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나는 인간 승리한 장애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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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 승리한 장애우가 아니다"
고려대학교 수학과 황윤성 교수
올해 "장애인의 날"에 황윤성 교수는 자랑스런 장애우의 한 사람으로 뽑혀 언론의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황 교수는 이런 언론의 칭송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을 장애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그는 지금의 자신이 있기까지는 장애우라는 편견이 그에게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며 장애우에게도 비장애우와 똑같은 기회가 제공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행운아다
인터뷰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급히 달려갔던 교정에는 황사현상에도 불구하고 잔디밭과 벤치에서 열띤 토론을 벌이는 학생들과 모래바람을 마셔가며 신나게 농구를 하고 있는 학생들로 자유로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고대이과대 건물은 그리 낡지는 않았지만 어두운 복도와 나무로 된 문이 고집스러운 학풍을 말해주는 듯 했다.
이곳에서 황교수는 아직 자신의 연구실이 마련돼 있지 않아 다른 교수의 방을 빌려 쓰고 있었다.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금새 강의를 마치고 돌아온 듯 헝클어진 머리를 가지런히 빗고 있는 황교수의 모습이 보였다.
"정확히 시간을 맞춰서 오셨네요"하며 활짝 웃는 황 교수는 많은 책이 둘러 쌓여있는 작은 쇼파로 기자를 안내했다. 일단은 가벼운 질문부터 시작하기로 하고 그가 가르치는 과목과, 요즘 생활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황 교수가 가르치는 과목은 대수학이다. 수학을 잘 모르는 기자에게 황 교수는 아예 전공교과서를 펼쳐들고 친절하게 설명을 시작한다. "수학에서 대수학 부분을 가르치고 있어요. 전공필수 과목인 응용선형대수학이죠. 고등학교 때 방정식배우죠? 그것과 많이 비슷해요. 1차방정식, 2차방정식, 3차방정식 같이....수를대신 집어 넣는다는 대신할 대 자에, 수학할 때 수자를 써요. 그런데 방정식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너무 수준 낮게 얘기하는 것이고 그것보다는 수준이 높게 응용한 것이 대수학이죠"
그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강의시간에 판서를 하지 않는다. 그만큼 시간이 지연되고, 자신도 무척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업시간에는 두상투영기(OHP) 사용하고 있다. 그는 느린 걸음으로 자신의 책상으로 가서 강의 때 사용하는 두상투영기(OHP)를 들어보였다.
"먼저 종이에다 그날 배울 것을 정리해서 써요. 그걸 두상투영기(OHP)에다 넣고 은막에다 비추는 거죠. 이렇게 하면 칠판에 판서할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이런 것 있잖아요"계속 서서 포즈를 취하던 그는 자신의 필통에서 펜처럼 보이는 지휘봉까지 꺼내 보여줬다. "이거 재밌죠? 이렇게 서서 이것으로 가리키면서 설명을 해요." 강의하는 모습까지 실제처럼 열심히 보여주는 황 교수의 모습에서 순수함이 느껴졌다.
- 강의 준비를 많이 한다고 들었는데 보통 하루에 몇 시간 정도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강의는 일주일에 9시간을 하는데 강의 준비는 그 날 강의할 내용을 일일이 쓰고, 복사해서 나눠줘야 하니까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어요. 하루에 잠자는 시간 뭐 그런 시간을 제외하다보면 13시간 정도 걸리죠. 강의를 준비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내 공부는 하나도 못하고 있어요"
실례일지는 모르지만 간간이 쓰는 황 교수의 영어발음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마이크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학생들이 그의 발음을 제대로 알아듣기에는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내 발음이요? 그래도 잘 알아듣는 것 같아요. 학생들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잖아요. 내가 대학 다닐 때보다 수업 분위기가 훨씬 더 진지해요. 그것은 숙제를 제출하는 것을 보고도 짐작할수 있어요. 내가 숙제를 많이 내주는 편이거든요. 58명 중에 40명이 넘게 숙제를 해오니까 열심히 한다는 것을 알수 있죠"
황윤성 교수는 인터뷰 중에 계속 자신을 가리켜 행운아라고 했다. 그 몇 가지 이유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가정에서 경제적인 뒷받침이 충분히 있었고, 두 번째는 자신이 국민학교에 입학할 당시 특수학교라는 것이 없어서 일반학교에 무리 없이 입학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반학교를 다니면서도 그는 불편함을 많이 느끼지는 못했다. 심한 장애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들과도 쉽게 어울릴 수 있었다. 다만 국민학교 1,2 학년 때 바보라고 놀림을 받은 게 그가 기억하고 있는 아픔의 전부이다. 그러나 그 놀림도 오래가지 못했다. 언제나 우등생인 그를 친구들이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는 서슴없이 "그때 내가 특수학교에 갔었더라면 지금의 내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왜 특수학교에 갔다면 지금의 자신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됐습니까?
