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이웃]잡초처럼 질기게 민들레처럼 순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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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처럼 질기게 민들레처럼 순박하게
-경북 고령군 우곡면 "들꽃마을" 사람들-
<산과 들판이 어우러진 후미진 곳>
"들꽃마을"에 도착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우선은 처음 가는 길이라 서툴기도 했지만 "들꽃마을"이 있는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예곡리가 워낙 후미진 곳에 있어서 차편이 좋지 않았다. "들꽃마을"에 연락해 보니 두시간에 한 대 꼴로 떠나는 시외버스가 대구시 서부정류장에 있다고 했는데 뜻밖에 서부정류장 메표소에서는 예곡리를 모른다는 것이 아닌가.
다행히 손님 한 분이 "들꽃마을"가는 차를 알려 주었는데 예곡리까지는 버스로 1시간 30분 정도 달려야 했다. 왜 그리 길이 꾸불꾸불하고 덜컹거리는지 차멀미에 시달리는 통에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나지막한 산과 들의 경치도 보지 못했다.
들꽃마을은 예곡리에 내려서도 돌길을 한참 걸어야 하는 정말 후미진 곳이었다. 하지만 정작 당황했던 것은 여기서부터였다.
자원활동자 들꽃마을에 들러 내려오고 있는 듯한 70여명쯤 되는 한 무리의 아줌마들에게 길을 물으니 "이곳 주민들이 들꽃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막고 있어서 이제는 마을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 아닌가.
들꽃마을에 장애우·노인·환자들이 모여 있지만 후미진 곳에 있어서 주민들과 마찰이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멀리 제방 위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이 보였고 제방 아래에는 몇 대의 트럭과 경운기와 순찰차까지 있었다.
순간 들꽃마을의 구성원들인 장애우·노인·환자들과 이 지역주민이 팽팽히 대치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혹시 다친 사람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지나가는 트럭을 세워 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물어 보았는데 다행히 차에 타고 있던 두 사람은 들꽃마을에 사는 자원활동자였고, 주민들을 피해 들꽃마을로 들어가려고 하는 참이라고 했다. 잘됐구나 싶어 차에 올랐다.
트럭은 몇 번 들꽃마을로 들어가는 샛길을 찾아 올라갔지만 길마다 주민들 트럭이 막아 서 있었다. 어찌할까 고민하더니 제방길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제방길은 멀리서 사람들이 모여있던 그 지점이었다. 주민들이 모여있더라도 트럭으로 밀어붙이면 그들이 비켜서리라 생각해서 그 길을 택한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제방 위에는 주민들 4∼50명이 모여 있는데 맥주도 한 두잔씩 마셨고 얼굴에는 노기가 등등한 상태였다. 차를 막더니 어디 가는 차요, 눈앞에 사람이 보이는데 사람들을 차로 쳐서 죽일 작정이었지, 제방위를 달리면 제방법에 걸리는 것 모르냐, 들꽃마을 신부가 돈을 횡령하고 환자들을 불법 매장했지 않았냐, 무슨 얼어죽을 놈의 봉사냐고 심한 욕설을 하며 멱살을 잡고 트럭에서 자원활동자를 끌어내리려 했다. 군청 간부와 경찰서 직원도 끼어 들며 봉사자들이 잘못했다고 거들었다.
20여분간 서로 옥신각신하다 한 사람의 자원활동자가 트럭과 함께 볼모로 남고 나머지 우리 둘은 트럭에서 내려 제방길을 지나 들꽃마을로 들어왔다.
<장애우·노인·환자가 함께 생활>
들꽃마을의 첫인상은 더럽고 초라했다. 20년도 더 되 보이는 낡은 슬레트 집이 20여 채. 첫눈에도 몸이 아프고 나이가 많아서, 혹은 장애우라는 이유 때문에 사회에서 소외당한 사람들이 집 주변에 나와 서성거리거나 집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사람들이 외부인을 전혀 꺼리지 않고 인사를 하니 반갑게 응수를 하는 것이었다. 군데군데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고 강아지들도 눈에 띄었다. 마을 한가운데 깨끗한 건물이 하나 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천주교 공소였다.
이 마을의 회장집에는 사무장과 총무가 들꽃마을로 들어왔던 손님이 무사히 나갈 수 있도록 마을을 빠져나가는 샛길을 알아보고 돌아간 손님을 파악하느라고 경황이 없었다. 회장은 마음껏 취재를 하고 어디든 가도 좋다고 했다. 첫날은 날이 저물기도 했고 몸이 피곤해서 마을만 한바퀴 돌아볼 생각으로 저녁을 먹고 마을을 둘러보는데 맨 끝에 "피정의 집"이라고 크게 쓰여 있는 집이 눈에 띄었다. 다른 집과는 달리 깨끗해서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보였다. 바깥벽에 목발과 휠체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장애우들이 사는 곳 같았다.
