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에 만난 장애우]홍두깨가 바로 우리의 현실이 되는 그런 사회 > 함께 사는 세상


[이달에 만난 장애우]홍두깨가 바로 우리의 현실이 되는 그런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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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마씨

어느날 갑자기 골목마다 삶의 보따리를 풀어놓고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던 수 많은 노점상들이 감쪽같이 사라진(?) 그래서 마치 수초가 없는 어항처럼 심심한 거리를 송사리떼처럼 몰려다니는 수많은 사람들. 워크맨으로 귀를 막고 핫도그를 사먹는 짧은 치마,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듯 팔장을 낀채 천천히 걸어가는 파마머리. 그 사이로 "반 민주적인 3당야합 분쇄 집회"를 원청봉쇄하기 위해 충돌한 전경과 한사코 성당으로 가기 위해 실랑이를 벌이는 청바지. 그리고 그 모두의 머리위로 흙탕물처럼 뒤엉켜 흐르는 웃음소리, 노랫소리, 소님부르는 소리. 토요일 오후의 명동은 그야말로 "범벅"이었다. 아직 이른시간탓인지 썰렁한 매표소 앞에서 만난 이로마씨는 생각보다는 키가 크고 갸름한 얼굴에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기자가 인사를 청하며 손을 내밀자 처음에는 약속을 기억하지 못한 듯 다소 당황하며 손을 내밀었는데, 굳은 살이 두껍게 박혀있어 양쪽 목발의 그가 얼마나 싸돌아다니는(?)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매표소앞 다방 구석자리에 앉자마자 담배를 무는 그에게 녹음기를 꺼내며 진짜 이름이 뭐냐고 묻자 그는 가볍게 피식 웃으며 『그게 본명이예요』라고 대답해 그의 신상에 대해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찾아간 기자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로마씨는 이른바 성공했다는 부류에 속하는 사람으로, 그는 지금 만화가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일간지를 비롯해 한들에 그려 보내야 하는 데가 스무곳이 넘을 정도로 잘 팔리는9?)  만화가이다. 만화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는 그에게 굳이 연극까지 손대게 된 이유를 묻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연극은 그동안 나에게 퍼부어졌던 비난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해명』이라고 다소 신경질적으로 내 뱉었다. 『그동안 나는 많은 비난을 받았어요. 85년이후 5공문제, 광주, 전교조, 노사, 박종철 사건등 그때그때 시국에 관한 내용을 하나로 그리지 않고 딴 소리만 하는 의식없는 작가란 소리를 많이 들었죠. 하지만 월급쟁이 소시민이라고해 의식이 없는 사람이냐 그건 아니라고 봐요. 나는 청소부 아줌마가 최루가스 먹지 않고, 머리띠 안 두르고 악악거리지 않았다고 해서 그 아줌마를 의식없는 사람이라고 보진 않기에 그런데 신경을 안쓸 뿐이지.』의식의 초점이 중요하지 시위에 직접참가하지 않는다고 그 사람을 의식없는 사람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는 그의 알레르기적인 반응에서 그가 그동안 이 문제로 얼마만큼 시달려왔는가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연극은 내 나름대로의 해명
