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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이웃]바늘 하나로 만들어 가는 새로운 세상

"옷을 만드는 사람들"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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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하나로 만들어 가는 새로운 세상
"옷을 만드는 사람들"을 찾아
힘들고, 더럽고 어려운 일을 멀리하는 사회풍조 속에 찬란했던 옛 영광의 그늘에서 90년대 봉제업의 새로운 싹을 틔우고 있는 "옷을 만드는 사람들" 한땀 한땀 바늘 하나로 만들어가는 새로운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
오숙민/한께걸음 기자

<90년대의 봉제인>
 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드르륵득득 미싱을 타고/꿈결같은 미싱을 타고/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시다의 언손으로/장미빛 헛된 꿈을 싹둑 잘라/미싱대에 올린다/끝도 없이 올린다.

"시다의 꿈"이라는 이 노래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 시에 곡을 붙인 것으로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학생들의  술자리에서 분이기가 차분해지면 즐겨 부르던 노래의 하나였고 사회운동단체의 연극이나 노래극에서 자주 들을 수 있던 곡이었다.
 당시의 봉제업은 이 노래처럼 하루 10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인데다 야근과 철야가 흔했고 임금이 너무 낮아 크고 작은 사업장에서 노동쟁의가 끊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요즈음 상황은 많이 달라져서 이 노래는 지난 시대의 분위기를 대표하기도 한다. "시"의 주인공인 시다가 미싱사가 되기 위해서는 몇 년을 기다려야 했는데 이제는 미싱사가 되려는 젊은 여성도 없을뿐 더러 간혹 있다 해도 직업훈련원 등에서 봉제를 배워 바로 미싱을 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일반인들은 요즘 아무리 생산직이 힘들다 해도 기본적으로 일하는 시간은 8시간을 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봉제업의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나쁘다.
 올해 24살의 강선아씨는 나이는 어리지만 봉제를 시작한 지가 6년이 돼가고 있는 데 평소에 자신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와 전사회사 다니는 사람과는 차이가 있어요. 전자는 학력을 따지거든요. 대부분 고졸이고하고 다니는 것을 봐도 외모에서 전자와 봉제는 차이가 있어요. 전자회사 다닌다면 괜찮게 봐주는데 봉제다 그러면 사람들이 차별을 두는 것 같아요." 강선아씨는 아직도 봉제업에 대한 사회 일반의 시선이 곱지 않음을 지적했다.
 봉제업의 현실을 살펴보면 노조가 있는 경우라도 9시간 일해서 40만원 미만을, 그외 영세업체는 기본 노동시간 10시간을 채우고 50여만원의 임금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 2천년대가 바로 코앞인데 이런 황당한 얘기가 나오는 것은 과거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이 여전히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기본으로 봉제업이 유지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찬란했던 봉제업은 과거의 이름>
 구로공단에서 이름을 대면 알만한 코오롱 계열사인 "삼경복장"은 봉제업의 흥망성쇠를 잘 말해주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이 회사의 생산직 노동자수는 1천6백명이 넘었고 주로 유럽으로 나가는 바바리 코트를 만들었따.
 찬란했던 80년대가 지나고 후반기부터 불어닥친 봉제업의 사양화는 이 대기업에도 여지없이 닥쳐왔다. 이른바 국내 임금으로 세계시장에서의 경쟁이 밀리게 되자 그간의 저임금 중심 제조업을 선진국형의 고부가가치산업, 첨단산업으로 전환시키는 "산업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봉제업이 밀려나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 "삼경복장"은 저임금을 찾아 인도네시아와 중국에 회사를 설립해 수출품을 만들고 있고 회사에서는 "케스케이드, 아르페지오" 같은 중가의 내수품을 만들고 있다. 회사의 직원도 94명으로 줄어 들어 올해안으로 회사가 없어질 상황에 놓여 있다. 본사가 직접 생산공장을 가지고 있으면 웃음거리가 될 정도로 봉제업의 지위가 떨어진 것이다.
 대신 한국의 봉제업은 기존의 본사-공장 운영체계에서 본사-하청구조 체계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삼경복장의 장석희(35) 노조위원장은 그 대표적인 예로 의류업으 ltls화를 만들고 있는 "이랜드사"를 들었다.
 "이랜드에는 31개의 상표로 각각 독립된 계열사가 있는데 자기 본공장이 없고 하청공장이 1백80여개 있어요. 협력업체도 생산공장이 아니라 유통업체예요. 구로의 "협진양행"도 이랜드 하청업체로 바뀠고 그런 데가 더 많아요. 이렇게 이랜드는 패턴과 디자인만 하고 제품은 하청공장에서 다 만들고 있어요. 하청공장은 이랜드에 어떤 권리도 없어요. 단순한 계약관계예요. 그리고 하다 못해 이랜드도 티같은 쉬운 옷은 대만에서 해오는데 하나에 700원이면 다 끝난데요. 항공료까지 포함해서 다요."
 저임금으로 저가의 수출품을 만들던 봉제업이 동남아 국가로 넘어가면서 봉제업 사장들의 경영의욕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고 한다. 결국 이 어려운 상황을 해결해 가려고 뜻을 모으는 사람들은 직접적인 피해자인 봉제 노동자들일 수밖에 없다.

