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믿는다, 노래의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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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과 노래의 공연 ‘고백’ 무대 현장의 모습. ‘고백’은 마음속 얘기를 털어낸다는 의미를 담지만, ‘Go Back’로 과거를 되돌아본다는 또 다른 화두를 던진다. 사진제공. 일과노래 |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핵심 하나가 있다. 우리가 흔히 민중가요라고 말하는 노동가요의 존재가 그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형식의 노동운동이 진행된다 해도, 노동가요가 없는 노동운동의 현장을 떠올리기는 힘든 일이다. 그만큼 노동가요는 흩어진 대오를 다시 뭉치게 하고, 현실에 지친 심신을 위로하며, 다시 타오를 불꽃의 결의를 담금질하게 만드는 투쟁의 중심에 위치한다. 모두가 화려한 조명과 갈채에 열광하며 ‘나가수’, ‘슈퍼스타케이’, ‘프로듀스101’, ‘히든싱어’에 몰입할 때, 묵묵히 거리의 현장으로 나서는 이들이 있다. 발성과 음악성 자체만으로도 최고의 인정을 받는데, 준비된 무대 대신 칼바람과 비바람의 진흙탕 위에 서서 가열 찬 열창을 내지르는 이들이다. 굳게 쥔 오른주먹과 함께 집회현장에서 익숙하게 마주하던 그들을 이 지면에 초대한다. 반갑게 맞이할 독자들이 많으리라 기대한다. ‘일과 노래’가 이번 호 주인공이다.
우리가 노래를 시작하게 된 이유
박은영, 김영희, 지민주, 이혜규, 권영주, 조현민, 이해정, 황현, 이렇게 이름만 나열하면 단번에 누가 누군지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진을 보면 곧장 ‘아, 이 사람!’ 하는 반가움이 앞설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고, 지금 현재도 함께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마주하리라는 믿음이 떠오르는 얼굴들이다. 이런 믿음을 간직하게 되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연대의 힘’이다. 우리를 외롭지 않게 만들리라는 확신, 그래서 이젠 우리가 먼저 그들을 응원해야 하는 차례가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박은영 “2013년 초부터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어요. 정식으로 함께 시작한 건 그 해 4월이었죠. 다 같은 마음일 것 같아요. 각자 혼자서 활동하다 보면, 하고 싶은 일들을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럴 때 제일 좋은 방법은 여럿이 한데 모이는 거예요. 혼자선 못하던 걸 할 수 있게 되고, 하고 싶었던 걸 더 크게 할 수도 있게 되죠.”
이혜규 “맞아요. 혼자서는 못하는 걸 여럿일 때는 가능해지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게 연대의 힘이고, 그게 바로 노래의 힘인 거죠.”
장애인권운동의 집회뿐 아니라 진보계열 어느 단위의 집회에 참석해도, 그들 중 한두 명은 무대에 서서 열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연대가 필요한 곳이라면 그 곳이 어디든 가리지 않는다. 뛰어난 음향시스템이 갖춰지고, 온도와 습도까지 완전하게 조절되는 무대에서 그들을 만난 적은 없다. 언제나 ‘현장’이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그들이 먼저 견뎌야 하는 건 뙤약볕 아니면 칼바람이다. 하지만 노래의 발성엔 더욱 큰 힘이 실리게 된다. 함께하는 수백, 수천, 수만의 동지들이 바로 앞에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궁금했던 내용부터 물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들을 보다 가깝게 이해하고 싶어 준비했던 질문이기도 하다. ‘왜 현장이냐?’는 것. 그 정도의 뛰어난 실력이면 가수의 길도, 뮤지컬의 길도, 안정된 종합예술의 길도 얼마든지 가능할 텐데 왜 낮은 곳으로, 소외된 곳으로, 한숨과 절규가 터져 나오는 곳으로 앞장서며 발걸음을 옮기는 걸까?
박은영 “저는 92년부터 ‘노래공장’이라는 팀으로 시작했어요. 전문성을 갖추고 우리의 얘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펼칠 수 있는 노래팀을 만들자는 취지로,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만든 팀이었거든요.”
