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외면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본문
서울 중심부에 있는 평화로에는 평화비(평화의 소녀상)가 자리 잡고 있다. 소녀가 응시하는 맞은편엔 주한일본대사관이 있었고, 건물을 새로 짓겠다며 기존의 대사관을 모두 철거한 공터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뒤덮여 있다. 신축허가를 내준 지 4년이 넘도록 착공에 들어가지 않자, 서울 종로구청은 지난 4월 대사관 신축에 대한 건축허가 취소를 ‘법대로’ 통보했다. 작은 동상 하나를 이유로 자기 대사관도 못 짓는 나라가 있다는 것이다. 그 평화로에서 27년 7개월을 한 목소리로 외친, 일본군 성노예제(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지난 8월 14일로 1,400회를 맞았다. 아기가 태어나 결혼 적령기로 성장할 만치의 긴 세월이 흘렀지만, 수요시위의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예단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날’을 확고하게 앞당기고 있는 이들이 있어, 응원과 연대의 손길을 기꺼이 내밀게 된다.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를 만났다.
죽을 때까지 상처는 아물지 않습니다
- 길원옥 할머니 (1928∼현재)
<함께걸음>은 지난 2017년 10월호에서 한국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아래 정대협)를 만나 소중한 의견을 들은 바 있다. 정의기억연대는 정대협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더 많은 연대체와 함께하게 된 새로운 조직이다. 사단법인이었던 정대협과 달리, 정의기억연대는 재단법인으로 출범했다. 그렇기에 훨씬 폭넓은 사업추진이 가능해졌고, 활동영역은 우리나라를 벗어나 전 세계 곳곳으로 넓어지고 있다. 우리의 상처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한정짓는 게 아니라, 성폭력생존자(피해자)들이 신음하고 있는 수많은 전쟁지역에 ‘할머니들의 정신’을 인류의 보편적 인권정신으로 심어가고 있는 것이다.
류 “얼마 전 자유발언 시간에 한 초등학생이 했던 말이 마음에 확 와 닿았어요. ‘천사백 번이나 수요시위를 했다는 건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일본이 사죄하지 않고 버텼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정의와 평화를 요구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고 했죠. 그 학생의 표현을 똑같이 옮긴 건 아니지만 그런 의미로 발언을 했거든요. 그 초등학생이 수요시위의 정의를 정확하게 내렸다고 생각해요. 다른 누구보다도 할머니들이 포기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오 “시작은 할머니들이 만드셨고 점점 더 많은 시민들이 동참하면서, 할머니들의 그 용기가 사람들의 연대의식을 만들었던 거죠. 그게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동인이 아니었나 싶어요. 정말 말도 안 되는 2015년 12월 28일 한일합의(화해치유재단 설립, 불가역적 종결 선언)에 가장 크게 분노하셨던 건 할머니들이셨잖아요.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그 반역사적인 합의 때문에, 다시 한번 수많은 사람들이 이 일그러진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어요. 무엇이 문제이고 진정한 진실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깨닫게 만들어준, 그 직접적인 계기가 역설적이게도 그 한일합의 선언이었다는 겁니다.”
1991년 8월 14일, 당시 68세였던 故 김학순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최초의 고백으로 공식 발표했다. 그리고 당시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의 방한에 맞춰, 1992년 1월 8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정부의 사죄를 외쳤던 게 수요시위의 시작이 됐다. 원래는 단발성 집회였다는 후일담이 많았기에,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이사장한테 그 여부를 직접 문의해 봤다. 일회성은 아니었고 몇 차례 또는 열 번 정도 진행할 예정으로 시작했었는데, 그게 100회를 넘기게 되자 수요시위의 의미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게 됐다고 한다. 이번 취재를 위해 마주한 류지형 생존자복지팀장과 오성희 인권연대처장의 의견 또한 비슷했다. 1,000회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다르고, 지금처럼 확고한 연대와 시위의 규모를 만들어놓은 건 다름아닌 일본정부였다는 것이다.
오 “하나의 이슈를 가지고 이렇게까지 꾸준히 오랫동안 시위를 했던 경우는 없었죠. (수요시위는 ‘단일 주제로 개최된 집회’로는 이미 2002년 3월 6일 500차 시위 때 세계 최장기간 집회로 기록됐고, 지금도 매주 그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중이다.) 한일합의가 남긴 가장 큰 부작용은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이라는 여성인권침해의 문제를 정치적 논쟁인 양, 또한 외교적인 마찰처럼 왜곡시키며 본질 자체를 흐리게 만들었다는 점이에요. 극우언론들은 이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진보와 보수의 대립 차원으로 폄하시켜버렸죠.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해석을 달리할 수 있는 화두가 아니에요. 이건 전 세계 어느 누가 보더라도 전쟁 중에 저질러진 명백한 인권침해범죄입니다. 한 국가가 기획해서 국가가 주도한 집단 여성성폭력범죄라는 것이죠.”
