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시인 이종형
본문
한국장애인문인협회가 내는 솟대문학 구십이 년 봄호 일백삼페이지 "솟대발굴"난에는 "보석보다 빛난 서러움"이라는 제목 아래 이종형 이름 석자가 실려 있다.
말 그대로 묻혀 있는 장애우 시인을 발굴해 소개하는 이 난에서 그는 "인생은 슬픈 희곡"외 아홉 편의 시작을 선보이고 있다.
가령, 내가 지금 고독하다는 것은/"나 혼자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다는 까닭만은 아니다/내가 지금 서럽다는 것은/가슴에 묻어둔 채 평생 불러 줄/이름 하나 없다는 까닭만은 아니다/그저 말없이 공상에 잠기는 것이/최대의 이상이 되어버린 지금/슬픔은 일상처럼 찾아라‥‥‥라는 그의 시 (내가 지금 고독한 까닭)의 서두 몇 구절을 인용해 보면 알 수 있듯이 그의 시에 국한시켜 관심을 표명하면 그의 시를 관류하는 정서 또한 장애우 시인들의 일반적인 창작 경향인 슬픔과 아픔의 정서표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고 여겨진다.
때문에 특별한 관심을 끌만한 새로움은 적어도 그의 시에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래서 주제넘지만 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는 사실을 여기서 핑계삼아 그의 시에 대한 언급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한다.
그렇다면 시인에 대한 얘기를 쓰면서 시를 제외하고 나면 무엇이 남는다고 이렇듯 객기를 부리는 것일까?
그에 대한 답은 그의 삶이 걸어 온 궤적의 어떤 장면에 앵글을 고정시켜 보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서 조명해 보고 싶다는 것이다. 이종형의 가슴이 시리도록 아픈 현재진행형의 서러운 삶의 이야기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믿어진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서라도 이 척박한 땅에서 장애를 가지게 된 그 순간부터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추락해야 하고 나아가 고통 속에서 몸부림쳐야하는지를 그의 삶은 너무도 생생하게 말해주고 있기에.
그는 현재 두 눈을 실명한 상태에서 설상가상으로 두 팔의 손목 아래가 잘려나가 양손을 쓸 수 없는 중중의 장애를 가지고 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러한 그의 심한 장애가 그의 삶을 망가뜨렸다. 그에게 있어서 장애는 고통의 근원인 것이다.
그는 열여덟 살 때 한순간의 부주의를 범해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그가 살아온 삶의 내력과 장애를 가지게 된 사연을 들어보자.
그는 일천구백육십사년 음력 사월 십팔일, 지금도 살고 있는 충남 연기군 금남면 대박리 구십일 번지에서 아버지 이부귀(현재 육십 사세) 어머니 한성희(현재 육십 오세)씨의 칠 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 농사를 짓던 집안형편은 그리 넉넉지 못했다. 그러나 열성적인 교육열을 가진 부모님 덕택으로 그는 일천구백칠십칠 년 영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인접한 금남면에 있는 금호 중학교에 진학해 역시 졸업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원예업에 종사하면서 부모님을 모시고 평범하게 살겠다."고 뜻을 세운 바 있던 그는 뜻한 바대로 공주농고 원예과에 장학생으로 합격해 생애 처음 성취감을 맛본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는 꿈 많던 학창시절을 이 학년 이 학기에 적을 두었던 것으로 마감해야 했다. 일천구백팔십일 년 팔월 십육일, 폭발물을 갖고 놀다가 큰 부상을 당한 것이다.
그는 이 해 여름방학이 되자 강원도 전방에 있는 맏형 이종길씨 집에 다니러 갔었다. 맏형은 직업군인으로 당시 포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집에 폭발물 몇 개를 보관하고 있었다. 그는 호기심이 일어 아무 생각 없이 그 중한 개를 형 몰래 가방 속에 숨겨 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후 그는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뒷산을 넘어가 강가에서 돌멩이로 폭발물을 두드리는 실험을 했다. 폭발물이 쉽게 터지지 않자 그 자신이 직접 뇌관에 불을 붙였다.
다음 순간 엄청난 폭발음이 천지를 진동시키는 것과 동시에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가 다친 지 만 하루만에 깨어난 곳은 청주시립병원 중환자 실에서였다. 그의 팔은 침대에 꽁꽁 묶여 있었고 가슴과 손 그리고 눈에 무수히 많은 파편이 박혀 있어 아픔에 진저리쳐야 했다.