연극 홍두깨는 자기 스스로는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나름대로의 야망도 가졌던 보통 젊은이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소시민이 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며, 자신이 소시민이 된 것은 가지의 잘못이 아니라 천재를 몰라주는 세상 사람이 바보이기 때문이라는 항변을 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 얘기를 해달라고 하자 그는 별로 달갑지 않다는 듯 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오십오년인가 육년인가 부모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어요. 그 때는 미군이 많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 따라 들어간거죠.』한국전쟁이 결국 분단으로 끝나고 폐허가 된 이 땅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미군을 따라 낯선 땅으로 새삶을 찾아 떠난 그의 부모가 그곳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때 태어난 그는 세 살 때 소아마비에 걸리게 되고 그 자신의 말대로 『잘하면 나을수도 있었는데』워낙 살림이 쪼들리고 미국 생활의 무지까지 겹쳐 일년정도 치료를 받자 거의 파산지경에 이르게 되어 결국 혼자 한국의 외갓집에 보내지게 된다.『어릴때부터 부모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뭐억지로 외롭다고 하면 할말은 없지. 지금도 나는 주위에서 자꾸 나를 장애우로 보기 때문에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하지 내 스스로는…. 그런거 생각하면 어떻게 어렷이 서있고 어울려서 놀 수 있어요? 거북해서. 더 활발하고 더 자신감있게.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위에서 자꾸 넌 병신이다라는 식으로 가르쳐 주는 그게 싫다는 거죠. 주위의 직접적 간접적인 그런 것 때문에 자존심과 오기로 더클 수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자존심과 오기" 이말은 그와 얘기를 나누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몇 번을 더 들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같은 반 애들이 놀아주지 않고 쩔룩발이라고 놀리고 도망가는게 오히려 내가 살 수 있는 욕구를 발동시켰다고나 할까.』자신을 놀린 아이들을 쫓아가 패주지 못하는 대신 그는 새총을 들고 다니며 여러 놈의 머리를 터쳐놔 그의 집에는 제 엄마손에 이끌려온 애들이 꽤 여럿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 때마다 『니가 잘 했으면 맞았겠냐』고 그를 두둔했다. 『그 후에는 개들과 친해져 나중에는 내가 산에 안가면 다른 애들도 등산을 안할 정도까지 됐어요. 내가 산에 못 올라 가는 건 분명하지만 내가 빠지면 그 자리에 재미가 없다는 거죠. 』


○오기와 자존심으로
미국의 무도 형제와 떨어져 양쪽에 목발을 짚고 외갓집에서 홀로 살아야 했던 그가 택할 수 있었던 생존의 방법은 그 당시 많은 장애우에게 가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전파사나 구둣방등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의 오만에 가까운(?) 자존심과 오기 그리고 타고난 방항기질은  이런 일반의 상식을 한사코 거부하게 했다. 『나는 내가 굉장히 유명한 교수나 뭐 이런 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우스웠죠』『당신 이나 가지 왜 나한테 그 딴 소리를 하느냐』고 대들었다는 그는 요즘도 어디가서 그런식의 얘기가 나오면 사람들이 듣는데서도 대뜸『너 잘났다 X발놈, 나보다 더 병신 같은 새끼』라고 욕을 할 정도로 스스로를 파괴적이고 도진적이라고 밝혔다. 사학을 전공했다는 그가 만화를 그리게 된 동기는 한마디로 『먹고 살기 위해서』이며 만화를 그려 유명해 지거나 하겠다는 식의 의식은 별로 없었다고 했으니『꼭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다 보니 만화가 직업이 됐다』고 덧붙였다. 몇몇 어린이 잡지에 만화를 그리던 그가 이른바 유명작가의 대열에 올라서게 된 것은 85년 스포츠서울 창간 공모전에 홍두깨가 당선되면서부터 인데 그는 이때 수많은 기성작가를 포함함 백대일의 경쟁을 뚫었다. 보통 두시간 정도면 한편의 만화를 생각해 낸다는 그는 『나는 작품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 평범해서 끄집어내기 어려운 그런 우스운 얘기들을 해 줄 뿐이죠. 하지만 시사만화는 매일매일 일어나는 각종 사건으로 재료가 무궁무진 하지만 내 만화는 주제 설정이 굉장히 어려워요. 』일상적인 조그만 일 예를 들어 ,백원짜리 동전에 발발 떤다든가, 마누라의 가계부를 밤에 몰래 조사해 보는 등의 소재를 찾아내는 일은 시사만화보다 몇 배 어렵다며『이 만큼 우월한 만화인데도 정치에 민감한 편집장은 의식이 없다고 비판하지, 한 마디로 우스은거야.』