조금 망설이며 들어갔는데 반갑게 맞아준다. 밖에서 듣기로는 이 마을에 평생 무보수로 일하는 자원활동자 10명이 있다고 들어서 나이가 많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몸이 통통하고 낙천적인 아가씨 한 명이 있었다.
피정의 집에는 나이 많은 할머니, 자리에만 누워있는 할아버지, 정신지체 소년과 바퀴를 단 나무판자 위에 앉아서 움직이는 아저씨 등 전부 중증장애를 가진 15명 정도의 장애우가 한 집에 살고 있었다. 실내에는 방이 3개에다 마루 겸 부엌 하나, 화장실과 세면실이 있었다.
나중에 이름을 알게 된 "시몬 아저씨"는 며칠동안 마을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이 마을의 장단점을 스스로 알아보라고 부탁했다.
<들꽃마을 사람들과 꿈을 키우는 자원활동자들>
첫날부터 이틀동안 같이 방을 썼던 사람들은 30대 초반의 주부로 대구에 살고있는 천주교 신자였다. 한 달에 한번 정도 며칠씩 이 마을에 와서 자원활동을 한다고 한다. 예전에 남편과 부부싸움을 하고 남편이 집을 나가 버렸는데 나중에 들으니 "들꽃마을"에 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들꽃마을을 알게된 이 아주머니는 식당에서 다른 자원활동자 한 사람과 함께 식사준비를 하고 김치도 해 주면서 지내 봉사하는 삶인데 자주 오면서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식당일을 맡고 있는 장 아네스(26)는 고향이 밀양인 아리따운 아가씨인데 이곳에 산 지 한 달이 채 안된 병아리(?) 자원활동자였다. 이곳에 오기까지 부모 형제의 반대가 많았는데 "특별한 이유는 없고 들꽃마을 신부님 정신이 "가난"이고 저도 가난하게 살았고 가난한 자와 함께 살고 싶어서 여기에 왔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자원활동자들을 천주교식대로 자매, 형제라고 부른다. 마을의 의료를 담당하는 로사(30)는 1년 정도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뇌성마비, 지체부자유, 노인성 치매, 정신질환자들이 함께 있으니 힘들지요. 심하게는 간염을 가진 전염성 환자도 있고 수술을 하루 빨리 해야 하는 환자도 있습니다. 의료문제가 가장 심각하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술을 먹고 싸우고, 집어던지고, 머리가 깨져도 대충 싸우는 것은 스트래스 해소일 수도 있고 생활 속에는 싸움도 있는 거니까 인정을 하죠. 이곳 신부님이 개개인을 최대한 존중하라고 해요."
6명의 자원활동자들은 들꽃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윗마을-들꽃마을에서 분가했다고 풀꽃이름을 따 "민들레마을"이라고 한다-에서 하루 종일 생활한다. 잠은 들꽃마을에 있는 "자매의 집"에서 자고 아침 5시에 일어나 새벽기도를 하고 6시에 "민들레마을"로 가서 저녁 6시 30분까지 가족들을 돌본다.
자원활동자의 임무는 가족의 식사와 빨래뿐만 아니라 한달 생활비 30만원으로 가계를 꾸려 가족들에게 절약을 가르치고 가족 간에 애정이 싹틀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밖에도 식당에서 식사준비, 들꽃마을 각 가족들의 생활 모두를 돌보고 그들이 삶에 의욕을 잃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는 역할을 한다.
<들꽃마을 가족생활>
"들꽃마을"은 91년 7월 16일 고령 천주교 본당 주임신부였던 최영배 신부가 재임 기간 2년 동안 오갈 데 없이 거리에 버려지거나 해매고 있는 20여명의 가족을 이끌고 오래 전부터 음성 나환자촌이었던 은양원으로 들어오면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원래는 대구 천주교구 땅인 고령 쌍림월막동에 가기로 했지만 그곳 주민들이 트랙터와 경운기로 막으며 격렬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비가 내리는 그 날 밤에 은양원에 들어와 지금은 민들레 마을까지 합쳐 150여명으로 식구가 늘어났다.
