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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엄, 예외는 존재할 수 없다

함께 사는 세상 : 홈리스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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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형 창고형 할인매장에 가면 물건을 고르고 카트에 담는 시간보다, 카운터 앞에 줄을 서서 결제를 기다리는 시간이 훨씬 길게 걸릴 정도로 구매 인파들이 넘쳐난다. 고급 패밀리 레스토랑 입구엔 번호표를 들고 입장 순서를 기다리는 고객들로 가득하다. 지난 연말연초 인천국제공항은 해외여행을 떠나고 돌아오는 승객들로 인해, 개항 이래 최다인원이 이용한 신기록을 연일 갱신했다고 한다. ‘창조경제’의 대성공이랄까? 방송화면 역시 불황 모르는 호황의 즐거운 비명들로 번지르르하게 장식되며 채워진다.

그런데도 굶주리는 이들이 넘쳐나고, 한겨울 얼어 죽는 참극은 계속되고 있다. 한 평 쪽방에서 기약도 없이 쫓겨나는 이들이 줄을 잇고, 비정규직의 절규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헬조선!’의 참상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도대체 이 나라가 국가인가? 국민을 의식이라도 하는 정부라는 게 존재하는가? 국정운영자들은 대체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기에, 국민의 참상을 살피려는 노력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낮은 곳을 향한 많은 운동단체가 있지만, 우리 사회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 이 단체만큼 직접적인 활동을 하는 곳을 찾기도 어려울 것 같다. 유래 없는 한파였다던 이 겨울, <함께걸음>은 홈리스행동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봤다.

 

문제는 사회제도의 틀이다

“저희는 일단 정부와 기업의 후원은 우선적으로 배제하는 입장이고요. 그 이외에 지자체에서 진행하는 인권 관련 프로젝트 지원사업 같은 게 있으면, 적절한 조건이 맞을 경우에 한해 응모를 해서 지원을 받는 형태로 운영하고 있어요. 지난해를 예로 든다면 서울시 인권담당관에서 공모한 사업에 저희가 제안서를 넣었고, 그게 채택이 돼서 야학 운영을 위한 지원을 받게 된 것이죠.”

홈리스행동의 상임활동가 황성철 씨의 설명이다. 일정금액이 지원금으로 들어오면 사업계획서의 범위 안에서 사용을 하며 운영한다고 하는데, 홈리스행동의 주된 활동영역은 무엇일까?

“우선 ‘인권지킴이’라는 현장 활동에 중점을 둡니다. 현장에 직접 나가서 정책대응활동과 법률상담, 복지지원 같은 활동을 주로 하고 있고요. 두 번째로 ‘미디어매체’를 중요한 사업으로 운영합니다. 매월 신문 형태로 발행하는 ‘홈리스뉴스’가 있고요. 영상팀이 따로 있어서, 저희들의 주된 사업활동을 영상기록으로 일일이 남기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홈리스야학이 있죠. 홈리스들의 교육과 문화적 권리를 실현하고 홈리스 운동의 기틀을 꿈꾸는, 작지만 아주 야무진 학교입니다.”

홈리스행동은 홈리스 상태가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에 기인하며, 신자유주의의 금융세계화가 확대될수록 홈리스 문제는 점차 심화될 것이라는 관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홈리스 문제를 게으름이나 무능 등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기는 인식에 반대하며, 노숙은 물론 극한의 주거빈곤상태에 처한 홈리스 대중들의 조직된 힘을 통해 홈리스 상태를 철폐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운동에 기여하고자 노력한다. 홈리스행동의 존재이유가 그것인 것이다.

홈리스행동은 2001년 12월 ‘노숙인 복지와 인권을 실천하는 사람들(노실사)’이란 이름으로 창립하여, ‘2001 Homeless Memorial Day(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 추모제)’를 거행하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2002년 6월에 ‘월드컵 대책 노숙인 인권공동실천단’을 조직했고, 2005년 1월엔 ‘1.22 서울역 사태 대응을 위한 노숙인 사망 진상조사 및 근본대책 마련을 위한 연대모임’을 구성했다. 2010년 2월에 현재의 명칭인 홈리스행동으로 재출범했고, 2010년 8월에 홈리스야학을 개교하는 등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신음하는 이들을 위한 알찬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는 중이다.

