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들이 모이면, 꿈을 품는 다도해가 된다
본문
제목이 뜬금없는 표현 같다. 하지만 직접 만나 취재하고 대화 내용을 녹취록으로 풀어가는 동안, 머릿속에 떠오른 핵심은 그 짧은 문장 하나로 모든 게 귀결되고 있었다. 개개인으로는 외딴섬으로 존재하는 1인들이라는 거, 하지만 함께 모이면 누구보다 자신감 넘치는 일상의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렇기에 외딴섬 아닌 다도해로 뭉친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성취임이 분명해진다. 경계선 지능 청소년들의 부모들이 오랜 시행착오 끝에 하나의 협동조합을 결성한 뒤 이뤄낸 성공사례를 만나게 됐다. 올라가는, 나아지고 향상되는, 그 모든 게 아름다움(美)으로 완성되고 있다는 경계선 지능 청소년들의 부모 모임 오르미 협동조합을 소개한다.
함께하는 위안과 성장 = 힐링
경계선 지능(境界線 知能, borderline intelligence) 또는 경계선 지적 지능(borderline intellectual functioning)은 ‘borderline’이라는 표현 그대로 경계선에 위치한 지능 상태를 의미한다. 장애와 비장애의 영역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중간지점이다. 지능지수(IQ)가 71 이상 84 이하를 가지고 있기에, IQ 70 이하일 때 판정되는 지적장애와는 다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낮은 지적 수준으로 인해, 일상생활과 취학 후 학교생활에서 어려움을 겪는 게 대부분이다. 상담학에서는 ‘경계선 아동(borderline child)’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경계선 아동과 청소년을 위한 제도적 장치는 극히 미흡한 상태라서, 특수학급의 수용대 상에선 제외되지만 일반 교실에서도 또래들과 같이 생활을 한다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언어를 이용한 수업을 30분 이상 집중해서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일반적인 교육 환경엔 적응하지 못한다. 자신의 사고와 의사 표현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걸 말 대신 몸짓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더 많아진다. 스스로의 언행에 책임질 능력이 부족함을 알기에, 다른 사람(특히 부모)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심해진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부족한 어울림의 경험 때문에, 또래한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훨씬 강하게 품게 된다.
“저희 아이들이 성인기(成人期)가 됐을 때, 사회로 진출할 수 있을지에 대한 믿음이 거의 없었잖아요. 힘들 거라는 생각부터 많이 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그럴 거라면 아이들이 어릴 때 조합을 빨리 구성해서, 애들이 스스로 개척이 안 될 때를 대비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어요. 부모들과 같이 조합을 만들어 카페가 됐든, 다른 형태의 매장이 됐든, 미리 준비 하며 추진하는 게 기대치를 훨씬 많이 갖게 만들잖아요. 스무 살에 닥쳐서 하는 것보다는, 실패하더라도 미리 경험을 쌓아보자는 취지로 협동조합을 만들었고 사업자 등록도 마치게 됐습니다.”
종합사회복지관 건물 5층에 있는 넓은 체육공간에 모인 청소년들은 삼삼오오 모여 큰 웃음으로 대화를 나눴고, 출입문으로 들어서는 친구와 선후배들을 반가운 환영인사로 일일이 맞이했다. 외부로 드러나는 언행에선 경계선 지능이 느껴졌지만, 하나하나 모두 해맑게 웃고 뛰어다니는 모습은 자폐와 같은 선입견을 단번에 물리치게끔 만들었다.
“이젠 틀이 거의 다 갖춰져서, 부모들 입장에서도 심적으로 무척 편한 단계가 됐죠. 수업의 문만 열어주면 다들 알아서 능동적으로 참가하고, 부모들은 따로 모여 앉아 일상의 대화와 정보 교환을 나누면 되니까요. 여기까지 오는 과정 모두가 시행착오였지만, 한 단계 한 단계씩 인내하고 지혜를 모아 풀어가다 보니까 이렇게 가시적인 결실을 얻게 된 것 같습니다.”