원래부터 있던 낡은 슬레이트 건물 17채는 전혀 보수를 하지 못한 상태로 그대로 남아 있으며 재래식 부엌에다가 세면실도 집 밖에 떨어져 있다. 공동화장실 사용도 몸이 불편한 이들이 쓰기에 힘들다. 하지만 은양원 회장이던 정삼명씨(63) 땅에 가족공동체로 새로 분가한 민들레 마을은 24평의 넓은 건물 안에 4개의 방과 세면실, 화장실, 창고와 마루가 갖춰져 있다.
92년부터 함께 살고 있는 자원활동자 10명과, 대구에 가족을 둔 채 이곳에 살고 있는 사무장과 총무, 93년 5월에 13명의 의사로 구성된 나사로회의 의료활동, 1∼2천원씩 보내주는 8천여명의 후원자와 여러 곳에서 오는 자원 봉사자의 도움 그리고 주변에 있는 천주교 소유의 밤밭 1천여 평에서 나는 이익금으로 들꽃마을이 유지되고 있다.
외부에서 자원활동자들이 찾아오기도 하고 자매, 형제들이 모든 정성을 돌보기도 하지만 가족 모두에게 세세한 손길이 가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실제로 "할머니 집"에서 중풍으로 몸 한쪽을 쓰지 못하는 제임성(62) 할머니는 마당으로 나가서 몸을 씻어야 하기 때문에 세면장과 화장실이 실내에 있는 "피정의 집"이나 "민들레 마을"로 가고 싶다고 설움이 받힌 듯 울먹거렸다.
같은 집에 다른 분이 도와주지 않냐고 물었더니 "전혀 도와주지 않는다"고 했다. 실제 로사자매도 말하듯이 "오랫동안 사회에서 소외당했고 어려운 생활을 해와서인지 같은 집 식구들은 서로의 밥은 잘 챙겨주지만 가족들의 똥, 오줌을 치우거나 옷을 입혀주는 등의 일에는 무관심하여 그것을 고치는 것도 큰 고민"이라고 한다.
육체적으로 일을 하기가 어렵기도 하겠지만 몸을 움직일 수 있어도 일을 안 한다고 한다. 주변에 식량을 지급하기 위해 예곡리에서 사들인 3천여평 가량의 논과 밭이 있지만 들꽃마을 식구들은 술이나 담배 사 준다고 자매들이 꼬셔도 일을 안 할 정도여서 농사를 제대로 짓고 있지 못하다. 신부님도 하기 싫은 일 강제로 시키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어떤 일이든 건강한 노동이 필요한 듯 싶었다.
밥은 집집마다 따로 해 먹는데 간혹 식당에서 밥을 갖다 먹거나 반찬을 가져오기도 했다. 신부도 식당에서 밥을 같이 먹기도 하고 마을 회장이나 사무실 실무자도 반찬의 차이가 없이 다 비슷하게 먹고 있었다. 가족 중의 절반이 60이 넘은 노인이고 지체장애, 정신지체, 간질 등 중복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절실한 형편이다.
<시몬아저씨와 요한 아저씨>
이튿날 피정의 집을 다시 찾았다. 이곳 분위기는 다른 집에 비해 가족 서로간에 서로 돕는 분위기가 있었다. 가족 중에는 성격이 까다롭고 들꽃마을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자꾸 집에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하며 가족들을 괴롭히는 사람도 있다.
봉사자의 말로는 가족들에게 버림받았음을 속이려고 일부러 전화를 걸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사실 전화기도 들꽃마을을 통털어 몇 대 밖에 없다고 한다. 이곳에 잊혀지지 않는 두 분이 있다.
시몬아저씨는 올해 42살로 몸을 움직이면 몸이 굳어버리는 "척추 종합병"에 걸려 있다. 어릴 때부터 "부산형제원" "전주 시립 갱생원" "충북 음성 꽃동네" "가평 꽃동네" "대구 희망원"에서 생활해서 그곳과 이곳이 다른 점을 잘 설명해 주었다.
"여기서는 장애인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찾아서 움직이라"는 입장이지만 다른 곳에는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마라. 그저 먹고 싸라"는 거지요. 장애인이기 때문에 일도 안하고 밥만 먹고 잔다고 외부에서 그렇게 보이고."
밖에서 듣기에 좋다고 하는 충북 음성의 "꽃동네"에도 들어간 첫날에 잘못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꽃동네의 자원활동자들도 가족들에게 지배자란 인상을 심어 주었고 여기처럼 싸우는 일도 없고, 누가 봤을 경우에 그 사람이 무얼 하고 사느냐는 인상이 들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이 생활이 편하다 해도 사회에서 이웃과 더불어 사는 것보다 낫기야 할까. 시몬 아저씨는 아무리 힘들어도 사회에서 살고 싶어 밖에서 10년 넘게 구두닦이를 해오면서 아픈 몸을 이끌어 성실히 살았지만 장애인을 보는 사회인의 눈초리가 견딜 수 없고 몸도 급격히 나빠져 이곳에 의탁할 생각이라고 한다.