지민주 “저는 대구에서 학교를 나왔는데, 학교 다닐 때부터 노래패 활동을 했어요. 당시 대구지역엔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전문 노래패가 없어서, 뜻이 맞는 친구들과 정말 무일푼 상태로 시작했어요. 십시일반의 도움으로 옥탑방 하나 빌려서, 거기서 먹고 생활하면서 97년에 결성한 게 연대를 위한 노래모임 ‘좋은 친구들’이라는 노래팀이었죠. 거기서 메인(main, 중심) 가수로 활동하다가 목이 터져버렸어요. 목을 너무 혹사했던 거죠. 솔로로 1집을 내면서 서울로 와서 활동하게 됐고, 2013년에 은영 언니의 제안으로 ‘일과 노래’에 합류했어요. 지금은 개인 활동과 팀 활동을 같이 병행하고 있습니다.”
김영희 “대학 노래패 활동 경험은 있지만, 저는 장애운동 분야에서 10여 년 일을 했어요. 이 분들은 항상 장애운동에 연대해 주던 가수들이잖아요. 그 인연을 맺고 지내다가, ‘일과 노래’라는 팀을 만들 때 함께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아서, 출발 때부터 같이 활동하게 됐습니다.”
이혜규 “저도 대학 노래패부터 시작을 했죠.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97년 ‘부산 메이데이 문화제’를 부산지역 동지들과 같이 준비하고 공연하면서, 그걸 계기로 부산지역 노래패 ‘참다운’을 결성하게 됐습니다. 서울로 오게 된 계기는 박은영 동지가 같이 팀을 꾸려서 해보고 싶다는 권유 때문이었죠. 그래서 2000년대 초반에 ‘노래공장’의 멤버로 결합해서 활동하게 됐습니다.”
당시에도 이들은 각 지역의 노래팀에서 유명한 인물로 이미 알려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시절에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게 가능했던 것 같다. 취재의 자리에 함께한 4인은 서로를 알게 된 계기를 얘기 나누며, 잠시 동안 자유롭고 유쾌한 시간을 가졌다. 평소에 미처 알지 못했던 서로의 뒷얘기(behind story)들이 쏟아져 나왔다. 누가 언제 누구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는 거, 당시 누가 제일 유명했다는 거, 그때 어떤 헤어스타일로 누가 불쑥 나타났다는 거, 누가 누구를 수소문하는 과정이 이러이러했다는 풍성한 대화가 호탕한 웃음과 함께 얼마간 이어졌다.
이렇듯 세상을 사는 이야기에선 교과서 같은 정사(正史)만 중요한 게 아니다. 살아있는 실감을 만끽하게 만드는 건 바로 야사(野史)이고, 그게 훨씬 더 피부에 와 닿는다는 경험은 누구나 공감하는 대목일 것이다. ‘일과 노래’ 4인은 그동안 몰랐던 서로의 ‘야사’를 발견하고 재확인한 셈이 됐다. 기대치 않았던 뜻밖의 수확으로 말이다.
▲ 취재를 진행하던 날, 겨울 내내 보기 힘들었던 제법 많은 눈이 내렸다. 서울 마로니에공원에서 독자 여러분께 손가락 하트를 전하는 일과 노래 멤버들 |
노래의 역할, 노래의 의미
전문적인 활동 아닌 일상의 생활이라 해도, 오래 전 어느 한 순간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실감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거창한 게 아니라 해도, 말로 꺼내기엔 너무나 사소한 것이라 해도, 한 편의 그 기억은 스스로의 내면을 살찌게 만들기도 하고 남모를 마음속 상처로 남기도 한다. 노동운동의 실제 현장에서 항상 활동하는 이들에겐 어떤 기억이 가장 깊게 남아 있을까?
지민주 “조금 전에 제가 ‘목이 터졌다’고 표현했는데, 그 성대결절(vocal nodules)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요. 젊을 때야 매일 아르바이트 뛰며 라면만 먹고 살아도, 얼마든지 연대하며 노래하는 걸 최고의 가치 삼아 활동하는 게 가능하잖아요. 그런데 저희들의 일은 좋은 노동조건이 절대 아니거든요. 절대다수는 매연 가득한 거리에서 노래를 하게 돼요. 그렇다 보니 대부분 성대가 굉장히 안 좋아져요. 은영 언니도 원래는 이런 목소리가 아니었어요. 진짜 꾀꼬리였거든요. 그런데 목이 나간 다음이게 안 돌아오는 거예요. 성대를 완전히 다친 거죠.”
