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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아무것도 모르겠더라구, 허허 벌판이야."

- 장애우 어머니 최임춘 -

본문

                 "아무것도 모르겠더라구, 허허 벌판이야."

                       - 장애우 어머니 최임춘 -
 장애우 어머니 최임춘씨는 무려 삼십일 년을 장애를 가진 두 아이를 키우면서 애를 끓여왔다. 그렇지만 이제 두 장애우의 어머니로서만이 아니라 춘천 지역 장애우들의 대모로 인정을 받으며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그이, 그이를 만나 그이의 가슴 속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태곤 (함께걸음 기자)

 

 장애우를 자녀로 둔 한 어머니의 이야기를 해보자.
 장애우 부모의 경우 사회적인 통념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매사에 힘들어하며, 열등감으로 인해 장애를 가진 자녀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쏟아 붓는, 다분히 부정적인 인상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이 말은 역으로 그만큼 부모들이 매우 심한 심적 갈등을 겪으며 힘들게 하루하루를 지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되겠다. 사실 장애우 부모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 부모들의 처지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 모른다. 그 하세월 켜켜히 쌓인 한 많은 사연들을 누구라 이해할 수 있겠는가란 물음을 던져보면 더욱 그렇다.
 올해 예순두 살인 최임춘씨는 춘천에서 산다. 그이는 지금 술하에 장애를 가진 자녀 둘, 장애를 가지지 않은 자녀 한 명을 두고 있는데 큰 아이가 올해 서른세 살이니까 무려 삼십삼 년을 장애우 어머니로 살아왔다.
 아직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활발하지 않았던 때, 명문여대를 나와 교사 생활을 하다가 의사인 남편과 결혼해서 당시로서는 상류층 생활을 꿈꾸던 그이에게 장애를 가진 자녀의 출현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쉽게 절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지만 그보다는 무엇보다 자존심에 치유할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는 말이 맞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일생을 상처받은 자존심을 보상 받으려고 지나칠 정도로 자녀에게 집착하며 살아온 그이를 보면 장애우 자녀는 가진 것이 없는 부모들에게 더욱 심한 고통을 주지만 가진 것이 있는 부모들에게도 그에 못지않은 만만치 않은 고통을 준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제 그이 가슴에 쌓여 있는 응어리의 한 부분을 펼쳐 보자.
 그이 이야기는 일천구백육십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이는 결혼 삼 년째에 이르러 전농동에 살면서 여전히 교사로 일하고 있었으며 남편은 낮에는 육군 사관학교 병원장으로 근무하면서 밤에는 청량리에 조그만 병원을 개업해서 환자를 보고 있었다.
 일천구백육십사 년, 그이 슬하에는 생후 일 년 팔 개월 된 아들 진홍이와 생후 십개월 된 딸 영림이가 있었다.
 별탈 없이 화목한 가정이 이어지던 어느 날 아침, 그이가 출근길을 서두르면서 보니 평상시에 아장아장 걸으며 엄마에게 작별인사를 할 영림이가 갑자기 온몸이 불덩이 같이 뜨거워진 채 자지러지듯 울고 있었다. 그이는 별 수 없이 출근길을 늦추고 아이를 달랬다. 그러자 아이는 조금 나아진 듯했고, 그래서 그이는 "아이 아버지가 퇴근해서 보면 낫겠지" 라고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오후에 그이가 퇴근해서 돌아와 보니 영림이는 아침보다 더 열이 나고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숨 가쁘게 우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이는 "감기를 앓는 정도겠지" 라고만 생각하고 영림이에게 감기약을 먹였다. 그랬는데 밤에 자다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일어나보니 남편이 새파랗게 질린 채 영림이를 안고 울고 있었다. 그이는 "왜 그러느냐?"고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영림이가 소아마비에 걸린 것 같다"고 대답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이는 소아마비라는, 당시로서는 질병인 이 장애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었다. 그래서 "병이면 나을텐데 남편이 왜 저렇게 심각하지" 라고 생각하며 의아해했을 뿐이었다. 통행금지가 실시됐던 때라 그 즉시 병원으로 가지 않고 날이 새기를 기다려 그이와 남편은 영림이를 안고 세브란스 병원으로 달려갔다. 영림이를 본 의사는 남편 말대로 소아마비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그이는 "별거 아니겠지, 이미 예방주사도 맞혔으니까 곧 나을 거야" 라고 자위하며 우는 영림이를 달래는데 신경을 썼다. 영림이는 그 날로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 후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이에겐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남편이 아들 진홍이를 안고 헐레벌떡 입원실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이었다. 남편의 첫마디는 "이 애마저 걸렸다"는 말이었다.
