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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이 아니라 이웃으로 똑같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사회적기업 열린책장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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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장 강화평 대표

2016년 가을부터 2017년 봄까지 타올랐던 촛불의 바다. 그 촛불의 가장 큰 결실은 물론 국가 권력을 본질의 제자리로 되돌려놓는 ‘비정상의 정상화’였지만, 그 결실을 장애계로 국한해서 평가한다면 무엇을 꼽을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모두의 판단이 소중하겠지만, 그 중에서도 ‘수화의 대중화’를 빼놓을 순 없지 않을까 싶다. ‘화면 한 귀퉁이에 있는’, ‘불필요한’, ‘뭔지도 모르겠는’, ‘화면에서 빼는 게 나을 듯한’ 막연한 이질감과 함께 살아왔던 일반 대중들이 그 또한 소통의 방식임을, 누군가에겐 소중한 언어임을 국민승리의 감동과 함께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수화가 공식 언어로 인정되는 전환기에, 또 다른 방식으로 수화의 대중화를 이끌고 있는 이들이 있어 찾아가봤다. 단순한 소통의 언어가 아닌, 문화의 공유까지 함께 이뤄내야 한다는 사회적기업 열린책장이 그 주인공이다. ‘청인’이 놓치고 있는 ‘농인’의 문화가 무엇인지, 농인에게 꼭 필요한 청인의 인식전환이 무엇인지를 함께 듣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본문에는 취재 당시 열린책장의 표현 그대로 농인과 청인이라 기술함을 미리 밝혀둔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따로 있다

대전광역시 동구의 한 언덕길에 위치한 열린책장은 2013년 봄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팀으로 시작해서, 기존에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수화의 문화를 설계하고 있다. ‘수화의 일상화’라고 할까? 방송 화면 한쪽에서만 눈에 띄는, 또한 농인의 손짓을 직접 보게 될 때만 접하는 게 가능한 수화가 아니라, 익숙한 하나의 풍경으로 생활 곳곳에 수화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성과를 이루기까지의 과정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던 모양이다. 기획과 실패가 반복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과정을 덤덤하게 털어놓은 강화평 대표의 설명은 실패담이 아니라, 오히려 제대로 된 정답을 찾아내기 위한 긴 여정처럼 들렸다.

“법인 설립과 함께 창업을 했던 날이 공교롭게도 2013년 6월 3일이었어요. 당시엔 그 날짜의 의미를 전혀 계산하지 않고 시작했던 건데, 그날이 바로 농인의 날(청각장애인의 날)이었잖아요. 처음엔 농인을 위한 사업이 아닌, 책 자체를 중심에 두고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열린책장과는 전혀 다른 열린책장이었던 셈이죠.” 책은 정보의 가장 기본이 되는 콘텐츠이기에, 정보 접근에 용이한 이들과 결핍된 이들의 격차를 줄이는, 한마디로 말해서 ‘정보의 빈부격차’를 줄이는 사업을 하겠다는 게 강 대표가 내걸었던 창업의 첫 목표였단다. 그래서 몇 가지 방법론을 살펴봤지만 사업으로 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아, 다양한 의견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생각하는 책의 존재와 의미를 묻고 또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인터뷰를 계속 진행하면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건, 누구를 만나도 다들 책전문가였다는 점이에요. 단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도 책에 대해 할 말이 너무 많았고, 책을 아예 안 읽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안 읽는 이유에 대해서도 나름의 분명한 논리를 펼쳤던 거죠. 그런 가운데서 ‘책이 정말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의 답을 찾아내는 게 가장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우선 떠오른 대상은 시각장애인들과 다문화인들이었단다. 그런데 그들을 위한 도서관과 책 문화는 부족하나마 일정 부분 만들어지고 있음을 확인한 뒤엔 다시 방향을 돌렸다고 한다. 각자의 책장을 개방해서 열린 도서관 개념으로 서로의 책을 공유하는 시스템, 각 개인의 책장이 하나의 네트워크 기반이 되는 방식이 추진됐는데, 사람들의 관심과 호응은 있었지만 사업 형태로 구조화하기엔 그것 역시 역부족이었단다. 그래서 책 자체로는 아무것도 안 되겠다며 출발점으로 다시 되돌아가려던 무렵, 그에겐 생소한 의견 한 가지가 전해졌다고 한다. “한 청각장애인과 만나게 됐는데, 그 분 말씀이 ‘우리 농인들한테는 동화책이 필요하다’고 하시는 거예요. 처음엔 당연히 아이들한테 주려고 동화책 말씀을 하시는 줄 알았죠. 그래서 특별한 의미는 두지 않고 대화를 계속했는데, 동화책이 필요하다는 게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농인들에게 동화책이 필요한 건, 동화라는 문화 자체를 실제로 모르는 채 살아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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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인의 삶은 농인의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아니, 보이는데 왜 동화책을 모릅니까?” 강 대표는 그 질문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단다. 동화책이 필요한 이유를 계속 설명 들으면서도, 그 의미가 전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동화책’이라는 화두는 마음에 남아서 떠나지 않았단다. 무언가 정말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실감이 들었던 건데, 그 답을 얻고 싶어서 그는 두 달여 동안 매주 농인교회로 가서 농인들에게 갖가지 설문조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두 달 동안 그가 깨달은 것은 자기 혼자만 수화를 할 줄 모른다는 현실, 다시 말해 농인의 세상에 직접 마주하지 못하고 따로 떨어져 있어야 하는 청인의 입장이었단다.