"사실이 그렇잖아요. 특수학교는 직업 공부에 더 치중하고 있고,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나도 그때 특수학교에 갔으면 기술을 배워야 했을 것입니다"
황 교수 말이 이해가 갔다. 그때 뿐만 아니라 지금도 특수학교는 취업 위주의 교육을 주요한 지표로 삼고 있다. 그래서 장애우 대학 특례입학이 실시되고 있는 현재에도 특수학교 졸업생이 대학에 가는 예는 극히 드물다. 특수학교에서는 장애우의 현실적인 생존문제에 더 가까이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장애우가 장애우를 만날 수 있는 기회 필요해
우리나라에 장애우 교수는 흔치 않다. 특히 뇌성마비 장애우로는 황 교수가 국내 처음이다. 때문에 그가 교수가 되기 위해 남들이 모르는 자신만의 고통을 심하게 겪었을 거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개인적으로 교수가 되고자 했을 때 주변에서의 반대는 없었습니까?
"표면적으로 반대는 없었어요. 물론 내가 모를 수도 있죠. 그러나 개인적으로 걱정은 많이 했습니다. 나는 무엇이든지 다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데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나의 생각을 인정하기 힘들죠. 아무래도.... 일단은 비장애우와는 다르게 생겼으니까요. 그러나 그 구분이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나 약점을 가지고 있잖아요. 장애도 자신이 갖고 있는 약점이라 할 수 있는 거예요. 비장애우를 정상인, 정상인 그렇게 부르는데 그러면 그 사람은 모든 게 정상입니까? 사람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지는 못한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약점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거죠. 나는 비장애우가 장애우에게 "당신은 잘 할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을 종종 봤습니다. 무엇을 잘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장애을 갖고 있다는 것은 단지 몸이 좀 불편하다 뿐이지 능력 면에서 비장애우보다 떨어진다는 얘기는 아니잖아요. 그런 얘기를 들으면 비웃어 주고 싶고, 그런 현실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흥분했다. 마치 장애우가 겪어야 하는 편견을 대변하듯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 얘기는 사실 황 교수 자신이 포함된 얘기는 아니었다. 그의 말처럼 그가 살아온 인생과정에는 비장애우의 편견이 항상 비켜갔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었고, 일반학교를 다녔고. 부모님들의 교육열도 있기에 그는 큰 어려움 없이 살아온 사람이었다.
-비장애우가 장애우를 분리시키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교수가 될 수이었던 것은 어쨌든 교수님의 실력이 월등했기 때문에 인정을 해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내 실력이 월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 고려대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이곳 교수가 되는 것이 쉬웠을 뿐이죠. 나를 가르친 교수님들이 내가 학생들을 충분히 가르칠 수 있다. 그리고 열심히 할 것이다 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인 거죠. 만약 내가 서울대 교수가 되길 원했다면 교수가 되는 게 쉽지 않았을 거에요. 왜냐하면 서울대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모르잖아요. 아무래도 장애우의 실력을 믿기 어려울 거에요. 실력을 믿지 못하니까 취직시키지도 않을 거죠.