 그때서야 그이는 비로소 소아마비라는 장애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아이들의 장애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굳어져 있었다.
 아들마저 병원에 입원 시키고 그이는 경황이 없는 중에서도 도대체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를 따져 보았다. 그이는 곰곰이 생각했지만 아무리 돌이켜봐도 잘못될 것이 없었다. 얼마 전 아이들에게 예방주사도 맞힌 후였기 때문에 그이는 더 혼란스러웠다.
 그이에게는 대학을 같이 다닌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서울 시내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었던 그 친구가 "내게 소아마비 예방주사가 있으니까 우리 아이들과 너희 아이들에게 맞히자"고 해서 그이는 아들에게는 이차까지 예방접종을 시켰고, 딸아이에게는 일차 예방접종을 시켰던 터였다. 집에서도 직장 때문에 엄마 젖만 못줬지 위생은 문제가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두 아이 다 소아마비에 걸리다니,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이가 이렇듯 당황해 하는 사이 아이들의 장애 상태는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특히 아들 진홍이는 호흡기까지 마비가 돼 산소호흡기 없이는 단 일분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심한 장애 상태로 치달았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그이는 억울해 할 사이도 없이 아이들의 치료에 매달려야 했다.
 "내가 엄마로서 이 아이들을 망가뜨려 놨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지만이 아이들을 살릴 수 있고 잘 키울 수 있는지를 전혀 모르겠더라구. 허허벌판이야. 백지야. 아무것도 모르겠더라구."
 그이 말대로 백지 상태로, 그래도 막연하게 "이렇게 해야 힘이 생긴다." 는 단 한 가지 생각을 하며 그이는 아이들에게 매달렸다.
 "하나 예를 들면 물리치료 자체도 얼마나 힘든 건지 몰라요. 물탱크 있잖아요. 아이들 근육 힘을 기른다고 거기에 아이들을 잡아매서 넣는 거예요. 뜨거운 물이 막 돌아 가는데 아이들은 힘이 없으니까 다리가 제멋대로 올라와요. 간호사나 엄마가 미쳐 못 봐주면 아이가 아파서 막 우는데, 그렇게 힘들기 때문에 하루에 한 번만 허용되는 물리치료를 나는 욕심 때문에 하루 두 번을 시켰어요. 그러면 아이들은 엄마 안 나아도 좋으니까 제발 그 치료 받지 않게 해달라고 애원해요. 그래도 나는 시켰어요. 그리고 아이들 병원에 있을 때 내 손은 늘 불어 있었는데 왜냐면 아이들이 물리치료 받고 나오면 또 쉬지 않고 핫팩을 시키는 거예요. 아이들이 너무 뜨거워서 울면 나는 이거 빨리 해서 너희들이 나아 내 잃었던 자존심을 찾아줘야 한다. 그러면서 멈추지 않았어요. 간호사가 애들 좀 쉬게 하라고 그러면 알았다고 대답하고 간호원이 나가면 또 시키고, 한 마디로 아이들을 달달 볶은 거야."
