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1]1993년 겨울 그리고 장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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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겨울 기리고 장애우
-상계 4동 빈민장애우들을 찾아-
달동네, 그 가파르고 숨가쁜 삶의 지평 속에서 높처럼 가라앉아 이름없이 살아가는 장애우들. 멸치볶음조차 만들어 먹을 수 없는 절대빈곤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는 달동네 장애우들의 맵고 차가운 겨우살이가 끝나는 날은 과연 언제일까.
오숙민 / 함께걸음 기자
노원구 상계 4동은 서울에서도 손꼽을 수 있는 달동네이다. 드문 드문 보이는 새 건물과 오피스텔을 빼고는 당고개역 주변의 집들은 모두 땅바닥에 납작 업드려 있으며 붉은색 기와지붕이 산언덕을 따라 빽빽히 늘어서 있고 역주변에는 길을 넓히느라 헐어버린 집들의 무너진 벽이 볼쌍사납게 남아서 쓰레기장과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로 쓰이고 있다.
비탈진 언덕길 한모퉁이에서 벌써 24년째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하고 있는 변형균(54)씨는 이 동네의 터줏대감으로 몇 달 전만 해도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지체장애인협회 노원지회 사무실을 다니며 상계4동 분회일을 했다.
자신이 장애우이다 보니 상계 4동 장애우의 생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혹 도움을 줄 수 없을까하는 고민 끝에 상계 4동 분회일을 맡았는데 얼마 전 그만두고 말았다. "장애우를 팔아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지체장애인협회에 대한 그의 생각이었다.
장애우들은 교육과 결혼, 취업등에서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생활이 어려워 달동네에 살고 있는 이들이 많다. 상계 4동만 해도 전체 주민 1만7천9백명 가운데 장애우세대가 1백21세대, 1백26명으로 집계돼 있으며 영세민 2백89세대 중 26세대가 장애우 세대이다.
"지금도 노원구 중계동에 있는 영구임대아파트단지를 빼면 상계 4동에 장애우도 많고 어려운 사람이 제일 많아요. 지체장애우들이 제일 많은데 밥을 못먹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1~2급을 제외하고는 무슨 일이든 해서 먹고 사니까. 내가 볼 때 부부가 다 벌지 못하는 사람이 어려운 것 같아요."
상계 4동 동사무소 사회복지과 담당 직원에게 변형균씨를 소개 받고 찾아간 날, 변씨는 그동안 보아 오던 이들중 어렵게 사는 장애우 몇 명을 알려 주었다.
<무허가 건물과 맞바꾼 장애우복지>
31통 1반의 세대주는 올해 63세의 이남순씨로 15살 때 대전역에서 기차사고로 양다리를 잃어 밖으로 나다닐 수가 없다. 88세 된 어머니를 모시고 부인과 함께 살고 있는데 자식이 없으니 세 노인만 살고 있는 셈이다. 지금 살고 있는 12평짜리 무허가 주택은 69년에 상계동으로 이사오면서 살기 시작한 집인데 한 모퉁이를 뭉텅 잘라 복덕방을 내줘 세를 받고 있다.
"그때는 남동생은 군대가고 여동생들은 시집가서 아버지, 어머니, 나하고 서이 살았지. 여긴는 철거민촌이기 때문에 전기도 없고 수도도 없는 허허벌판이라고. 아무 것도 주머니에 없는 사람들만 있었지. 공장도 없고 벌어 먹을 게 없었지. 그러니깐 타락한 사람들은 매일같이 술먹고 다니고 주먹 센 놈들은 주먹을 휘두르는 세상이지. 그래서 살아 나온 게 뭐냐면 봉투를 붙였어. 사각봉투도 붙이고. 그래 인건비가 싸니까 시내 사람들이 일거리를 준거지.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하고 둘이 조금조금 갖다 했지. 나중엔 잘붙인다고 차때기로 갖다 주더라고. 그렇게 죽으나 사나 그걸 몇 년했지."
고향인 충남 옥천군을 떠나 식구들이 서울로 올라온 이후 이남순씨는 가내부업으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왔다. 처음 봉투 붙이는 일을 했는데 이나마 규격봉투가 나와 일감이 들어오지 않자 나무로 만든 벽걸이용 장신구에 락카칠을 하기도 했다.
