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장애우 예술가들]소설가 고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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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고정욱
이태곤 (함께걸음 기자)
고정욱 연보
1960년 서울 출생
1990년 문장 작법서 ‘글힘돋움’ 냄
1991년 아내와 함께 육아일기 ‘아이를 키우며 나를 키우며’ 냄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선험’이 당선돼 문단에 나옴.
1992년 소년소설 ‘절름발이 소년과 악동 삼총사’ 냄
1993년 ‘살려 쓸 우리 말 4500’ 냄
1994년 장편 ‘원균, 그리고 원균’ 냄
고정욱은 경기도 남양주군 별내면 화적 3리 속칭 산말 동네에 ‘만파서재’ (萬波書齋)라는 작은 작업실을 가지고 있었다. 5평 남짓한 공간에 2천 5백여 권의 장서가 꽂혀있는 그 방에서 그는 최근까지 ‘원균’이라는, 우리 역사에서 논란의 중심축이었던 한 인물과 씨름해 왔다고 한다. 이제 그 ‘원균’을 떠나보냈지만 (그는 원균과 1년여 동거 끝에 원균을 화려하게 복원시킨 <원균 그리고 원균>이라는 제목의 단행본 두 권분량짜리 장편소설을 펴냈다.
‘원균’은 집요하게 그의 곁에 남아 만만치 않게 그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듯했다. 아직 치워지지 않고 벽에 붙어 있는 ‘원균’ 생가의 사진하며 ‘원균’이 마지막 격전을 치뤘던 칠천량 포구 등의 사진이 이를 증명한다.
책이 나오자 잇따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수없이 많이 ‘원균’을 입에 올려야 했으며 ‘원균’에 덧씌어진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애를 썼다고 했다. 다시 한 번 그 수고를 되풀이해야 한다는 것에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그것이 글을 쓴 작가의 의무였기 때문에 그는 선선히 물음에 답했다.
- 책이 나오자 ‘원균’에 대한 해석이 파격적이라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 1년 전 알고 지내는 출판사 후배가 기획을 의뢰해 왔다. 내용이 뭐였냐면 어린이용 위인전을 내려고 하는데 기획 자문을 해달라는 거였다. 나는 기존의 위인전들이 인물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이 없이 너무 탁월한 인물 묘사에만 초점이 맞춰져 씌어지고 있는 데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기존의 위인전하고 차별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지의 자문을 해줬다.
그러자 그 후배가 그럼 기획한 사람이 하나를 쓰라고 해서 전형적인 위인 ‘이순신’을 쓰겠다고 대답하고 1백 20매 분량의 이순신을 위인전을 썼다. 그런데 쓰는 과정에서 원균이란 인물이 걸리는 것이었다. 모두 다 원균을 죽일 놈으로 그렸는데 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었다. 원균이란 인물이 과연 그런 인물인가, 역사적인 사실이 그랬는가, 결론은 자료를 들쳐보고 논문을 구해 봤더니 ‘아니다’였다. 오히려 원균은 충신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면서 이거 이야기가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원균이란 인물을 붙들었다.
- 글을 쓰면서 상당 부분의 자료를 ‘선조실록’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기는데 ‘선조실록’은 일반에 공개가 된 책인데 그런 역사적 사실을 여지껏 일반인들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닌가.
=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맹점이다. 지금도 그것 때문에 논란이 많은데 결론을 이야기하면 그간 이순신은 여러 단계를 거쳐 왜곡이 돼왔다.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건 사실이고 훌륭한 장군인 건 틀림없지만 선조실록 다음에 나오는 수정실록에서 한번 왜곡이 되고 그 통념이 조선시대 내내 이어져 내려오다 근래에 들어서는 독재정권이 필요해 의해 결정적으로 이순신을 왜곡했다. 이런 단계를 거쳐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이미지가 고착됐는데 원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주로 한 연구결과는 80년대 이후에나 가능했다.
- 책에 대한 반응은 어떤가.
= 잘 나가는 편이다. 나온 지 한 달 됐는데 벌써 4판을 찍었다.
- 책이 나오고 나서 작가가 언론을 상대로 한 인터뷰를 주의 깊게 봤다. 작가의 장애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 나는 인터뷰를 하면서 의도적으로 내 장애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문학작품은 작품으로만 접근을 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편이다. 내 말은 장애가 굴레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글은 안 봐주고 장애우가 책을 냈으니까 인간승리 운운하는 것은 질색이다. 작가는 작품으로만 이야기해야 된다는 게 내 신조이다!
