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빈민장애우 심의섭<2> > 함께 사는 세상


[사람사는 이야기]빈민장애우 심의섭<2>

본문

거리에서 우연히 이광훈 전도사를 만난 게 계기가 돼 그는 삼년여에 걸친 걸인 생활을 마감한다. 다시 시계 수리점을 열고 우여곡절 끝에 결혼도 하지만 쪼들리는 생활은 그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다시 걸인으로 나서도록 등을 떠미는데‥‥‥

 그가 안성장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 날 그는 객기가 발동해 시장에서 종이를 줍고 있던 그 지역 넝마주이 한 명을 붙잡고 "술 한잔 먹고 싶은데 사줄래"라고 추근댔다. 그러자 "어디서 보지도 못한 놈이 술을 사달래"라며 넝마주이가 화를 벌컥 냈다. 그러더니 "어이, 이리 좀 와 봐"라며 소리를 질러 주변에 있던 동료들을 불러모았다. 잠시 후 십여명의 넝마주이들이 그를 빙 둘러쌌다. 그는 "이거 큰일났구나. 잘못하다간 남은 한쪽 다리마저 부러지겠는걸." 불안해서 허리띠에 꽂아 다니던 조그만 칼을 움켜쥐었다.
 "야, 너 술 사달라고 그랬다며?"
 "그렇다."
 "이 새끼가, 너 알지도 못하는 새끼가 간덩이가 부었냐. 너 오늘 죽어볼래!"
 여차하면 몰매가 쏟아질 기세였다. 그는 칼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마침 그 부근으로 정복경찰 한 명이 지나갔다. 경찰은 "야, 니네들 알아서 해"라고 한마디를 던졌다. 그 한마디에 넝마주이들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춰 그는 봉변을 면할 수 있었다.
 다니다 보면 지역 꼬지(걸인을 칭하는 은어)들의 텃새도 만만치 않았다. 꼬지들은 "우리 먹을 것도 없는데 딴데서 오면 우리는 뭘 먹고 사냐"며 그를 내몰았다. 그럴 경우 그는 "알았다. 술 한 잔 먹고 가겠다"며 좋게 자리를 피해야 했다. 시비가 붙으면 크게 다칠 것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매냥 쫓기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강원도 주문진장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그 날도 지역 꼬지들의 텃새가 심했다. 생각다못해 그는 꼬지 한 명을 붙잡고 "왕초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런 다음 꼬지가 가르쳐준 왕초 집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왕초 집은 부둣가 후미진 곳에 있었는데 뜻밖에도 왕초는 난장이였다. 그는 불문곡직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형님, 먹고살려고 서울서 왔는데 텃새가 심해 동냥을 얻을 수 없어 이렇게 형님을 찾아 왔수다. 어떻게 한번 봐주쇼."
 "그놈 예의 한번 밝아서 좋다. 그래 며칠 있을 거냐?"
 "딱 삼일만 신세를 지겠습니다."
 "알았다. 내가 내일 나가서 얘기를 해줄 테니까 아무걱정 말고 여기 있도록 해라."
 왕초는 흔쾌히 응낙했다. 그는 그 날 밤을 왕초 집에서 묵게 됐다. 같이 누워 자면서 왕초는 그에게 신세타령을 했다.
 "내 처도 맹인이야. 앞을 보지 못하지. 내가 맹인 처를 데리고 사는 건 지금은 다 날려버려서 옛날 얘기가 됐지만 처갓집에서 집도 사주고 배도 한 척 사줬기 때문이야‥‥‥"
 다음 날 그는 왕초와 함께 시내로 나갔다. 왕초는 꼬지들을 불러 모아놓고 말했다.
 "서울 동생이 찾아와서 사정을 하니 어떡하냐. 잘 좀 봐줘라. 모르는 거 있으면 가르쳐도 주고, 알았지."
 그래서 그는 활개치며 주문진장에서 동냥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전국을 떠돌아다니던 그가 그의 나이 사른 네 살 때인 일천구백칠십구년 여름, 걸인 생활을 마감하게 되는데 그렇게 된 것은 우연히 거리에서 당시 축구선수로 유명했던 이영무 선수의 삼촌 이광훈 전도사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 날도 그는 동냥을 얻기 위해 종암시장 부근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일러 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딴 시장에 가서 동냥을 얻어야 되겠다고 생각한 그는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버스정류장에는 소란한 가운데서 잚은 남자 한 명과 처녀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이 전단을 들고 열심히 노방전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앳돼 보이는 여자에게 특별한 관심이 갔다. "야, 저 어린 게 뭘 안도고 전도를 하고 있을까. 머리가 허옇고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한테 저 어린것이 무슨 말을 해줄 수 있다고 저렇게 목청을 높일까." 속으로 속삭이면서 그는 "참 안 됐다." 오히려 그 여자가 불쌍하게 생각돼 물끄러미 여자를 쳐다보고 서 있었다.
 그때 같이 전도하던 남자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남자는 "예수를 믿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예수가 있으면 나를 이렇게 만들 수가 있느냐"고 역정을 냈다. 그러자 남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대신 전단 한 장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꼭 한 번 찾아오십시오"라며 당부를 했다. 그 남자가 이광훈 전도사였다. 그는 속마음에 찾아가면 돈도 얻을 수 있고 밥도 얻어먹을 수 있겠구나 판단이 돼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 주 일요일 그는 전단을 보고 남영동 체육인교회를 찾아갔다. 이광훈 전도사는 그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예배가 끝난 후 그는 교회에서 차려준 점심을 먹었다. 밥을 먹고 돌아서 내려오는데 전도사가 "어디로 가십니까"라며 그를 불러 세웠다. 그는 "하숙방으로 가야죠"라고 대답했다. "하루 숙박비가 얼만데요?" "오십원에서 백원쯤 합니다." "그러면 돈 내고 잘 거 없이 여기서 자도 되지 않겠어요?" "저야 뭐 아무데서나 자도 상관없죠." 그래서 그는 그 날 밤을 교회에서 지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그는 교회를 나섰다. 그런데 전도사가 또 "어딜 가냐"고 물어왔다. 그는 "수금 좀 하러 가야죠"라고 대답했다. "수금? 수금이 뭡니까?" "동냥을 얻으러 간다는 말이에요." "그래요? 우리 형제님 여기서 딱 삼일만 지내면서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없겠습니까?" 그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하긴 돌아다니다 보니 몸이 너무 피곤해서 머물 곳이 있다면 잠시 쉬고 싶기는 했다.
