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의 달리기는 빛을 나누는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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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산의 케이블카를 타는 곳 맞은편 산책로를 따라가면, 목멱산방이라는 건축물이 나온다. 그 앞쪽의 배드민턴장 공간엔 매주 토요일 오전 9시마다 준비운동을 시작하는 이들이 모여든다. 평범한 달리기 동호회 회원들처럼 자연스러운 몸짓이지만, 그 장소까지 오는 길은 길고도 험난하다. 그래도 약속장소에 도착하면 모두의 표정과 몸짓이 가벼워진다. 시각장애인과 마라톤은 연결될 수 없는 전혀 다른 영역 같지만, 이들에겐 생활과 인생의 활력을 듬뿍 안겨주는 최고의 윤활유가 된다.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 회원들과 빛나눔동반주자단 회원들의 새로운 주말 달리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달린다, 나도 달린다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VMK, 회장 배선애)은 80여 명의 회원을 가진 큰 동호회로 성장했다. 지난 2000년 가을 제주도에서 열렸던 ‘한일 시각장애인마라톤대회’를 계기로 전국의 마라톤 동호인들이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싹을 트게 됐고, 이 가운데 수도권에 사는 십여 명이 매주 남산 길에 모이면서 동호회의 모습을 갖춰가게 됐다.
초기엔 저시력자와 전맹의 당사자가 짝을 이뤄 달렸는데, 아무리 조심하며 뛰어도 부딪치고 넘어지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렇게 3년여의 시행착오를 거듭하던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은, 마라톤 국가대표 출신인 안기형 감독을 만나면서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을 맞이하게 된다. ‘그냥’ 달리기가 아닌, ‘체계적인’ 관리와 훈련의 마라톤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당사자 곁에서 길 안내를 하는 동반주자를 ‘가이드 러너’라고 합니다.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과 함께하는 자원주자들은 ‘빛나눔동반주자단’이라는 이름으로 시각장애당사자 여러분들과 매주 호흡을 맞추고 있어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오히려 더 불편한 달리기가 되죠. 하지만 저희는 서로를 완전히 신뢰하며 매주 함께하기 때문에, 일주일 중 가장 즐겁고 보람찬 시간을 같이 나누고 있습니다. 일방적인 도움이나 의지가 아니라, 진정한 ‘한 팀’으로 마라톤 자체에 몰두하는 것이죠.”
그들이 달리는 남산 길(목멱산방~국립극장)은 ‘선수들’ 사이에선 최고의 고난도 훈련장이라 불리고 있다. 평지가 아닌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좌우로 굽은 길들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록단축 훈련을 위한 최고의 코스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 동호회 수준 이상의 주자들이 손목시계를 살피며 달려가는 모습들을 쉴 새 없이 마주치게 된다.
그렇다고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이 무조건 마라톤 하나에 집중하는 건 아니다. 당일 몸 상태와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달리는 속도와 거리는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다. 천천히 걸어도 되고, 뛰다가 걷는 걸 반복해도 된다. 어떤 방식으로 달리기에 임한다 해도, 시각장애당사자 곁엔 동반주자가 항상 함께한다. 동반주자는 매번 같은 인물로 짝을 맺지 않는다. 당일의 상태(컨디션)에 따라 빨리 달리는 조, 천천히 달리는 조, 걷는 조를 구분하면서, 당사자와 동반주자는 새로운 파트너를 정한다. 익숙한 ‘1인’에게 적응하기보다는,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는 훈련으로는 오히려 효과적이라고 다들 입을 모으는 이유가 된다.
동참으로 얻게 되는 성취감 – 이젠 당신 차례입니다
취재가 진행됐던 날은 당시까지 이번 겨울 최강의 한파였던 영하 15.3도의 다음 날 이른 아침이었고, 새벽부터 제법 많은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 나오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우려는 기우였고, 눈 쌓인 남산을 배경으로 ‘사랑의 끈’ 또는 ‘희망의 끈’이라 부르는 연두색 끈을 서로의 손목에 묶은 채로 제각기 달리는 모습이 이어졌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은 특히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잠실보조경기장 같은 장소를 대신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때그때마다 날씨 상황에 따라 훈련 장소를 바꾸기도 하죠. 그런데 오늘은 갑자기 맞이한 눈이라서, 일단 모인 다음 보강운동과 스트레칭 정도로 훈련을 마무리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길 상황을 살펴본 결과, 동반주자들이 좀 더 안전을 도모한다면 뛰는 게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서 달리기를 결정했죠. 사실 우리 당사자분들이 눈을 밟으며 달려 볼 수 있는 기회가 평생 몇 번이나 있겠어요. 그래서 눈을 밟으며 달리는 기회를 한 번 제공해드리고 싶었습니다. 다들 너무 즐거워하시니까, 제가 훨씬 더 기분이 좋아지네요.”
2002년부터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과 인연을 맺은 안기형 감독은 막연한 불안감이 앞서던 초기와 달리, 이젠 ‘저 분들을 위해 내가 뭘 해드려야 할까, 저 분들한테 더 필요한 게 뭘까’를 스스로 찾게 됐다며, 오랜 기간 열정과 우정을 나눴던 함께 달리기에 만족감을 표했다. 참가자들의 표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시간 가까운 달리기를 마치며 출발지점으로 되돌아온 모두의 얼굴은 성취감으로 환하게 피어올랐다.
