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 함께 사는 세상


[사람사는 이야기]"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서예가 긴냇 권영환씨

본문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서예가 긴냇 권영환씨
장애우 서예가 권영환씨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글씨를 쓴다. 성남을 지키는 지역운동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를 만나 그의 그리움을 들어본다.
이태곤 (함께걸음 기자)

 서예가 긴냇 권영환, 그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오른쪽 팔이 없는 장애 상태로 쓴 S작업을 해오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사람 사는 세상을 갈구하는 한 사람의 민초로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에 대한 염원을 글씨 속에 녹여 작품을 만드는 서예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신음하는 소리와 통일을 염원하는 시들만을 옮겨 액자를 만든다. 그런 그의 작품은 운동 단체들 사무실에 걸려 용기를 복 돋우고, 때로는 운동 기금 마련 전에 출품돼 관심 있는 사람들의 안방으로 시집을 간다. 예컨대 문병란씨의 "직녀에게"라는 시와 문익환씨의 "꿈"이 라는 시.
 "그런 시들이 내 취향에 맞습니다. 이런 시들은 엄청 고생한 사람들의 시예요. 시련도 많이 당하신 분이고 옥고도 치른 분이고, 모두다 통일을 염원하고 통일을 바라는 시들이죠. 나는 그 시들이 시집에 그냥 덮어져 있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작품화시켜 놓으면 보는 사람들이 세대를 구분하지 않고 이념이나 사상을 초월해서 반 통일 세력도 그 시를 보며 최소한 고민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역할만 할 수 있어도 내가 붓으로 작업해서 시들을 작품화시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권영환씨는 서예가이기 이전에 지역운동가이기도 하다. 그는 지금 살고 있는 성남시에서 연륜은 짧지만 나름대로 치열한 한때를 보내기도 했다.
 그가 지역운동에 몸담게 된 것은 지난 일천구백팔십육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교회이기 때문에 단지 함께 하기 위해서 성남 주민교회를 찾아가 이해학 목사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는 주민교회 산하 사회선교위원회에서 활동했는데 마침 터진 육십 항쟁 때는 서울 명동에서 살다시피 했고, 성남에서 운동하다가 감옥에 들어간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성남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를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런 그의 활동은 곧바로 빈민문제로 이어져 팔십구년 성남 하대원동 철거 반대투쟁과 분당 신시가지 건설 반대 투쟁으로 경찰의 주목을 받아 잠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결과는 실패로 끝났지만 하대원동 그린벨트 내 빈민촌 철거 반대투쟁을 했을 때 내가 주장한 것은 싸움이 싸움으로 끝나지 말고 이후 공동체를 만들자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분당 신시가지 건설 반대투쟁을 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기존의 서울 강남이 있는데 성남에 또 다른 부촌이 생기면 성남은 말 그대로 샌드위치 도시가 된다는 겁니다. 그럴 때 생기는 문제는 딱 두 가지 인데 이 도시가 개발되든지 아니면 부촌 사람들의 놀이터로 퇴폐화 되든지 둘 중 하나라고 봤어요. 개발된다면 기존의 성남에 살던 가난한 사람들은 또 다시 쫒겨나는 겁니다. 그전같이 쓰레기차에 실려 오는 그런 상황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유형무형으로 밀려나는 거죠. 또 개발이 안 될 때는, 사실 성남시는 개발이 안 될 측면도 있는데, 전부 적은 평수의 따지 집이고 산을 벗겨놓은 도시이기 때문이죠. 개발을 하려면 개발 주체가 환수이익이 생겨야 하는데 그 이익이 생길 지 의문인 것이죠. 결국 이 도시는 자식 하나 제대로 키울 수 없는 굉장히 퇴폐화된 도시가 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분당 신시가지 건설을 반대한 겁니다."
 그는 철거 반대 싸움에서 보인 극렬성으로 감옥에서 몇 달을 살다가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이 과정에서 그는 새삼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그 사건이 이후 막무가내로 덤벼들게 아니라 이젠 내 위치를 정립해 봐야겠다. 전면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뒤에서 이름없이, 이 사회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되기 위한 두엄노릇이 더 필요한 때 아니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때 "정든 땅 언덕 위"라는 빈민 공동체를 추진했고 이런 공동체에 대한 집착은 지금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가령 철거 싸움을 예로 든다면 그 과정에서 빈민들이 많이 변화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부조리에 대한 항거들이 자연스럽게 싹트는 거죠. 그런데 그것들이 사회개혁으로 가지 않고 철거 싸움이 끝나면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끝나는 겁니다. 그러니 힘이 될 수 없어요. 그래서 공동체 운동으로 가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만 운동의 지속성이 유지될 수 있는 겁니다."