오르미 협동조합 홍세영 대표는 체육수업이 시작됨을 확인한 뒤, 1층에 모인 이모들의 자리로 안내했다. ‘이모’는 청소년들이 서로의 모든 엄마들을 부르는 호칭으로 통일된 표현이다. 이모들의 대화 모습은 일상 어디서나 보게 되는 풍경과 같았지만, 그 내용은 각도가 크게 다르다는 점이 확연하게 두드러졌다. 당사자 부모들만이 공유가 가능한 공감대 안에서, 이해와 격려의 문답이 깊이 있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엄마들끼리 힐링(healing, 정신적 · 신체적 상태의 회복. 심리적 치유)이 된다는 점이에요. 사실 누구한테도 얘기를 못해요. 형제와 친척들도 이해를 못하죠. 얘기를 안 하는 건 아니지만, 공감이 안 되니까 대화를 제대로 할 수가 없게 되는 거예요.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해도, 일일이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다는 건 정말 힘겹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있는 엄마들이라면 무엇이든 털어놓을 수가 있어요. ‘아’라고 말하면 ‘어’가 나오고, ‘어’라고 하면 ‘아’가 바로 이어지는 거죠. 여기서는 하고 싶은 얘기 자체가 상담이 되고 정보가 돼요. 해소가 되고 위안이 되죠. 어디서도 얻지 못했던 힐링을 받게 되니까, 엄마들 마음의 안정도 이 자리 안에서 다 이뤄지는 거예요.”
부모의 동참 없이 이뤄지는 건 없다
오르미 협동조합의 첫 발걸음은 아이들이 초등학교 시절일 때 놀이체육으로 만나던 부모들로부터 시작됐단다. 놀이체육의 모든 과정이 끝난 뒤 주변단체의 지원으로 아이들한테 연극수업을 이어가게 됐는데, 그 연극수업에서 기대치 않았던 뜻밖의 성과를 얻게 됐다고 한다.
“저의 딸은 자폐적인 성향이 있어서 낯선 사람과는 말을 안 하고 긴 문장으로 얘기하는 게 없었는데, 한 달 만에 이모들한테 다가와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모, 저 이번 주 연극 가요’, ‘연극 재미있어요’ 하며 먼저 말을 떼기 시작했다는 거죠.”
홍 대표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 중 경계선 지능 분야에선 가장 알려진 한 카페에서, 비슷한 고민을 나누던 엄마들한테 적극 제안을 하게 됐다고 한다. 애들한테 너무 좋은 연극수업이 있는데 한번 나와 보시라고 말이다. 초등학교 아닌 중학교 때부턴 사회성을 깊이 고민 하게 되는데, 홍 대표의 제안에 한두 명씩 입소문을 타고 찾아들게 됐다고 한다. 그렇게 만남과 모임의 틀이 하나씩 갖춰지면서 진행됐던 수업은 다양하다. 놀이체육 이후로 연극과 독서, 사회성 치료, 캘리그라피, 마음읽기수업, 문장이해수업 등이 다음 단계로 계속 이어지게 된 것이다. (취재의 주된 문답은 홍세영 대표와 나눴지만 모든 대화를 이모들과 함께했기에, 이제부터는 홍 대표를 포함한 ‘이모들의 고백과 발언’으로 기술한다.)
“어떤 강의를 듣게 되더라도, ‘어, 이건 우리 애들한테 필요하겠다’는 의견이 표출되는 거예요. 꼭 필요하다고 확신이 드는 건 금세 일치가 되거든요. ‘기간은 일 년 코스였으면 좋겠다’라든지, ‘강사는 어떻게 섭외하는 게 좋겠다’ 하는 공감대가 서로 간에 확인되는 거죠.”
“중요한 건 프로그램 자체가 아니고요. 아이들끼리 교류를 나누는 거예요. 자발적인 놀이가 가능하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핵심이라고 저는 확신하거든요. 그런데 개별적인 인지학습 같은 데 중점을 두는 부모들은 ‘놀이’라는 용어 자체부터 거부감을 나타내요. 당장 부족한 기능들을 해결하겠다고 개별학습에 집중하지만, 아이들의 사회성은 또래들과 어울리는 과정 속에서 놀라운 성과를 이뤄내거든요.”
