자 사는 장애우의 경우 임대아파트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돌봐주는 가족도 없이 혼자 사는데 그나마 편리한 아파트라도 들어가야 덜 불편할 텐데 단독세대는 안된다고 제한을 해놔서 분양이 안 되고 있어요. 이러한 일괄적인 장치가 장애우에게 그대로 적용되니 불합리하기 짝이 없습니다. 보호자 없는 장애우의 주택문제에 제도적인 변화가 시급한 실정이에요"
<자원활동은 나 스스로를 돕는 것>
- 이번호 "부름의 전화" 회보에서 지난 8년동안 자원활동자를 파송한 총 파송횟수가 8천8백53회로 나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94년 한해 동안만도 1천2백40회, 연활동자가 1천3백85명에 이르고 있는데 꾸준히 활동하는 자원활동자는 어느 정도 되는지요. 또 이들 자원활동자들의 교육과 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요.
" 부름의 전화"에 도움을 의뢰하는 장애우들은 약2천여명 됩니다.
이들은 수시로 필요할 때마다 전화를 하지요. 그리고 대기하고 있는 자원활동자는 한 4백여명됩니다. 이들 모두가 열심히 활동한다고는 할수 없지요. 이중 1년에 1백40여차례 한 주부 활동자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자원활동이니까 시간과 여건이 되는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활동을 합니다. 2천명에 4백명이면 부족하긴 한데, 지금은 시간과 여건을 맞추어 이 4백명이 돌아가면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교육프로그램을 실시하진 않습니다. 단지 자원활동자들 전체가 만나는 시간이 있다면 장애우들과 함께 하는 나들이 행사나, 또 자원활동자 야유회 행사 정도입니다.
그 외에는 활동도 다 밖에서 이루어지고 전화로 연락만 해요. 사무실에도 특별한 볼일이 없으면 오지않습니다. 자원봉사자에게 특별히 주입하는 것이 있다면"자원활동은 결코 여가선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원활동이야말로 정말 바쁜 사람이 한다는 것이지요. 여유 있으니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래 가지 못해요. 내 바쁜 시간을 쪼개고 또 없는 시간을 내어서 해야 값지니까요 우리 활동자들 가운데는 주부도 많지만 회사원, 공무, 또 자영업을 하는 사람도 많이 있어요.
- 자원활동자들에게 자원활동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특별한 교육프로그램이 없다고 하셨는데, "부름의 전화" 활동자들이 대장님의 뜻을 잘 받아들이고 이해하는지요.
"처음에 자원활동을 하겠다고 왔을 때 일단 충분히 잘 알아듣게 설명하고 주의사항을 이야기합니다. 사실은 정기적인 교육시간과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한다면 이론과 실제를 잘 응용하면서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기가 수월할 텐데, 자원활동자들이 정기적인 시간을 낼수가 없어요. 일단 다 자기 일이 바쁘니까 시간을 맞추기가 힘이 들죠. 그래도 직접 몸으로 부딪치면서 생각의 많은 변화를 가져오지요. 처음엔 장애우가 안스러우니까 아무거나 막 도와주려는데 제가 호통을 치지요. "장애우는 불쌍한 사람"이 라는 생각에만 머물러 있으면 자원활동의 의미가 없다고 거듭거듭 말해주지요. 백 마디 말보다 실전에서 직접 눈으로 보니 사실은 빨리 먹혀드는 점도 있어요.
또 하나는 자원활동자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어요. 자원활동을 하다보니 자신의 문제를 들여다보게 되거든요. 남의 아픔을 통해 내 아픔을, 때로는 내 아픔을 통해 남의 아픔을 들여다봐요. 모든 사람이 누구나 문제를 안고 살고 있으며, 나 역시 똑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래서 아 우린 함께 살아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구요.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돕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면 한층 성숙한 자원활동으로 나갈 수 있어요. 바로 생활 속의 자원활동이 되고, 살맛나는 내일이 되는 것이지요.
