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장애인의 삶] 천생연분은 따로 있었다. > 함께 사는 세상


[어떤 장애인의 삶] 천생연분은 따로 있었다.

이송렬씨 "87년 동아공예님전에서 대상받다(가죽공예)

본문

12살 때 국민학교 3학년에 편입한 이송렬씨는 만화책을 보며 국문을 깨우쳤지만 지금은 대학교, 대학원생들 부럽지 않은 유능한 전문적인 세계를 가죽공예를 통해 연출하고 있다.
/글·사진 편집부

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나는 이미 자신을 감수해야만 하는 업을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남들처럼 "나는 이 다음에 대통령이 될거야! 아니 나는 장군, 의사, 박사 등등의 꿈을 꾸며 두 눈을 반짝일 때, 이송렬씨는 풀이 죽은 어깨를 보여야만 했고, 꿈에 젖은 반짝이는 눈 대신에 슬픈 눈을 해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풀이 죽은 어깨에 힘이 가고, 슬픈 눈 대신에 사물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장애는 죄가 아니다. 이 몸은 죄의 씨앗이 아닌 정당한 아니 고귀한 생명을 지닌 한 인간이다라는 것을 새기며 살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생각은 시간이 자나면서 이끼낀 유리창을 서서히 투명하게 만들었다. 용산초등학교 다닐 때는 누나 등에 업혀 다녀야했고 그것도 고작 1학년까지 다니지 못했으나, 그는 국문을 만화책을 보면서 깨우쳤다. 항상 산꼭대기에 위치한 집에 살았기에 그나마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던 그는 형, 누나가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아도 친구가 많았다. 강아지가 그의 친구였고, 닭또한 유일한 친구였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가도 동네 꼬마들에게 나무를 깎아 새총을 만들어 주면서 숨어있는 그 무엇인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12살에 삼육재활국민학교3학년에 편입>
용산구 한강로 2가 70번지에서 태어난 이송렬 씨(28세)는 2남 1녀 중 막내로써 3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
그래서 국민학교 입학해서 1년을 다니다 그만두고, 12살 때 삼육재활원 3학년에 편입되었다. 이송렬 씨는 처음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생활하게 되었다며 그 당시의 감정을 말했다.
"처음에는 너무 외로웠어요. 그렇다고 가족들과 그리 정이 많았던 것도 아니었지만 혼자 떨어져 생활해야 한다는 게 슬펐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생각을 잊어버렸다. 혼자만의 슬픔이 아니고 혼자만이 외로운 게 아니다 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차츰 같은 동료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울며 웃고 지내다 보니 집에가고, 싶다는 생각보다 조금이라도 친구들과 같이 있고 싶었다. 그 당시 아이들은 고아원에서 데리고 와 나이가 천차만별, 그래서 12살이 되어 국민학교 3학년이 되었지만 창피한 것을 못느꼈다.
이렇게 8∼9년 있으면서도 먹고 자는 문제는 집에서도 잘 먹고 잘 입고 하지 않았기에 삼육재활학교가 천국 같았지만 그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선배한테 얻어 맞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방을 바꿔달라고 애걸했겠습니까?" 라는 이송렬씨는 16살에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졸업하고 나서 직업보도를 받고 수술 받고 저녁에는 야간 공부를 해서 못다 이룬 학문에 몰입하기도 했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 삼육재활원에서 수용 불가하게 되어 성인시설로 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사회로 뛰어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집에는 가고 싶지 않고 어쩔 수 없이 재활원에서 배운 목공예, 시계수리, TV, 라디오 등의 기술을 믿고 겁나는 발을 조심스럽게 사회로 내 딛어야 했다. 역시 하루 이틀 지나면서 두려움은 쌓여갔다. 재활원에서 배운 기술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막상 사회에 나와 직접 일을 하려고 하니 단순한 시계부속 끼우는 정도 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둘째 문제다.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몸이 불편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는 두드러지게 나타나 장애를 입지 않은 사람은 쉽게 일어났다 앉을 수 있지만 장애인은 한번 일어나려면 온갖 힘을 드려서, 일어나야 하고 또 일도 딸려 주인의 눈치를 보아야만 했다.
이런 것은 주인에게도 문제가 있다. 장애인들이 일을 잘 한다는 인식에 일을 많이 시키려고 데리고 갔다가 막상 시켜보니 그렇지 않으니 주인의 인상이 틀려지기 마련, 그래서 스스로 나와야 하는 입장이 이송렬 씨를 더 두렵게 했던 것이다.
약점이 있으니까 감수해야지 하면서도 1년 동안에 직장을 네 번이나 옮겨야 했던, 이송렬 씨는 시계유리 깎으며, 전자부속, 샷시판, 수석받침대, 전자조립을 하며 괴로움이 쌓여갔다는 것이다.
꼭, 주인의 보이지 않는 눈초리보다도 화장실이나 층계 등의 시설로 인해서 나온 적도 많다.

