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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글]소아마비 여판사가 있었다는 사실만 남겨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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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0일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장애우 판사인

▲故정순희판사의 모습 제주도에서 불의의 교통
사고로 순직하셨다. 정 판사님은 생전에 국제장애인연명(DPI) 한국지부와 장애우 관련 법안
제정에 관여 활동하셨고 특히 장애우 교통문제 해결을 위해 남다른 열정을 가지시고 노력하
신 분이다. 때문에 장애우 문제에 있어서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는 지금 정 판사님을
잃은 것은 이 땅 400만 장애우 모두의 크나 큰 슬픔이 아닐 수 없다. 고인의 뜻을 받드는
길은 가일층 장애우 문제 해결을 위해 매진하는 것 뿐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보지는 생전
에 정 판사님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방귀희 씨의 추도글을 싣는다. <편집자>

그녀에 대해 추억할 것이 남아있음이 나에게 큰 위안이 됨을 먼저 고백한다.
동네 아줌마들이 편한 자세로 혀 음을 내며 아깝다고 할 때의 불쾌감 때문에 난 아깝다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난 그녀의 죽음에 아깝다는 소릴 수 없이 했다. 너무나 귀해서 만져보지도 못하고
곱게 모셔두었던 유리 인형이 아이들의 무심한 공놀이에 무참히 형체를 잃은 것과 같은, 아
니 감히 유리 인형에 비유할 수 없다. 그건 얼마든지 다시 구할 수 있는 물건이지만 그녀는
복제될 수 없는 인간이기에 그녀의 부셔짐이 가슴을 져민다.

그녀는 정말 아까운 여자였다.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그녀가 판사였다는 사
실 하나로 아깝다고 그녀의 죽음을 탄식했다.

똑똑한 사람은 하느님이 당신 곁에 두고 싶어하신다는 위안으로 그녀의 떠나감을 똑똑한 탓
으로라도 돌려서 인생의 무상함을 매꾸어 보고 싶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1986년 5월 어느 날이었다. 정립회관에서는 매년 삼에 봉사상
이라는 것을 수여하고 있는데 시상식 며칠 전에 이번 수상자는 정순희 판사라고 하는 얘길
들었다.

그때 난- 줄만하지-하면서도 그녀의 퍼스낼리티에 더 많은 점수를 준 것 같은 낙점 방식에
약간의 심통스런 마음을 가졌었다.

그것은 아마 선배인 내 모습이 그녀보다 초라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은 시상식
장에까지 이어졌다. 시상식장은 그 어느 때보다 성대했다. 그 성대함 속에 주인공이 나타났
다. 그녀는 새색시처럼 분홍색 한복을 입고 있었다. 멀리서 내 눈에 들어온 그녀의 모습은
고귀함 그 자체였다. 시원한 이마에서 이지로움이, 동그란 눈에는 지혜가 그리고 단정한 입
술에선 냉소적인 아름다움이 번졌다.

난 얼른 보도자료를 뒤적이며 그녀의 이력서를 살폈다. 경기여중·고교에서 서울대학교 법
대, 뽑기를 하던 시절도 아니고, 또 장애인에 대해 넉넉한 마음을 가진 시절이 아니기 때문
에 그 KS가 섬짓 할 정도로 번쩍였다.

더 이상 살펴 볼 필요가 없었다. 그것으로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행사과정을 마치고 그녀가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내가 어렸지만 내가 선배이니 내가
먼저 그녀를 맞기로 했다.

"축하합니다"란 필요 이상으로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그녀의 목소리는 왠지 차갑게 느껴졌다. 못난 사람을 잘난 사람을 싫어하고 특히 못난 여
자는 잘난 여자를 더욱 싫어한다는 속성 때문에 순전히 주관적으로 느낀 차가움이었을 것이
다.

그녀는 다섯 명이나 되는 선배들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듯 했다. 만약 보통여자 같았으면
"말씀은 많이 들었는데 처음 뵙는군요"리며 선배들을 향해 약간의 관심을 보였을 텐데, 그녀
는 그렇지가 않았다.

우리 모두는 서로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그런 태도에 대해 서운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그녀와의 첫 만남은 따스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말보다는 행동
이 앞서는 실천파였다.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빈틈없이 해냈다.