- 장애우의 실력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장애우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학력을 소유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든지, 아니면 신체적 장애가 능력의 문제가 된다는 얘기입니까
"그것은 아니죠. 다만 비장애우가 장애우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어요. 사람들은 누구나 막연히 미지의 세계를 두려워한 나머지 배척하기도 하고 부정해버리기도 하죠. 비장애우에게 장애우는 미지의 세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비장애우가 장애우를 접할 기회가 있습니까? 그런 기회는 전무할 거에요. 왜냐하면 모든 건물이나 도로는 장애우가 활동할 수 없게 가로막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한번도 장애우를 보지 못했던 비장애우 앞에 장애우가 나타나서 "취직을 시켜달라"고 얘기해 보세요. 그 비장애우는 다른 것보다 거부감을 먼저 느끼지 않겠습니까? 그 선입견은 쉽게 깨지지 않을 거에요.
이쯤 돼서 황 교수가 단지 학문 연마를 위해서 미국 유학길에 올랐는지 궁금해졌다.
- 왜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됐습니까
-수학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습니다. 미국에는 실력자들이 많으니까요. 그리고...(그는 한참동안 뜸을 들였다. 그 동안에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박사학위를 받아봐야 취직하기도 힘들 것 같고, 생활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면 취직자리 하나 정도는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미국 유학을 가게 됐죠. 그러나 유학을 가게된 가장 큰 이유는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보통 유학생활이 힘들다고들 말하는데 미국에서 생활하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았습니까
"아니요.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해 상당히 불쾌해했다. 당연히 목소리의 톤이 높아졌다.) 왜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비장애우 유학생에게는 그냥 힘들 것이다라는 정도만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비장애우는 그 힘든 생활을 잘 견뎌내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나도 그런 유학생 중 한 사람입니다. 특별히 몸의 근육이 발달 못했다 뿐이지 크게 불편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혼자 7년 동안 생활했지만 힘든 일은 없었어요."
말이 나온 김에 여쭙고 싶은게 미국에서는 장애우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떻습니까
"그 곳은 거리나 건물 어느 곳에서도 장애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없죠. 그리고 장애우를 판단하는 기준 자체가 우리나라와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 장애우가 일할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우선이지. 그 사람의 신체적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비장애우와 장애우가 별 구분 없이 친구처럼 잘 어울리죠."
-어리석은 질문인데 그러면 장애우가 살기 좋은 환경을 등지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물론 그 곳의 환경이 살기 좋은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미국에서 취직자리 얻기는 한국보다 더 어려워요. 지금 미국 대학의 수학과에는 비어있는 교수 자리가 없어요. 그리고 수학과를 졸업한 미국 사람도 많은데 굳이 동양인을 취직시킬 이유가 없잖아요. 그리고 솔직히 내가 영어를 잘못합니다.(황교수는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히면서 "하하"하며 아이 같은 웃음을 웃었다.) 만약 내가 그 곳에 남아 기반이 잡힐 수만 있다면 미국에서 사는 것도 매력이 있죠. 살기 편하기도 하고, 학문적으로도 우리나라보다는 실력이 있으니까요"
그는 그가 얘기했듯이 확실히 행운아였다. 그는 93년 8월 말에 귀국했다. 그리고 귀국 즉시 강의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대 조치원 분교에 시간강사로 나갔고, 시간강사로 1년을 지낸 뒤 다시 도전한 교수 임용에서 당당히 합격한 것이다.