 교회는 개척교회라 바닥이 마루로 되어 있었고 시원해서 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그러죠 뭐"하며 전도사 말을 따르기로 했다. 전도사는 성경책을 갖다주며 "읽고 싶을 때 읽으십시오"라며 권했다. 그는 성경책을 읽는 것 외에는 달리 하는 일이 없이 꼬박 삼일을 교회에서 지냈다.
 약속한 일이 지나자 전도사가 말했다. "여기서 먹고 자는 건 걱정하지 말고 신앙생활만 열심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교회생활이 편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기도원에도 가겠습니다."
 그는 다음 날 전도사에게 차비를 얻어 담요 한 장을 둘러매고 경기도 오산리에 있는 기도원으로 들어갔다. 일주일 후 기도원을 내려온 그는 이제 생활방식을 바꾸어야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동안 피우던 담배를 끊었다. 그런데 술은 쉽게 끊어지지 않아 애를 먹어야 했다. 술을 먹지 않자 뼈가 쑤시고 잠이 오지 않는 증세가 나타났다. 그렇다고 전도사가 술 사먹으라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니어서 그는 그때마다 전도사 몰래 동냥을 나가서 얻은 돈으로 갈증을 해결해야 했다.
 술에 쉬한 날이면 미안해서 교회에 들어가지 않았다. 자연히 한뎃잠을 자면서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 때문일까. 그런 날이 며칠 이어지자 그는 비로서 술을 끊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을 다져먹고 교회에서 어느 날이었다. 그는 교회에 자주 찾아오던 허아무개 전도사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허아무개 전도사는 무슨 말끝엔가 "기술 가진 게 없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시계수리 기술이 있는데 공구 살 돈 육만원이 없어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허전도사는 "알았다"고 말하더니 며칠 후 "이 돈을 가지고 기술을 살려 보라"며 돈을 갖다 주었다.
 그는 그 돈으로 공구를 구입해 화전읍으로 갔다. 예전에 수리점을 열었던 친구 가게를 찾아가서 "여기 좀 있으면서 밥 좀 빌어먹자"고 했다. 그런데 예상외로 수입이 예전 같지 않았다. 한참 전자시계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거리에서 옛날 시계학원에서 같이 배웠던 동기생을 우연히 만나 그가 시계수리기사로 다시 취직한 곳은 성북동 팔십오번 버스 종점 못미처 쌍다리 부근에 있는 "성북사"라는 허름한 가계였다. 그는 이곳에서 월급 십오만원을 받으며 삼년여를 일했다. 그 후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가진 돈과 은행에서 이백만원을 빌려 사백만원에 가게 일부를 이수해 직접 경영에 나섰다. 이때 그의 나이 서른일곱살이었다.
 떠돌아다니던 그의 삶이 안주할 곳을 찾은 셈이었는데 장사도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먹고 살 만큼은 됐다. 그리고 주로 혼자 늦게까지 가게를 지켰기 때문에 주위에서 "젊은 사람이 성실하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가 자리를 잡자 동네 사람들이 "이제 결혼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며 중매를 섰다. 그는 성화에 못이겨 서너 번 선을 봤다. 선을 본 상대 중에는 청각장애우 여성도 있었다. 오빠가 은행 지점장이고 집이 두 채나 있는 부자 집안의 처녀였는데 그 집 올캐가 두 번이나 그를 찾아와서 "솔직히 얘기해서 아가씨를 못난 사람한테 시집을 보내자니 평생 돌봐줘야 할 것 같고 아저씨는 똑똑하고 기술도 있으니까 한번만 밀어주면 앞으로 얼마든지 살아 갈 수 있을 것 같아 이렇게 부탁하는 거예요. 가게 하나 내주고 집 한 채 사줄 테니까 우리 아가씨와 결혼하세요"라고 부탁했다. 그는 구미가 당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집도 좋고 가계 내주는 것도 좋지만 저녁에 집에 들어가는데 문이 잠겼으면 두들겨도 알 수 있나, 어디를 가도 대화가 안 될 것은 뻔하고, 어려운 점이 많을 것 같아 그만두겠습니다"라며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고 나서 만난 것이 지금의 아내 전미숙씨였다. 당시 전미숙씨는 열아홉살로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 올라와 버스안내양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가 부속을 사기 위해 타고 다니던 팔십오번 버스에서 그는 처음 전미숙씨를 만났다. 그가 전미숙씨를 점찍은 것은 남들처럼 퍼머를 하지 않고 생 머리를 댕기 따서 뒤로 묶은 것이 무척 신선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오다가다 전미숙씨를 만나면 "아가씨는 우리나라 고유의 여인상을 가지고 있어서 참 마음에 듭니다"라고 말을 붙였다. 그때마다 전무숙씨는 대꾸 없이 웃기만 했다.