<"옷을 만드는 사람들">
 70년대 봉제업체 최초의 노동조합으로 유명한 "청계피복 노동조합"과 그 이후의 봉제 노동자들의 크고 작은 모임과는 만들어지는 계기부터 약간의 차이점이 있어 보인다.
 "청계피복 노동조합"은 70년대 너무도 열악한 당시 평화시장의 영세 봉제업체 노동자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지역노조로 출발했다면 80년대 후반 이후에 생기는 봉제인들의 모임은 변화하는 봉제업의 지위와 연관되어 있다.
 87년 이후 노동조합이 활발하게 만들어지면서 봉제공장에도 많은 수의 노동조합이 생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봉제업은 투자를 별로 하지 않아도 쉽게 회사를 차릴 수 있고 또 기계를 빼내기만 하면 쉽게 다른 곳에 회사를 옮길 수도 있다는 특수성 때문에 회사는 노동조합이 생기기만 하면 휴·폐업을 하기가 일쑤였다.
 게다가 산업구조 조정으로 압박 밭는 경여자들은 노조에 대해 더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80년대가 임금인상과 근로환경 개선을 위해 노조가 회사와 정면 대립하던 시기였다면 90년대 노조는 기술을 개발하면서 봉제업이 살아 남기 위해 회사와 렵력하는 입장에 서 있다.
 단위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을 만들기는 어렵고 점차 봉제업의 존재가 위협반는 상황에 직면해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들어 지역별로 봉제인의 모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보통 보면 단위노조는 현장을 줌심으로 모이잖아요. 근데 지역노조는 현장을 뛰어넘고 그 지역에 있는 같은 업종의 노동자들이 모이는 것을 말합니다. 지역노조가 만들어 지면 같은 지역의 사용자들과 협상을 해요."
 "옷을 만드는 사람들"의 정숙자(33) 조직부장은 지역노조를 만들기 위해 모인 몇 개의 모임을 소개해 주었다. 서울 북부지역의 "새날동지회", 서울 남부지역의 "옷을 만드는 사람들", 인천 "청산골 봉제인으 집 더하기 회"등이다. 그의 "생활문화연구소"와 "남부고등공민학교 야학팀"도 봉제인의 모임에 속한다.
 "옷을 만드는 사람들"은 지난 89년 서로 다른 회사에 다니던 봉제인 친목회인 "산악회"가 같은 봉제인끼리 난국을 헤쳐나갈 길을 고민하다 만든 모임이라고 한다. 만 3년 6개월이 지나면서 1년에 한번씩 직접 만든 옷으로 "패션쇼"를 열고 년 2회 "패턴반, 컴퓨터반, 영어반" 등의 문화학교를 열어 봉제인에게 배움의 장을 열어 주고 있다. 이러한 사업은 사양화 되어 가는 봉제업을 살리기 위한 봉제인 스스로의 노력으로 보인다.
 가장 큰 의미를 두는 "패션쇼"는 공장에서 옷의 한부분만 계속 맡기에 완성된 옷을 만들지 못하는 봉제인들이 전체 과정을 익혀서 직접 자신이 옷을 만들어 입고 남에게 선보이고 그러면서 자부심을 갖게 된다고 한다. 위의 여러모임에서 팀을 짜서 숙녀복, 신사복, 아동복, 개량한봅 등의 옷을 선보이고 또 이때 여벌로 만든 옷을 팔아 그 수익금으로 모임 운영에 쓰고 있으니 일석이조이다. 이 패션소는 봉제인 개개인의 기술을 높이는데 큰 힘이 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93 봉제인 대동 한마당"에 선보였던 "옷을 만드는 사람들"의 작품은 전통한복을 개량해서 물빨래가 되고 입기 편하며 값싸게 만든 우리옷이었는데 여러 곳에서 좋은 반응을 얻어 주문을 받아 더 만들어 낼 계획이라고 한다.