‘매연 가득한 거리’라는 표현이 가슴에 와 박힌다. 거리의 상황 자체가 열악한 건 분명하지만, 이들이 노래하는 무대 부근에는 행사진행을 위한 발전기 차량이 가깝게 위치해 있다. 행사 진행 내내 시동을 걸고 있어야 한다. 발전기가 가동되는 그 매연, 정확히는 그 냄새가 말 그대로 ‘장난이 아니다’. 행사 진행을 맡은 이들은 무대 바로 옆에서 발생하는 매연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는 것이다. 목(발성)에 집중해야 하는 가수들에게는 치명적인 조건임이 분명하다.
박은영 “악보를 처음 받아 노래를 연습하고 녹음하고 공연하고, 이런 과정은 저희들 모두가 다 거치잖아요. 그런데 실제 현장에서 저희들의 노래를 수많은 참석자들이 다 같이 한 목소리로 부르는 순간이 있어요. 그게 드넓은 광장이든 좁은 공간이든 그건 상관이 없거든요. 그렇게 모두의 합창을 듣게 될 때, ‘정말로 노래의 역할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절감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어요. 저는 그럴 때마다 ‘노래를 하길 정말 잘했구나’ 하는 생각을 되새기게 돼요.”
김영희 “저는 장애운동 분야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여기 동지들보다는 다양한 현장의 경험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죠. 그런데 ‘일과 노래’ 활동을 하면서 제가 조금이라도 뭔가 함께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것, 나눌 수 있는 게 존재한다는 데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게 되고, 함께 일을 도모하게 되는 계기들이 계속 생겨나거든요. 새로운 세상을 배우고 또 그만큼 제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는 것, 그게 이 활동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이혜규 “제가 노래활동을 하면서 기억 속에 가장 강하게 박혀 있는 건, 90년대 말 광주 캐리어(에어컨 생산업체) 복직투쟁과 해고철폐투쟁을 할 때였어요. 당시 정말 몇 안 되는 동지들이 구사대와 맞서 싸우면서 소화기에 얻어맞고, 돌멩이와 쇠몽둥이에 맞으면서 공장에 진입하려 결사적으로 싸웠거든요. 그런 투쟁 와중에 거기에 공연하러 갔다가, 얼떨결에 같이 엉켜서 저도 물대포 맞고 돌멩이에 맞아 뒤로 나자빠지며 쓰러진 적이 있었어요. 그때의 상황이 가장 기억에 남고, 바로 그때가 저한테는 가장 큰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제가 열심히 할 영역은 작고 좁겠지만, 그래도 힘겹게 싸우는 동지들 곁에 같이있어야겠다는 거…. 지금의 저를 만든 건 그때의 경험으로 새겨진 기억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은영 씨가 한 가지 더 얘기해도 되냐고 불쑥 말을 꺼냈다. 아주 큰 의미를 놓치고 있었다는 제안 같았다. 그건 탄핵촛불 당시의 회고였다. 탄핵의 분위기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무렵, 광화문광장에서 ‘시민합창단’이란 단체의 무대공연이 진행된 바 있었다. 그런데 그게 ‘일과 노래’의 작업이자 작품이라는 설명이었다.
박은영 “그때 월요일인가 화요일인가, ‘시민합창단’을 기획해 보자고 일순간에 의견이 모아졌어요. 노래해야 할 시점은 당장 며칠 후 토요일이잖아요. 시민들이 직접 무대에 올라 노래를 한다는 게 엄청난 의미를 담게 되리라는 확신이 있어서, 정말 말도 안 될 만큼 급하게 준비하고 시민들을 모아 ‘임을 위한 행진곡’을 새롭게 편곡하면서 연습할 공간까지 마련했어요.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는데도, 그게 정말 감동적인 무대로 완성이 됐던 거예요.”
지민주 “저도 그 당시를 얘기하고 싶었는데, 마침 그 화제가 등장했네요. 정말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거든요. 합창을 할 시민들부터 급하게 모집했어요. ‘내일 몇 시까지 어디로 오세요.’ 그렇게 공지 하나만 띄워놓고 저희도 확신이 없는 상태였는데, 계속 문을 두드리며 처음 마주치는 시민들이 들어오시는 거예요.”
박은영 “일단 많은 분들이 모이셨으니까 각자 소개를 하자고 했는데, 우리가 보통 일상적인 모임이라면 ‘어디에 근무하는, 무슨 일을 하는 누구입니다’라는 식으로 자기 소개를 하잖아요. 그런데 그때 모이신 분들은 다들 ‘수원에서 온 누구입니다’, ‘인천에서 온 누구입니다’, ‘서울 무슨 동에 사는 누구입니다’ 하며, 모두가 시민이자 국민의 일인으로 자신을 소개하신 거예요. 저희들은 정말 그때 너무 감동을 받았어요. 생전 노래 한 번 안 해봤다는 분들도 계셨거든요. 탄핵촛불에 동참하겠다는 그 의욕 하나로 모인 분들이셨다는 거죠.”