가장 단순한, 어쩌면 ‘정말 그렇다고?’라는 의문을 가질 부분들이 경계선 지능 당사자들에겐 많이 나타난다. 대외적인 접촉을 극히 꺼리기 때문에, 집 앞 가게로 가서 물건을 사고 계산하는 것 자체부터 안 하겠다고 거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 식의 사례들을 해결할 방안은 개별과외 같은 별도의 집중교육이 아니라, 평소 학교생활에서 또래들에게 소외만 당했던 스트레스를 함께 풀 수 있는 열린 공간을 확보해 주는 일이다. ‘놀이’라는 표현이 괜한 시간낭비 같은 ‘놀자’의 개념이 아니라, 사회성을 키워낼 가장 빠르고 확실한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의 욕구가 나오게 돼서 부모들이 여기까지 함께하게 됐지만, 아이들의 욕구는 그 안에서 부모들끼리의 소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에요. 부모들의 소통이 없으면 아이들도 소통하는 방법을 못 배우거든요. 아이만 맡기고 빠지시는 분들도 어느 모임이나 있는데, 이 안에서 판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어떻게 피드백(feedback, 어떤 원인에 의해 나타난 결과를 다시 원인에 작용해 그 결과를 재조절하는 원리)을 해야 효과가 있는지 여부는 자발적인 참여일 때만 확인이 가능해요. 부모가 바뀌지 않으면 아이도 바뀌지 않는다는 거, 그건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그렇다면 아이들(청소년)이 실제 변화된 모습은 무엇이 있을까? 아주 사사로운 작은 단면일지 모르지만, 부모의 입장에서는 천지개벽과 같은 엄청난 성과로 받아들일 대목임이 분명하다. ‘이모들’은 일정하게 유지되던 긴장의 끈을 내려놓고, 자연스러운 사담 분위기로 대화를 이끌어갔다.
“경계선 지능 아이들은 자폐성향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청각적인 부분에 굉장히 예민해요. 소리에 대한 반응에 집중하거나 거부부터 한다는 거죠. 그래서 노래방을 극도로 싫어하는 애들이 있어요. 그런데 노래방의 방 안쪽까지는 안 가더라도, 친구들이 있는 문밖의 복도에서 기다리는 식의 변화가 생겼죠. 그러다가 또래들과 어울리고 싶어 방 안으로 들어가게 됐고, 결국 마이크까지 잡고 노래를 직접 부르게 된 거예요. 정말 사사로운 얘기 같지만, 이건 실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게 분명하거든요.”
“저는 자전거가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체격은 멀쩡한데 평소 운동량이 떨어지다 보니까 줄넘기도 안 되고, 연습시키려 해도 자존감이 떨어져 있어서 제대로 할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중랑천 산책길을 함께 걷다가 다른 애들이 전부 다 자전거를 잘 타는 걸 보더니, 정말 시도조차 안 하던 자전거 타기에 도전해서 결국 한 시간 만에 자유롭게 타게 된 거예요. 땀을 뻘뻘 흘리며 타는 모습에 너무 놀라고 기뻐서 아빠한테 곧장 연락했죠. 너무 신기한 변화였어요.”
“앞장서서 모임을 주도하는 모습이 일상화됐죠. 다니던 학교에선 그걸 전혀 못했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와선 항상 모두를 이끌어가는 행동을 해요. 여기에 모이라며 중심을 잡고, 다투는 친구들을 중재하기도 하죠.”
“놀이기구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겁이 워낙 많아서 전혀 도전을 안 했는데,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까 매번 갈 때마다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가 되는 거예요. 또래가 하는 건 자기도 하겠다는, 할 수 있다는 도전의식과 자신감을 갖게 된 거죠.”
지면의 제약으로, 오르미 협동조합과 나눴던 풍성한 대화들을 다 옮기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다. 분명한 성과를 이뤄간다는 사실에 박수를 보내고, ‘아이들의 스무 살 이후’ 협동조합의 취지에 맞는 결실을 이뤄낼 내일을 기대한다. A4지 16장에 기록된 녹취록 중에서, 가장 진하게 밑줄을 새겨 넣었던 ‘한 이모’의 의견을 마무리로 정리하고자 한다. ‘빨리빨리’에 젖어든 채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함께 귀담고 들어야 할 내용이라 되새기게 된다.
“개인차에 따라서 할 수 있는 게 있고 할 수 없는 게 구분되죠. 시간에 기대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어떤 애들은 정말 긴 시간이 필요하고, 어떤 애들은 짧게 올라갈 수도 있죠. 그런데 부모들 대부분은 짧게 올라가는 애들을 보면서, 긴 시간이 필요한 자신들의 현실에 조급함부터 느끼는 것 같아요. 물론 당연한 현실이겠죠. 행복의 기준은 다 다르지만, 이렇게 모여서 함께한다는 건 아이들을 모두가 함께 키운다는 장점이 있어요. 기능을 올리는 데만 몰두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조금씩 좋아지는 게 가시적으로 보인다는 거, 그게 가장 소중한 결실 아닐까요? 시간의 차이일 뿐이에요. 정말 강조하고 싶은 건, 아이와 함께 부모들도 동참해야 한다는 거예요. ‘내가 존중받고 있구나!’, ‘내가 환영 받고 있구나!’의 가장 큰 실감을 부여하는 건, 결국 엄마와 아빠들의 동참과 한마디가 최선의 결과를 낳게 만듭니다.”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