이남순씨를 찾은 날 한쪽 방에는 늙은 어머니가 누워 있었고 두 부부는 마루에서 스티로폴 판자 위에 핀을 꼽는 가내부업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이 일도 매일 있는 게 아니어서 한달 내내 부부가 매달려야 겨우 10만원을 번다고 한다. 그 돈을 가지고 어떻게 사냐고 했더니 복덕방 가게를 내주고 월세 12만원을 받고 있다고 한다.
올해 55살인 부인 이복기씨는 45살 때 동네 사람 한씨가 애를 써줘서 부부의 연을 맺었다.
"아저씨와 결혼할 때 내가 많이 고민했지. 나도 외롭거든, 부모형제 없고, 와서 보니까 안됐더라구.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냐. 저런 사람 도와주고 살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 처음엔 내가 많이 울기도 하고 몇 번 도망갈려고 그랬다고. 말도 못했지. 안살아 본 사람은 몰라. 남들도 두 부부가 손잡고 가는 것보면 부럽고, 나도 여자니까. 휠체어를 타니까 다니려면 내가 항상 업고 다녀야 하니 에로가 많지."
한달 벌이 22만원. 한 사람의 최저생계비에도 못미치는 돈을 가지고 세식구가 살아야 하는 형편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무허가 주택이지만 이남순씨의 소유이기 때문에 영세민에서 제외되어 있다. 그래서 10년이 넘은 휠체어가 자꾸 뒤로 넘어가 바꾸고 싶어도 동사무소를 통해 보장구 신청을 할 수도 없고 새마을 취로사업을 나갈 수도 없다.
집에 나이 많은 시어머니와 몸이 불편한 남편 때문에 집을 비우기도 어렵지만 이복기씨는 일을 하고 싶어도 몸이 아파서 일을 못한다고 한다. 그의 소원은 딱 두가지 뿐이다.
"배급이나 줬으면 좋겠어.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새마을 일이라도 주면 얼마나 좋아. 집 있다고 안주는거야. 그거라도 주면 점심엔 집에 와서 먹으니까 아저씨 밥 차려 주고 일 나갈 수 있거든. 안준다는데 어떡해. 애들 있으면 우린 벌거 벗고 나가서 벌어야 돼. 애가 없이니 살지."
이남순씨는 한 달에 한번 정도 부인이 업어서 태워주는 휠체어를 타고 당고개역까지 내려갔다가 온다. 간혹 장애우 행사가 있어 밖에 나갈 기회가 있으면 다른 사람을 유심히 본다고 한다.
"나가 보면 좋은 사람이 더 많지. 넘어지면 보고 가는 사람이 더 많은지, 와서 일으켜 주는 사람이 더 많은지 그걸 보는 거라구. 우리야 현상태로 사는 수밖에 더 있냐고. 남을 넘볼 수도 남을 괴롭힐 수도 없는 거구. 장애우를 반겨주는 마음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 이말이야.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다구. 인간이 인간의 도리를 모르고 사는 사람이 인간이냐 이거야. 돈하고 사는 사람이지."
무허가 주택을 가지고 있다고 그나마 영세 장애우에게 주어지는 혜택조차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말이되는 거냐고 이남순씨는 격앙된 목소리로 정부의 장애우정책을 따졌다.
어떤 집이든 갖고 있으면 대충은 사는것이라고 합리화하며 그 살아 가는 모습을 애써 외면하려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멸치 볶음을 만들어 본 적이 없어요>
상계 4동의 붉은 기와집들은 67년부터 이곳에 모인 철거민들의 집이었기에 지금도 무허가 주택이다. 하지만 같은 무허가 건물이라도 건물대장에 올라 있는 것은 "집"이라 이름붙일 수 있겠지만 이승준(40)씨가 살고 있는 건물은 집이 아니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공터에 베니어판을 이어 붙여 네모 모양의 상자곽을 만든 다음에 그물 같은 검은 천을 씌워놔서 밖에서 보기엔 큰 짐을 쌓아놓은 것 같아 보인다. 방 문도 그물 천을 걷어 봐야지 그냥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마당 앞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널려져 있어 마치 쓰레기 소각장을 떠올리게 한다. 이 판자집을 1년에도 몇 번씩이나 구청에서 뜯으러 온다고 한다.
이승준씨는 남들이 보기에 약간 바보같이 보이는 사람이다. 영세민이라 새마을 취로사업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의 부인은 정신지체 2급 판정을 받았다고 하는데 대화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7살난 딸 하나가 있는데 야무지게 생겼다.