절박함의 진정성이라는 건… 생존권
노동가요의 발전사를 곰곰이 살펴보면,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그대로 투영된다. 그리고 절대 간과해선 안 될 중요한 핵심은 대한민국의 화려한 성장이 아닌, 그 이면의 그늘진 굴곡이 가감없이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흩어지면 죽는다’로 시작하는 ‘파업가’를 모르는 노동자들이 있을까? ‘단결투쟁가’, ‘딸들아 일어나라’,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한 걸음씩’ 같은 곡들은 정확한 가사를 모르는 일반 대중이라 해도, 같이 따라 부르는 데 동참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모두에게 익숙한 멜로디가 돼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관점으로 돌린다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시작하는 ‘헌법 제1조’,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던 어린 목소리가 인상적인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같은 곡들은 그 곡이 탄생하게 된 시대적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렇다면 노동가요이자 민중가요의 대표곡은 어느 곡으로 뽑아야 할까? 몇 곡씩 정하라 하면 각자의 취향에 따라 수많은 제목들이 등장하겠지만, 딱 한 곡만 선택하라면 모두의 의견이 일치하리라고 판단된다.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아닐까 싶다.
박은영 “백여 명의 시민합창단이 무대에서 노래하는데, 무대 위에 있던 저희들만 느낄 수 있었던 벅찬 감동의 순간이 있었어요. 새롭게 긴 호흡으로 편곡한 그 노래 진행 중에, 반주가 빠지고 목소리도 빠지는 빈 지점이 있었거든요. 바로 그때 광장에 모인 백만의 시민들이 무반주로 동시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신 거예요. 그 군중의 합창은 아마도 무대 위에 있던 저희들만 제대로 들을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완전히 다른 울림, 그 벅찬 감격은 ‘진짜 이거야말로 노래의 힘이다!’라는 확신을 최고로 간직하게 됐던 순간이었어요.”
지민주 “저희들은 매번 집회 때마다 불렀던 노래였잖아요. 그런데 그때 무반주의 합창으로 시민들이 부르시면서, 눈물을 흘리는 분들이 너무 많으셨던 거예요. 그제야 깨달았죠. 저희에게는 일상의 노래였는데, 이 많은 분들한테는 그 노래가 보수정권에 의해 빼앗겼던 노래였다는 거, 남몰래 속으로 불러야 했던 아픔의 노래였다는 게 확인됐던 거예요.”
▲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진행된 장애인권운동 투쟁 집회 무대에 오른 낯익은 얼굴들. 왼쪽부터 박영은, 김영희, 김종환(‘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의 목소리 주인공), 박준(‘장애해방가’의 목소리 주인공), 이혜규, 황현. 이렇게 여섯 명이 장애해방열사들의 영정사진 앞에서 가열찬 투쟁가를 부르고 있다. |
그 시간의 감동이 다시 재현될 나날이 남아 있을까? 과거와 미래를 잠시 얘기하던 가운데, 다시 자리매김한 것은 바로 ‘현실’의 문제였다. 서로의 애로사항이 연이어 쏟아졌다. 제대로 된 스피커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면 다행이지만, 승합차량 위에 부착된 나팔 형태의 스피커가 전부일 때도 많다. 그것조차 없어 목소리 자체로 내질러야 할 경우도 적지 않다. 당연히 목이 상할 수밖에 없다. 또한 노동가요의 의미가 갈수록 퇴색돼 가는 시대적 상황도 큰 부담이 된다. 매번 당연하다고 발언하는 연대인 데도, 실제로는 보이지 않게 구분된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도 이들에겐 심각한 화두가 된다.
