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행동하는 참여가 문제해결의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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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먹고 생존하며 살아가려면, 헌법 같은 건 아예 몰라도 ‘이 법’만큼은 반드시 알고 지내야 한다. 실제 현실에선 헌법보다 상위에 존재한다는 그 법은 무엇일까? 바로 ‘근로기준법’이다. 모르면 당하고, 알아도 당한다. 그렇기에 매번 꼼꼼히 살펴봐야 하지만, 조항만 116조에 이르는 광범위한 법 전체가 그물망처럼 빠져나갈 구멍투성이다. 법대로만 지켜진다면, 그래서 노동의 가치를 정당하게 보장받는 일상이라면, 이번에 소개하는 ‘이 단체’ 같은 조직이 생겨날 필요가 있었을까? 2017년 11월 1일 출범 이후 반 년 만에 1만2천 건의 제보가 쏟아졌다는 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한숨과 분노 속에 참고 견디기만 반복했던가를 반증한다. 갈증 속의 오아시스처럼 등장한 단체의 명칭부터 속이 시원해진다. 직장갑질119를 만났다.
비정상의 관행을 정상화시킨다
직장갑질119는 사무실이 없다. 회의가 필요할 때는 연대체들의 상황실 같은 데서 만난다. 그런데도 전국조직이다. 변호사, 노무사, 노동전문가, 현장활동가 등 조직에 함께하는 전문인력이 150여 명에 이른다. 네트워크 중심의 플랫폼으로 운영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카카오톡 오픈채팅과 이메일로 상담과 제보가 진행된다. 오픈채팅방은 누구나 익명으로 글을 올릴 수 있고, 보다 심화된 내용과 붙임자료는 이메일로 확인한다. 150명이 각자의 자기 자리에서 일을 하다가, ‘몇 번 이메일은 OOO님이 답변해 주세요’ 하면 담당자가 결정된다. 앞에서 밝힌 ‘반 년 만에 1만2천 건의 제보’는 그 양과 내용에 있어서,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부조리들이 이들에게 전달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일명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올해 7월 16일부터 시행됩니다. 근로기준법 제76조가 올해 1월에 신설됐고, 7월 16일부터 법제도로 노동현장 전체에 적용되는 것이죠. 업무 이외의 회식, 노래방 강요, 장기자랑 강요, (병원 간호사들 간의) 태움, CCTV를 통한 감시, 야근 강요 등, 노동의 기본을 벗어나는 모든 불필요한 강요가 법으로 금지됩니다. 기존의 회사 간부들의 반발과 불만이 크죠. ‘회사가 발전하기 위해서 그 정도도 못 하나?’, ‘직장생활에서 퇴근 후 술 한두 잔까지 금지시키나?’는 볼멘소리들이 터져 나오는데, 사회문화가 바뀌는 과정임을 이젠 인정해야 합니다. 그만큼 세상이 이미 변했다는 거죠.”
상세한 설명을 이끌어 준 오진호 총괄 스태프의 언급처럼, 직장갑질119라는 명칭을 생전 처음 듣는다는 이들보다는, ‘어디선가 들어봤는데?’ 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을 거라 판단된다. 신입간호사들한테 노출이 심한 복장을 입히고 무대 위에서 선정적인 춤을 추게 한 장기자랑대회 영상이 폭로돼 사회적 지탄을 받은 바 있다. 한림OO병원의 비리를 세상에 공개한 이들이 바로 직장갑질119다. 방송업계에서 관행처럼 이뤄지던 상품권으로 임금지불, 일명 상품권페이의 관행을 뒤집어놓은 것도 직장갑질119다. 출범 이후 기간은 짧았지만, 이들이 일궈낸 큰 성과들은 적지 않다. 여기서 ‘큰 성과’라는 건 말도 안 되는 부조리가 관행처럼 이어지던 걸, 상식의 선으로 되돌려놓은 ‘비정상의 정상화’를 의미한다.
“직장 내 괴롭힘을 증명하기 위해선 증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만으로는 고소나 고발 같은 다음 단계가 진행될 수 없죠. 상담 중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조언 한 가지를 먼저 말씀드릴게요. 욕설이든 부당한 지시든 신체적 접촉이든, 반드시 녹음을 해서 녹취자료를 만드세요. 많은 분들이 녹음 자체를 불법으로 알고 계시는데, 본인이 포함된 녹음은 합법입니다. 남들의 대화를 몰래 녹음하는 건 도청이고 당연히 불법이지만, 녹음의 내용 안에 본인이 들어가 있으면 확실한 증거자료가 된다는 거죠. 경찰에 고소를 하든 회사 징계위원회에 징계요청을 하든,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또는 ‘그런 뜻으로 한 거 아닌데?’의 반박자료로 아주 중요하게 활용됩니다. 저희 입장으로 봤을 땐 굉장히 신뢰할 수 있는 증빙자료가 되는 거죠.”