"상계동에는 77년부터 살았지만 이집에는 88년부터 살았어요. 버스 운전하는 남동생이 달달이 5만원씩 보내줘요. 쌀은 동사무소 가서 달라고 해서 받아 먹지요. 취로 사업 나가기 전에는 여기서 창경궁 다니면서 청소일을 하고 살았어요. 그러다 2~3년 전부터는 취로 사업만 나가고 있죠."
한 달에 취로사업 나가서 26만원을 번다고 하는데 의심쩍어 변형균씨 집에서 다시 물어보니 아마도 그만큼은 벌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취로사업은 하루 일당이 1만3천원인데 기껏해야 한사람이 10일 정도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엌 겸 방안 한 켠에는 밥을 해먹을 수 있게 가스렌지가 있고 다 낡은 장롱과 불이 들어오지 않는 냉장고 한 대 , 빈 책꽂이가 하나 놓여 있었다.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밥솥도 보이지 않는다. 한달에 생활비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여 물었더니 부인 정형숙씨는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동사무소에서 주는 쌀은 모자라요. 쌀도 일반미 못먹고 푸대쌀 사다 먹어요. 수도가 없어 옆집에서 끌어다 먹는데 겨울엔 호스가 얼어 물받아 먹기가 어려워 죽겠어요. 전기도 한 달에 3천원 주고 끌어다 써요. 이불 빨래는 장마지고 그럴 때 냇가 가서 빠는데 요즘엔 비가 안왔잖아요. 제일 힘든 것은 구청에서 집을 부수러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겨울에 추우면 어디로 가요."
부인 정형숙씨는 얼마 전부터 자꾸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병원에 가도 낳지 않아 걱정이라고 한다. 또 남편 이승준씨가 몸이 약한 것도, 딸 나라가 자꾸 손바닥 발바닥에 허물이 벗겨지는 것도 걱정이다.
"콩나물국, 된장찌개도 끓이고 두부도 부쳐 먹어요. 애들 반찬은 따로 해줘야 하는데 멸치 볶음, 쥐포볶음 같은 것은 못하겠더라구요. 한번도 안해 먹어봐서 어떻게 할 줄을 알아야죠."
정형숙씨는 내년이면 나라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해야 할 텐데 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동생을 다른 데로 보내야겠어요>
같은 장애우라 해도 결혼한 이들은 서로 의지하고 도와가면 살 수 있다. 어려운 생활을 이겨나갈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가족의 힘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30통 3반에 사는 김종석(65)씨는 부인도 자녀도 없이 형님 집에 얹혀서 살고 있는 외돌토이다.
김종석씨는 청각장애우라 대화를 할 수가 없고 마침 찾아간 날도 집에 없었다. 형님 김금돌(71)씨가 대신 많은 애기를 들려 주었다.
"육남매 중 내가 맏이고 종석이가 셋째지요. 고향은 경남 통영군 산양면인데 거기서 아버님이 돌아 가신 뒤 식구들이 먹고 살자고 헤어졌지요. 어머님이 서울에서 돌아가셨단 얘기를 듣고 그때 속초에서 배를 타고 있었는데 가족들과 올라왔지요. 37살 땐데 그 뒤로 객지로 못가고 노동판을 돌아다니면서 형제들하고 같이 살았어요. 동생을 맡게 된 것은 누가 형제간에 뾰족하게 사는 사람도 없고 내가 맏이니까 맡은 거지요. 서울 와서 한글이라도 깨우쳐 볼까 학교에 넣으려고 하니까 나이 많아 안 된다고 가르치지 못했어요. 그래서 무식자로 저리 사는거예요. 여기 정착한지가 20년은 됐을 거요. 이집도 산 지가 11년 밖에 안됐어요. 그전에 종석이를 결혼시켰는데 동생이 여자를 다룰 줄도 모르고 옆에 누가 있으면 잠을 자지 못해요. 그래 상계동 와서도 다시 여자를 구해주었는데 그 여자도 살지 못하고 나가 버렸지."
말하는 중간 중간 김금돌씨는 동생에 대한 깊은 책임감을 내비쳤다. 겉모습만 보아도 오랜 노동에 단련되어 나이가 들었어도 다부지고 깡다구가 있어 보이는 체격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빛은 밝지 못했다. 뱃일을 그만둔 뒤 마장공이 되어서 30년이 넘게 일했지만 천식이 심해서 작년부터 일을 못하고 집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동생 김종석씨도 부지런한 성격이라 형을 따라 다니며 목수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서른이 넘으면서 허리와 허벅지가 아프기 시작했고 15년 전부터는 아예 현장일을 나가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아프다고 한다. 대신 하루 이틀씩 목공소에 나가 일을 하고 돈을 벌어 오고 있다.