류 “국제적으로도 다른 나라 정부들 또한, 피해자들의 인권회복 측면에서 일본군 성노예제 만행을 규탄해왔어요. 유엔(UN)에서도 계속 성명을 발표했고, 가해자들은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일관된 입장이었잖아요. 그걸 난데없이 한국과 일본 간의 외교적 합의로 손쉽게 해결 짓겠다는 식으로 왜곡시켰던 게 일본정부이고, 거기에 적극 동조했던 게 한국의 극우언론과 수구세력들입니다. 이건 명백한 인권침해사건이예요. 분명한 공식사죄와 법적배상 없이 금전보상 정도로 무마하려는 건, 본질 자체를 뒤흔드는 반인륜적 만행일뿐입니다.”
우리는 정부는 못 믿어도 국민들은 믿습니다
- 김복동 할머니 (1926∼2019)
1932년 상해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1945년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의 거의 모든 전투지역에 ‘군위안소’를 설치해서 점령지와 식민지 여성들을 동원해 성노예로 만든 반인륜의 범죄를 저질렀다. 역사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작은따옴표를 사용하며 일본군 ‘위안부’라고 부르지만, 정확하게는 ‘일본군 성노예제’가 올바른 표현이다. 영어로는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이고, 범죄의 주체가 일본이며 범죄의 본질은 성노예제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 ‘성노예’라는 표현을 할머니들이 너무 힘들어하셔서, 일본군 ‘위안부’라는 용어로 대체하는 게 일반적이다. 다만 절대 사용해선 안 될 표현이 ‘종군 위안부’이다. ‘종군’은 ‘자발적으로 따라다녔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에, 우리 민족에겐 금기어와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본정부와 우익언론, 한국의 극우매체들은 여전히 ‘종군’이라는 용어를 태연하게 앞세우고 있다.
오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는 거죠. 일제강점기 당시에 그 긴 세월 동안 인권유린만행을 저질렀고, 뒤늦게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체결한 1965년의 협정과 2015년의 합의는 지속적으로 피해자들의 존엄과 명예를 훼손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요. 그걸 핑계로 이젠 경제도발까지 자행하고 있잖아요. 삼권분립을 기반으로 한국 사법부가 독립적인 판단에 따라 강제동원배상판결을 내렸는데, 그걸 한국정부가 개입해서 뒤집고 백지화시키라는 건 명백한 내정간섭이에요. ‘전쟁 중에 발생한 인권침해피해에 대해서는 개인이 정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다른 나라 모든 이들이 봤을 땐 너무나 비상식적인 논리지만, 그게 일본정부의 논리이고 끊임없이 도발을 자행하는 전쟁범죄의 뿌리에서 비롯된다는 걸 잊어선 안 됩니다.”
▲ 1,400차 수요시위에 참석한 수많은 시민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는 길원옥 할머니의 모습.(무대 뒤 스크린에 담긴 영상으로 촬영함.)) |
류 “저는 조금 다른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수요시위와 평화의 소녀상에 대한 관심과 호응이 갈수록 높아지는 건 사실이에요. 특히 청소년들의 참여가 두드러지고 있죠. 손에 들 피켓을 직접 열심히 만들어오고, 자유발언문을 정말 진지하게 써오는 학생들도 많아요. 그런데 대학생들의 참여도가 낮고, 삼십 대와 사십 대 연령층의 빈자리가 특히 눈에 띄곤 해요. 많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 연령대들이 다들 직장을 준비하고 취직해서 직장생활과 육아와 교육 같은 현실문제에 매몰돼 있다는 것 역시 외면할 순 없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런 분들한테 이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자기 삶이 물론 가장 중요하죠. 그런데 전쟁이라는 상황이 되면 자기 삶부터 없어지는 거고, 우정과 사랑 같은 것도 다 사라지게 돼요. 모든 게 다 파괴되는 거죠. 그래서 그 전쟁 상황에서 평생의 피해를 당하신 할머니들이 앞에 나서서 계셨던 거예요. ‘나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전쟁이 없는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된다’고 끊임없이 외치셨거든요. 우리는 각자의 일상을 살고 있기 때문에 할머니들의 그런 말씀이 무슨 뜻인지 선뜻 새겨듣지 못하지만, 이미 본인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자신이 아닌 후대가 다시 또 당하면 안 된다는, 절규와 같은 그 외침은 분명히 진지하게 경청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오 “지난여름 일본에서 열린 ‘표현의 부자유전’에서, 개막 사흘 만에 평화의 소녀상만 전시중단을 시켰죠. 국제적으로 거센 비난을 받고 세계시민의 항의가 빗발쳤는데도, 그렇게 하는 나라가 일본이고 그 정부의 관료들이에요. 일본의 언론통제는 엄청나게 심해요. 거의 관제언론 수준이고, 정부의 말과 다른 내용은 일체 싣지 않고 있어요. 일본인들은 그걸 읽고 그렇게 믿는 걸로 끝나는 거죠. 일본이란 나라한테 가장 위험한 것 중 하나는 역사가 단절됐다는 점이에요. 역사교육에서 역사의 진실은 다 빼고 보여주고 싶은 것만, 다시 말해 전쟁범죄의 당위성과 그 뿌리만을 주입시키고 있다는 거죠. 국제적인 전시회에서 특정 전시물만 자의적으로 철거한다는 게 얼마나 아둔한 결정인지, 일본 스스로도 그걸 깨닫지 못한다는 게 아주 심각한 현실인 거예요.”