"아니 정판사도 왔네"라고 놀라워할 정도로 기대치 않았던 삼애 가족의 몫을 게을리하지 않
았다. 그러나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목청을 돋구고 흉볼 일 있으면 좀 더 가까이에서 소근
거리는 평범성은 없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그녀에게 비범성이 있었다는 것인데 그 비범성이 나 같은 속인에게는 자
신감에 가득찬 교만으로 보일 때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녀를 이해하고 좋아하고 그
리고 사랑하게 되기까지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87년 겨울이었다. 주부 생활에 「소아마비 여판사의 홀로서기」라는 제목으로 정순회 판사
의 이야기가 실려G다. 난 확실한 꼬투리를 잡고 전화를 했다. "어떻하죠, 판사님. 우리가 PD
가 정판사님 인터뷰 해 오래요. 잡지책에 그렇게 나서, 반매스컴주의 라는 말이 통하질 않네
요"
그녀는 내키지 않는 듯 했지만 "그럼 그럽시다"라고 승낙했다. 그 당시는 수원 지방법원에
근무하던 때라 수원전철역에서 만났다.

그녀는 두꺼운 코트에 머플러를 하고 있었다. 스틱이 겨울에 친절하지 못한 탓인지 아주 조
심조심 발을 옮겼다.
우린 조용한 곳을 찾아 지하까지 내려가야 했다. 일이 아닌 만남이었다면 딱 좋은 분위기였
다.
 
그래서 취재 노트를 펼치기가 고통스러웠다. "학교 들어가실 때, 문제가 된 적이 있으세요?"
그녀는 어깨를 들썩였다. -nothing의 의미로- 내가 원하는 대답은 점수는 되지만 받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하면서 뭔가 극적인 이야기를 기대했었기 때문에 그녀의 어깨 대답이 불성실
하게 느껴졌다.

"사법고시는 언제 보신 거예요" 난 간단히 천 구백 몇 년도라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포크(우린 그 때 정식을 먹고 있었음)를 멈추더니 "글쎄 합격은 1983년이었는데 그것이 6번
째니까 방귀희씨가 한번 계산해봐요"

이제 내 포크가 멈출 차례였다. "뭐라구요. 5번이나 낙방을 했었단 말예요" 그때서야 비로써
겨울답지 않게 그녀에게서 따스한 인간미가 느껴졌다. 너무나 완벽한 사람에게 갖게되는 비
정(非情)이 역전되는 순간이었다.

그녀에겐 아무런 고통도 없었다고 생각했었다. 노력 없이 타고난 머리가 경기여고와 서울대
학 그리고 사법고시까지 아주 쉽게 달려오게 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녀가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도 바로 그 자리에서
였다.
"공부 지겹지 않으세요?"
"지겹죠. 하지만 해야할 일 아네요. 너, 나쁘다. 좋다. 그런 말 하는 것이 질리 때를 위해 대
비하는 거예요"
그 말에 그녀가 대학에 들어갈 계획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또-할만 하지-하며 고개
를 끄덕였다.
"딸만 셋 이시라구요?"
"방귀희 씨도 남자 선호경향이 있나봐"
취재에 임하기 전의 사전조사로 인한 질문이었지만 그녀는 아들 선호 쪽의 판결을 내렸다.
그것은 아마 주위에서 딸만 셋인 것에 대해 입방아들을 찧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내 속셈은 딸만 있는 가운데 맏이라는 것이 가정에 대한 의무감을 더 갖도록 했다는
스토리를 건져내려는 것이었다. 그때 그녀는 매 말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제주도로 떠나기
전에 이런 고백을 했었다.

가족들의 기대가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구 그래서 한번 떨어져 생활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구 말이다.

추측컨데 그녀는 그런 기대 때문에 자기 자신을 찾는 일보다 가족을 위하는 일을 더 우선적
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미친 녀석이 따라 다녀서 정신 병원으로 보내겠다고 한 적은 있다며 이성관을 일축해버렸
다.
그녀의 가정 환경은 넉넉한 편이 못되었다. 운수업에 종사하시던 아버지는 정순희에게 최소
함의 뒷받침을 해주었어도 부(富)의 편리함은 주지 못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좋은 환경 속에서 태어나 풍요롭게 성장해 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들은 현재의 모습에서 과거를 판단하는 습관이 있으니 말이다.

그녀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은 1988년 7월에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 열린
DPI(Disabled personis international) 세미나에서 였다.

여자가 그녀와 나 둘이었기 때문에 우린 당연히 파트너가 되었다. 기내에서도 함께 앉았다.
그때는 주로 장애인 복지의 흐름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가 그 말에 별로 관심이 없
을 것이란 오해가 풀린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녀는 그것이 첫 해외 여행이었지만 능숙한 영어 실력으로 오히려 리드했다. 식사 주문도
대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요리한 것이냐, 어떤 식으로 나오느냐는 등을 물었다. 그리고
음료로 와인을 주문했다. 난 어리석게도 그녀가 술을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큰
비밀이라도 알아낸 것 같은 스릴을 느꼈다.

