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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장애우 수녀 윤석인씨

"봉사하는데 장애가 걸림돌이 될 순 없죠"

본문

[사람사는 이야기]


"봉사하는데 장애가 걸림돌이 될 순 없죠"

장애우 수녀 윤석인 씨

     

  전신을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서만 지내는 그녀는 최근 꿈꾸어 오던 수녀가 됐다. 수녀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그녀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윤석인 씨가 보나수녀가 되기까지는 다음과 같은 과정이 있었다.
  교회법에는 못박아 놓고 있지 않지만, 언제부터인가 천주교에서는 "신부나 수녀 등 수도자는 남을 위해 살아야 되는 사람들이니까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완전해야 한다"라는 인식이 관례적으로 지켜지고 있었다.
  이 인식 때문에 장애우들은 수도자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었다. 하느님 앞에서의 차별이 많은 장애우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차별은 과연 옳은 것인가?
여기 "그렇지 않다"라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박성구 요셉 신부이다. "수도자가 지향하는 모습이 하늘나라를 증거하는 것이라면, 장애를 가졌지만 아주 기쁘게 살면서 함께 사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그들이 어려울 때 힘이 돼주면서 살다보면, 하느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이게 바로 수도자의 역할이다" 
  박성구 신부는 그동안 특별히 새로운 것도 없는 이와 같은 평범한 이야기를 통해 장애우도 수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간곡하게 설파해 왔다. 그런 다음 단순히 교회를 상대로 설득하는데 그치지 않고 손수 나서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함께 하는 수도회 설립을 추진했다. 그 수도회가 바로 "작은예수회"이다.
  박성구 신부가 이 수도회 설립을 준비한지는 어언 팔년을 헤아린다. 선각자는 외롭다. 박성구 신부는 수되회 준비에서 설립인가를 받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야 한다.
  무엇보다 교회의 완강한 부수성이 수도회 설립을 가로막아 그는 많은 애를 먹어야 했다.   이런 어려움 끝에 "작은예수회"는 작년 십이월 팔일 한국 천주교에서 정식인정을 받는 개가를 올린다. 그리고 인정을 받는 것과 동시에 "작은예수회"는 장애, 그것도 아주 심한 장애를 가진 한명의 수도자를 배출했다. 그 수도자가 바로 보나수녀이다.
  굳이 세계적인 사례를 찾아 본다면 장애우가 수도자가 된 예가 없는 것도 아니다. 프랑스에 본원이 있고, 미국 일본에 본원을 두고 있는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함께 하는 수도회가 있긴 하다. 그러나 그 수도회는 활동하는 수도회가 아니라 특정한 공간에 봉쇄돼서 기도만 하는 봉쇄 수도회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다 수도자가 된 후 장애를 가지게 된 일부 수도자를 제외한다면 장애우가 정식교육과 수련을 통해 현장에서 활동하는 수도자로 태어난 것은 보나수녀가 처음이다.
  "제가 영세를 받은 게 십이년전이에요. 당시 신앙서적들을 읽으면서 수도자가 있다는 걸 알았죠. 그걸 알자말자 이거야 말로 일생에 한번 가볼만한 길이다 라고 생각했어요"
마흔네살에 수도자로 새 삶을 시작한 보나수녀, 그녀는 순탄치 않았던 삶을 돌이키며 자신이 수녀가 된 사실에 감격해 했다.
  보나수녀의 속명인 윤석인 씨가 누워서만 지낸 햇수는 올해로 삼십년째이다. 그녀는 그녀 나이 열 살 때인 국민한교 다닐 무렵, 처음 발목이 아파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서는 "놀다가 다쳤다"며 간단한 처방만을 해줬다. 그런 줄 알고 집으로 돌아온 윤석인 씨는 그때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렇게 병세가 진행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자 그제서야 부모는 그녀를 서둘러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시켰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진단 내린 그녀의 병은 류마티스 관절염이었다. 의사는 그녀의 부모에게 "여태 뭐했냐"며 호통을 쳤다. 그런다음 "학교에 다니지 말라"고 해서 그녀는 국민학교 사학년 과정을 끝으로 정규교육을 마쳐야 했다.
  윤석인 씨는 그때부터 치료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병세는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처음 질병으로 시작해서 장애로 굳어지는 류마티스 관절염이란 무엇인가? 이 장애는 우리 몸의 뼈와 뼈 사이에 있는 연골이 곪아서 삭아버리고, 나중에는 연골이 없어지고 뼈와 뼈 사이가 붙어버려 심한 경우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되는 장애를 말한다. 현대의학으로도 아직 그 치료 방법이 개발돼 있지 않는, 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장애이다.
