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수기] 힘들게 버텨온 나의 지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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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여덟 살 때 돌아가셔>
내 출생지는 전라남도 나주군 노암면 대어리 2구 칠전부락이야. 아주 산골짜기이지. 거기서 1956년 4월 초하루에 태어났어.
우리 아버지는 마누라가 셋이야. 그 중 우리 엄마가 둘째 첩이야. 우리 아버지는 셋째 마누라와 살고 우리 엄마랑은 안 살았어. 그 때 우리 아버지가 뭐했냐 하면 지관이야. 묘 자리 보는 사람이었는데 아주 유명했나 봐 옛날엔 재산이 좀 있었는데, 그런데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탕진하고 남은 게 없지 뭐
내가 여덟 살 때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셨어. 우리 엄마가 죽으니까 우리 아버지 큰마누라, 나한테는 엄마지. 큰 엄마네 집에서 여덟 살 때, 저기 나주가면 금성 국민학교라고 있어. 거기 1학년 입학해서 2학년까지 다니다가 2학년 1학기 때 눈칫밥 먹기 싫어 가지고 그만뒀어. 우리 큰집이 눈치주지 아무래도 내가 그렇게 느낀단 말야 친 엄마가 아니니까 거리감 느끼는 거지 더군다나 우리 아버지 큰마누라의 제일 어린 자식이 나보다 한 살 위야 그러니 만날 싸우지 그래가지고 거기서 그러니까 몇 번 들락날락했어. 학교 다니다가 내 맘에 안 맞으면 집을 나가고 나가면 그 때 어렸으니까 문전걸식했지. 그 때는 다리를 안 다쳤을 때니까 남의집살이도 했다고. 내가 지금도 낫질을 굉장히 잘 하는 건 그 때
낫질로 풀 베어주고 밥 얻어먹고 했으니까 그 덕분이지.
그렇게 살다가 -몇 번 들락날락 하다가- 우리 아버지 생각에 쟤는 큰집에 놔두면 안되겠다 싶었는지 우리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우리 아버지 셋째 마누라네 집에 갔어. 거기는 충남 공주군 사공면 계실리야 그 때가 삼 학년 다녔을 때니까 열 살 때거든 셋째 엄마네 집에서도 가만있지 못하고 만날 들락날락했어. 거기는 애들이 다섯인데 다 내 동생들이야 제일 큰애가 나보다 한 살 아래야 왜 못 견뎠냐하면, 좌우지간 나는 어디 한 군데 있을 체질이 못 돼. 내 성질에 안 맞으면 나와버리는 거야 나와서 돌아다니다가 몇 개월 남의 집에서 살고 밥도 얻어먹고 그랬어. 어디냐 하면 충남 공주군 사공면 하월리, 우리 밑에 동네가 하월리 거든 하월리에서 내 이름을 이경호 라고 내가 바꾼 거야 하월리에 오 부자라고 부자 집이 있었어. 거기서 머슴으로 있었지, 꼴머슴이라고 군불이나 때주고 꼴이나 베어다주고 소 있으니까 소나 뜯기고, 그런 일하고 밥 얻어먹었지. 집에선 모르지 내 이름을 바꿨기 때문에 말야.
거기서 몇 개월 안 있고 금방 나왔어. 그 다음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거야. 새벽 차 타고 서울까지 왔어.
<서울로 무작정 상경>
무작정 와 가지고 그 때는 통행금지 있었을 때였거든 그 때 역시 오 갈데 없으니까 불 다 꺼지고 일 다 끝나고 인적이 끊기면, 남의 집 건물 밑에서 자는데 낮에는 문전걸식했지 뭐. 깡통은 안 들었어. 밤이면 남의 집 으슥한데서 자고 그런 거야. 그런데 하루는 자는데 웬 쓰레기차가, 옛날에 쓰레기 수거하는 차 중엔 뚜껑 덮는 차가 있었거든, 그 차에다가 때려 싣는 거야. 그래가지고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 끌려간 거야 그 때 열 한 살쯤 됐지. 꼼짝없이 아동보호소에 들어갔어.
그 때는 아동보호소 사방에 철조망이 쳐있어서 도망 갈래야 도망갈 엄두도 못 냈지. 그런데 나는 어떻게 도망쳤냐 하면 철조망 하나는 밑으로 누르고 하나는 올려 그 틈새로 빠져나온 거야. 들어간지 며칠만에 말야. 왜 도망 쳤냐하면 아동보호소 거기는 자유가 없었단 말야. 두드려 맞기도 했지. 아동보호소 있을 때는 만날 맞는 거 뿐이야. 이유도 없이 큰놈들이 자기 비위 안 맞으면 나와라 그래서 때리는데 들었다 놨다 한다고, 광대라고 있어 광대라는 게 뭐냐하면 두 사람이 서 한 사람은 양쪽 팔 잡고 또 한 사람은 양다리 잡고 이렇게 번쩍 들었다 놓는 거야 그게 광대거든 그렇게 맞고 하니까 어린 마음에 거기서 못 있겠다 싶어 도망친 거지.