공부벌레여서 멋대가리라곤 하나도 없는 기계 같은 여자일 것이란 나의 편견이 무너지기 시
작했다.

그녀는 파티에 나가기 위해 얼굴에 컴펙트를 바르고 입술에 빨간 루즈를 바르고 옷에 맞춰
목걸이와 귀걸이를 했는데 그 모습은 가장 평범한 여자의 모습이었다.

우린 파티석상을 주도하는 입장이었다. 우선 서울장애자올림픽 개최국이기 때문이었고, 우리
멤버들이 변호사, 판사, 교수, 작가라는 것이 그들의 눈을 부풀리게 했다. 특히 송영욱 변호
사님이 DPI 평의원이었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아주 정치적이고 애국자였다. 중공팀 안내자와 아주 친한 관계를 유지해 그
중공안내자가 미스 정을 찾으러 다닐 정도로 멋진 외교 관계를 수립했었다.

그리고 그녀가 애국자라는 것은 일본이 초청한 만찬에서의 일 때문이다. 회장이 일본사람이
기 때문에 DPI의 흐름에 일본의 입김이 센데 그녀는 그것을 몹시 언짢아했었다.
그래서 그 만찬에 처음부터 내키지 않는 것을 나갔다. 그 만찬은 일본이 중공의 환심을 사
기 위해 일본이 중공과 우리나라 그리고 주최측을 초청한 모임이었다. 그녀는 우리가 들러
리가 된 모임에 있을 필요 없다고 식사를 거부한 채 호텔방으로 올라갔다.
약삭빠른 일본 멤버가 그녀가 화가 난 것 같다고 물었다. 난 그녀가 피곤해서 라고 둘러 붙
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녀의 진실을 그대로 전해주었어야 옳았다.

일을 마치고 올라가 보니 그녀는 벌써 잠옷으로 갈아입고 누워있었다. 난 마치 내가 매국노
가 된 기분이 들어 그녀의 눈치만 살폈다.
"잘 끝났어요?"
" 아- 네. 송변호사님께서 우리 곰두리 액자를 선물로 주셨어요" 우리도 그 모임을 충분히
이용했다는 변명이었다. 그녀도 그것엔 동의하는 듯 했다.
"우리 공원에 가요. 시원한 맥주 어때요?"
"그럽시다" 그녀가 웃어주었다.

우린 밤마다 호텔 근처 야외 공원 식당이나 살롱을 찾아다녔었는데 그때의 그녀의 모습은
아주 낭만적이었고, 인생의 멋이 무엇인지를 아는 여자였다.

나는 그녀가 여성다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빼놓을 수가 없다. 아침 햇살에 눈
이 부셔 눈을 베시시 떳을 때 눈이 마주쳤다.
"굿모닝"그리고 먼저 인사했다. 굿모닝이라고 받아치기가 쑥스러워 쭈뼛거리다 기회를 놓쳤
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잠옷을 입고있지 않았다.
"와 글래머다" 난 장난스럽게 굿모닝에 대한 인사를 대신했다. 또 정말 그녀의 속살에서 풍
기는 느낌은 풍요로움이었다. 혼자서 비밀스럽게 부풀려왔을 그녀의 가슴에서 오이향 같은
신선함이 풍겨나왔다.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그녀가 제주도로 떠나기 하루 전에 우리 삼애봉사상 수상자들이
환송파티를 해주었다. 전날이 된 것은 다른 환송 모임이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전날이라는
것이 송별의 분위기를 더 진하게 해주었다.

그날 그녀에게선 완숙의 기품이 느껴졌다. 여판사로의 분위기가 확실해졌다고나 할까. 아무
튼 그녀는 조금 달라져 보였다.

내가 그녀를 집에 바래다주게 되었는데 그 때 차안에서 우린 조금 더 솔직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현장 검증 때의 어려움. 해직교사가 된 동생, 단위가 낮은 저금통장, 그리고 할머니가 되었
을 때의 이야기 등.

차가 멈췄다.
"공항의 이별 못해서 어떻하죠?"
"이별?" 그녀가 고개를 꺄우뚱하며 웃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이별이 되었다. 그녀의 사고
소식을 들은 것은 5월 20일 저녁 11시 20분 황연대관장님의 목소리가 젖어있었다. 하지만
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설마 죽기까지.

그러나 서울로 온 그녀는 영안실에 있었다. 그녀는 하얀 국화 속에서 움직임이 없는 굳은

작성자방귀희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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