○ 평범한 일상의 예기를 해줄 뿐
그러나 얘기를 나눌수록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한 가지는 그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장애를 거부(?)하고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 었는데, 내가 만화를 통해 억압받고 있는 장애우의 현실에 뛰어들 생각이 없느냐고 묻자 그는 솔직하게 지금까지 장애우로서의 고민은 자기 혼자만의 것이었으며 다른 사람의 고통까지 공감하는 수준은 아니였다고 인정했으나『자신의 장애를 너무 의식하게 되면 활동 범위를 스스로 좁히게 되기 때문에 장애는 장애자체로 무시하고 싶어요. 만약 그런 상황이 주어 진다면 하겠지만 굳이 찾아서 하고 싶지는 않다.』고 밝혔다. 이런 그의 이밪ㅇ에 대한 반작용 때문인지 그는 사회에서 장애우에게 베푸는 온정의 뒤에는 거의 언제나 위선이 숨어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을 했다. 그는 그가 택시를 탈 때 가끔 당하는 김새는 경우를 예로 들었는데『빈차면 손님을 태우는게 당연한데도 타고 나면 아저씨니까 태워줬다는 거예요. 지가 차비를 덜 받는 것도 아니고, 날 업어서 태운 것도 아닌데 이렇게 생색을 내요. 그래도 그 사람은 오히려 솔직한 거지 소위저명인사라는 사람은 오히려 그걸 이용해 먹지. 봐요, 어떤 공장 사장이 장애우를 한 사람 채용했다 하면 자 봐라, 난 이렇게…하는 식으로. 난 그런 것과는 타협 안 하는 거죠. 굳이 타협할 필요가 없어요 장애우는 특수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인간이예요』그는 현실적인 장애우의 어려움에 대한 책임은 사회와 장애우의 책임이 반반 정도라고 본다며 자신에게 주어진 반을 활용하지 못하면서 백명, 천명 모아서 외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강자에 약하기 마련인 인간의 속성을 피부로 느끼면서 살아왔고 그러기 위해서는 오직 실력으로 상대방을 누르는 길 밖에 없다는 생활철학이 몸에 밴 그에게, 아니 그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자유인으로 남고 싶어하는 그에게 오히려 내가 끊임없이 어떤 구렐를 씌우려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 만화도 현실이예요. 민주화가 안 된 세상이라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정치만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민주화가 되면 내 만화가 정말 현실문제로 느껴질 거예요.』핵이나 식량문제 공해문제등 범세계적 인류 공등의 얘기가 먼나라 애기처럼 느껴지는 현실과 자신의 작품에 의식이 없다고 매도하는 비 민주적 현실에 답답함을 느낀다는 그는 앞으로 만화에서 못다한 얘기들을 연극으로 형상화해서 들려 줄 작정이라고 앞으로의계호기을 밝혔다. 지나가는 말로 결혼에 대해 물어보자 연속극등을 볼 때는 나도 가정이 있었으면 하다가도 또 자유분방하게 사는 걸 보면 그게 좋은 것 같다며 그냥 웃어 넘긴다. 연극에 대한 반응을 묻자 『돈 벌려고 합니까 좋아서 하죠.』라고 슬쩍 받아 넘겼다. 얘기를 마치고 노트랑 녹음기를 챙기는 사이 재빨리 커피값을 낸 그와 악수를 하고 극장 밖으로 나왔다. 시계는 벌써 네시를 넘어서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더 큰 물결로 골목골목을 흐르고 있었다. 성당앞에서는 산발적인 시위가 일어나 한떼의 전경과 백골단이 홍두깨 공연 포스터 앞을 정말 홍두깨처럼 구령을 외치며 뛰어 가고 있다. 참으로 이 시대의 희극은 어두컴컴한 극장에서가 아니라 백주 대낮 길거리에서 곤봉과 발길질로 무지막지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작성자전흥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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