“일반 세상살이에서는 청인이 절대다수이고 농인이 극소수가 되잖아요. 그런데 그 교회에 있는 기간 동안 저는 극소수일 뿐인 청인이었어요. 입장이 바뀌다 보니까, 무엇이 가장 큰 단절일까를 깊게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게다가 실제 문의해 본 결과, 동화를 모르는 분들이 정말로 많이 계셨어요. 동화라는 존재를 처음 알게 된 나이도 어린 시절이 아니었다는 게 솔직히 충격적이었죠. 성장하면서 어디서든 자연스럽게 접하는 게 동화인데, ‘왜 이 분들한테는 결핍이 될까?’ 저는 이 지점에 아주 큰 키워드가 담겨 있다고 확신하게 됐어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해답을 찾는 실마리가 그에게 전해졌단다. 그가 설명해준 내용을 간단한 예로 대신 풀어본다면 이런 경우가 된다. 커피가 담긴 하얀색 종이컵을 처음 본 사람한테 ‘이것이 컵!’이라고 말하면, 그걸 처음 본 그 사람은 ‘컵’이라는 말의 정의를 단번에 받아들이기 힘들다. 안에 담긴 검은 물이 컵인지, 컵의 둥근 모양을 컵이라고 하는 건지, 컵 표면의 하얀 색상을 컵이라고 부르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종이로 된 재질을 말하는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굉장히 모호한 관념으로 컵이라는 단어와 그 형상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된다. 농인들에게 동화와 동화책이 그런 경우가 된다. 그리고 이 대목은 청인의 관점이 아닌 농인의 관점으로 판단해야 이해가 된다. 농인들에게 모국어는 음성언어가 아니라, 시각언어인 수화가 된다. 그렇기에 음성언어인 한글은 배우기 어려운 대상이다. 우리가 영어를 공부하고 단어를 열심히 외워도 조금 긴 문장과 마주하면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어릴 때부터 청각장애를 가졌던 모든 이들에게 한국어는 ‘일단’ 외국어가 되는 것이다.

“책을 읽게 되는 건 그림책 중심인 아기 때가 아니라, 어느 정도 성장한 뒤 한글을 배운 다음부터 가능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청인의 입장에선 아주 쉽게 접했던 동화를 농인들은 모르게 되는 겁니다. 청인들은 동화를 음성언어로 먼저 접했잖아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구수한 입담으로 전해주시고, 엄마가 잘 때마다 ‘옛날에 옛날에’ 하며 들려주셨던 게 동화예요. 음성으로 듣고 또 들으며 익숙해진 그 동화를 책으로 읽는 건, 유치원과 초등학교로 진학한 다음의 일이죠. 이미 아는 내용이니까 더욱 쉽게 읽게 됩니다. 그런데 농인들은 책에 담긴 문장을 아무리 주의깊게 읽어도, 음성언어로 익숙해진 청인들의 동화 감수성을 경험할 수 없어요. 일부러 찾아 읽지 않는다면, 한글을 배운 다음 동화책 과정을 건너뛰고 바로 일반 독서로 들어간다는 거죠. ‘눈으로 읽으면 되는데, 왜 동화를 모른다는 거지?’ 이건 전적으로 청인 중심의 닫힌 사고방식이라는 겁니다.”

