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거리의 나자로 성모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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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훈이의 심장병 수술 내 아들 살아난 기분>
성모세씨는 요즘 매우 기분이 좋다. 자신을 아빠처럼 따르는 세훈이가 심장병 수술을 받아 즐겁게 뛰노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세훈이가 살고 있는 고아원에 찾아가면 반갑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 매달려 응석을 부리곤 하다가도 조금 지나면 기진맥진하여 주저앉곤 하는 모습이 그렇게 안스러울 수가 없었다. 평소에 허약해 보이던 세훈이의 몸에 수술칼을 들이대어 행여 예기치 못했던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나 조바심도 태우고, 열한 살의 어린 것이 얼마나 아플까 애처로운 마음도 앞섰지만 수술 과정도 입원기간도 잘 참아 준 세훈이가 기특하기만 하다.
두달여 가량 입원해 있다가 지난 10월 16일 세훈이는 퇴원을 했다. 이제 마음놓고 뛰어 놀아도 숨이 차지 않고 가슴도 아프지 않을 세훈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자신의 병이 다 나은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며 매달리는 세훈이를 보면서 정말 아버지가 된 착각에 빠질 지경이기도 했다 아니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몇 년 전 자신이 낳은 자식을 심장병으로 죽음에까지 몰고 가야 했던 그 아픔과 원한이 조금은 가시는 듯했다.
"내가 낳은 아들이 다시 살아난 기분이에요." 자신이 직접 마련한 돈으로 언젠가는 심장병 아이들을 고쳐주는 일을 하리라고 다짐하며 그 날만을 고대해 온 그가 첫 번째로 세훈이를 수술시키고 난 이후 수줍게 웃으며 소감을 말했다. 그가 유독 심장병 어린이를 고쳐주는 일에 말없이 발벗고 나서는 이유를 알 법도 했다. 그리고 아프고 외로운 아이들을 찾아가 그 아이들의 아빠가 되어주고 싶어하는 마음도.
<사랑은 더불어 살아야 한다. 명동으로 남대문으로>
숱한 어려움과 고생을 겪으면서 서른 다섯해를 살아 온 성모세의 인생철학은 "사람은 역시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처지와 형편을 생각하면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 누구보다도 편안하게 살고 싶을 텐데도 그는 굳이 거리로 나오는 것을 고집한다. 매일 남대문 시장으로, 명동으로 나오는 것 역시 그가 나름대로 터득한 삶의 역할을 지키기 위함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가진 것을 나누고 또 나누어야 한다는 그런 철학 말이다.
그의 나이 세 살이 되었을 때 병원에서는 뇌성마비라는 진단을 내렸다. 20살 때까지는 거의 집에만 박혀 있어야 했던 그는 자살시도도 몇 차례, 결국은 집을 뛰쳐나오고야 말았다. 그대로 집에 처박혀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무작정 고향인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세상물정도 잘 몰랐고, 서울이 어떤 곳인가도 모르는 채 마치 탈출하듯이 서울로 올라왔다. 아마 78년도쯤 됐었나 보다.
살아야 했다. 무슨 짓을 해서든 살아남지 않으면 그대로 굶어죽을 판이었다. 그는 껌장사를 시작했다. 껌 열통을 팔아야 겨우 밥 한끼를 때울 수 있는 형편이었다. 껌장사 4일 만에야 겨우 한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갔다. 마땅히 밥을 먹여 주는 곳도, 잠을 재워 주는 곳도 없는 갈 곳 없는 신세였다. 그런 처지에 겨울은 더욱 혹독했다. 그나마 잠자리로 사용하던 서울역 대합실과 강남터미날 대합실에서도 구두닦이 왕초들한테 걷어차이고 쫓겨나기 일쑤였다. 잠잘 곳이 없어서 역대합실 화장실에서 자다가 변기통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는 두달 십오일만에 서울 생활을 중단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서울에 발붙일 곳이 없어서였다. 그를 위해 비어있는 휴식처는 한군데도 없었고, 먹고살기에만 급급해야 했던 사람들의 몰인정이 그를 부산으로 내쫓고 말았다.
다시 부산역, 그는 역주변을 쫓아다니면서 신문과 잡지를 팔았다. 매상이 조금씩 올라 셋방이라도 구해서 살려고 했으나 방을 선뜻 내주는 사람은 없었다. 계속되는 한뎃잠에 그의 몸은 상할 대로 상했다. 잡상인으로 몰려서 부랑아 수용소에 끌려 가 갇힌 적도 있었다. 말은 듣지 않는다고 옷을 홀랑 벗긴 채로 얼음창고에 갇히기도 했다. 그래도 20살 때까지는 숟가락질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고, 담배도 피울 수 있을만치 손놀림이 가벼웠는데 부산에서의 고생살이로 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손도 팔도 다리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을만치 마비 증세가 심했다.