 어느 날 동료 안내양이 시계를 고치러 왔길래 그는 용기를 내 부탁을 했다. "전 양 그 아가씨 참 착하게 생겼던데 한번 만나게 해주지 않을래요." "어머 아저씨 마음에 들었나 보죠. 걔 정말 착한 애예요. 교회도 열심히 나가 구요. 알았어요. 내가 한번 말해 볼께요."
 며칠 후 얘기를 했는데 잠자코 있더라는 전갈이 왔다. 그것 뿐 그 후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는 틀렸구나 싶어 체념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불쑥 전미숙씨가 가게로 찾아왔다. 그리고 찾아온 목적은 성경주석 한 질을 팔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팔만원짜리 책을 사주기로 하고 자리를 옮겨 중국집에서 말했다.
 "사실 내가 미스 리한테 부탁을 했었는데 소식이 끊겨 궁금해하고 있었어요.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아저씨는 참 그런 말하지 마세요. 일부러 소식을 끊은 게 아니라 그동안 저 시골에 내려가 있었어요."
 그 날은 이렇게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그쳤다. 그가 정식으로 전미숙씨에게 구애를 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책을 팔아준 보답으로 시계를 하나 사고 싶다"고 다시 찾아온 전미숙씨에게 그는 "미스 전, 내 지팡이가 되어줬으면 정말 좋겠습니다"라고 고백했다. 전미숙씨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저는 결혼 상대로서 장애인이고 아니고는 따지지 않아요. 그런 걸 떠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면 돼요. 제가 서원기도를 했는데 전도사가 되기를 기도했기 때문에 장차 전도사 생활할 때 그걸 방해만 안 하면 누구와도 결혼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신바람이 나 얼른 그 말을 받았다.
 "아, 그건 염려 마십시오. 나도 예수 믿고 사니까 미스 전이 전도사가 되도록 제가 뒷바라지를 하겠습니다. 지금은 비록 집도 없는 신세지만 이담에 교회를 개척하면 나는 권사를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미스 전이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도록 제가 뒤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날 이후 그와 전미숙씨는 결혼을 전제로 사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만나면 신앙 안에서 앞으로 살 꿈들을 펼쳐 보이며 행복해 했는데 어려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전미숙씨의 어머니와 언니는 전미숙씨가 그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말 그대로 펄쩍 뛰었다. 어머니는 전미숙씨가 숙식을 해결하고 있던 신월동 오빠 집에 전화를 걸어 "야 이놈아, 그년이 연애질하는 것도 모르고 너는 도대체 뭐하고 있었느냐"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전미숙씨 어머니의 반대가 의외로 거세다는 사실을 안 그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래서 어느 날 전미숙씨를 붙잡고 말했다. "서로 사랑의 표시가 있어야지 그냥 마음으로만 좋아하다가 헤어질 수도 있지 않느냐"며 말했더니 전미숙씨가 대답했다.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아저씨는 도대체 어떻게 확인을 해주길 원하는 거예요?"
 그가 말했다. "그래도 몸과 마음을 다 확인을 해야지 안심하지." 전미숙씨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이 지금은 안 돼요. 내가 아직 공부도 끝나지 않았는데 이번에 중학교 검정고시 시험이 끝날 때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그때가 되면 원대로 해줄게요."
 그는 기다렸다. 그런 다음 팔십사년 사월, 그 해 검정고시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 그는 전미숙씨가 합격한 사실을 확인한 후 전미숙씨를 데리고 무작정 강원도로 떠났다. 춘천에 도착해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버스를 타고 첩첩 산골로 들어가 해가 질 때까지 놀다가 다시 춘천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날밤을 여관에서 같이 지냈다. 전미숙씨는 약속했기 때문인지 그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응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두 사람은 결혼 날짜를 잡았다. 그런 다음 결혼하기로 약속한 팔십오년 일월달을 두 달 남겨 논 그 해 십일월 마침내 전미숙씨는 식구들에게 "그와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도 함께 밝혔다.
 뜻밖의 결혼선언에 접한 전미숙씨 식구들은 혼비백산했다. 어머니는 그 길로 상경해 "이년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며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는 전미숙씨 머리채를 붙잡고 고향집으로 끌고 갔다. 전미숙씨가 "애를 가져서 돌이킬 수 없다"고 울며 매달려도 "죽어도 병신하고는 결혼시킬 수 없다. 애를 떼라"며 어머니가 막무가내로 나왔다.
 전미숙씨가 끌려갔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전미숙씨의 고향집이 있는 예산으로 내려갔다. 전미숙씨의 고향집을 찾아간 그는 당연히 문전박대를 당했다. 별 수 없이 말 한마디 건네 보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가게에서 일이 손에 안 잡혀 초조해 하고 있는데 며칠 후 전미숙씨에게서 편지가 왔다. 편지에는 "이 땅에선 괴로움이 있고 눈물이 있어도 하늘나라의 상급을 바라보며 저는 삽니다. 그러니까 나는 누가 뭐래도 당신하고 결혼할 테니 저를 믿어 주십시오"라고 씌여 있었다.
 