<"옷을 만드는 사람들"과 지역노조">
 90년도부터 3~4개월 단위로 시작한 "문화학교"도 모임을 이끌어 가는 활력소가 되고 있는데 특히 93년에 "패턴반, 컴퓨터반"이 생기면서 남성들의 참여도 많아지고 있다. 패턴반의 채종구(29)씨는 경력이 오래된 재단사이다. 그가 봉제업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9년이 넘는데 봉제업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보니 "옷을 만드는 사람들"을 찾아 오게 되었다고 한다.
 "봉제쪽에서 일하는 남자들은 대부분 전업을 생각하기 일쑤고 대부분 완성품을 만드는 개수대로 수익을 얻는 "객공"으로 빠져서 생계에만 매달리기 때문에 이런 활동을 하기가 어렵지요. 지금 봉제업이 어려운데 소재부터 더 질을 높이고 염색이나 옷 자체의 디자인, 봉제기술을 높인다면 고품질을 만들어 봉제업을 살릴 수 있다고 봐요."
 그가 제시하는 봉제업의 살 길은 다른 회원들 생각과 비슷하다. 봉제업이 여성 중심의 일이다 보니 "옷을 만드는 사람들" 구성원이 대부분이 여성일 수밖에 없다. 지금 회비를 내고 있는 정회원이 30여명 밖에 안되는데 회원수가 그렇게 적은 것은 여성들이 결혼을 하고 집에서 애를 키우면서 활동을 중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임의 해결 과제이기도 한 이 문제는 남성회원의 참여와도 연결된것이었다.
 여성이 아이를 키우기 위해 집안에 머물게 되면 남성 혼자서 생계 전체를 책임져야 하고 그럴려면 활동의 폭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것이고, 기혼여성도 다시 일을 시작하는 경우에 가시일과 탁아일이 있기에 활동에 지장이 오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가 풀려야만 남성들이 참가한 힘있는 모임이 될 것이고 기혼 여성 중심으로 점점 옮겨가고 있는 봉제업이 활로를 찾을 수 있다고 하니 심각한 일이다.
 그간 저가품 중심의 봉제업이 수출이 막히고 기술이 뛰어난 유럽의 고가품을 따라잡지 못한 상태에서 점차 단위 사업장에서도 지역노조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삼경복장의 조명숙(33)씨는 지난 11월 제6기 문화학교에 입학해서 패턴반 모임에 나가고 있다. 미싱사인 그가 패턴반에 나오게 된 것은 패턴을 배우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 또 중요하게는 앞으로 회사문을 닫을 삼경복장을 생각할 때 회사 조합원들이 나가야 할 방향을 찾기 위한 것도 있었다.
 ""옷을 만드는 사람들"과 우리는 조직은 달라도 서로 좋은 관계를 가지면서 봉제업에 대해서 같이 고민해가는 관계로 보고 있어요. 삼경복장이 오래 갈 수 있다고 보지는 않기에 이 모임과 관계가 좋을 수밖에 없어요. 앞으로 같은 지역에서 같은 일을 할 것인데 우선 알고 지내야죠. 그러면서 일도 같이 하고 지역노조를 해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고 여러 가지 좋은 조건을 갖출 수 있을 것 같아요."
 "옷을 만드는 사람들"이 많은 봉제인들의 희망사항인 지역노조로 발전해가기 위해서는 해결해가야 할 여러 문제가 있고 이는 봉제업 전체가 다시 회생해야 한다는 전제를 포함하고 있다.
<바늘하나로 지어가는 세상>
 "옷을 만드는 사람들"은 앞으로 봉제업의 진로를 다음과 같이 점치고 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 의존한 나라가 선진국이 된 예는 일찍이 없었으므로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대신 저임금에 의존하던 의류업이 앞으로는 고부가 상품을 만들어 내면서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것이므로 의류산업은 그 비중이 줄지 않고 고가 의류산업은 그 비중이 줄지 않고 고가 의류산업과 증저가 의류산업이 공존할 것이다."
 이러한 전망 속에 회원들은 봉제업이 시원찮다고 벌써 실망해서 의욕을 버리지는 않는다. 대신 한국 의류업이 나갈 방향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 봉제업을 살릴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다.
 "사실 봉제업이 이렇게 된 것은 86~88년 3저 호황 때 적극적인 기술투자와 기술인력 향상에 신경을 쓰지 않은 당연한 결과이지요. 노조도 그 문제에 큰 신경을 쓰지 못했고, 이제는 인식들이 깨져서 정부를 쪼아대고 기업인들이 돈만 번다는 유치한 생각에서 기술투자를 하도록 기업인이 달라져야 하는 상황이 됐어요. 우리는 항상기능 습득을 같이 하면서 취업알선을 하고 함께 회원으로 갈 수 있도록 할 거예요. 최소한 회사에서 이 사람이 없으면 안 될 정도의 기능인이 되도록 무장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중고가 상품을 만들기 위해 개인적인 기술향상을 크게 생각하는 "옷을 만드는 사람들"은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어 활발한 사업을 벌여갈 수 있도록 하는데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다.
 가장 먼저 해결할 것은 재정을 확보해서 안정적인 상근자를 두는 것인데 지금은 재정이 부족해 약간의 활동비를 받고 조직부장이 낮부터 상근하고 있다.
 다음은 기혼여성 중심으로 가고 있는 봉제업을 볼 때 기혼여성이 활동할 수 있도록 의식을 변화 시키고 동시에 탁아를 해결해야 할 과젤르 가지고 있다. 그래서 기혼 여성 모임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일을 계획하고 있다.
 "옷을 만드는 사람들"은 오늘도 하루 9~10시간의 긴 노동을 끝내고 구로동의 사무실로 바쁜 걸음을 옮긴다.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3D업종이 아니라 사람살이에서 가장 소중한 "옷"을 만드는 자부심에서, 한국의 봉제업이 그들의 손에 달려있다고는 책임감으로 오늘도 바늘 하나로 세상을 지어가고 있는 것이다.

작성자오숙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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