  윤석인 씨는 이 장애가 심하게 진행된 경우이다. 그녀는  이 장애를 가지게 된지 삼년만에 팔과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 신체가 모두 굳어버린 그때부터 꼼짝없이 누워서 자리보존을 하는 상태로 지내야 했다. 그녀 집이 여유가 있는 집안이라 여러 가지 민방약도 쓰고 침도 맞아 보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장애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아픔에 시달리기를 사오년, 그녀는 수시로 찾아오는 통증 때문에 일절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한 상태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그녀 나이 스무살이 되면서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다.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하지?" 그 생각 끝에서 그녀는 한때 " 직업도 갖지 못하고 결혼도 할 수 없다면 차리라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자살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된 데는 그녀의 천성인 낙천적인 성격도 한몫 작용했다. 그 성격 덕분에 나이가 들면서 그녀는 자살을 생각하는 대신 " 내 몸이 이렇지만 뭔가 길이 열려 내 길을 갔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을 하나 키웠고, 그 소망은 가족들의 "이제 너도 뭔가 네 일이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는 배려로 현실에서 구체화 될 수 있었다.
  처음 그녀가 배운 것은 플라워 디자인 이었다. 그녀가 손은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에, 딸이 뭔가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를 찾아보던 그녀 어머니는 플라워 디자인을 가르치는 학원에 등록을 했다. 그런 다음 어머니는 전적으로 딸을 위해 학원에 다녔다. 어머니는 학원에서 기술을 배운다음 집에 돌아와 그 기술을 딸에게 가르쳤다. 이런식으로 어머니는 플라워 디자인뿐만 빵꽃공예를 비롯한 여러 가지 공예품 제작 기술을 습득해와 딸에게 전수했다.
  이런 어머니의 극성에 힘입어 윤석인씨는 여러 가지 공예품 제작 기술을 습득 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가르치는 어머니보다 기술이 더 늘어 혼자서 충분히 공예품을 만들어 맬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공예품 제작은 곧 한계에 부닥쳤다. 무엇보다 판로가  확보되지 않아 모녀는 심한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그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자 모녀는 공예품 제작이 장래성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윤석인 씨가 공예품 제작을 그만 두고 나서 손댄 것은 그림이었다. 그녀는 예전에 공예품 제작을 하면서 틈틈이 가족들 생일날에 손수 카드에 그림을 그려 나눠준 적이 있었다. 그 카드를 기억하고 있던 가족들은 그녀 나이 서른살이 되었을 무렵 "아무래도 네가 그림 그리기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라며, 이번에는 오빠가 나서 홍익대 미술대에 다니고 있던 한 학생을 초빙했다. 그녀는 그 학생으로부터 일주일에 두 번 개인교습을 받았다. 뎃상부터 회화, 그리고 디자인까지  꼬박 삼년을 배운 그녀는 어느정도 그림 그리기에 재미를 붙일 무렵 찾아왔다.
  "이 세상에는 뛰어난 사람들도 많고, 정규교육을 받은 실력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내가 그림을 배워봤자 뭐할 것인가?"그녀가 이런 회의를 품게 된 데는 다른 무엇보다 소재에 대한 한계가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그녀는 집안에 있는 소재는 그릇에서부터 가구까지, 하다못해 가족들 초상화까지 전부 다 그렸다. 그리고나자 더 이상 그릴 소재가 없었다.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폭넓은 대상을 접하려면 외출을 해야 하는데 누워서만 지내야 하는 그녀는 외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아무래도 이것도 헛일인가 보다. 공예품 제작처럼 이 일도 내 인생에 돌파구가 되지 못하겠구나"나는 판단을 내려야 했다.
  그때 맛본 절망감은 꽤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는 그 후 한참의 시간을 절망감을 곱씹은채 지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 뇌리속에 한 책이 떠올랐다. 오년전에 읽은 적이 있는 "교부들의 신앙교리"라는 천주교에서 신앙 초보자들을 위해 낸 책이었다. 여기서 이 책을 설명하기에 앞서 그녀 집안의 내력을 먼저 알아보자. 그녀 집안은 대대로 내려오는 독실한 불교 집안이었다.
  불교 집안에 그 책이 들어오게 된 것은 그녀 아버지 친구 중 한명이 천주교 신자였는데, 아버지를 개종시킬 요령으로 그 책을 두고 갔다. 그녀는 아버지가 서가에 처박은 그 책을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됐다. 그 책을 읽고난 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막연히 "내 영혼이 언젠가 절박함을 느끼고 이 세상에서 살기 힘들다고 생각될 때 하느님께 가야지"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녀가 그림 때문에 절망에 빠지게 된 그 무렵, 불현 듯 그 책과 그때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그 책을 찾아 정독했다. 그리고나서 그녀 표현에 따르면 "그 즉시로 성당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아무래도 내가 천주교를 믿어야 할 것 같아요. 근처 성당 아무데나 가서 나 같은 사람이 한 명 있는데 성당에 나가고 싶어하니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어봐 주세요"라고 자신의 결심을 먼저 어머니에게 얘기 했고, 어머니의 전언을 통해 그녀의 결심을 알게된 가족들은 회의를 열었다. 회의 결론은 "석인이가 가고싶어 하는 길을 갈 수 있도록 해주자"는 것이었다.