 아이들은 이 년여를 병원에서 보냈다. 그 기간동안 수술과 물리치료를 병행했지만 애쓴 보람도 없이 아이들의 장애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이 년 만에 의사가 "병원에서는 할 일이 없으니 퇴원해라"고 해 그이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 와야 했다. 이 년여를 병원에서 보낸 성과는 큰아이 호흡기 마비가 풀리고 두 아이 다 겨우 앉을 수 있을 뿐 양 다리를 쓰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집으로 돌아와서 그이는 한동안 실의에 찬 날들을 보낸다. 남편은 의욕상실로 술을 먹고 우는 날들이 많아지고, 그이는 그이대로 아이들이 싫어져 방관자로 절망만을 곱씹으며 지냈다.
 "그 일년을 지금 생각하면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들에게 어떻게 했고, 어떻게 밥을 먹였고, 어떻게 하루종일 데리고 있었는지 기억이 잘 안나. 어디 간 것도 아닌데 말야. 나주에야 내가 이기적인 사람이구나 라고 깨달았지. 한 마디로 아이들이 싫어지더라고. 아이들 아버지는 술을 먹고 우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지만 나는 그런게 전혀 없이 아이들이 싫더라고. 아이들은 내 자식이 아니고 나는 아이들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처럼 생각되는 거야. 그러니 아이들을 끌어안고 우는 아버지 모습도 보기 싫지. 그때 내 생각에 이 사람들은 성이 박가야, 내 성은 최가야. 애써서 나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했어. 눈물이 나면 내가 이 사람들 때문에 왜 울어. 이건 전혀 내 책임이 아냐, 나는 먹어야 되겠어. 먹고 나는 얼굴 예쁘게 생겼으니까 화장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랬어. 이건 너희들 박가 몫이고 내 몫이 아냐, 나는 할거 다 했어. 그렇게 생각하며 일 년을 지냈지."
 그러다가 그이는 빈혈을 앓기 시작한다. 빈혈뿐만이 아니라 얼굴에 심한 경련이 와 그이는 심한 고통에 시달린다. 그이 말을 빌자면 그 지경이 되자 그이는 "아. 하나님한테 야단을 맞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방황의 터널을 빠져나온 그이가 선택한 길은 낙향이었다.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서울이 복잡하고 싫어 그이는 남편과 상의해 그이 친정이 있는 강원도 평창으로 생활기반을 옮기기로 했다. 딱히 그이 의지가 아니더라도 시부모님과의 갈등 등 상황이 그이의 평창행을 강제했다.
 당시만 해도 교통이 불편해 서울에서 일곱시간 차를 타고 가야 닿을 수 있었던, 전기불도 들어오지 않는 평창읍 대하리에서 남편은 병원을 개업했다. 병원을 개업하자 남의 속도 모르고 시골 사람들은 "서울에서 유명한 의사가 왔다"며 병원으로 몰려들었다. 환자가 많자 남편은 시름을 잊고 정성껏 환자들을 돌봤다. 전기불이 없어 수술을 할 수 없음에도 호롱불과 카바이트 불을 켜고 그것도 모자라 자동차 헤드라이트까지 동원해 수술을 해줄 정도로 남편은 인술을 베푸는 일에 몰두했다. 그이는 그이대로 남편 일을 도우며 시골 사람들의 순박함에 매료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내는 일의 보람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지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양딸 양녀를 둘 맞아들여 업혀서 학교에 보내 공부하게 했다. 그렇게 지내면서 그이는 두 아이에게만 정성을 쏟으려고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임신을 했다. 그이는 처음에는 아이를 지울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안 친정엄마가 달려와 "내가 키워 줄 테니까 아이를 낳으라."고 사정해 그이는 셋째 아이를 낳게 됐다.
 셋째 아이를 몸 안에 가지고 있었던 그 시기, 그렇지만 그이 관심은 여전히 몸 안의 아이 보다는 진홍, 영림 두 아이에게 쏠려 있었다.