당연하게도 이날부터 그는 암흑만을 볼 수 있었다. 푸르디푸른 강물을 본 것을 마지막으로 그는 세상 정경과 원치 않은 이별을 해야 했던 것이다.
청주시립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은 그는 좀더 큰 병원인 충남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를 진찰한 의사는 무심하게 "가망이 없다"고 사망선고를 내렸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가족들의 오열 속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때쯤 그가 다쳤다는 소식을 접한 형제들이 대처에서 부랴부랴 달려왔다. 형들은 "어떻게 집에서 죽게 내버려 둘 수 있느냐"며 택시를 대절해 그를 서울대학부속병원으로 옮겼다. 이 병원에서 그는 한달 보름여를 입원해있었다. 더 놔두면 위험하다고 해서 두 손목을 절단한 것도 바로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의 치료비로 논 열두 마지기가 날아가고 더 이상 급전을 구할 수 없어 부모들이 애태울 무렵 때마침 병원 측에서 이제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해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서 십일 년, 그는 집에서 시 구절을 생각해내는 일 외에는 뚜렷하게 하는 일 없이 시간만을 죽이고 있다.
그가 본격적으로 시라는 화두를 붙잡고 씨름하기 시작한 시기는 장애를 가진 지 이 년 후인 일천구백팔십삼 년 칠월 경부터이다. 외적 동기는 육촌 누나 이경희 씨의 권유 때문이지만 실제로는 그 일 밖에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을 수 없어 그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방송통신대 시학과 문학 강의를 반복해서 들으며 문학수업에 몰두하는 한편, 실명하기 전에 본 사물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려 애를 썼다. 그렇게 해서 그가 생각해낸 시 구절은 형수와 누나 그리고 친구들에 의해 원고지에 옮겨졌고 그는 자기가 생각해낸 단어의 나열에 충분히 만족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일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워낙에 낙천적인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는 어느 정도 행복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지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해 그는 생전 처음 살아있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그 자신의 표현대로 그 지경이 되어서까지 끊지 못하는 자신의 목숨에 저주까지 퍼부어야 했던 것이다.
서울에 살던 그의 둘째 형(그의 부탁대로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이 작년 사월 알코올중독에 걸려 열두 살 먹은 딸아이를 데리고 낙향했다. 그의 둘째형은 내려오자마자 그를 학대하기 시작했다. 그는 고백에서 둘째형을 "사이비 종교의 미치광이 교주같이 자신을 절대화 신격화하면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패륜아"로 묘사하고 있다. 이쯤에서 이제 직접 그의 육성을 들어보자.
"그는(둘째형을 가리킴) 천륜까지도 망각한극악한 행동으로 나를 괴롭혔는데 병신새끼 꼴갑잔치 한다며 인사말을 했고 온갖 신발로 나를 목표 삼아 투구 연습을 했고 내 머리에 걸레바가지를 뒤집어 씌웠고 콩 소쿠리를 뒤집어 씌웠고 주먹을 휘둘렀고 발로 걷어찼고 누워있는 나의 목을 밟았고‥‥‥ 그때 그는 사람이 없을 때만 나에게 가혹행위를 했기에 혼자서는 움직일 수도 없는 나는 앉은 채로 그 봉변을 다 당해야 했는데 그는 그런 나를 도망도 못 가는 병신새끼, 두들길 수 있어서 신난다 했고 나중에는 자신의 행위일체를 잡아뗐지만 그는 또 다시 악취 나는 더러운 짐승으로 나를 매도했고 그의 딸에게는 악취 나는 더러운 짐승이 무슨 삼촌이냐며 삼촌이라 하지도 말라했고 가까이 가지도 말라했고 밥 한 숟가락 라면 한 가닥 입에 넣지도 말라했고‥‥‥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그는 나에게 너 같은 새끼는 병신이 된 게 천만다행이라 했고 내가 병신이 되어 기쁘다 했고 그때 뒈졌어야 할 새끼가 살아서 주둥이만 나불거린다 했는데‥‥
나는 그 치욕스러움을 필설로 다 표현 못하겠거니와 실제로 나는 한마디 반박도 하지 못했다. 내가 반박을 하면 그는 곧바로 가혹행위를 했고 그의 행위는 곧바로 부모님에 대한 패륜으로까지 이어졌기에 나는 그 엄청난 수난을 당하면서도 반발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앉은 채로 담배를 세 갑 네 갑씩 피워대며 울분에 떨어야 했다.