몸을 움직이면 상처가 깊어지지만 마비가 되지 않은 우측 몸을 풀어주기 위해 자진해서 피정의 집 식구들의 빨래를 세탁기에 돌리는 시몬 아저씨. 자신이 빳빳하게 누워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더 힘들어진다는 그의 생각은 성한 몸을 갖고도 이기적인 사람에게는 따끔한 말로 들리기에 충분하다.
"십자가 아저씨"는 51살이다. 십자가를 만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퀴 달린 나무판자 위에 앉아서 돌아다녀야 할 정도로 하반신 장애가 심하고 몸피가 적다.
집 주변에 흔한 손목 굵기만한 소나무 가지를 잘라 겉껍질을 떼낸 후에 그늘에 3-4개월 말린 뒤 가로 4센티, 세로 7센티 크기로 잘라 홈을 파 끼우고 온 정성을 다해 사포로 문지른다. 92년 12월에 들꽃마을에 들어와 지금까지 20여개의 목걸이를 만들어 형제 자매 봉사자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힘든 노동의 결과인 만큼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현대식 건물에 가족공동체 이룬 들꽃마을>
"들꽃마을"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얼마 전에 따로 분가한 "민들레마을"이다. 24평짜리 깔끔한 집 다섯채로 시작한 "민들레마을"은 한 집에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아주머니, 어린이, 장애우를 합한 9명의 식구들과 자원활동자 한사람이 어머니로 결합한 인위적인 가정이다.
"인혁이네 집"의 아버지인 유은식(68)씨는 처음에 가족을 구성해서 민들레마을로 온 93년 8월 초에는 정신과 육신이 멀쩡하지 못한 아이들 때문에 불편한 다리와 신경통으로 고생하던 몸이 더 아프고 근심걱정 하느라 애정이 생기기보다는 머리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여기 온 지 한 달이 넘어가지요. 지금은 한 번 보고 두 번 보니까 나도 앞으로 몸이 나빠져 오줌, 똥 받아내려면 남을 안 시키겠나 싶어서 애석한 마음으로 정이 더 나지예. 여기서는 서로가 몸은 불편하지만 가족끼리 의논해가며 사랑을 베풀어야 가족생활을 할 수 있지예. 사회서는 먹고살자고 힘들었지만 여기서는 서로 도우려니 더 힘들어요."
인혁이네 집에는 11명의 가족이 있다. 정상인으로 인근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있는 반면 전직 기자였다가 사고를 당해 몸과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아저씨, 치매환자인 할머니, 대소변도 못 가리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누워있는 청년 등이 있어 서로 도우며 가족 구성원 스스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민들레마을에서 살다가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겠다 싶으면 대구에 내려가 분가할 생각이라고 한다. 민들레마을이 생긴 지 한 달밖에 되지는 않았지만 가족들의 더 나은 생활을 위한 좋은 시도로 보였다.
<벼랑에 선 들꽃마을, 그러나 맑고 아름다운 수채화 같은 곳>
들꽃마을을 한 장의 그림으로 표현해 보면 어둡고 탁한 색이지만 결코 어둡지만은 않게 환한 노란색이 비취는 수채화로 느껴진다. 이처럼 보이는 것은 사회에서는 격리됐지만 "들꽃마을" 가족들의 삶의 의지가 있고 봉사자의 사랑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들꽃마을"이 바람직한 삶의 공동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무리 애정이 깃들어 있다고 하지만 가족 스스로가 사회를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우나 노약자, 고아 등 사회에서 버려지고 있는 이들을 사회가 받아들여 차별 없이 모두가 사는 것이 올바른 모습이다.
하지만 예곡리 주민들이 "들꽃마을"을 내쫓기 위하여 신부를 모함하고 허위사실을 신문에 흘려보내며 함께 살 수 없다며 집단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에서 인적 드문 산 속에 조용히 살고자 하는 최소한의 요구마저 짓밟고 있는 비뚤어진 사회를 볼 수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예곡리 주민들과 별 마찰 없이 지내왔지만 요즈음 들어 부쩍 심해진 주민들의 반대를 겪으며 행여나 밖에서 인정을 해주면 조금 나아질까 싶어 법인설립을 추진하고 있는 "들꽃마을"의 미래가 그리 밝아 보이지만은 않았다.
글/오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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