부산에서의 생활은 이런 지독한 고생과 함께 그에게 평생 가도 지울 수 없는 쓰라린 아픔을 맛보게 한 것이었다. 떠돌이 생활을 계속하고 있던 그즈음 어떤 여인을 알게 되어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의 나이 스물 두 살, 부산 생활 1년쯤 되었을 때였다.
"아이가 생겼어요. 아이들이었죠. 그런데 심장병으로 죽고 말았어요. 돌잔치를 치룬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핏덩이가…… 병원에도 한번 못 가보고 말이죠."
그는 삼여년간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아이 일로 함께 살던 여인과 헤어졌다는 말과, 지금도 심장병 아이에 대한 이야기만 들어도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프다는 말 이외에는.
쓰라린 상처 때문이었을까. 그는 부산 생활도 마감했다. 부산에서 힘겹게 벌어 조금씩 모아 놓았던 돈 백만원을 챙겨서 다시 고향 대전으로 돌아왔다.
몸이 아프고 불편하다고 집에 틀어박혀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장남"인 처지도 있고, 또 뭔가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옷장사를 시작했다. 매일 도매로 물건을 떼어서 장날이 서는 지방 곳곳을 찾아 다녔다. 전국 어디나 장이 있는 곳이면 갔다. 5년간 계속된 장똘뱅이 옷장사로 꽤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는 대전에 가족들이 함께 살 수 있는 제법 큼직한 집을 한 채 마련했다. 그리고 건물 한 칸을 가게로 만들어서 슈퍼마켓을 운영하였다.
제법 마음놓고 편안히 살게 되긴 하였으나 그렇게 머물러 있을 수 없었던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옷장사를 하면서 전국을 여행 삼아 돌아다녀 보니 정말 불쌍한 사람이 너무 많았어요. 내가 제일 불쌍하고 가난한 줄 알았는데 나보다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역광장에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옷을 벗어 주고 온 적도 여러번, 미쳤다는 소리도 숱하게 들으면서 그는 갈 곳 없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외면한 수가 없었다.
우연히 친구 아버지를 따라 어느 병원에 병문안을 간 적이 있었다. 한겨울이었는데 동사 직전의 한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얼굴이 온통 퉁퉁 부어서 형체를 알아보기도 어려울 지경인데다 가족도 보호자도 없다는 설명을 들었다. 갈 곳도 없고 치료를 못 받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을 3여년간 간병했다. 그게 인연이 되어서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왕래를 하고 있다는 그의 설명이다.
성모세씨에게 있어 그 걸인과의 만남은 큰 충격이기도 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다는 아니다. 이 수퍼를 운영하는 것이 내 할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절실하게 든 것이다. 그는 가게를 전세로 내놓고 다시 서울로 왔다.
<부산에서 대전으로 다시 서울로, 새로운 생활>
올해 나이 서른 다섯인 성모세씨의 본명은 성시대. 그는 굳이 86년도에 받은 세례명 "모세"로 불리기를 원한다. 그는 "성시대"가 아닌 "성모세"로 판이하고도 별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새로운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모금함을 하나 만들었다. 판자를 잘 다듬어서 만드러진 네모난 함 겉면에 "성금함"이라고 단정하게 글씨를 쓰고, 그의 없어서 서는 안될 교통수단인 세발 자전거로 개조된 휠체어 앞에 달았다.
90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거주해 온 서울역 뒤편 중림동에 있는 허름한 여관 "임창여관"에서 세발자전거를 타고 남대문과 명동을 일터로 잡았다. 매일 아침나절 출근 시간보다 조금 이른 시간, 혼잡한 교통시간대를 피해서 그는 남대문으로 명동성당 앞으로 나간다.
매일 오전 신세계 백화점 근방에, 금요일부터 월요일 오후에는 명동성당 앞 가로수 그늘 아래 자리잡고 있다. 손과 발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사람, 어눌한 몸 동작으로 동정을 구하는 장애인으로 그가 사람들 눈에 띄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그의 모습이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동전과 지폐를 떨어뜨리게 하는 요인이 되는 지도 모른다.
마치 자신의 배를 채우려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듯이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켕기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시선들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라도 해야만 된다"는 자신의 생각에 자신감이 생겼고, 자신이 직접 알리지는 않았지만 그가 하는 일들이 보이지 않게 조금씩 명동성당 근방에서 알려져 그의 지지자들이 제법 생긴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한달 동안 모금된 돈을 갖고 서울 시내에 있는 가난한 고아원과 양로원을 찾아간다. 그가 모금한 돈은 고아원 한군데, 또 양로원 두 군데에서 꼭 필요한 일을 위해 쓰여진다. 비교적 운영이 어려운 이 시설에 그나마 작은 보탬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성모세씨에게 큰 힘을 준다. 매일 매일의 그의 일에 더욱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용기를 준다.