▲ 직장갑질119의 폭로로 큰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던 한 종합병원의 행사 장면. 신입간호사들에게 자기결정권 없는 선정적 의상의 무대공연을 일방적으로 강요했다. *한국당사자널리즘센터 뉴스타파 화면 갈무리 |
법은 있지만, 보호 받을 법이 없다?
직장갑질119의 오진호 총괄 스태프한테 들은 직장갑질 사례들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함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불합리함이 나열됐고, 상상을 벗어나는 갑질의 형태도 쏟아지듯 폭로됐다.
“어제와 오늘 접한 사례만 따로 말씀드린다면, 병원에 간호사로 입사한 분이 수습기간 중에 회의를 느껴 그만두겠다고 하니까, 사용주가 이미 계약한 기숙사의 1년 비용을 다 내야만 나갈 수 있다고 했답니다. 또 다른 분은 회사의 채용공고를 보고 지원해서 입사를 했는데, 회사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내용만 골라서 광고를 냈다는 거예요. 실제 근로조건과 환경이 전혀 딴판인 일종의 사기채용을 한 거죠. ‘직장인들은 가슴 속에 사직서 한 장은 넣고 다닌다’는 말이 있잖아요. 이 말의 속뜻은 회사를 바꾸는 건 어렵다 해도, 최소한 그만두고 싶을 때는 그만두는 게 가능해야 한다는 걸 의미해요. 직장갑질119에는 이런 사례들이 굉장히 많이 들어오거든요. 단순히 근로기준법 몇 조 몇 항 위반이라고 지적하기 어려운 사각지대가 너무나 많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법은 분명하게 있는데도 여전히 법이 비어 있다는 거예요.”
대한민국의 모든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는 건 아니다. 언론에 매번 등장하는 게 대기업과 공공기관의 거대노조들이라서 단체협약이라는 최소한도의 권리가 보장되는 것 같지만, 한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10%에 불과하다. 게다가 30인 이하 사업장으로 가면 0.2%로 툭 떨어진다. 가장 간과되는 건, 5인 미만 사업장이 전체의 60%가 넘는다는 현실이다. 사실상 근로기준법의 범주에서 전체 노동자들의 60%가 제외돼 있다는 것이다.
“5인 이상 사업장은 8시간 이상 일을 시킬 때는 1.5배의 추가수당을 줘야 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8인 정도가 근무하는 사업장은 일부러 두 개로 나눠서, 4인씩 근무하는 다른 회사로 등록을 해요. 그럼 근로기준법이 무용지물이 되는 거죠. 법은 대놓고 무시하고, 대놓고 직원을 해고하기 일쑤입니다. 노동조합이 없는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노동부에 직접 진정을 넣어야 하거든요. 문제 해결을 시도할 용기를 내기도 어렵고, 실제 해결의 기대를 갖기도 난망해지는 거죠. 이렇게 노동자들은 계속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사용주들은 그물 속 송사리처럼 빠져나갈 구멍들만 활용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겁니다.”
온라인 환경에서 성장한 직장갑질119이기에, 사회관계망서비스 등 시대적 환경에 따라 빠른 속도로 저변을 확대했다는 건 분명한 긍정적 측면이다. 하지만 직장갑질119가 모든 직장인들과 노동자들의 권익을 섭렵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선, 여전히 빈틈이 존재한다고 오진호 총괄 스태프는 스스로를 진단했다.
“온라인 환경의 접근이 어려운 분들이 분명히 계시거든요. 연세가 많으신 청소노동자라든가, 우리말과 사회적 환경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조선족이나 새터민들도 계시죠. 이주노동자들도 물론 포함되고요. 상담의 첫 질문은 근로계약서의 내용인데, 근로계약서 자체가 없이 일하는 분들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어요. 근로환경이 특정화돼 있어서, ‘무슨 일’이라고 하면 ‘누구누구’라고 금세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죠. 저희가 중지를 모아 보강해야 할 지점들이라서, 그 빈틈에 대한 고민을 모두가 깊게 하고 있습니다.”
▲ 직장갑질119가 주최한 '을(乙)들'의 가면무도회의 한 장면. 기존 언론에 가장 많이 인용돼 화제가 됐던 영상이기도 하다. *사진제공. 직장갑질119 |
참여가 세상을 바꾼다
“직장갑질119가 출범하기 전부터 ‘비정규직없는 세상만들기 네트워크’에서 활동했고 지금도 하고 있는데, 119와 같은 조직을 만들어 활동해 보자는 의견들이 이전부터 모아지고 있었어요. 본격적으로 분출이 된 건 촛불혁명 때였죠. 2017년이라는 시기는 불의한 정권이 물러난 전환기였잖아요. 극히 평범한 시민들과 직장인들이 ‘민주주의를 바로 잡아 보자’고 광장에 쏟아져 나왔고, 연인원 1700만이라는 힘이 한데 모여 정권을 바꿨던 거죠. 저희들의 문제의식은 그 지점에서 터져 나왔어요. 그렇게 정권까지 바꾼 국민인데, 정작 자기 직장의 비민주적 환경은 바꾸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는 거, 그건 모두의 마음에 자괴감으로 남게 됐을 거란 결론이 내려졌던 겁니다.”