그에게는 또 자신의 행동에 대해 남의 의견을 묻는 버릇이 있었다. 그가 서울에 있을 때는 누구에게 의견을 말해 달라고 부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향에서는 부모님이 들일을 나가시면 나 혼자 집에 남아있어야 했기에 그는 항상 내게 와서 나의 의견을 말해 달라고 했다.
그때마다 나는 소신껏 나의 의견을 말해 주었는데 그러나 그것이 실수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에게는 자신의 행동을 뼈저리게 반성하는 체 하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꾸짖게 한 다음 그것을 트집으로 또 다른 행패를 부리는 기막힌 기술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그의 유도하기 식 트집 잡기 기술에 걸려들었고 그는 눈깔도 없는 식물인간 새끼가 주둥이만 살아서 나불거린다는 말로 나를 매도했다.
한번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 날은 어머님이 안 계셔서 점심을 굶어야만 했고 또 그런 일은 그때뿐만 아니라 종종 있었지만 다른 때는 나 몰라라 했던 그가 그 날만큼은 라면을 끓여 가지고 들어와서 먹지 않겠다던 나에게 한사고 권유했다.
그러나 그 더러운 음식을 내가 어찌 먹을 것인가. 그는 이미 나를 가리켜 눈깔도 없는 식물인간 새끼의 아가리에 밥 한 숟가락 라면 한 가닥을 더 넣지 말라는 말을 여러 차례 한바 있고 나 또한 그의 학대 행위에 대한 반발로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구역질이 나는 증세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 더러운 음식을 받아먹지 않으면 그는 자신의 성의를 무시한다며 또다시 트집을 잡을 것이 분명하였기에 나는 고저 하루만이라도 편하게 살자라는 생각으로 마음 독하게 먹고 그 더러운 음식을 받아먹었는데 단 하루만이라도 편하게 살자했던 나의 야무진 꿈은 채 몇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날 저녁 그는 점심에 라면을 끓여 주었더니 눈깔도 없는 식물인간 새끼가 아가리를 딱딱 벌리고 돼지새끼 같이 퍽퍽 거리고 잘 받아 처먹더라고 구역질나는 그 특이한 웃음까지 웃어가며 내가 가장 아파하는 곳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어쨌거나 그때 나는 남도 아닌 형이라는 자에게 그런 엄청난 수모를 당해야 하는 통분 속에서 차라리 그 악마의 모습보다 더 처참한 모습으로 악마처럼 몸부림치는 나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이제는 용서하리라 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고 있었지만 나는 끝내 나의 모습을 다 감추지 못한 채 마침내 그 악마를 죽이려고 했었던 적이 있었고 그때 나는 그런 악마를 죽이는 행위가 결코 죄일 수는 없다는 생각도 아울러 했다.
그날 그는 도끼와 쇠망치를 들고 들어와서 마룻장이 움푹 움푹 파일 정도로 거세게 내려치면서 또다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몇 번이고 저 병신 새끼를 죽일려고 마음먹었으나 저런 눈깔도 없는 병신새끼 하나 죽이고 살인자라는 누명을 써야 한다는 사실이 억울해서 죽이지 못했다 했고 눈깔이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눈깔도 없고 눈치도 없는 돌대가리 병신새끼에게 죽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라며 그는 나에게 목매달아 해지라 했고 차도에 나가 달리는 차량에 뛰어들어 뒈지라했고 물통에 대가리를 처박고 뒈지라했고 혀를 깨물고 뒈지라 하면서 또다시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고 누워 있는 나를 짓밟았는데 ‥‥‥
그때 나는 순간적으로 그를 붙잡아 방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그리고 재빨리 그의 목을 잡아 비틀었다. 그 악마의 목을 부러뜨리기 위해, 그러나 나의 팔에 힘이 가해지고 그가 나의 옆구리에서 발버둥을 칠 때 나는 차마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고 그와 동시에 그를 풀어주었다.
그런데 풀려 나온 그는 더욱 더 사납게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했다. 그때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고 그렇게 앉아 있는 나의 머리에 그는 라디오를 들어 내리쳤고 그 라디오가 내 머리에서 박살나던 그 순간, 그 순간, 나는 아픈 줄도 모르고 그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 저주스러워서 울었다. 서러워서 울었다.
그렇게 울다가 정처도 없이 대책도 없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는 마침내 고향을 떠나왔다. 그 날이 구십일 년 구월 팔일. 나는 그 후 한동안을 꿈을 꾸듯 살았다.