 말이 나온 김에 그의 지역운동에 대한 견해를 들어보자. 결론 삼아 말한다면 그는 지금 성남에서 지역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지금 성남은 겉으로는 많이 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적으로 바뀐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리려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사람들의 흉내를 내기 위해서 더 고달픈 삶을 살고 있죠. 최근에 생긴 도시 중 이런 기형적인 도시는 아마 없을 겁니다. 주택정책만 봐도 전부 이어서 임대해 세 받아먹게 만드는 정책을 쓰고 있는데 이건 개인을 이기주의화 개인화하고 개별화시키는 정책입니다. 그리고 성남 사람들 거개가 서울에 직장을 가지고 있다보니 교통난이 심각하고, 이런 상황에서 지역운동이라는 것이 지금 전부 중앙집권식으로 가고 있습니다.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운동도 전부 다 중앙집권식이에요. 서울 뒷바라지 하다가 지역 문제는 못 짚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성남의 모든 운동단체들이 지역화 향토화되어야 하는데 여기서 뿌리를 못 내리기 때문에 서울 쪽 움직임에만 민감함 거예요 때문에 지역운동도 속히 내용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는 지역운동의 대안으로 「몬드라곤에서 배웁시다.」라는 책을 예로 든다. 일종의 협동조합 운동, 그의 바람은 몬드라곤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조그만 공동체를 만들어서 필요한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 세상을 위해 그는 서예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살려 서각제품을 만들 구상을 하고 있고 천연유약을 쓴 도자기를 시험 삼아 제작해 보기도 했다.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공동체밖에 없습니다. 공동체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열띤 표정으로 공동체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과거 한때 그가 명성을 날리던 건당이었다는 사실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하긴 그런 어두운 과거가 있었기에 오늘날 그가 있지만 그럼에도 과거의 그를 대비해 볼 때 그는 너무나 많이 변해 있다.
 무엇이 그를 변하게 했을까?
 권영환, 그는 일천구백사십구년 전남 해남 장계리에서 농사를 짓던 부모의 칠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집안은 간척지를 개간해 농사를 지어먹고 살고 있었다. 그는 구제품 분유를 먹고 호롱불을 켜놓고 공부한 세대이다.
 고향에서 칠량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학교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광주 명문 서 중학교에 들어간다. 군사혁명 공약을 외우고, 까다로운 입학시험을 거쳐서 중학교에 들어간 그는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며 공부에만 열중했다. 덕분에 삼학년 내내 반장을 했지만 이 반장이라는 직함 때문에 결국 그는 학업을 중도에서 포기하게 된다.
 그때 서 중학교는 광주에서 부자로 손꼽히는 집안 자녀들이 주로 다녔다. 때문에 가뜩이나 열등감을 느끼던 차에 그가 삼학년이 됐을 때 한 유지 아들이 그의 반으로 전학을 왔다. 그 유지 아들은 학교에 피아노를 기증하고 반마다 철제 캐비넷을 놔주는 등 재력을 과시했고, 그에 따른 오만감 때문이었는지 선생들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의 반에서 생긴 일이었으므로 이 일로 그는 교무실에 불려가 책임을 추궁을 당하게 된다. 그러자 그는 미련 없이 학교를 그만뒀다.
 학교를 그만둔 그는 거리에서 산다. 속칭 불량 청소년으로, 나아가 들면 서는 본격적인 건달로, 집에는 가지 않고 광주에서 잔뼈가 굵는다.
 "건달도 머리 좋은 놈들이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어요. 나는 이미 선배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쉽게 그 생활을 적응했죠. 싸움도 많이 했고, 그러다가 스무살이 넘자 일정정도 대우를 받았는데 시내 충장로 1가에서 3가를 장악하고 대장 노릇도 했어요. 내가 그 세계에서 한창 이름을 날릴 때는 김태촌도 내 부하였습니다."
 그는 그런 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심한 갈등을 느끼기도 했다.
 "삶이란 건 참 이상해요. 세상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내재된 마음하고 또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나도 별수 없다, 이런 마음이 상충되는 거예요. 결국 그 세계를 떠낫지만 내가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건달로 계속 돌아다녔으면 아마 지금쯤은 건달로 출세했을 거예요."
 그가 광주를 떠난 것은 칠십오년 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민당 당사 난입 사건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치 깡패로까지 진출한 셈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수배를 당하면서 그는 광주에서 도망쳐 가족을 이끌고 성남으로 숨어들게 된다. 그가 성남으로 들어온 것은 아는 후배가 성남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성남에 왔을 때는 광주 대 단지 사건이 일어 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아직 이주 초기라 성남은 말 그대로 온통 허허벌판이었다. 허허벌판에 무일푼으로 들어와서 그는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역시 건달로 세월을 보냈다.
 생계는 아내가 개천가 빈터에 장이 서면 시골에서 잡곡을 사다가 팔아 근근히 이어갔고, 그는 일을 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시장에서 자릿세 받아먹는 건달들과 어울려 거리를 휘젓고 다녔다.
