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와 사람]우리는 지역주민들의 손과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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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사회에서 개척자적인 심정으로 우리나라 사회복지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김진학씨, 그는 사회복지 전문요원이다. 재가 장애우 복지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그의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가양동 주민들의 손발이 되어>
메말라 보이는 아파트촌에도 따사로운 봄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있었다. 택지개발사업자단지 조성공사가 마무리단계에 들어선 강서구 가양동에는 말끔히 색칠해진 영구임대아파트가 줄지어 있고 새 주인들이 막 입주한 상태였다.
서울시 도시개발공사가 지은 이 임대아파트의 이름은 "도시개발". 아파트촌 한 가운데 있는 종합복지관 건물에 늘여 뜨려 놓은 "입주를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이 봄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 종합복지관 2층에 자리잡은 강서구 가양 제2민원분소는 도시개발아파트 수천 세대 주민들의 손발 노릇을 하는 곳이나 다름없다.
사회복지전문요원 김진학씨(37)는 이곳에 근무하는 일곱명의 사회복지전문요원 중 가장 선배이다. 선임 요원으로서 후배 요원들의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그가 가양동에서 일을 시작한 것은 지난 해 10월부터다.
이곳 주민들의 특성이 주거문제만 간신히 해결된 저소득층인 탓에 사회복지전문요원이 해내야 하는 일이 쌓여 있어 늘 바쁘게 지내다 보니 가양동에서 일을 시작한 것이 아주 오래 전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등록장애우 150여명을 비롯해서 노인, 아동, 모자 등등 담당해야 할 복지업무가 매우 많습니다. 특히 알콜중독, 치매, 정신질환, 중풍 등을 앓고 있는 환자들도 많고 오래전 가출했던 청소년들이 집이 생기니까 다시 들어와 아파트 문을 걸어 잠그고 한데 모여 흡연을 일삼는 등의 문제도 일어나고 있어 사회복지전문요원의 업무가 과다한 편이죠."
일반적으로 무뚝뚝하고 경직된 인상을 주기 쉬운 공직자들과는 달리 김진학씨는 이웃의 힘든 문제를 진심으로 고민하는 마음 좋은 동네 아저씨 같은 인상을 준다.
<장애우 재활정보 제공처로>
지난 88년 2월 서울시 제1기 사회복지전문요원으로 서대문구 홍제3동사무소에서 근무를 시작한 김진학씨는 그곳에서 5년 가량 근무하다 서대문구청 사회복지과를 거쳐 가양동으로 오게 되었다.
"구청에 있다보니 업무성격상 현장감각이 떨어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양동 근무를 지원했습니다."
공무원 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그의 이러한 "개척정신"은 서대문구청에서 근무할 때 유용한 성과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구청의 사회복지과라는 부서를 "그냥 한번 지나가는"부서쯤으로 탐탁치않게 여기는 과장과 동료직원들 틈에서 김진학씨는 장애우들이 생활 속에서 꼭 필요로 하는 재활관련 정보를 쉽게 접하기 힘든 상황을 개선해 보려고 혼자 일을 시작했다. 당시는 장애우 관련 주무부처인 보사부에서조차 종합정보책자를 만들어놓지 못한 상태였다.
혼자 3개월여에 걸친 작업을 통해 서대문구 예산으로 "장애우 재활을 위한 복지안내"라는 알찬 책자를 만들어낸 것이 지난 90년 초. 이 책자는 각 기관에 발송된 뒤 여기저기서 좋은 반응을 얻어 비슷한 책자가 나오기도 했는데 이 일로 김진학씨의 "윗사람"이 대신 표창을 받기도 했다.
사회복지전문 요원의 주요 업무는 생활보호대상자의 조사 및 보호의 결정에 수반되는 제반 사항, 직업훈련, 생업자금 융자, 취업알선 등 생활보호대상의 자립지원을 위한 업무와 개별상담, 후원자의 알선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김진학씨가 청주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사회복지전문요원의 길을 택한 것도 "시설이나 기관에서 근무하는 것보다는 직접 주민들과 만나면서 그 속에서 일을 해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과 "안이한 풍조가 만연해 있는 공직사회에 들어가 창의력을 갖고 새로운 사업을 개발해보자"라는 생각을 했기 대문인 것을 보면, 그의 "개척정신"은 오래 전부터 몸에 배어 있었던 것 같다.