 "셋째 아이 생일이 일월 십팔일 인데 일월 십오일, 나는 배가 남산만 해가지고 한 친구가 고성에 용한 한의사가 있다고 해 트럭을 얻어 타고 대관령을 넘어갔다. 아침에 출발했는데 고성에 닿으니까 한밤중이더라고. 가서 그 한의사가 몇일날 대하리로 오겠다는 약속을 받고 거기서 하룻밤 자고 그 다음날 집에 돌아와서 십 칠일날 배가 아프기 시작해 십 팔일날 셋째 아이를 낳았지. 이런 무리를 했으니 셋째 아이가 온전할 수가 없었지. 그렇지만 그때도 나를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나는 오로지 두 아이들 고치겠다는 생각뿐이었기 때문에 누구한테 의논도 안했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서 아이들 약을 가져와야 돼, 이 생각뿐이었지."
 그이가 셋째 아이에게 얼마나 소홀했는지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이에겐 외삼촌이 한 명 있었는데 그이가 셋째를 낳고 이십여 일 지나서 다니러 왔다가 셋째 아이를 보더니 대뜸 그이에게 "너는 나쁜 계집애야"라고 욕을 했다. "너 어떻게 태아관리를 했길래 아이가 이 상태냐"고 덧붙인 외삼촌은 옆에 있던 친정어머니에게 "얘한테 아이를 맡기면 큰일 나니까 데려다 키우라"고 말했다. 그래서 셋째 아이는 난지 이십일만에 친정어머니에게 가서 여섯 살이 될 때까지 자라야 했다.
 한편 그이는 진홍이가 삼학년이 됐을 때 두 아이를 다시 세브란스 병원 부속 소아재활원에 입원 시켰다. 그이가 두 아이를 소아재활원에 입원 시켜야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우연히 진홍이 일기장에서 "걷고 싶다, 뛰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을 접하게 되자 그이는 "아차 내가 아이들에게 무심했구나. 어떻게든 아이들을 걷게 라도 만들어줘야겠다" 고 마음먹었다. 또 하나 그이가 두 아이를 재활원에 입원 시켜야 되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가 딸 영림이에게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인한 척추마비 증세가 시작될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다.
 두 아이들 세브란스 병원 부속 소아재활원에 입원 시키고 그이는 "이제 집에 가서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어 아이들 뒷바라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서울 나들이를 시작했다.
 아이들의 입원비는 그야말로 돈 한보따리였는데 고생해서 번 돈 한보따리를 싸가지고 서울 가서 이이들을 만나서 경과보고 돈 계산해서 내고 또 평창에 와서 호롱불 아래서 열심히 일을 하는 고단한 날들이 이어졌다.
 "그때 재활원 원생들 중 얼굴이 하얗고 제일 삐쩍 마른 아이가 우리 영림이었다. 이유가 뭐냐면 허리 브레스에다 양쪽 보조기까지 착용하고 거기다 양 목발까지 짚었기 때문인데 허리 브레스는 선생들이 이걸 차야 허리가 안 휘어지고 낫는다고 그러니까 다음달 엄마 오실 때 허리가 휘어지면 안 된다면서 땀띠 생기고 살이 터도 계속 그걸 차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그때 아이들이 내가 돌아갈 쯤 되면 날 붙잡고 엄마 가지마 그러면서 우는 거야. 그래서 내가 이번에 엄마 집에 갈 때는 울지 말자고 약속하자고 하면 고개는 끄덕여 놓고 울기는 마찬가지야. 얼마나 애처로웠는지 몰라."
 아이들의 재활원 생활은 사 년여 이어졌다. 그 기간동안 진홍이는 재활원 안에 있는 특수학교 초등학교 과정을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했고, 영림이는 초등학교 졸업반이 됐다. 그이는 그이대로 재활원을 오가면서 영림이 또래의 장애아들을 보고 많은 것을 깨닫는 중이었다. "나는 그래도 아이들 치료는 안 됐지만 남편이 도움을 주고 또 내 나름대로 아이들에 대하여 포기를 안 하고 살지만 다른 집은 어떨까. 아마 다른 집 부모들은 나 보다 더 힘들어 할 거야."