하루에 모아지는 모금액은 평균 7만원에서 8만원. 저조할 때는 1만원 미만인 적도 있었지만 꾸준히 모금한 액수가 한달이면 1백만원이 넘는다. 그것을 다시 쪼개어서 한 시설당 30만원 또는 40만원씩 보태준다. 그는 통장을 하나 만들어서 매일 모금한 돈을 입금해 놓고 각 시설들에 구좌번호와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알아서들 스스로 빼내어 갈 수 있게 한다. 물론 그의 통장은 개방되어 있어서 누구나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은행으로 돈을 넣는 것도 환영한다고. 단 찾아가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고.
그는 매달 몇 차례씩 자신이 돕고 있는 고아원과 양로원을 찾아간다. 자신이 조력자라는 것을 생색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곳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서이다. 고아원에 가면 자신을 아빠처럼 따르는 아이들이 마냥 좋기만 하다. 몇 년간 꾸준히 찾아갔더니 제법 정도 들었고, 아이들의 커가는 모습이 대견하기만 하다. 그저 다른 많은 아이들처럼 더없이 맑고 밝게, 건강하게 자라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양로원 역시 외롭고 병든 노인들이 그에게는 친 부모님 같다. 그 노인들을 만나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인생살이를 재점검해 보기도 하고 교훈을 삼기도 한다.
<우선 고아원과 양로원을 찾아가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의 꿈과 간절한 소원은 심장병 어린이들을 돕는 것이다. 한때 유명한 가수였던 "수와 진"이 심장병 어린이 돕기 모금공연을 했을 때는 하루에도 150만원씩 모금되었다고 한다. 그가 모금하는 액수는 턱도 없이 모자라는 액수다. 심장병 수술에 한번 드는 비용이 1천5백만원 정도이고 보면 그 정도의 액수가 매일 모금되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성급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우선 이렇게 아이들과 노인들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하자"고 다짐하면서 그들과의 만남에 정성과 성심을 다한다. 그 만남이 성숙되어지면 좋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번에 수술하게 된 세훈이의 경우도 그렇다. 언젠가는 기회가 올 "그 일"을 위해서 그동안 조금씩 개인적으로 모아두었던 돈 8백만원과 집에서 갖고 온 3백여만원, 그리고 조금 모자라는 2백여만원은 빚을 내서 수술비용으로 썼다. 어떤 수를 써서든 자신의 힘으로 하고 싶었다. 꼭 그래야 지만 될 것 같았다.
두명이 드러누우면 꽉 찰 것 같은 좁은 여관방,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약한 다리로 겨우 겨우 운전을 해서 교통수단으로 사용하는 세발 자전거, 매달 올라오는 대전의 가게세 중 일부가 그가 가진 것의 전부다. 모금액 중 점심 값 1천원을 빼고는 몽땅 통장으로 들어가는 그의 서울 생활은 가난하고 빠듯하기 그지없는 영세민이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보다도 부자의 마음을 갖고 산다. 더 잘살기 위해서 더 잘 먹기 위해서 악착같이 가지려고 애쓰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 있으면 조금 있는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다 나누어주고 베풀어줄 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슬며시 다가와 물 한병 갖다 주는 사람, 국수 한 그릇 시켜주는 사람 등 이름 모르는 친구들이 늘 곁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루종일 자전거 위에 앉아 있으면 온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저녁때가 되면 손발이 뻑뻑해져서 운전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는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소주를 반병 마신다. 그래야 지만 몸놀림이 유연해져서 이제는 어김없이 행하는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불빛이 휘황한 도로를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오면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른다. 신세타령일 때도 있고 희망의 찬가일 때도 있다. 무슨 노래인들 상관 있으랴. 한 세상살이 즐겁게 살면 그만인 것을. 그리고 그는 외친다. "세상에 있는 심장병 어린이들을 우리 손으로 고쳐 줍시다."
<세훈아 튼튼하게 자라거라. 그리고 촛불 같은 아이 되거라>
4형제의 맏이인 성모세씨. 추석 때 차표가 없어 부모님을 뵈러 가지 못한 것이 불효인 것만 같아 죄스럽기만 하다는 성모세씨.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보았다는 그는 검정고시를 통해서 고등학교 졸업장까지 얻게 되었고 시간이 나는 대로 틈틈이 편지도 쓰고, 일기도 쓴단다.
희망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희망이 가득하다. 그 희망의 세상 속에서 성모세씨는 희망을 전해주는 우편배달부가 되기를 원한다.
막 퇴원한 세훈이에게 성모세씨는 나직하게 그러나 힘차게 말했다. "세훈아, 튼튼하게 자라서 주위를 밝히는 촛불 같은 아이가 되거라."
글/고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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