"동생은 세대주로 독립돼서 영세민으로 올라가 있어요. 매월 정부에서 쌀 10킬로그램, 돈이 3만원씩 나오지요. 병원비, 약값은 무료이고, 동생은 자기 몸만 성하면 어디 가서 뭐라도 하려는 성의는 있어요. 한 가지 이런 문제는 있어요. 일을 해 놓으면 날짜를 알아가지고 자기가 벌은 돈을 받아 와야 하는데 그걸 못해요. 돈을 갖고 있으면 자꾸 남에게 보여 가지고 주변에 있는 이들이 술먹고 그돈을 없애버린단 말요. 하지만 그렇게 아파도 일은 나가요. 일이 있거나 방에서 이불 깔고 눕지를 않고 나가니 그게 좋지요."
지금까지는 형 김금돌씨가 건강해서 일을 할 수 있으니 동생을 데리고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김금돌씨가 아프면서 동생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하다고 한다. 부인도 나이가 많아 일은커녕 빨래와 식사 준비하기도 힘들다. 세식구의 생활비는 아무리 아껴 써도 30만원이 든다. 이런 상태에서 김금돌씨가 그동안 모아 놓았던 5백만원을 까먹고 있다고 한다. 이게 얼마나 갈까.
김금돌씨 부부가 나이가 들어 몸이 아프기 때문에 동생이 부담이 되고 있다. 두 사람이야 자식들이 모시지 않더라도 집이라도 팔아 살아갈 결심을 하고 있지만 동생을 데리고 있는 게 점점 힘이 부쳐 이제 몇 년 사이에 결단을 내려야 할 입장이다.
"그래도 내가 살고 있으니까 이 동생이 있는 거지. 내가 예를 들어서 큰병이라도 나고 영원히 꼼짝못하고 누워 있을 정도가 되면 어떻게 똑같은 사람을 데리고 있을수가 없는 것 아녀요. 내가 죽기전에 어디 선택을 해서 정부에서 보호해 주믄 보호대책을 찾아야지요. 공동체에서 자기가 살 수 있는 있는지 모르지."
몸이 낫지 않으면 어디든 다른데로 동생을 보내야겠다며 김금돌씬느 말을 맺는다.
상계 4동에는 지체장애우이지만 집에 미싱을 석 대 들여놓고 사람을 써가며 일을 받아다 하는 김미경씨도 있고 변형균씨 같이 가게를 해서 사는 이도 있다. 하지만 약간의 차이 뿐이고 대부분 장애우의 생활은 이남순씨나 이승준씨 그리고 김종석씨 처럼 이웃과 고립된체 외돌토리로 살고 있으며 살림살이 역시 팍팍하다.
정부에서 추산한 대로 장애우를 약97만명(UN 통계에 의하면 4백만명)으로 볼 때 영세민은 약 141,600명이다. 이는 전체 인구의 2.18%인 장애우가 영세민의 7.08%를 차지해 인구비율에 비해 생활수준이 떨어진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숫자는 또 전체 장애우 중 14.6%가 영세민이라는 것으로 영세민 기준이 1인당 월소득 15만원이하, 가구당 재산 1천3백만원이 라는 것을 볼 때 피부로 느끼는 장애우들의 생활은 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장애우의 생활이 알려져야 합니다>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변형균씨를 다시 만나 보았다. 그는 요즈음 지체장애인협회 노원지회를 나온 뒤 따로 맘맞는 동료들끼리 모여 장애우를 돕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다. 자신의 세대에는 안됐지만 적어도 이제는 각 구마다 장애우 자립작업장과 사무실이 생겨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장애우들이 집에만 있기 때문에 정보가 단절돼서 영세민 혜택에 대해서도 모르고 장애우 수첩을 만들지 못한 이도 많다고 한다.
"밖에 나서서 장애우 행사에라도 다니는 사람들은 그나마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에요. 정말 알아야 할 사람들은 집에만 있어서 밖에 나와보지 못한 사람, 가족들에게 무시당하며 사는 사람들이에요. 이런 사람들을 찾아서 많이 알려줬으면 합니다."
상계 4동 장애우들의 생활이 어렵고 팍팍할지라도 변형균씨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보면서 미래의 희망을 가질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 상계 4동의 비탈길에는 빨간 기와 지붕이 어둠에 쌓여 있고 방안의 불빛만이 반짝거렸다. 그 불빛은 우리에게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회의 책임과 역할을 알려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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