 그이의 눈이 주위로 열리는 최초의 계기가 된 이런 깨달음은 그이로 하여금 재활원 원생들 부모회를 만들게끔 한다. 그러나 부모회가 궤도에 오를 무렵 그이는 아이들을 재활원에서 퇴소 시켰다. 무엇보다 경제적인 능력이 안돼 아이들 입원비를 계속 대기가 버거웠기 때문이다.
 "속된 표현으로 이건 시루에 물 붓기야. 열심히 일해서 돈 조금 모아지면 나는 애들한테 갖다 주고, 그러니 뭐가 남겠어. 처음에는 주위 사람들이 만류하는 게 귀에도 안 들어 왔는데 친가 족에서 계속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이젠 너희들을 위해서 돈을 모아야지 견딜 수 있다고 얘기하더라고. 또 하나는 그나마 재활원에서 치료한 덕분에 아이들이 조금 나아진 상태니까 그 상태로 평창에 와서 공부하면 최소한 그 상태 이하로 퇴보하지는 않을 거 아닌가 이런 생각도 했지. 왜냐하면 두 아이 다 보조기를 차고 걸었으니까 말야."
 그러나 이런 그이의 바람은 아이들이 평창에 오자마자 깨진다. 지속적인 물리치료가 뒷받침 되지 않자 아이들은 보조기를 다 벗어버리고 또다시 업혀서 학교에 다녀야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이는 새로운 아픔에 시달렸다. 아이들은 걷는 연습을 하긴 했지만 잘 되지 않았고 시골이다보니 진학 문제도 심각한 난관으로 다가왔는지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이는 아이들이 표현을 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겪는 고통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이는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보조기를 안 하니까 특히 영림이는 눈에 띄도록 내려앉는 거야. 허리가 에스자 커브로 휘어지고, 허리가 휘어지니까 아픔을 호소하고, 거기다 꿋꿋하게 버티던 남편도 휘청거리기 시작하는데, 남자는 고통에 더 약해. 폭삭폭삭 무너지더라고. 그렇게 되자 나는 남편도 챙겨야겠으니 나도 막 죽겠어. 그래서 평창이 제 이의 고향이지만 여기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지.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든 거야. 남편과 의논은 했지만 거의 다 내 일방적인 의사로 칠십육년 결단을 내려서 내 아이들 셋에다 양딸 둘 양아들 하나 이렇게 아이들만 여섯을 데리고 춘천으로 나왔어. 남편은 그냥 평창에 있고 나만 나왔지."
 그이가 어려운 중에도 양딸 양아들을 데리고 나온 것은 물론 진홍, 영림이의 학교 통학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그이는 춘천엘 나오면서 당돌한 면모를 보여준다. 살집을 구하는 과정에서 그이 친구가 "다른 동네는 한 집에서 장애 가진 자식이 둘 있으면 구경거리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춘천 유일의 아프트인 공무원 아파트는 고급 공무원들만 사는 데니까 괜찮을 거다. 거길 알아봐라"고 조언하자 직접 시청을 찾아가 "나는 장애를 가진 아들 딸을 키우려는 사람이다. 춘천에 왔는데 다른 동네에서는 도저히 못 키우겠다. 공무원만 주는 집인지 알지만 아래층으로 하나 나도 달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이런 그이의 요구가 먹혀들어 그이는 당시 춘천 유일의 아파트인 공무원 아파트 한 채를 공무원과 똑같은 조건으로 임대 받아 살게 된다.