  당시 그녀 집은 서울 등촌동에 있었다. 이번에도 어머니다 나서 중간에서 심부름을 했다.
  등촌동 성당에서는 어머니가 간곡하게 부탁하자" 성당에 나오기 힘들면 통신으로 교리 공부를 해도 된다"라고 일러주었다. 그녀는 곧 교리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나서 몇 달 후 그녀 나이 서른두살에 그녀에 집으로 찾아온 신부에게서 영세를 받는다. 소망하던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이다.
  이쯤에서 한가지 의문을 짚고 넘어가자. 이 시기 그녀는 왜 천주교를 선택했을까? 그녀에게서 신앙은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도피수단이 아니었을까? 당연히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다. 그 있을 수 있는 질문에 대한 답을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아구스탄이 한 유명한 말 중에 우리 영혼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영혼이기 때문에 하느님과 만나기 전에는 내면에 안정을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라는 말이 있어요. 이 말처럼 나는 당시 내 마음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불안을 가라앉게 하고 평화를 맛볼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 와중에 신앙을 받아 들이면서 이 방법이 내 영혼을 이끌어 줄것이다 라고 의심하지 않고 믿었지요"
  그녀는 천주교 신자가 되고나서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이십여년만에 첫 외출을 했다. 가족들은 그녀의 외출을 위해 여름에 사용하는 비치의자에다 바퀴를 달아 휠체어 비슷한 탈것을 만들었다. 그녀는 그 탈것에 누워 성당에 갔다. 그렇게 일단 한번 외출을 하자 외출이 재미있어진 그녀는 그 후 자주 바깥 나들이를 나갔다. 교회 청년들에게 부탁해 청년들을 대동하고 미술 전시회도 가보고, 고궁도 둘러보고, 사라의 고리라는 천주교내 여성 장애우 모임에도 참석해 같은 처지에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서 그녀가 첫 피정에 참석했을 때 생긴 일이다. 외국인신부가 강론을 끝내고 나서 그녀에게 다가오더니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신부님은 영적으로 거룩하신 분인데 나 같은 보잘 것 없는 사람보고 기도해 달라고 그럴게 아니라 오히려 신부님이 나를 위해 기도해 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의문이 생겼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 외국인 신부는 왜 그녀에게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했을까? 여기서 굳이 이 일화를 소개하는 것은 교회 내에서 장애우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를 알수 있는 단초로 이 일화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시 그녀 말을 들어보자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만난 사람들은 지배자가 아니라 창녀였고 천민들이었어요. 지배자에 대해서는 야단을 치고, 이 세상에 있는 소외되고  불상한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갔어요.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 세상의 고통들이 하느님에게 귀하게 쓰일 수 있다고 말씀 하셨죠.
  바로 여기에 해답이 있는 것 같아요.  고통이란 것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괴로워만 하면 그 고통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요. 그런데 그 고통은 무언가 이세상의 죄와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의한 일들에 대한 대속으로 하느님께 바치면서 사람들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를 하면 하느님은 이런 봉헌을 통해서 세상을 선하게 변화 시키는 거죠. 그래서 교회 내에서 고통받는 장애우들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죠. 그 외국인 신부님이 나한테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 이유 때문일 거에요"
  그녀는 묵상 속에서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을 마음속에 받아 들이면서 그녀는 예전의 윤석인이 아닌 신앙인 윤석인으로 빠르게 변해갔다. 신앙 외에는 어떤 것에도 의미를 두지 않을 만큼 그녀는 교회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러기를 삼년, 그녀 나이 서른다섯살 때 그녀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찾아왔다.