<아동보호소를 도망쳐 나와>
거기서 나와 가지고 부평에 왔어. 지금 애림학교 있는 데가 옛날에 우리 보육원 자리라고. 거기로 들어갔어. 제기랄 부평에 왔지만 오 갈 데가 있어야지 갈데 없이 얼쩡대니까 북구청 직원이 거기로 데려다 준거야. 거기서 꽤 오래 있었어.
우리 보육원에서는 미군들이 갖다 준 과자, 켈러그, 건포도 등을 얻어먹고 점심은 강냉이죽도 황송했지, 아침, 저녁은 꽁보리밥에 반찬은 고춧가루 넣지 않은 김치나 소금에 절인 우거지 등을 먹고 그랬어.
보육원에서는 열 한 살이면 큰아이 취급을 받았거든 큰아이들은 토끼 돼지 닭 등을 키우는 일을 나눠서 책임지고 길렀는데 나는 토끼 키우는 일을 맡았어. 조그만 애들이 토끼풀 뜯어 오면 내가 검사해서 주는 거지. 그런데 어느 날 그놈의 토끼 한 마리가 죽은 거야. 아무래도 그 책임이 나한테 돌아올 것 같더라고, 원장이 굉장히 무서웠거든 원장한테 혼나겠다 싶어 가지고(그 때 다리는 멀쩡했지) 겁난 김에 막 뛰어서 소사까지 간 거야.
거기서 나와 돌아다니다가 춥고 배고프면 원장 아들이 내 친구였었거든. 원장 아들 빽 믿고 만날 들락날락 한 거야. 여름에 실컷 돌아다니다가 겨울에 추우면 다시 우리 보육원에 들어가고 그랬어.
<열네 살 때 처음 교통사고 당해>
그러다가 한 번은 아마 열네 살 때였지. 서울 영등포 신길동에 갔는데 거기서 교통사고를 당한 거야 사고가 어떻게 났는지는 몰라 머리를 다쳤기 때문에, 간호원 얘기로는 군인 헌병 짚 차에 치였대. 두 달 동안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나봐 거기가 국립의료원 이었는데 거기서 우리 아버지를 불렀어. 우리 아버지가 왔지. 네 달을 치료하고 그 때는 멀쩡하게 걸어나왔어. 한 쪽 다리가 약하기는 했지 만도 말야. 머리를 다치면서 다리도 같이 다친 거야.
아무튼 병원에서 나와서 아버지를 따라 계월리에 있는 집으로 갔어. 혼 좀 났지. 뭐 그런데 또 거기서 못 있고 왔다 갔다 방황한 거야. 서울이나 전국적으로 돌아다니다가 춥고 잘 데 없고 그러면 집에 들어가는 거야. 그러다가 열 다섯 살 때 집에서 아주 나왔는데 그 때는 거지나 마찬가지였어도 문전걸식은 하지 않았어.
안양 못 미쳐 시흥에 그 때는 미군 기지가 거기 있었거든. 거기서 낮에는 종이를 주워 팔아서 밥 사먹고 그러니까 넝마주이지, 밤에는 미군들한테 그 당시 롯데에서 나온 페퍼민트 껌을 100원에 사서 200원에 팔아먹고 그랬어. "헬로 껌 사세요" 막 그러고 다녔지.
거기서 좀 있다가 부평 백마장 미 군부대로 왔어. 그 때도 미군한테 껌 팔 때야 백마장 미군부대 앞에 플레이보이 클럽이라고 미군 술집이 하나 있었어. 그 앞에서 껌을 팔다가 미군이 돈 없다고 그러면 껌을 막 그냥 주고 그랬어. 미군들도 돈을 그냥 줄 때가 있고.
<껌 팔면서 미군들과 사귀고>
그러다가 사귀게 된 거야. 미군 흑인 샤워스라고 상사가 있었어. 그 흑인상사를 주축으로 흑인 백인 할 것 없이 서른 두 명이 모였어. 그 미군들이 한 달에 1달러씩 내서 그 돈을 모아서 나한테 준거야.