잘못된 역사는 감춘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 이용수 할머니 (1928∼현재)
27년 7개월이라는, 한 세대가 넘어가는 지난한 시간을 거쳐 수요시위는 1,400차를 맞았다. 故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의 증언을 했던 날을 기념해서 전 세계는 매년 8월 14일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로 지정하고, 전쟁피해지역의 전시성폭력생존자들을 잇는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올해는 특히 기림일과 1,400차가 같은 날짜로 겹쳐, 정의기억연대 입장에선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수요시위는 언제까지 계속될까? 축제의 분위기로 아름답게 마무리될 계기가 찾아들 수 있을까? 그걸 기대하는 게 합리적인 상상일까? 이 지점에서 우리가 절대 잊어선 안 될 매우 중요한 화두가 존재하고 있다. 1,500차가 되든 1,600차가 되든, 그게 2,000차라는 전무후무한 숫자를 넘겨가든 간에, 수요시위는 일본의 전시만행을 세계시민들에게 점점 더 넓게 각인시키고 있고, 새로운 운동의 씨앗을 광범위하게 펼쳐내는 날갯짓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 “지난 2012년에 나비기금을 만든 이후로, 다른 나라 전시성폭력생존자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어요. 아프리카 각국의 내전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거든요. 콩고 같은 경우는 극심한 내전 때문에, 일상의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돼 있어요. 성폭력피해를 당하고도 자신이 피해자라는 것마저도 몰라요. 일상 자체가 그렇다 보니까, 성폭력을 당해도 그게 ‘피해’라는 걸 인지하지도 못하는 상황이 돼 있다는 거죠.”
류 “내년이 정대협 삼십 주년인데, 저희가 작년부터 ‘김복동평화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어요. 첫 해 수상자가 우간다의 인권단체 대표였는데, 아프리카 나라들의 경우는 대부분 제국주의 열강들한테 당했던 식민지지배에선 벗어났지만, 독재정권이 들어서면서 악순환이 끊이질 않고 있어요. 전시성폭력을 겪고 돌아와도 고향에서 환영 받지 못하고, 가족에게 버림을 받고 결혼해서도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게 일상화돼 있거든요. 하소연할 데도, 피할 데도, 도움을 구할 데도 없는 상태로, 피해자들이 제각각 파편처럼 방치돼 있는 거죠. 그래서 정의기억연대가 내년 완공 예정으로, ‘김복동센터’라는 이름의 건물을 현지에 짓고 있어요. 거기에 우간다 내전역사관을 만들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공간과 쉼터도 함께 건립할 거예요. 머나먼 아프리카 땅에 우리의 이름으로 세워질 ‘김복동센터’는 정의기억연대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확장되는 출발점으로 기록될 겁니다.”
오 “다른 나라의 전시성폭력생존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만드는 게 연대의 힘이고, 보편적 인류정신을 실천하는 정의로운 길이잖아요. 그것이 바로 할머니들의 뜻이기도 하죠. 피해생존자들 간의 연대, 그건 언젠가 우리의 할머니들이 모두 다 떠나신다 해도, 할머니들의 빈자리를 후대에서 계속 채워나가면서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계승한다는 소중한 의미를 담고 있어요. 비록 육신은 진정한 사과를 받지 못하고 떠나신다 해도, 우리들이 할머니의 자리를 굳게 지키는 한 할머니들은 언제까지라도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는 거죠. 정의기억연대와 함께해 주세요. 평화의 소녀상 옆의 빈자리에, 이젠 여러분이 앉으실 차례입니다.”
“언젠가는 밝혀져야 할 ‘역사적 사실’이기에 털어놓기로 했습니다. 제가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 故 김학순 할머니 (1924∼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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