  어느 날 교회에서 만난 한 장애우 친구가 그녀를 찾아왔다. 그 친구는 "박성구라는 신부님이 있는데 지금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함께 하는 공동체를 만들려고 한다. 장차 수도회도 만들려고 하니 거기 가지 않겠느냐?"라고 제의를 했다. 그런데 이상한건 그 얘기를 해준 사람이 비단 그 친구 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후로도 서너사람이나 더 찾아와 똑같은 제의를 그녀에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제의를 받게되자 가보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내가 그 공동체와 인연이 있나보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자 그녀는 늘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에게 "작은 예수회라는 모임이 있다는데 가서 내가 갈만한 곳인지 알아봐 주세요"라고 부탁을 했다.
  어머니는 당시 성산동에 있는 "작은예수회"를 방문했다. 어머니의 방문 소감은 "장소는 좁지만 사람들은 친절하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직접 "작은예수회"를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박성구 신부에게 "그림 그리는 것만 허락된다면 이 곳에 들어와서 기도생활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박성구 신부는 "언제든지 오라"고 대답했다.
  박성구 신부의 승낙으로 그녀의 공동체 참여는 확정된 듯 싶었다. 그런데 가족들이 나서 그녀가 "작은예수회"에 가는 것을 반대했다. 가족들은 "그 몸으로 공동체 생활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네가 돌봐줄 가족이 없는 것도 아니니 아무 생각하지 말고 집에 있어라"라며 극구 만류했다. 하지만 그녀 마음은 이미 "작은예수회"에 가있었다. 누구도 그녀를 제지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일년여의 가족들과의 줄다리기 끝에 팔십육년말 그녀 나이 서른여섯살 때 당시 장애우 공동체였던 "작은예수회" 식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작은예수회"에 들어가면서 그녀는 공동생활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이년 동안 그림 그리는 것을 금지 당했다. 그때 그림을 그리고 싶어 애달아 했던 자신의 모습을 소중한 추억으로 그녀는 기억하고 있다. 그것뿐 공동체 생활이 그녀에게 다른 변화를 초래하지는 않았다. 굳이 변화가 있다면 그녀가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공동체 회계일을 맡게 되었다는 것 정도였다.
  처음 박성구 신부가 그녀에게 회계일을 맡겼을 때 그녀는 "나는 그림만 그리고 기도만 할수 있지 다른 일은 못해요"라고 사양을 했다. 그러나 박성구 신부는 "너는 할 수 있다"라고 강권했다. 결과적인 얘기지만 이렇게 시작된 박성구 신부의 강권은 그녀가 공동체 생활에 적응하고, 훗날 수도자로서의 수련을 쌓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
  수녀가 된 요즈음 그녀는 바빠졌다. 오전에 신학원에 가서 공부해야하고, 여전히 공동체 회계일을 맡고 있으며 외부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것도 그녀 몫이다. 그러나 수녀가 되고나서 그녀에게 닥친 가장 큰 변화는 그녀가 "작은예수회" 산하 공동체 한 곳의 운영을 책임지는 책임자가  됐다는 것이다.
  "우리 작은 예수회가 서울 자양동, 성남, 제주도, 거제도 까지 분원을 냈어요. 우리는 대게 성당옆에 작은 전셋집을 얻어서 거기서 최소 아홉명에서 많으면 열네명 정도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함께 살죠. 그 중 한곳인 자양동 분원의 운영을 제가 맡은 거예요."
  그녀의 장애만 보면 그녀가 수녀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믿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 수도자보다도 이웃에 가까이 다가가 있다."이웃을 위해 봉사하는데 장애가 걸림돌이 될 순 없잖아요"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이태곤/함께걸음 기자

 


"쇼생크 탈출"을 보고온 날

이하진

 

거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쇼생크 탈출을 보고
거리에 나섰을 때
빗줄기 사이로 사람들이 모여서서
한 장애우가 노점 단속에 항의해 분신 했다는 소식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 하는 모습이보였다.
우연이었을까 조금 전 본 영화는
꿈이 있는 삶 아니면 죽음
그래서 꿈을 갖고 살든가
아니면 희망없이 죽든가
삶의 방식은 둘 중 하나라고
분명한 어조로 이야기 했는데
한 장애우가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다
한번도 두 발로 땅을 딛어본 적이 없던 그가
마침내 희망없는 삶에 마침표를 찍었다
나는 벽을 등지고 서서 소리를 질렀다
그가 불 지르고 싶어 했던 대상은
자신의 몸이 아니었다고, 정말 아니었다고
나는 벽을 붙잡고 울었다

 

●쇼생크 탈출 - 현재 국내에서 상영되고 있는 미국 영화제목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쇼생크라는 감옥에 갇힌 한 은행가가 감옥을 탈출 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영화이다.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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