고정욱은 1960년 서울 용산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양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게 된 그는 장애만 빼고는 별 어려움 없이 유년시절을 보냈다. 신촌 근방에 살면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그는 장래에 당연히 의대에 진학해 의사가 되리라는 꿈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대입을 앞두고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의과대학에 들어가려고 대학을 알아봤더니 장애우는 안된다고 퇴짜를 놓는 것이었다. 이유는 실험 실습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낙담하지 않고 그렇다면 공대로 가자는 결정을 내리고 공과대학을 알아봤다. 그러나 공대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그의 대학입학을 거부했다.
십수 년을 오로지 대학을 가기 위해 이과 공부를 죽어라고 했던 그로서는 갈 만한 과가 하나도 없다는데 커다란 낙담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살아오면서 타의에 의해 자신의 의지가 꺽인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결국 진학 지도 선생님이 문과로 방향을 돌리라고 해서 그는 대학입시를 목전에 두고 다시 시험준비를 해서 1차에 떨어지고 2차에 아버지가 원서를 집어넣어 합격한 곳이 성균관대 국문과였다.
1980년 대학에 들어간 그는 처음 1년은 적응하지 못해 방황해야 했다. 그러다가 2학년이 되면서 “나도 문학을 해보자. 나도 살아남아야 될 거 아니냐.”는 판단이 들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 처음부터 그는 소설을 썼는데 그렇게 된 것은 시는 정말 재능이 있어야 쓸 수 있지만 소설은 노력과 체력 그리고 집념이 있으면 가능하리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쓴 소설은 ‘부화 연습’이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이었다. 부잣집 아들과 가난한 여공 사이에 일어난 일을 소재로 작품을 완성한 그는 이 소설을 교내 문학상에 응모했다. 비록 당선은 되지 않았지만 심사평에서 가능성을 인정받게 되자 그는 용기를 얻어 소설습작에 몰두했다. 그의 노력은 4학년 때 교내 문학상에 그의 작품이 당선되는 것으로 가시화됐고 그때부터 그는 소설가로서 자신의 진로를 자리매김한다.
그가 문단에 정식으로 나온 것은 1992년이다. 이 해 그는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선험’이라는 작품으로 당선돼 등단 절차를 마무리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등단하기까지 기간이 길었던 것은 졸업할 무렵 학문에 매력을 느낀 그가 대학원에 진학했기 때문이다.
성균관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다시 ‘한국 근대 역사소설 연구’라는 논문으로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지금 모교에 강사로 출강하며 국어작문과 문학개론 등을 가르치고 있는데 소설 못지않게 학문 또한 여전히 그의 관심사인 듯했다.
- 지금 작가는 학문과 소설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어느쪽에 더 관심이 있는가.
= 처음엔 갈등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사실 글 쓰는데 학벌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내가 공부만 한다면 소설은 쓸 필요가 없다. 공부만 많이 하고 논문만 쓰면 되는 것이다. 반대로 내가 공부를 안 하고 쭉 소설판에 뛰어들었다면 지금보다 낫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런데 그 갈등은 이번 소설을 쓰면서 다 풀렸다. 두 가지가 동시에 양립될 수 있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자료를 검토하면서 자료 사이에 있는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는 능력은 대학 다니면서 체득된 분석능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학문은 소설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 작가에 대한 평가의 하나로서 분석능력뿐만이 아니라 착상을 이끌어내는 데에도 남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 소설도 그런 착상의 결과물인 것으로 읽혀지는데 그런 재능의 원천은 무엇인가.
= 나는 글을 쓰기 위해서 늘 머리로 구상한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상상력이 뛰어나며 포착하는 능력이 남다르다는 판단이 드는데 그건 기획력에서도 확인된다. 내가 낸 책 <글힘돋움>과 <살려 쓸 우리말 4500>도 기획력의 소산이고.
가령 이런 일도 있었다. 재작년 실제로 내가 기획했는데, 최불암 씨리즈가 한창 유행할 때 내가 어떤 점을 포착했냐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웃기는 얘기만큼 좋아하는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는 것이었다. 그건 바로 무서운 이야기다. 그 감이 오면서 이거면 상품이 된다는 판단이 들어 내가 강의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리포트로 자기가 알고 있는 무서운 이야기를 다 써오라고 했다. 그걸 정리하고 원고를 만들어서 출판사 몇 군데와 섭외를 했는데 다들 용기를 내지 못했다. 한마디로 연대가 안 맞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작년 여름 <공포특급>이라고 무서운 이야기를 모은 책이 나와 큰 히트를 쳤다. 내 기획력은 이 점만 봐도 확인된다.
-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언뜻 이런 생각이 듣다. 작가가 글을 쓰면서 이 작품이 팔릴 것인가 팔리지 않을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 같은데 과연 그런가.