 "사실상 내용성 없는 거지였지. 분명한건 이 세계도 먹이사슬이 있어요.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힘 있는 놈들이 터를 마련해서 세를 받고 그 놈들이 자릿세의 일부분을 공무원들에게 상납하는 거예요. 나는 예전 경험이 있으니까 그놈들이 알아서 모시지. 관이 정비가 됐으면 아부를 해야 하고 관이 정비가 안됐으면 관도 힘의 표적물일 수 있는데 건달도 조잡하게 보이면 안 되거든. 그런 부분에 내가 역할을 좀 했어요. 그러다 보니 깡패 두목이랄까, 그 비슷한 대우를 받았지요."
 그런 나날들을 보내면서 한편으로 그는 회의를 맛보기도 했다. 거개가 가난한 농촌 이주민들인 성남 주민들이 길거리에서 뒹구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는 가난의 설움과 아픔을 피부로 느낀다. 그래서 "삶이 이런 건 아닌데?"라는 문제의식을 저절로 갖게 된다. 하지만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기에는 그는 너무 깊숙이 건달세계에 들어가 있었다. 제 앞가림하기에도 벅찬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는데 유신말기 칠십팔년이 됐어요. 일반적인 경우가 그렇지만 정권은 정치적으로 불안정 할 때 사회정화니 뭐니 하면서 쇼킹한 무엇을 만들어내려고 해요. 그럴 때 사상범과 정치범, 소위 시국사범을 먼저 치는 게 아니라 사회 잡범들을 먼저 치고 거기서 명분을 얻어서 시국사범을 치는 게 순서이지요. 나는 그때신변에 심각한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 오자 그는 아무개 수산회사에 다니고 있던 사람에게 선을 대어 선원수첩을 만든다. 그런 다음 원양어선을 타고 바다로 도망쳤다. 바다에서 한동안 명태 잡이 어선을 타던 그는 얼마안가 파나마 선적 상선으로 갈아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
 무려 육 년여를 바다에서 생활하던 그는 팔십사년 봄, 사회 상황도 좀 나아진 것 같고 무엇보다 선원 생활이 지겨워 배타면서 배운 전기기술로 육지에서 일 해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배에서 내려 육지로 돌아왔다.
 자격증 없는 전기 기술자로 동두천 근처 삼화레미콘이라는 회사에 들어간 그는 팔십오년 일월, 감전사고로 장애를 가지게 된다. 병원에서 오른팔을 절단 당한 그는 당연히 큰 절망감에 휩싸인다.
 "건달 생활을 할 때도 놓지 않았던 서예를 이젠 못하게 되겠구나, 그리고 지금까지 식두들을 성가시게 해왔는데 이젠 성가시게 안 할 수 없는 신체구조를 가지게 되었으니 주위에서 건강할 때도 식구들 속 썩이더니 이제 장애를 가졌으니 식구들 완전히 못 살게 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두려웠어요. 그래도 목숨은 제멋대로 못하는 거 아니예요? 살아야 된다고 마음속으로 작정하는 거였죠. 살 수 밖에 없는 것이지 별수 있어요? 그랬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가 고민이 되는 거예요. 장애우로서 어떻게 하면 가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살아갈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한참 했어요."
 그는 일 년여를 병원에서 지낸 뒤 성남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날 이후 그가 매달린 일은 오른손으로 쓰던 글씨를 왼손으로 옮기는 작업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있는 사람으로서 다른 할 일은 찾아봐도 없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일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글씨 쓰는 작업에 매달렸죠. 한 작품 쓰는데 보통 사오 일 걸려요. 사실 서예로 생활은 안 됩니다. 나눌 수 있는 정도지요. 그렇지만 그냥 글씨를 쓰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큰 힘이 서예이다. 이런 생각으로 글씨를 씁니다. 그냥 몸 아픈 사람의 안타까운 몸부림 정도로 제 작업을 봐줬으면 좋겠어요."
 그의 이런 겸손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의 서예작업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성남에서는 대단한 호평을 받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그가 서예를 하는 자세가 남다르기 때문인 것으로 읽혀진다.
 그는 지금 슬하에 세 아들을 두고 있다. 생계를 위해 아내 김선자씨는 공장에 나가고 결혼 초기부터 같이 살아온 장모 손순덕씨는 성호시장에서 잡곡 장사를 한다. 그는 텅 빈 집에서 작업을 하며 문득문득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해 그리움을 느낀다고 했다.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것은 어떤 책이나 삶의 어떤 부분이 미친 영향 때문이 아니라 내 삶 자체가 있고 없는 문제로 고민했고 그런 현실적인 문제로 고민하다보니 그 자체가 삶이 되었다."고 말하는 권영환씨, 그는 "지금 운동단체 기금마련 섭외가 많이 들어오는데 돈을 받고 안 받고 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르겠다."며 활짝 웃었다.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함께걸음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5364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치훈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