<전국 사회복지전문요원 2,500명>
현재 서울시내 사회복지전문요원의 수는 320명, 그들이 만든 동우회에서 김진학씨는 회장직을 맡고 있다.
지난 87년부터 대도시 저소득층 밀집 지역 동사무소에 배치되기 시작한 사회복지전문요원은 정부에서 일선 행정기관의 인력부족과 전문성 결여로 공적부조사업에 내실을 기하기가 어렵다고 인식해 생활보호행정의 합리화와 효율성을 제고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제도화되었다.
93년도 1월 현재 사회복지전문요원은 서울 325명, 부산 188명, 대구 143명, 인천 52명, 광주 94명, 대전 97명으로 6대 도시에 899명이 확대 배치되고 9개 도에는 1,582명이 확대 배치되어 전국 저소득층 밀집지역 읍·면·동사무소에 총 2,500명이 일하고 있다.
이들이 담당하는 주요 업무는 생활보호대상자의 조사 및 보호의 절정에 수반되는 제반 사항, 직업훈련, 생업자금 융자, 취업알선 등 생활보호대상의 자립지원을 위한 업무와 개별상담, 후원자의 알선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김진학씨는 이러한 사회복지전문요원제도와 달리 탄탄하게 정착되어 가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를 지속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전문요원들 스스로가 강한 사명감을 가져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며 일반 민원들에게 사회복지전문요원제도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어야 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초기의 전문요원들은 공적부조를 책임지는 사람으로서의 뚜렷한 책임감과 사명감이 있었는데 갈수록 이러한 의식이 떨어지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시로 만나 어려운 점들을 토로하며 잘해보자고 훈훈하게 격려해주던 동우회원들 사이의 협동심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사회복지시설보다 월급이 많은 직종이라는 "매력" 때문에 사회복지전문요원의 길을 택한 후배들에게 그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현재 생활에 안주하지 말고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사명감으로 어려운 사람의 입장에서 일해야 한다"는 따끔한 충고를 던진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십시오>
남다른 사명감으로 사회복지전문요원의 일을 해내고 있는 그에게도 항상 보람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공정한 업무를 위해 자격요건에 맞지 않는 기존의 생활보호자를 대상에서 제외시켰을 때 술 취한 채 찾아와 "죽일 놈, 살릴 놈" 욕설을 퍼붓는 이들도 있었고, 별정직 7급 공무원이 사회복지전문요원에 대한 반감으로 일반공무원으로부터 "너희들이 무슨 전문직이냐"는 비웃음을 받아야 할 때도 많았던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결핵에 걸린 혼자 사는 할아버지가 사무소로 찾아와 상담을 했다. 상담 후 실제 사는 집을 찾아가 보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가난하게 살고 있어 충격을 받았다. 얼마 후 그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지만 김진학씨의 사슴 한켠에 말못할 아픔으로 남아 있다.
또 한번은 혼자 살아가기 힘든 어려운 형편의 할머니에게 양로원을 소개해드린 적이 있었다. 갈 곳이 없었던 그 할머니는 양로원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 것이 고마웠는지 감사의 뜻으로 사과 몇 알을 싸들고 손수 찾아오셨다. 그 할머니를 보면서 훈훈한 인정과 일의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서 "나는 오늘 들어온 신입사원"이라는 생각으로 나를 바로 잡습니다. 공직사회에서 개척자적인 심정으로 우리나라 사회복지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욕심을 갖고 일해 나갈 것입니다."
김진학씨는 오늘도 오전에 사무소내의 업무를 처리하고 나면 오후부터 밤늦게까지 가양동 주민들의 대문을 두드린다. 사회복지전문요원이 그들의 편안한 이웃처럼 친숙해지기를 바라면서.
그가 사회복지전문요원의 일반적 인식도를 높이기 위해 자비를 들여 만든 명함의 뒷면에는 알아보기 쉬운 큼직한 글씨로 이렇게 씌여 있다.
"사회복지전문요원은 생활보호사업 등 사회복지 전반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전문공무원입니다. 가정에 어려운 문제가 있으시면 언제든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글/이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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