거기 있을 때는 미군부대에 들어가고 싶으면 목욕하겠다고 하면 얼마든지 들어갈 수가 있었어. 정문을 지키는 미군도 알고 있었거든. "미 샤워"한마디 하면 무사통과야 목욕을 하고 나오면 미군들이 빠찡코 하라고 돈도 줬어. 5전 자리도 있고 10전 자리도 있었는데 5전 자리는 우리 돈으로 15원 이었고. 10전 자리는 30원인가 그랬어. 낮에는 주로 샤워스가 동거하는 양 색시가 있는 집에서 같이 놀았어.
그러다가 미군부대가 의정부로 옮겨가는 바람에 샤워스가 나를 산곡동 사회복지관 고아원에 데려다 주면서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했어. 그 때 데리러 왔으면 나는 미국 간 거야. 그런데 거기서 못 참고 또 나오는 바람에 미국도 못 간 거지. 그 고아원에서도 오래 못 있었어. 왜냐하면 큰놈들 힘센 놈들이 때리고 못 살게 굴었고 규칙적인 단체생활이 싫어 한 달쯤 있다가 나와 버렸어. 나중에 고아원에 찾아가 물어봤더니 샤워스 라는 미군이 왔다가 내가 없어서 그냥 갔다고 그러대.
거기서 나와 가지고 시흥으로 다시 갔어 저번과 마찬가지로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박스를 새벽부터 쓰레기통을 뒤져 주워 파질 팔아먹고 그걸로 밥 사먹고 잠은 공사하려고 갖다 논 토간 속에서 자는 생활을 했어. 시흥 유원지에 가서 그곳에 놀러온 사람들에게 음식을 얻어먹기도 하고 그랬었지.
그런데 어느 날 어느 놈이 한 명 갑자기 나한테 와 가지고 무조건 잘해주고 그러는 거야. 밥도 사주고 여인숙에서 잠도 재워주고 옷도 사주고 말야. 나이는 나보다 어린놈인데 키는 나보다 큰놈이었어.
하루는 돈이 떨어졌는지 기차 브리에크쉬라고 굉장히 무거운 쇳덩어리인데 그걸 떼러 가자는 거야. 나보고 거기에서 망 좀 봐라 나는 일을 할 테니까 그러는 거야 나는 무서워서 싫다고 그랬지 그러니까 자기가 이때까지 나에게 잘해준 것을 상기시키는 거야 하는 수 없이 쫓아가서 망을 봤어.
그 날은 무사히 떼어놨어. 그 놈이 떼어내고 나는 망만 본거지. 그 때 시흥 역 기차길 옆에 둑이 길다랗게 있었어. 한쪽은 논이고 둑 이쪽은 역이었어. 기차 브레이크를 그 둑에다 감춰 논거야 그래놓고 그 날 저녁 휘파람을 휙휙 불며 여인숙에 가서 잠을 잤어. 그런데 시흥 역에서는 발칵 뒤집힌 거야 이놈의 기차가 시흥 역까지는 브레이크가 잡혔다 이거야 그런데 다음 역에서 브레이크가 안 잡힌다 이거야 한마디로 난리가 난거지.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낮에 지난밤에 감춰 논걸 찾으려 갈려고 가는데 역원들이 나와서 두리 번, 두리번거리며 무엇을 찾기에 우리는 모른 척 딴전을 피웠는데 어떤 역원이 와서 우리 목 뒷덜미를 잡는 거야 그러더니 무조건 역장 실로 끌고 가는 거야. 들어가자마자 막 때려, 너희 가 훔쳐갔지. 훔친 거 내 놓으라고 고함 치면서 말야.
그 때는 나는 그런 걸 처음 해봤기 때문에 무서워서 어디어디에 숨겼다고 얘기했지, 금방 역원들이 그걸 찾아 가지고 왔어. 그래 가지고는 그 무거운 것을 들고 벌서라고 해서 꼼짝없이 무릎꿇고 벌섰어. 한참 그렇게 있다가 역전에서 신고를 해 가지고 영등포 경찰서에서 나와서 우리를 잡아갔어.
<경찰서에 잡혀가고>
그 때 내 나이로 따지자면 대인 수이거든 열아홉인가 스무 살인가 그랬으니까 말야 그래서 구형 때 내 나이대로 대고 재판을 받았는데 1년 6개월형을 받았어. 그래가지고 구치소로 다시 왔어. 구치소 오니까 나보다 나이 많이 먹은 사람들이 얘길 하길 나이를 많이 하면 안 좋다 이거야 대인수로 찍히면 전과가 붙는다 이거야 나는 전과가 뭔지도 몰랐지. 나는 어려 보이니까 나이를 낮추라고 그러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어떻게 하여 나이를 열 다섯 살로 줄였어 그래가지고 언도 받을 때 재판장에게 이랬지. 난 열아홉 살이 아닌데 옆에 있는 애가 열아홉 살이라고 하라고 그랬다고 말야. 그 때 나랑 같이 들어간 그 놈이 가만히 있었어. 재판장이 속았는지 아니면 봐줬는지 좌우지간 나랑 같이 들어간 그 놈은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나가고 나는 초범이니까 고생 좀 해봐야 한다고 판단 됐는지 서대문 가의탁(가정법원)이라는 미결수들이 있는 곳으로 보내졌어. 거기서 재판 받고 찍히면 소년원으로 넘어가는 거야.