= 그 점을 고려하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상업주의는 아니고 소설이란 장르가 산업자본주의 유통경로를 가장 잘 흡수할 수 있는 매력이 있기 때문에 그 점을 고려하는 것이다. 즉 상품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소설이 가장 크다는 말이다. 나는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독자들에게 읽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구상 단계에서 그 점을 많이 생각한다.
- 구체적으로 글을 쓸 때 어떤 특별한 주제에 천착하는 게 있는가.
= 별로 없다. 자유롭게 쓰고 싶은 것을 닥치는 대로 쓰는 편이다. 굳이 어떤 주제를 파고들겠다는 생각 또한 없다. 그렇지만 어떤 작품이든지 역사와의 관계를 떼놓고 쓰지는 않겠다는 입장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다. 가령 내 작품 <절름발이 소년과 악동 삼총사>도 동화지만 1970년대라는 당대 시대상황과 밀접하게 연관을 가지고 있다. 글이 잘못된 현실을 개선하는데 일조를 해야 된다는 생각도 물론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 쓴 작품도 그런 인식의 바탕 위에서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쓴 것이다.
- 거창한 말인지 모르지만 이 시대 작가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말을 하는데 나는 작가들이 독자가 글을 읽음으로써 읽는 자기의 삶이 어떤 삶이고 어떤 삶이어야 하는지를 깨우치는 작품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역사의식인데 현대인들은 자기도 모르게 항상 타성에 젖어 살고 있다. 문학의 역할은 그러한 타성에 젖은 사람들의 삶에 작품을 읽음으로써 ‘아 내가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는 그런 새로운 일깨움을 줘야 한다. 아무런 각성 없이 살다 죽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건 동물과 같은 삶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문학의 역할은 중요하다.
- 여지껏 작품을 쓰면서 특별히 영향을 받은 작가가 있다면.
=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작품 <그리스인조르바>를 읽은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이다. 그때 그 작품을 읽고 작가가 삶을 껍데기로 사는 게 아니라 매우 진지하게 살았던 것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의 영혼의 문제에 대한 해석과 삶을 대하는 치열성은 당시 이런 저런 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내게 해답을 주었다. 개인적으로 장애우들에게 그의 작품을 꼭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한마디로 강렬한 불꽃같은 감동을 주는 작가이다.
- 우문일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비장애우들이 관심이 있을 것 같아 물어보겠다. 장애 때문에 작품활동에 어려움은 없는가. 가령 취재할 때 어려움 같은 거 말이다.
= 전혀 없다. 차가 있으니까 어디든 다닐 수 있다. 그리고 소설은 취재만 해가지고는 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과 구성력, 그리고 작가의식이 일단 있어야 하고 그것에 보충되는 게 취재내지 경험인데 몸이 장애를 가졌으니까 집에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 작품을 쓰면서 장애문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 내 작품 <절름발이 소년과 악동 삼총사>가 장애를 표방하고 쓴 소설인데 나는 절대 장애를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장애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다만 장애 문제를 다루기가 힘들어서 아직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왜냐면 자기가 처한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기가 무척 힘들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장애 문제를 가지고 작품을 쓴다면 비장애우가 장애를 소재로 쓴 작품보다 훨씬 더 뛰어나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아직 없다. 오히려 장애에 대한 관심은 문학적인 것보다 정치적인 면에서 접근하는 방식이 더 강한 편이다. 내가 보기에 장애우 문제가 개선되려면 장애라는 특수한 현실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 같다. 그리고 장애아를 낳아도 부모가 걱정하지 않는 사회가 조속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내 바람이다.
그의 집은 상계동이다. 1988년에 결혼한 부인 이연숙씨와의 사이에 그는 이제 6살과 3살된 아이 둘을 두고 있다. 명색이 전업작가로서 그는 효율적인 작품활동을 하기 위해 과감히 집을 뛰쳐나왔다고 했다.
그가 만파서재에 입주한 것은 1년 전이다. 이 만파서재에서 그는 일주일 중 강의가 없는 3일을 보내고 있다. 그는 지금 연애소설을 하나 기획하고 있는데 이 연애소설 역시 단순한 연애소설이 아니라 80년대라는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역사의식에 줄을 대고 쓰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 점을 봐서 그가 글을 쓸 때 특별한 주제에 천착하지 않는다는 말은 어쩌면 틀린 말인지 모른다. 그만큼 그는 역사와 개인의 상관관계에 집요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 자체가 그의 작품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장애 문제의 형상화에 자신을 가지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역으로 장애판 자체의 역사의식에 대한 문제제기로도 읽힐 수 있다. 장애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가 장애판에서 작품화할 치열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은 장애판이 가지고 있는 한계로 비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장애판이 서는 날, ‘고정욱 그에게서 나올 작품은 장애우의 주체적인 인간상일 것이다.’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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