주말에는 광장에 나와 목청껏 민주주의를 외쳤지만, 정작 월요일 출근부터 가장 비민주적인 시스템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건 진정 불합리한 일이다. 그렇게 촛불을 들었던 모든 이들의 마음속엔 자기의 삶도 바꾸고 싶지 않을까 하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게 됐고, ‘어떻게 이 사람들의 의견을 한데 모을 수가 있을까?’를 6개월 가까이 토론한 결과가 온라인 플랫폼으로 만나는 직장갑질119의 탄생이었다고 한다.
▲ 직장갑질 타파를 위한 긴급 토론회 현장에서, 한 활동가가 갑질을 당하는 피해자의 모습으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 제공. 직장갑질119 |
“이 플랫폼의 가장 큰 순기능은 참여하는 시민들 스스로가 문제를 풀어가고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는 점이에요. 대화의 장이 폭넓어지다 보니까, 문제를 먼저 해결했던 참여자들이 조언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대폭 늘어났다는 거죠. 예를 들어 저희가 ‘반드시 녹취를 받아놓으세요’라고 말씀드렸다면, ‘그럼 어떤 녹음기가 좋은가요?’라는 질문이 올라오죠. ‘제가 그런 경우를 겪었는데, OO제품이 가장 좋았어요’, ‘OO제품이 초소형인데, 녹음이 깨끗하게 잘 되더라고요’ 하는 식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조언하는 과정이 활성화되고 있어요. ‘그 서류는 이런 식으로 작성하세요’ 하며, 직접 사례를 전하고 공개하는 도움도 계속 올라오고 있죠.”
사안이 개별적이고 경미하다면 일대일 문답으로 정리가 되지만, 법률적인 문제나 사회구조적인 모순일 경우에는 사례들을 모아 직장갑질119의 이름으로 언론에 공개하는 과정을 거친다. 정부의 정책에 제동을 걸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경사노위’라고 부르는 대통령 직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탄력근로제를 확대 시행하려던 시도를 막아선 경우다. 노동조합이 없는 기업들은 ‘근로자 대표’라는 인물을 활용한다. 그런데 실제 근무하는 노동자들은 자신의 회사에 근로자 대표가 있는지, 그게 누군지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용주가 회사의 전무 같은 간부를 그 자리에 앉혀놓고, 근무자들의 뜻과 전혀 다른 결론을 내려 시행하면 그만이다. 주요 언론에서도 지나치고 넘어갔던 근로자 대표제의 비합리성을 따끔하게 지적한 게 바로 직장갑질119다.
“저희가 뛰어나거나 능력이 많아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드러나지 않은, 숨어 있었던 법제도의 맹점을 지적하고 문의하셨던 모든 분들 때문에, 저희도 그 빈 구멍들을 발견하게 됐던 거죠. 저희한테 제보해 주시는 한 분 한 분의 목소리들이, 불합리한 제도의 문제점들을 이 사회에 공론화시키는 밑거름이 됐던 겁니다. 공론화의 확실한 성과는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점이죠. 직장인들 하나하나, 노동자들 하나하나의 힘이 세상을 바꿉니다. 저희들의 역할은 그 플랫폼을 운영하고 서로를 연결하는 것이죠. 반드시 개선해야 할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는 주체는 바로 여러분인 겁니다.”
<참고-법조문>
제76조의3(직장 내 괴롭힘 발생 시 조치) ① 누구든지 직장 내 괴롭힘 발생 사실을 알게 된 경우 그 사실을 사용자에게 신고 할 수 있다.
② 사용자는 제1항에 따른 신고를 접수하거나 직장 내 괴롭힘 발생 사실을 인지한 경우에는 지체 없이 그 사실 확인을 위한 조사를 실시하여야 한다.
③ 사용자는 제2항에 따른 조사 기간 동안 직장 내 괴롭힘과 관련하여 피해를 입은 근로자 또는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근로자(이하 "피해근로자등"이라 한다)를 보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 해당 피해근로자등에 대하여 근무장소의 변경, 유 급휴가 명령 등 적절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 이 경우 사용자는 피해근로자등의 의사에 반하는 조치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④ 사용자는 제2항에 따른 조사 결과 직장 내 괴롭힘 발생 사실이 확인된 때에는 피해근로자가 요청하면 근무장소의 변경, 배치전환, 유급휴가 명령 등 적절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
⑤ 사용자는 제2항에 따른 조사 결과 직장 내 괴롭힘 발생 사실이 확인된 때에는 지체 없이 행위자에 대하여 징계, 근무장 소의 변경 등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 이 경우 사용자는 징계 등의 조치를 하기 전에 그 조치에 대하여 피해근로자의 의 견을 들어야 한다.
⑥ 사용자는 직장 내 괴롭힘 발생 사실을 신고한 근로자 및 피해근로자등에게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처우를 하여서는 아 니 된다. [본조신설 2019. 1. 15.] [시행일 : 2019. 7. 16.] 제76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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