 이렇듯 그이는 매사에 당당했다. 그이의 당당함은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많은 장애우 부모들이 주눅들어 숨소리도 한 번 크게 못 낼 무렵 그이는 장애우 부모임을 숨기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많은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주위 사람들이 보니까 저 집은 두 아들 딸이 장애를 가졌는데 아이들은 맨 날 씩씩하게 다니고 엄마란 사람은 화장하고 멋 내고 다니더라 이거야. 그러니까 춘천에 사는 장애를 가진 자식을 둔 부모들이 호기심반 관심반으로 나에게 몰려드는 거야. 나는 가만히 있는데 처음에는 전화 오고 찾아오고 그러더니 그렇게 모인 게 금방 백명이 넘더라고. 그걸 보면서 이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생각했지. 내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후회되는 게 많았거든. 의료적인 거라든가 경제적인 거라든가 마음가짐이라든가 이런 경험을 사장시키지 말고 써먹어야 되겠다, 그래서 부모회를 만들었는데 그때 내가 제일 싫었던게 뭐냐면 부모들이 나를 붙잡고 어떻게 장애 가진 두 아이를 데리고… 하면서 우는데 기가 막히더라고. 그러면 나는 당신 몇 살이야 라고 물어. 그러면 나보다 한참 젊었지. 내가 면박을 줬어. 당신 왜 그러느냐, 당신 장애 가진 아이 밖에 없느냐고, 아이를 위해서도 당신 살아야 하지 않느냐 울지 말라고… 그렇게 부모회를 시작했어." 그이는 부모회 모임이 활성화 되자 당사자인 장애우 모임도 만들었다. 칠십칠년 "등대 모임"이라고 이름 짓고 춘천시 여성회관 내에 사무실을 하나 얻어 처음 아이들을 모았을 때의 기억을 그이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팔십여명 가량 모였는데 처음에는 너 몇 살이지 물어도 얼굴도 쳐다보지 않아. 얼굴이 어둡더라구. 그래서 내가 너희들 장애우가 된 것은 누구 탓이지. 왜 다리가 이렇게 됐지. 너희들 병신이지 그래봤어. 그랬더니 몇 아이들 가만있고 몇 아이는 토라지더라고. 내가 덧 붙였지. 그렇지만 너희들 장애우가 된 건 네 책임이 아니다.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 책임도 아니다. 문제는 누군가에게 책임이 있는 법인데 그 책임은 바로 나라에 있는 것이다."
 그이는 당시 아이들을 접하면서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첩첩이 쌓인 기막힌 사연들을 보고 그때부터 국가를 상대로 장애우들의 권인 요구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말하고 있다. "야 이거 대한민국 형편없구나. 첫째 장애 예방인데 국가가 책임져야 할 걸 안 했고, 또 예방을 책임져 주지 못했으면 고쳐 줄 의무가 있는데 그 의무도 지켜주지 않고 있다. 교육에 대한 의무도 안 지키고 그럼 도대체 정부는 뭐냐."
 그이는 이런 생각으로 결의를 다지고 있는데 다른 부모들은 주로 아이들에 대해서 부모가 책임을 져야 되느냐 안 져야 되느냐는 지엽적인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부모들이 책임을 지려면 자식들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지 않으면 책임을 질 수 없지 않느냐고 그러면 맞다고 그래. 그렇다면 우리 열심히 하자 가정일도 열심히 하고 남은 가족들을 열심히 키워야지만 이 장애를 가진 자식에게 도움이 된다. 이렇게 말해주곤 했어."
 그이는 칠십팔년 아이들 모임을 "강원도 지체부자유 아동복지회"란 이름으로 사회단체를 만들어 강원도에 등록 시켰다. 아이들을 모아 방학 중 정립회관 연수를 시키고 수술문제와 진학 상담을 하는 등 활동의 폭을 넓혀갔다.
 특히 장애아 수술 문제는 그이가 해낸 중요한 업적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아이들을 춘천 시청에 모아 서울에서 의사를 데려다가 진찰을 했는데 백팔십명 모인 장애아 중에 한번도 진찰을 안 받아본 아이들이 반 이상이야. 자기 장애가 무슨 장애인지도 모르더라고. 이런 아이들을 칠십팔년 한 해에만도 스물일곱 명이나 수술을 받게 했지."