언론의 주목받는 것 곤혹스러워
그가 교수가 되자 그는 곧 유명인사가 됐다. 텔레비전, 신문, 잡지 등 모든 언론에서 앞다투어 그의 인간승리를 보도했고, 사람들은 그의 모습을 보며 많은 관심과 반응을 보였다. 혹자는 "장한 사람이다"라고 하고, 혹자는 "대단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런 사회 분위기에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 거부감을 느꼈어요. 곤혹감도 느끼고요. 내가 비장애우와 똑같이 살아왔었는데 단지 장애우라는 이유로 교수된 사실에 대해 신기하게 바라보잖아요. 비장애우가 대학 교수가 됐다고 방송에 출현하거나 잡지에 실리는 것 봤습니까? 비장애우한테는 그런 일이 결코 있을 수 없죠. 내 생각에 나는 비장애우인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장애우로 구별지어 생각하는 자체가 우스울 뿐입니다. 얼마 전에 이익섭 교수(연세대 사회복지과 교수, 시각장애우)를 만났는데 이런 얘길 해주더군요. "미국에서는 장애우가 박사학위 받았다고 언론에서 부각시킨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다르다. 황 교수는 특히나 견디기 힘들 것이다. 기자들이 주로 특별히 어렵거나 힘들었던 일이 있느냐 라는 질문을 던질텐데 솔직히 말해봐라. 특별히 힘들었던 기억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그 곳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살다가 귀국해보니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 돼버렸다. 이러한 일은 우리나라의 복지의 낙후성을 극렬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난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황 교수의 불쾌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황 교수는 특별한 사람이다. 아니 특별하다기보다 장애우의 귀감이 되고 있다. 장애아 부모들은 황 교수를 보며 미국 유학을 생각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황 교수가 자신이 신화적 인물이 되는 것에 대해 불쾌감을 넘어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내가 장애우의 귀감이 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현실이 답답하기만 해요. 모든 장애우가 나처럼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장애우가 좋은 환경 속에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내가 가진 환경은 무척 좋았습니다. 나는 일반학교도 다녔었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었습니다. 미국 유학을 부담 없이 갈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미국에서도 내가 편히 생활할 수 있는 재정적인 뒷받침이 있었어요. 박사학위 논문지도 교수님도 영어를 잘 못하는 나에게 많은 배려를 해줬어요. 나한테는 이러한 여건이 마련됐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될 수 없으니까 내가 특별하게 보이나 봐요. 장애우가 나를 보며 자기위안을 할지도 모르죠. 아니면 실제로 비장애우가 배려해주지 못하니까 "저런 사람도 있다. 너희는 뭐하냐"라고 큰소리치기 위해서 나를 이용하는 것일 수도 있죠. 그럴 때면 참 괴로워집니다"
-국내에 장애우 문제의 심각성은 느끼고 있습니까
"심각하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되더군요. 마치 비장애우가 장애우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는 또 한참 동안 뜸을 들였다. 말하기가 무척 괴로웠나 보다
"그런... 그런 나에게 장애우를 대표한다고 얘기할 수 없는 거에요. 나는 장애우들의 귀감이 아닙니다. 나는 단지.... 나는 그냥 비장애우로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갈 뿐입니다"
어느새 그의 목소리는 풀이 죽어 있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자신을 가리켜" 비장애우"라고 말했지만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를 장애우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기자는 혹시 황 교수가 자기위안의 방편으로 "비장애우"라고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는 다시 한 번 한국사회의 장애우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우리나라는 장애우가 살아가기 무척 힘든 곳이죠. 어려움이 많을 거예요. 솔직히 나는 장애 정도가 심하지 않기 때문에 장애우 문제를 얘기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요. 그러나 바람이 있다면 장애우와 비장애우를 구분지어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장애우 자신부터 그러한 구분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비장애우보다 못할 꺼야"라는 절망적인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런 시각을 갖기 위해서는 편견에 사로잡혀 희망을 갖지 않는 장애우 자신부터 변화돼야 합니다. "내가 다를 게 뭐가 있느냐"고 당당히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죠. 그러나 현재 편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죠. 시각을 변화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각을 바꾸기 위해서 손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있어요. 비장애우와 장애우가 서로 많이 접할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거리에서건, 사무실에서건 어디에서나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런 편견은 쉽게 사라질 것이라고 믿어요"
이게 막 교수로서 삶을 시작한 그에겐 꿈이 많을 것이다. 당당히 비장애우로 살아가는 것이 그의 꿈일까?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어요. 그래서 훌륭한 학생들을 배출하고 싶죠. 그리고 시간이 허락된다면 내 공부도 하고요. 어쨌든 교수로서 열심히 살아보고 싶습니다."
이 답변으로 인터뷰가 끝났다. 인터뷰를 마치자 그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수학과 여교수였다. 다시 그는 일상의 자신으로 돌아간다.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받게 되는 관심이 아닌 위대한 수학자로서의 자신을 만들어 가기 위해, 그리고 비장애우와 장애우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으로 한걸음을 디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작은 노력이지만 비장애우에게 자신의 "모습 보여주기"를 하고 있다. 집에서 학교까지 20분간의 거리를 걸어가며 스쳐가는 많은 비장애우들이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편견을 깨뜨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면서 오늘도 황 교수는 걷는다.
글/김수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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