“시각장애인분들은 일차적으로 보행 자체부터 불편하시잖아요. 그런 분들이 달리기를 한다는 건 감히 상상을 못할 수 있는데, 여기에 오시면 어떻게 달려야 하는지를 먼저 지도해 드립니다. 여기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는 도움의 달리기를 같이 하려는 주자들이 굉장히 많이 계세요. 언제든지 이 만남에 동참하실 수 있습니다. 처음 시작하시는 분들께는 두 명 혹은 세 명의 동반주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옆에서 안전하게 인도를 해드립니다. 저희들의 문은 활짝 열려 있으니까, 첫 시작에 도전해 보세요. 이전엔 경험하지 못했던 전혀 다른 신세계를 맞이하실 겁니다.”
동반주자들은 배번이 새겨진 옷이나 조끼를 착용하고 달린다. 빛나눔동반주자단의 조끼도 별도로 제작해 이용하고 있다. 달리기를 하는 다른 주자들한테 시각장애인과 동반주를 하고 있음을 알리고, 양보와 지원을 얻으며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가 된다. 매주 토요일 훈련 장소에 모이고 나면, 매번 시각장애당사자들보다 동반주자들이 더 많이 참석하게 된다고 한다. 마라톤대회 같은 경우는 일대일로 달려야 하지만, 훈련 때는 초보자 교육과 같은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당사자 한 명에 두세 명의 동반주자들이 한 팀을 이루는 경우가 많게 된다는 것이다. 취재 당일에는 ‘가톨릭마라톤 서울’ 조끼를 입은 동반주자들이 많이 참가했다.
“(조충식 동반주자) 저도 꾸준히 마라톤을 하고 있지만, 동반주자로 동참하시는 분들 중에선 실제 선수로 활동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공동체 의식으로 항상 함께 달리고 있습니다. 동등하고 평등하게 같이 달리는 거죠. 누가 잘 달리고 누가 못 달린다는 차별화된 그런 달리기는 여기에 없습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나와서 동반주 마라톤을 하고 있는데, 앞으로도 계속 함께 달릴 계획입니다.”
“(김정호 당사자주자) 이렇게 와서 친구들과 달리는 게 가장 좋죠. 모르던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같이 달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데요. 그러니까 이렇게 춥고 눈 오는 날씨에도 나오게 되는 거죠. 2007년부터 같이 뛰었는데, 앞으로도 꾸준히 참가할 겁니다.”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에서 여성으로는 첫 번째 회장이 됐고 연임하게 된 배선애 회장은, 달리기가 끝난 뒤에도 전문가로 보이는 동반주자와 계속 개인훈련을 하고 있었다. 취재를 위해 몇 말씀 듣고 싶다 하니까, 그는 회원 중 한 명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가장 늦게 동참했는데도 실력은 가장 빠르게 늘어나는 회원이 있다면서, 그에게 듣는 게 훨씬 좋은 내용이 나올 거라며 밝게 웃었다. 회장의 신임(?)을 받는다는 게 확인된 한 회원이 다가왔다.
“기자님이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작년 4월부터 시작했어요. 지인을 통해서 이런 마라톤클럽이 있다는 말을 듣고 늦게 참여하게 된 거죠. 너무 좋습니다. 일단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된 게 가장 좋고, 이렇게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즐거워요. 개인적으로는 지구력과 체력이 정말 많이 좋아졌어요. 일상생활도 활력이 넘치게 됐죠.”
낙천적인 성격이 분명해 보이는 김민범 회원은 이 모임을 월간지에 잘 소개해서 더 많은 시각장애 달리기 회원들이 생겨나면 좋겠다며, 독자 여러분께 전하는 초대의 몇 마디를 덧붙였다.
“저는 지금 만나는 사람들마다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을 자랑합니다. 우리 시각장애인들은 도우미가 없으면 혼자 뛰기가 불편하잖아요. 하지만 여기만 나오면 모든 게 다 해결되고, 주말마다 봉사하시는 동반주자분들의 아주 친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어요. 무엇보다 좋은 건, 자기 수준에 맞는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거죠. 달릴 수 없는 사람은 걷고, 천천히 달리거나 빠르게 뛰는 사람은 거기에 맞게 연결해 주니까 믿고 달릴 수 있어요. 너무 좋으니까 아무 걱정 마시고 일단 나오시면 되겠습니다. 살아가는 생활 자체가 바뀌는 체험을 하시게 될 거예요.”
매주 토요일 오전 9시에 서울 남산 목멱산방 앞에 나오면 이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의 훈련 장소는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 카페에 항상 공지가 되니까, 비회원이라도 이번 주 훈련의 위치를 카페(http://cafe.daum.net/vmk)를 통해 먼저 확인하면 된다. 같이 뛰지 않는다 해도, 그들이 달리는 길을 따라 천천히 산책을 즐겨도 충분히 즐거운 나들이가 된다. 남산 둘레길이기 때문이다. 대도시의 도심 한가운데 이만큼 여유로운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실감을, <함께걸음> 독자 여러분도 함께 나누게 되기를 기대한다.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 있다는 거, 운동과 사람이 대자연과 만나는 지점에 이보다 보람 있는 동참이 또 어디 있을까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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