그는 그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 생각해 보았다. 그 집 식구들이 다 기독교 신자라는데, 더욱이 사촌 처남도 목사라는데 믿음 안에서 산다는 사람들이 반대를 하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마지막 방법으로 예전에 전미숙씨에게서 들었던 전미숙씨 어머니가 다닌다는 예산 신택교회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가 찾아가자 목사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서울에서 왔는데 혹시 전미숙이를 아십니까?" "알지, 어려서 여기 교회를 다녔는걸." "사실은 우리가 서울에서 결혼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전미숙씨 어머니가 반대를 해서 승낙을 못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도움이 있어야 될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래요, 정말 결혼하기로 약속했습니까?" "네." 그래도 목사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전미숙씨가 보내온 편지를 꺼내 내밀었다. 편지를 읽어본 목사가 그제 서야 "서로 결혼을 하기로 했구먼"하고 인정을 했다.
 "가만있어 봐. 이럴 게 아니라 내가 미숙이 어머니를 부를 테니 같이 얘기를 해보도록 하지." 목사가 전화를 하자 얼마 후 어머니가 교회문을 밀고 들어섰다. 목사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 총각을 보니까 교회 집사라고 그러고 또 보니까 똑똑해 보이기도 하고 요새 세상에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못 사는 것은 아니잖아요. 시계수리 기술도 가지고 있다니까 먹고  사는 거야 해결하겠지요. 무엇보다 믿음이 첫째니까 어려우시겠지만 집사님이 승낙을 해주세요." 묵묵히 듣고 있던 어머니가 마땅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목사가 다시 설득했다.
 "성격에도 과부와 고아와 장애우들을 외면하지 말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단지 장애를 가졌다고 반대하는 건 이유가 안됩니다. 다른 부분이 못마땅해서 반대를 하는 건 좋지만 집사님은 지금 이 총각이 부모가 없고 장애우라는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반대를 하시는데 그건 하나님 앞에서는 옳지 않은 것입니다‥‥‥"
 