 그때 만난 장애아들이 지금은 장성해서 여자 친구가 생긴다. 애를 낳는다. 결혼을 한다. 그러면 자기 부모 빼놓고는 나한테 달려와서 인사한다며 그이는 흐뭇해했다.
 그러면서 그이는 한편으로는 그이가 가지고 있던 최대의 고민인 영림이 수술 문제에 매달렸다. 영림이는 춘천여중에 들어가면서 척추가 더 심하게 굽어지고 있었다.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서울대 병원에서는 그대로 놔두면 허리마비가 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수술을 집도할 수 있는 의사도 없고 삽입할 기구도 없다며 난색을 표명했다. 그이는 궁여지책으로 홀트 아동복지회를 찾아갔다. 가서 "애 이렇게 놔두면 죽으니까 임시라도 해외입양을 보내달라"고 떼를 썼다. 안되는 걸 간절하게 부탁해 수속까지 마쳤지만 해외입양은 영림이가 "죽어도 안 간다."고 버티는 바람에 결국 포기했다.
 대신 홀트에서 가르쳐준, 미국에 유학가 있는 그 방면의 전문 의사에게 그이는 일주일에 한번 꼬박꼬박 부탁 편지를 썼다. "다 소용없습니다. 김박사님만이 우리 영림이를 살릴 수 있으니까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하자 얼마 후 그 김박사에게서 답장이 왔다. "이십 일 있으면 한국에 간다."는 내용이었다. 그이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받은 영림이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운 좋게도 연구 케이스로 지정돼 수술에서 회복까지 무료로 끝마칠 수 있어 그이를 기쁘게 했다.
 영림이는 그 후 강원대 건축학과를 나와 지금 강원도 장애인복지관에서 근무하고 있다. 처음에는 약대를 지망했지만 당시는 입학이 불허돼 차선책으로 택한 과가 건축학과였다.
 아들 진홍이는 춘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연세대 신학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원서를 넣었다. 그런데 면접일 전날 학교 측에서 불러서 갔더니 학교 측에서 "학교 시설이 휠체어 타고 다닐 시설이 안돼 있다"며 설득을 하는 것이었다. 그이는 다닐 수 있다고 우겼지만 "진홍이가 들어와서 힘들어서 몇 달 못 다니고 그만두면 그 고통이 더 심하지 않느냐. 제발 어머니 아이에게 그런 고통 주지 말고 시설이 돼 있는 작은 학교에 보내라"고 강권하는 바람에 그이는 결국 연세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이가 가본 강의실은 너무 꼭대기여서 휠체어로 다니기가 불가능했다. 그 후로 몇 번 다른 대학에 원서를 넣어 봤지만 결국 시설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그때 마음에 상처를 받은 진홍이는 그러나 대학을 포기하지 않고 지금도 열심히 입시준비를 하고 있다. 서른다섯 쌀까지 공부를 하고 그 다음엔 직장을 가지겠다는 것이 진홍이 말이다.
 그이 집안의 한 특색은 남편만 빼고 나머지 네 식구 모두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식구들 중 둘이 장애를 가지고 있다보니 남달리 사회복지에 관심이 많아서 그렇게 된 거 같다며 그이는 웃었다.
 현재 강원도 재활협회 지부장을 맡고 있으면서 여전히 장애우 복지의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이는 소망을 물어보자 "시설은 싫고 가능하면 시설보다는 마을을 만들어서 어려운 사람들과 같이 자유롭고 아늑하게 살고 싶다"고 대답했다.
 "장애우 문제를 해결해야 선진국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후진국으로 전락할 것이다."고 강조하는 그이, 그이는 "내가 아이들한테 미안한건 내가 해야 될 일을 포기했던 기간이 삼십일 년 동안이 삼 년만인데 그 삼 년을 그렇게 안 했으면 아이들이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았겠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며 장애우 어머니로서의 애틋한 심정을 피력했다.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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