<자가용을 타지말자>
-8년 활동하는 동안 많았다고 봅니다. 가장 크게 변한 것은 무엇인지요
"여전히 지금도 심각한 문제가 "이동권"의 문제인데 참 변하기도 많이 변했어요 .그와 함께 시민의식도 많이 변했구요. 이제 자동차가 장애우들의 보장구 역할을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러 승용차를 이용하는 장애우들이 참 많습니다. 옛날에는 장애우를 길에서 보면 멀찌감치서 돌아가던 사람들이 이제는 "제가 도와드릴까요?"하면서 다가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원활동자들의 노력도 있었을 것이고, 매스컴의 영향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장애우들도 자신의 장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서 비장애우들과 마음을 주고받으며 적극적으로 사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가장 두드러져요"
-올해 이동권과 관련해서 계획하고 있는 것이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것입니까.
"이동권의 문제가 참 심각하다고 했는데, 바로 승용차를 타면서 비롯되는 문제를 하나 지적하고 싶습니다. 마치 장애우는 자가용만 타야 되고 버스나 지하철은 타지 않아야 되는 것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계단과 보도턱이 무서워 집 밖을 못나오거나, 나올 때는 아예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지요 그 많은 장애우가 다 자가용을 이용할 수는 절대 없으니까요. 교보문고에서 광화문까지의 거리에는 횡단보도가 없어요. 휠체어를 타고 장애우가 지나가려면 종로로 광교로 안국동으로 돌아 돌아 가야하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맙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우리 "부름의 전화"에서는 "장애우 버스․지하철 타기"운동을 벌일 겁니다. 복지는 누군가 저절로 갖다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가 따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단 뜻 있는 장애우들과 자원활동자들이 모여 시간 나는 대로 나와서 요구를 할 생각이에요. 장애우도 탈수 있는 지하철을 만들어 달라구요. 시간이 오래 걸려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꾸준히 할 예정이에요.
<가끔은 외로운 대장님을 위하여!>
김정희 대장은 지난해 "국민훈장 목련상"을 수상하였다. 뒤늦게 축하의 인사를 전했더니 대뜸 "난 다 잊어버렸어"라고 대꾸한다. 자꾸 소감을 물으니 심드렁하게 하는 그의 대답.
"내가 뭘 잘했다고 준 건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아니야. 사람들은 더 일을 잘하라고 준 것이라고 말들 하는데, 수상을 한 어제나 오늘이나 뭐가 달라. 그저 나는 최선을 다해서 할 뿐인데, 그냥 필요한 일이라 생각하고 하고 있을 뿐이야. 이 상의 의미는 그렇게 계속 이일을 하라고 허락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어."
올해 나이 58살, 6.25때 한 고아원의 원장 딸과 친구가 된 것이 인연이 되어 시작된 이 일이 44년이다. 참 지난한 세월을 혼자서 묵묵히도 견디며 해온 것이다. 월급으로 단 10원도 받지 않고 또 거창한 계급을 이르는 명칭도 아닌 그저 "부름의 전화" 일꾼 "대장님" 김정희 대장은 "새벽부터 밤까지 매달려 때로는 목욕할 시간도 없어 솔직히 그만 두고 싶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라고 고백한다. "다녀보면 자기보다 잘 사는 장애우가 수두룩하다"며 , "명절 때 쌀이나 고기를 나누어 주러 다녀도 정작 자신에겐 아무것도 돌아오는 것도 없고 갈 데도 없다"며 투정 아닌 투정을 하는 김 대장. 그가 그 고백과 투정 끝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이게 당연한 내 삶이라 생각해. 이런 내 생활을 나 자신도 우리 활동자들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뭐 어때? 그래도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야. 내 주변에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자원활동자들이 많은데, 내가 무슨 복으로 이런 사람들을 만나. 결혼을 왜 안했냐고? 안외롭냐고? 가끔 외롭지. 누가 날 데려가? 잠잘 시간도 없는데 어느 누가 이런 바보 같은 나를 봐주겠어? 그래도 뭐 어때? 다른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나 한 사람쯤 안 간다고 . 단지 내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야. "
몇 년 전 어느날 그가 생각나서 끄적거려 엽서에 보내준 시 한편이 있었다. 이 기사를 마무리하며 가끔은 외롭고 지칠 그에게 조금의 힘이라도 될까 싶어 환하게 열리는 새봄에 다시 그 시를 바치고 싶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거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이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고생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을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가랴
가기로 작정하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휠휠 지나서
뿌리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고정희 시, 상한 영혼을 위하여>
글/고은경(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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