어머니는 목사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묵묵히 듣고 있다가 "알겠다"며 대답하고 돌아갔다. 일이 잘 풀렸음을 감지한 그도 교회문을 나섰다. 그를 향해 목사가 말했다. "승낙 받은 거나 마찬가지이니까 올라가서 기다리세요."
 일주일 후 전미숙씨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의 형을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는 내키지 않았지만 인천 백마장으로 형을 찾아갔다. "형, 내가 결혼을 하게 됐는데 저쪽 집에서 형님을 좀 보자고 그러니 같이 갑시다." 형이 떨떠름한 표정을 떠올리며 말했다. "여태 참았는데 지금 뭐하러 그렇게 급하게 결혼을 서두르냐. 내가 돈도 없고 하니 조금 더 있다 해라." "결혼을 하게 될지 안될 지는 모르겠으나 저쪽 어머니 되시는 분이 보자고 하니 일단 서울역으로 갑시다." 그는 망설이는 형을 재촉해 서울역 다방으로 갔다. 다방에서 잠시 기다리자 전미숙씨와 어머니가 들어섰다. 그를 본 전미숙씨가 먼저 눈물을 쏟아냈다. 그도 반가워서 자신도 모르게 찔끔 눈물을 흘렸다. 얼마 후 자리에 앉은 어머니가 형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며 운을 뗐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하루속히 결혼날짜를 잡읍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기뻐서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팔십오년 일월 십일 체육인교회에서 목사가 된 이광훈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나이 서른아홉, 아내 나이 스물 한 살이던 해 겨울이었다.
 가난한 부부는 그의 가게가 있는 성북동에 보증금 사십만원에 월세 육만원짜리 사글세방을 얻어 신혼 살림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해 사월 달에 첫 딸 혜원이를 얻었다. 그러나 딸을 얻은 기쁨도 잠시, 그는 이어지는 어려운 살림 형편 때문에 전전긍긍해야 했다. 전자시계가 대중화돼서 도대체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아내는 아내대로 신학교에 가기 위해 검정고시 공부에만 매달리고 있고, 별 수 없이 방을 줄여야 했다.
 이십만원에 팔만원짜리로 이사했다. 비로소 상황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내가 직업전선에 나섰다. 그의 가게 앞 버스정류장에서 아내는 월세 오만원을 주기로 하고 토큰부스를 빌렸다. 토큰 장사는 처음에는 괜찮아 보였다. 복권도 팔면 기본적인 수입이 된다고 해서 아내는 열심히 장사에 매달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장사는 아내의 기대를 배반하기만 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토큰을 사오느라 힘만 들었지 버는 돈은 푼돈으로 다 없어지기 일쑤였다. 결국 시작한지 두 달여 만에 아내는 토큰가게를 그만뒀다.
 