거기서 미결수들이 쉬엇 차를 시키더라고 쉬어 하면 이렇게 구부렸다가 차 하면 이렇게 발딱 서는 거 있어. 그걸 시키더라고 그것도 어떨 때는 계속 테이프가 돌아가는 것처럼 시키다가 갑자기 변경을 해, 쉬엇 차 쉬엇 차 하다가 쉬엇하면 쉬하고 차 하면 차렷 해야 하는데 그걸 잘못하면 나와 그래 가지고 막 패는 거야. 큰놈들이 그랬지 뭐 심심하니까.
거기서도 역시 광대라는 걸맞았어. 옛날 아동보호소 있을 때는 그걸 맞아도 괜찮았는데 교통사고를 당해서 한쪽 다리가 약해진 후라 광대를 맞으니까 죽겠더라고 설상가상으로 떨어지면서 약해진 다리가 심하게 바닥에 부딪힌 거야. 처음에는 아프고 퉁퉁 붓기만 해 내가 아프다고 하니까 파스 한 장을 붙여주더군 괜찮거니 했는데 어느 한 날에 밥 먹으러 가는데, 거기는 똑바로 서서 못 다니게 해 똑바로 서서 다니면 독사한다고 해서 막 패 독사가 뭐냐하면 뱀 있잖아. 뱀 중에서 독사는 고개를 빼닥 쳐들고 다니잖아 그래서 허리 피고 다니면 독사한다고 해서 막 패 허리 구부리고 만날 다녀야 해. 나야 그때 쫄자니까 허리 구부리고 쭉 줄서 가지고 밥을 먹으러 가는데 갑자기 파스 붙인 자리가 덜컥하고 주저앉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 그 다음부터 걸음을 못 걷는 거야.
<광대를 맞아 다리를 다치고>
걸음을 못 걸어 가지고 거기서 며칠 있다가 할 수 없이 우리 아버지를 불렀지. 거기는 보호자가 있으면 내 보내 줘. 걸음을 못 걸어서 엉금엉금 기어서 우리 아버지 등에 업혀서 다시 집으로 간 거야.
집에 가서 상골 이라는 뼈의 가루 같은 것을 먹었는데 그것을 먹으니 통증이 조금 없어지더라고 그래서 참나무를 베어 내 목발을 내가 만들었어. 그래가지고 목발을 두 개 짚고 셋째 엄마에게 말해서 그 때 돈으로 오백 원을 얻어 공주에서 다시 서울로 왔어.
서울가면 갈데 있다고 거짓말시키고 말야.
다시 인천 부평으로 가서 우리 보육원에 가 있었는데 얼마 안 있어 신체검사 통지서가 오더라고 그 때가 76년도야 그 당시 인천에는 병무청이 없었어. 그래서 저기 수원지방 병무청에 가서 신검을 받았어. 정종 판정을 받아 병역이 면제됐어.
그래가지고 우리원에서 또 나왔어. 수원으로 무작정 간 거야. 수원 근처를 껌팔이를 하며 돌아다니다가 그 때 수원에 비행장 미군부대가 있었어. 그 부대 앞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면 미군 클럽이 세 개 있었어. 플레이보이클럽하고, 로즈클럽하고 트윈스클럽이 있었어. 그 앞에서 미군을 상대로 또 껌팔이를 했는데 한 번은 어떤 미군이 하얀색 물이 가득 든 병을 들고 부대로 들어가 그래서 달라고 했어. 그랬더니 주더라고 꿀꺽꿀꺽 막 마셨지 그랬더니 한 반병 정도 마셨을까 눈깔이 핑핑 돌더라고 집들이 막 돌아가 좌우지간 거기서 쓰러져서 아침에 눈떠보니 파출소 보호실이었어. 그게 백양 위스키였어. 그것도 모르고 꿀꺽꿀꺽 마셨더니 미군들이 깔깔거리며 막 웃더라고.