나 자신조차도 살아있는 것인지 죽어있는 것인지를 분간 못하는 혼미함 속에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그저 꿈을 꾸듯 그렇게 살았다.
그는 집을 나와 경기도 미금시에 있는 셋째형 종원씨와 작은 누나 종선씨의 집을 오가며 생활했다. 그러나 "방 한 칸에 조카들하고 사는 셋방살이에 더 이상 짐이 될 수 없어" 올해이월 초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자 둘째형의 학대는 여전히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학대를 당하며 사는 이즈음 그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면 그건 "학대를 당하는 것 또한 운명이기에 참고 살수밖에 없다"는 체념의 늪에 깊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둘째형은 유독 왜 그만을 괴롭히는 것일까? 그 이유를 아버지 이부귀씨는 "둘째가 객지 나가서 살다 제 뜻대로 일이 안되니까 그때부터 술을 많이 마시게 된 것이 원인"이라며 "종형이가 바른 말을 잘 하니까 공격을 당하는 것 같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술을 먹지 않으면 순 하다가도 술만 입에 들어가면 난폭해져서 부모 형제가 아무리 뜯어말려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옆에 앉아 있던 어머니 한성희씨가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훔쳤다.
"그때 다쳤을 때 얘가 죽었어야 되는데, 죽었어야 얘 신세도 괜찮고, 나도 괜찮고‥‥‥‥"
이어진 어머니의 설명에 따르면 그가 학대를 당해 괴로워할 당시 고육지책으로 시설에 보내고자 당신이 직접 면사무소를 몇 번 찾아갔었단다. 담당자를 붙잡고 "몇 달만이라도 좋으니 종형이를 시설에 보내 달라"고 사정했지만 담당자는 직업군인으로 나가 있는 큰애를 들먹이며 "큰 형이 있는데 왜 시설에 보내려고 그러느냐"며 안 된다고 거절하더라는 것이다.
"잠이나 들어야 잊어버리지 얘 생각이 가슴에 뭉쳐서 울화병이 생겼구먼." 침묵이 흐른 후 어머니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얘가 장애자니까 동사무소에서 먹을 것도 나오고 돈도 나올 거라는 거지. 그런데 우리가 뭘 알아야지. 그래서 그냥 이렇게 사는 거야‥‥‥ 얘 앞일을 생각하면 막막하네. 그나마 내가 살아있으니까 수발을 들어주지 내가 죽으면 누가 수발을 들어 주겠나. 형제간도 남이나 마찬가지여‥‥‥ 얘가 말이지 여기는 지가 살고 있는 집이기 때문에 어디가 어딘지 잘 아니까 문제가 없지만 다른데 가면 낯설어하고 곤란해하네. 얘는 주면 주는 대로 먹고 성질 한번 안 부리는 착한 아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정말 하늘이 원망스러울 뿐이네."
어머니는 화병이 도져 약 없으면 살지 못할 지경에 처해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모든 걸 잊고 싶어 술만 찾으시고 그는 그대로 부모님들에게 죄송스러운 감정 때문에 큰 부담감을 느끼며 움츠러들고.
말미에 그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 건지를 물 어 보았다. 그는 "따로 계획을 세울 수 없으니까 살면 살고 죽게 되면 죽는 것일 뿐"이라며 "그래서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는다." 고 대답했다. 그나마 그가 예측 가능한 변화라고 꼽은 것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수용시설에 들어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비관스런 상황뿐이었다.
그가 사는 금남면 대박리는 일백 이십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원산에서는 하루 종일 산새가 우지 짖고 마을 한가운데로 흐르는 냇물은 언제나 맑고 시원하다. 아침이 되면 어머니는 밭을 일구러 나가고 아버지는 인접 한 도시로 공사장 품일을 나간다. 집안에 혼 자 덩그마니 남겨진 이종형,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낼까?
당연하게도 그는 시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가 생각하는 시의 주제는 순수, 사랑, 사람이 살면서 느끼는 감정들이다. 여기서 그의 시에 대한 언급을 한마디만 더 하자. 아직까지 그의 시는 재미가 없다. 사람의 마음을 울리지 못한다.
왜 그럴까? 이유는 그가 의도적으로 아픔 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시인으로 인 정을 받고 싶어 보이지 않지만 세상의 아름다움만을 노래하려 애쓰는 듯하다. 그래서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지만 그는 누가 뭐래도 시인이다. 그처럼 시가 생의 전부인 삶을 살 고 있는 시인도 드물 것이다. 그처럼 아픈 삶을 사는 시인도 역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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