그러자 가뜩이나 쪼들리는 생활이 더 심해졌다. 그렇다고 방세가 밀리고 그런 건 아니었지만 곤궁은 눈에 띄게 드러났다. 설상가상으로 생활이 힘들어지자 아내는 조그만 일에도 벌컥 신경질을 내기 시작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토큰가게를 해서인지 아내는 동네 사람들에게 인사성이 밝았다. 오죽하면 그의 주위 사람들이 "자칫하면 너 색시 잃겠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그는 은근히 기분이 나빠 어느 날 아내를 앉혀놓고 말했다. "아무한테나 불필요한 친절을 보이지 마. 당신이 친절하게 대해주면 남자들이 생각이 달라서 그러나보다라고 생각해 유혹할 수도 있으니까."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내가 발끈 화를 냈다. "당신은 이제 내가 인사하는 것까지 참견할 거예요?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 날 그와 아내는 결혼한 후 처음으로 지독한 말다툼을 벌였다.
 그는 아내의 신경질이 전적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기인한다고 믿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큰일나겠다는 위기감이 그를 짓눌렀다. 그는 궁리 끝에 며칠 후 아내에게 말했다. "가게 세 내야 되고 방세도 내야하고 우리 살아갈려니까 너무 힘든 것 같아. 그래서 당신이 이해한다면 잠시 동냥을 했으면 해. 시계는 지금 일이 없으니까 맡아놓으면 저녁때 와서 수리하며 될 거 아니겠어? 그렇게 해서 이 어려움을 빨리 면했으면 하는데 당신 생각은 어때?" 아내가 한참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 다음 후-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받았다. "당신 뜻이 정 그렇다면 좋을 대로하세요. 그게 도둑질하는 것도 아니니 죄 될 거야 없겠죠." "고마워. 대신 누구한테도 얘기하면 안 돼. 당신과 나만 알고 있는 거야. 알았지?" "알았어요."
 이렇게 해서 그는 다음 날부터 다시 걸인생활을 시작했다. 아는 사람이 있는 데는 가지 않고 주로 서울 변두리와 인천 그리고 성남시로 동냥을 나갔다. <계속>

글/이태곤

 
 

 

작성자이태곤 기자  a35270@hanmail.net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함께걸음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5364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치훈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