<가죽공예의 세계를 안 이송렬 씨>
여기 저기 다니며 하루에도 10군데를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직장을 구해 일을 하다가도 다시 떠돌아다니던 끝에 만난 천생연분. 가죽공예! 바로 이것이었다.
"목공예도 해 보았지만 가죽공예가 훨씬 손에 맞고 수월했습니다." 많은 어려운 일을 하다보니 더 수월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는 이송렬씨는 처음에는 그냥 배우는 것으로 만족해 4개월 동안은 6만원의 월급을 받았다. 지금은 이 보다는 나아졌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적은 월급이나 사실 사장도 장애인이기 때문에 채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술의 세계를 아는 것이다.
이 계통에서 베테랑이 되어 공인 정신으로 살며, 기회가 닿으면 재활사업 쪽으로 일을 하고 싶다는 계획도 있다.
문득문득 날씨 맑은 날을 보면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게 참 기쁘다며 가을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87 동아공예민전에서 대상 받다>
군대를 안가니까 공부해서 뭔가 한번 해 보자는 마음은 있었지만 나이도 있고 의식주문제 때문에 공장을 떠돌아다니다 운 좋게 가죽공예를 하게 되었다는 이송렬 씨.
그는 지금은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처음에는 못 배운 것에 대해 열등감도 있었지만 이 예술의 세계에서는 전문적인 공부를 못한 게 장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접어든 계기가 있었다.
"87 제15회 동아공예민전에서 대상을 받게 된 이유도 다른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대상을 받은 게 바로 그의 사고를 정립시켰다.
이송렬 씨의 작품은 틀에 박힌 부분보다 신선한, 참신한 공간이 연출된다. 특별히 전문적인 교육을 배우지 못했지만 이송렬 씨의 나름대로의 연출이 그대로 표현되어 장점으로 연출된다.
그 당시 공식적인 작품상 100만원에 동아일보에서 작품 값을 120만원에 사들여 모두 220만원을 받았다.
그는 남들이 기쁠거라고 하는 말에 별로 기쁘지 않았고, 이번 개인전을 끝내고 나서야 비로소 흐뭇함을 느꼈다는 그는 이번 개인전을 1년간 준비했다.
앞으로도 계속 가죽공예 일을 할 것이라는 그는 죽어버리겠다는 생각보다 일단 일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어려움을 견디었다.

그 전에 택시비가 없어 가고 싶었던 전시회를 못간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또 다른 이송렬 씨와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게 복지차원에서 차량문제 같은 것을 해주었으면 좋겠는데.....말끝을 흐렸다.
이제는 전시회라는 곳은 이 잡듯이 뒤지며 찾아다닌다는 이송렬 씨는 문득 문득 날씨 맑은 날을 보면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게 참 기쁘다며 가을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맑은 가을 만큼이나, 바람결에 머리칼이 날릴 때 가을을 느낌만큼이나 여린 마음을 울리지나 않을까? 하는 가냘픈 몸짓을 그저 바라보지 말고, 감싸안을 수 있는 미소로 한 장애인의 걸어온 길에서 모든 장애인을 만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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