아무튼 파출소에서 훈방 조치를 받고 나와서 기분도 나쁘고 그래서 수원을 떠나 시흥으로 갔어. 거기서 또 돌아다니는데 그 때는 잘 데가 없어서 반네루 쌓아놓는 데서 자고 그랬어.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오더니 나보고 빵 공장에 들어가래 넣어준다 이거야 언제까지 오라고 그래서 갔더니 영등포 근처였어. 처음으로 공장 생활을 하게 된 최초의 공장이지.
<공장생활을 시작한다.>
가니까 공장에서 받아주더라 그래 가지고 그 공장에서 일당 육백 원을 받고 봉지에 빵을 넣는 일을 했어. 그 때는 다리를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하게 절었지. 한 달 조금 넘게 그 공장에 있었는데 숙련 될 즈음 그 공장을 나오게 됐어. 거기서 나와서 부평에 있는 4공단 텐트 공장엘 들어갔지. 텐트 공장에서는 일당 1500원을 받았어. 텐트 공장에서 한 3개월 있다가 또 다른 데로 옮긴 거야.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꼬시는 바람에 옮긴 거지. 부평 백마장 가는데 규성산업 이라고 있을 적에 장화복이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얼굴도 굉장히 예뻤어. 걔하고 같이 지내다가 내가 도 그 공장을 나오게 됐어. 애들이 꼬시는 바람에 저기 포천 까지 갔어. 거기에서 양말 짜는 일을 했지.
거기에서 몇 개월 있다가 다시 모집공고를 보고 주안 5공단 내 서원산업이라는 가방 공장에 들어가서 주로 가방손잡이 만드는 일을 했어. 거기서도 오래 못 있었지 뭐.
공장생활을 더 이상 못 하겠더라 고 다리도 아프고 다치고 나니까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손이 굉장히 느려졌나봐. 남들 하는 일을 도저히 못 따라 가겠더라 고 그것 때문에 설움도 많이 받았어.
마지막으로 다녔던 판코라는 가방 공장이 n도를 내서 망해버리자 나도 공장생활을 땡, 종쳐 버렸지 계산해 보니까 한 5년 공장생활을 했나봐.
<아침은 사와나 요구르트 점심은 막걸리나 라면>
그래가지고 그 때 부평 역 앞에서 구두를 닦는 아는 형한테 갔어. 구두도 찍어주고 틈틈이 닦기도 하면서 구두 닦는 법을 배워 가지고 혼자 닦을 수 있게 되자. 부계다방 앞 갈산동 양지다방 앞 부개동 비서실다방 앞 등을 옮겨 다니면서 구두를 닦았어. 그러다가 지금 여기 부평 성모병원 앞으로 온 거야.
한 동안 낮에는 여기서 구두를 닦고 밤에는 동 인천 자유공원에 가서 백 원 자리 껌 사 가지고 이백 원에 팔고 그랬어. 구두 닦으면 삼사천 원 정도 버는데 껌을 팔아 많이 벌면 만원 정도도 벌고 그랬어.
다른 사람은 껌 사세요 하면서 달라붙었지만 나는 절대 안 그랬어. 껌 하나 팔아 주시겠습니까? 정중하게 얘기했다고
안 팔아주면 그만이지 뭐 하긴 내가 절뚝, 절뚝 저니 많이 팔아 줬나 봐.
잠은 다니다가 으슥하다 싶은 곳이 나의 집이야. 겨울에는 심야다방에서 삼백 원 짜리 커피를 오백 원 내고 밤새도록 지냈어. 부평 역에서는 화장실에서 잔 적도 있어. 스팀 위 거기는 따뜻하니까 앉아서 그냥 자는 거야.
끼니는 요즘도 아침은 삼강 사와나 요구르트 하나로 때우고 점심은 막걸리나 라면을 먹어 저녁은 돈 좀 벌었으니까 밥 사먹고 다방에서 차 한 잔 시켜놓고 지내고 그래 명절 때는 돈 있어도 못 사먹으니까 다 문을 닫으니 그냥 굶는 거야.
다행스럽게도 아직 아파서 병원신세 진 적은 없어.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니까 돈도 없고 갈 곳도 없지. 그러면 비상금 이천 원 정도 가지고 순대 국 밥 말아 한 그릇 사 먹고 하루종일 다방에 죽치고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지내.
아버지 소식은 양말 공장에 다닐 때 한 번 가보고 여태 가본 적이 없어서 몰라. 그 때 아버지는 아파서 생식을 하고 계셨는데 지금은 아마 돌아가셨을 꺼야.
저금해놓은 돈 그런 거 없어. 앞으로 어떻게 살겠다는 계획도 없어. 그냥 사는 거지.
정리 조계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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