김영희 “장애인권운동도 마찬가지지만, 열악한 모든 운동에는 모두 다 먹고사는 문제가 항상 가장 현실적인 장벽이 돼요. 지금 현재의 의지가 강하고 굶어죽지 않을 정도라면, 그 의지에 따라 사람들은 활동을 해요. 하지만 어느 순간에 또 그 지점에 봉착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 계속 유지하기가 어려워지고, 한 걸음 물러나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되는 거예요. 이건 노래운동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지민주 “저는 절실함과 절박함의 문제를 항상 떠올리게 돼요. 일반적인 노동자들의 집회는 같은 생존권 투쟁이라고 해도, 죽기 싫어서 싸운다기보다는 더 나은 조건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잖아요. 그런데 장애인권운동은 정말로 절박하다는 그 진정성이 느껴져요. (김)주영 동지가 죽었을 때, (박)홍구 동지가 죽었을 때, 제가 늘 마주치던 얼굴들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이 죽어갔어요. 그들이 매일 외치던 요구사항들이 있었죠. 그런데 그들이 요구하던 그것 때문에 죽은 거더라고요. 활동보조 이십사 시간, 그러니까 ‘이들이 정말로 이거 아니면 죽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그 절박함의 느낌이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거예요.”
내가 만든 노래, 나를 만든 노래
네 사람이 안타깝게 지적한 사항들 모두가, 마주앉은 탁자 위에 수북이 쌓이는 듯했다. 그 중 한 가지는 꼭 이 지면에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최근 들어 비장애 중심의 집회에 장애운동가들의 동참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장애운동의 집회에는 비장애운동의 면면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화제가 됐던 게, 비장애 중심의 노동집회 무대에 오른 문예일꾼 박준 동지가 마지막 곡으로 ‘장애해방가’를 불렀던 일이라고 한다. 장애운동과 직접 관련이 없는 집회의 현장에서 그 곡을 부르며, 함께 가야 하는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던 그 장면은 모두에게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이혜규 “저희들은 대부분 각자 대학 노래패 출신으로, 노래운동의 필요성을 몸과 의식으로 직접 익혔던 입장이죠. 그런데 지금은 그런 노래패의 정신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상황이에요. 현재 대학에 다니는 동아리(노래패) 후배들을 만나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으면, 그 질문에 대한 ‘왜?’라는 반문도 없어요. 현실인식을 왜 해야 하는지의 질문조차 없다는 거예요. 선배들의 고민이 깊어지는 게 바로 그 지점이죠. 노래운동의 맥이 이렇게 끊겨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위기의식이 점점 현실로 느껴지고 있습니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던 시절은 분명히 지나갔다. 느리고 시행착오의 연속이긴 하지만, 민주화의 과정은 한 걸음씩 진행돼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어쩌면 촛불혁명이 가능했던 건 87민주화투쟁 당시 대학생이었던, 또한 속칭 ‘넥타이부대’였던 이들이 다시 거리와 광장으로 나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2세들한테는 절대 물려주고 싶지 않은 일그러진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절실함이 또 다시 나라를 바꿨다는 것이다.
새로운 한 세대가 지나갈 30년 후에도, ‘임을 위한 행진곡’이 광장에서 울려 퍼질까? ‘단결투쟁가’와 ‘민중의 노래’가 (만약에) 잊혀지더라도, 그 노래들의 무게감을 계승하는 새로운 곡들이 생겨나게 될까? 그 질문과 대답은 현재의 세상을 바꾸려는 ‘일과 노래’ 같은 움직임 속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앞으로도 치열한 활동을 계속하겠다는 그들에게, 독자들을 위한 한마디를 부탁했다. 박은영 씨가 먼저 발언했는데, 그 내용에 모두가 깊이 동감했다. 아마 누가 먼저 입을 열어도 같은 내용이 나왔을 것 같아, 이 만남의 마무리를 그 의견으로 맺고자 한다.
박은영 “당신의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다워요. 그 삶이 저희들의 노랫말이 되거든요. 이미 떠나간 이들의 삶이 저희들의 노랫말이 돼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지금 최선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의 멋진 나날 역시 저희들의 노랫말이 될 거예요.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의 삶도 저희들이 노래할 거예요. 그래서 저희 프로젝트 팀의 또 다른 이름이 ‘노래로 물들다’입니다.”
덧붙임 : 이번 대화의 중심을 잡아준 박은영 씨는 황현 씨와 함께 듀엣 ‘다름아름’으로 활동하는 중이다. 그런데 황현 씨가 아주 많이 아픈 상태라고 한다. ‘천천히 즐겁게 함께’를 정말 멋지게 불러주던 황현 씨의 모습을 다시 무대 위에서 마주보고 싶다는 진솔한 희망을 여기에 남긴다. “<함께걸음>과 독자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담아, 황현 님의 건강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더 많이 힘내시고, 꼭 돌아오세요. 무대 앞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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