 

수화는 우리 모두가 공감할 소통의 언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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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평 대표는 시각적 효과와 함께, 수화로 동화를 경험할 수 있는 방법론을 찾아 나선다. 그 결실이 바로 열린책장이 개발한 영상도서의 탄생이다. 영상도서는 화면 안에 배우가 나와서, 커다란 몸동작과 과장된 표정으로 옛날이야기를 실감나게 연기하는 장면을 연상하면 이해가 쉬워진다. 단, 다른 부분은 그 언어가 수화라는 점이고, 청각장애 당사자가 배우처럼 분장을 하고 등장해서 화자(話者)의 역할을 담당한다. 동화의 내용과 분위기를 충분히 알고 있는 당사자가 직접 동화 내용을 전달하기 때문에, 구연동화의 특징까지도 함께 전달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청인 기준이지만, 동화구연가 선생님들을 보면 동화를 정말 실감나게 묘사하잖아요. ‘옛날 옛날에’라는 표현을 아주 높은 톤(tone, 음색)으로 발음한다든지, 일부러 ‘옛~날~옛~날’처럼 길고 느리게 말하면서 보는 이들의 관심을 집중시키죠. 그와 마찬가지로 호랑이가 나타나 ‘어흥!’ 하는 장면의 의성어도, 영상도서의 출연자는 수화와 몸동작으로 얼마든지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어요. 청인 중심의 ‘동화구연가’라는 직업과 역할에는 ‘입구(口)’ 글자가 들어가 있죠. 그래서 영상도서에 출연하는 분들은 저희가 ‘수화이야기꾼’이라고 부르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앞으로도 수화이야기꾼이라는 말이 등장하면, 그게 바로 영상도서라고 반겨주면 좋겠습니다.” 첫 작품인 ‘금도끼 은도끼’를 시작으로, 계속 제작되고 발표되는 영상도서들은 청각장애 당사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강화평 대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농인에 대한 청인들의 이해가 전혀 없었다는 기존의 사회적 환경을 개선하고자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했단다. 수화를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 바로 이모티콘 사업이었다. 소셜벤처 경연대회 우수상과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한, 아주 귀여운 캐릭터가 한눈에 들어오는 모습으로 기본적인 수화를 모두에게 보여주고 직접 따라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카카오톡 이모티콘 스토어에 이미 입점해 있다고 하니, 관심 있는 많은 독자들의 발길이 함께 찾아들기를 기대하고 싶다. “저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건, 수화 전용 방송채널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거예요. 공영방송 화면의 작은 일부분만 차지하는, 그나마 모든 방송에서 수화를 볼 수 있는 게 아닌 현실을 타파하려면 드라마와 뉴스, 생활정보 모든 면에 열려 있는 수화방송국을 만들어야 합니다. ‘손티브이(TV)’라고 준비하는 이 목표가 하루빨리 실현되고 진행되도록 저희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강 대표는 열린책장에서 제작하고 출간한 웹툰 책인 ‘그녀들의 일상’과 ‘하늘색의 꿈’ 두 권을 펼치며 마지막 당부를 덧붙였다. “장애당사자분들은 늘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잘 살고 있어. 그런데 사람들이 우리를 장애인이라고 해.’ 이건 참 많은 걸 시사하는 대목이에요. ‘우린 잘 살고 있어. 밥 먹고 카페 가고 영화 보고 차 한 잔을 마셔. 그런데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장애인이래.’ 이건 차별과 편견이 너무 큰 전제로 이 사회 전체에 깔려 있다는 의미가 되죠. 중증의 지체장애인들이 맛집을 선정하면, 그건 일반적으로 거명되는 유명 맛집이 아니라 중증장애, 지체장애, 전동휠체어로 출입이 가능한 몇몇 매장들 중에서 한두 군데를 뽑는 겁니다. 출입이 가능해야 먹는 것도 가능하다는 거, 마찬가지로 청인과 농인의 관점도 이젠 열린 마인드가 되면 좋겠습니다. ‘농인들이 왜 그걸 모르고 안 하는지’를 궁금해 하기 전에, 그 접근성을 막아놓은 게 청인들의 편견 중심의 판단이었다는 사실을 함께 공유하며 받아들이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작성자글과 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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