 

이곳을 찾는 이들이 바로 주인이다

어떤 면에서는 가장 인간적인 질문이 아닐까 싶은 궁금증을 먼저 풀어야 했다. 홈리스 상태로 힘겹게 지낸다 해도, 막상 홈리스행동의 문을 두드리기가 주저될 면이 없지 않을 것 같은데, 홈리스행동과 각 개인의 연결은 어떻게 진행되는 걸까?

“저희 단체를 찾는 분들의 대부분은 기존의 상담체계를 통해서, 저희 단체를 전혀 모르시던 분들도 찾아오시게 되는 경우가 많고요. 기본적으로는 저희가 매주 금요일마다 인권지킴이 활동을 위해 거리로 직접 나갑니다. 나가서 만나고 조직이 돼서 상담이 필요한 분들을 모시고 오거나, 현장에서 직접 행정지원을 실시하기도 하죠.”

이 대목에서 독특한 특징 하나가 발견이 된다. 홈리스 밀집지역 중심으로 현장활동을 나가는 곳들이 영등포, 서울역, 종로3가, 돈의동, 청량리, 창신동 등인데, 이 모든 곳들이 서울지하철 1호선 라인과 겹친다는 점이다. 이건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오랜 기간 정책의 차등이 빚어낸 일그러진 현상일까?

“야학 같은 경우는 일단 저희가 홍보를 일일이 합니다. 홈리스 밀집지역마다 찾아가서 야학 포스터를 붙이고, ‘공부하러 오세요!’ 하는 안내에 따라 찾아오시는 분들도 많아요. 시설에도 배포를 하기 때문에 노숙인시설에 계시던 분들도 오시고, 지인들의 소개로 오시는 분들도 계시죠. 기본적으로 어떤 분이 어떻게 찾아오신다 해도, 저희들의 문은 항상 개방되어 있으니까 언제든지 찾아오셔도 환영합니다. 여러분이 주인공인 홈리스행동이니까요.”

 

죽음마저도 법으로 차별하는가

매년 동짓날 저녁엔 그 해에 돌아가신 홈리스들을 추모하고, 홈리스 복지와 인권 개선을 요구하기 위한 ‘홈리스 추모제’가 진행된다. 작년 연말에도 44개 노동사회복지단체들이 연대하여, 추모기간을 선포하고 추모제를 거행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즈음에서 ‘홈리스’의 문제점이 무엇이고, 왜 그만큼 시급한 사회적 대안이 필요하다는 건지를 먼저 살펴야 할 것 같다.

홈리스들의 삶이 빈곤과 차별로 얼룩진 것과 같이, 그들의 죽음 또한 그러하다. 연고자가 있든 없든 간에, 홈리스들은 배웅하는 이 없이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빈곤화의 과정은 가족과 친지 관계에도 커다란 원심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현실이 그렇다면 십시일반의 힘을 모아 해결책을 마련하면 될 텐데, 암 덩어리 같은 가장 큰 문제점은 죽음을 다루는 법률과 제도에 집중되고 있다. 국가의 법률과 제도가 이들의 존엄을 더욱 처참하게 만들고, 마지막 길까지 짓밟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헌법재판소는 생전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무연고시신을 해부용으로 제공하도록 한 ‘시체해부 및 보존에 관한 법률(시체해부법)’이 위헌임을 선고했다. 그 법률의 12조 1항은 무연고시체에 대해 ‘교육 또는 연구를 위하여 시체를 제공할 것을 요청할 때에는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그 요청에 따라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말도 안 되는 규정이다. 사자(死者)의 신체 자기결정권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집권 새누리당의 의원 10명은 곧장 시체해부법의 개정안을 발의했다. ‘시체 본인의 생전 반대의사가 없는 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을 뒤집으라는 법률개정안을 발 빠르게 제출한 것이다.

왜 그럴까? 누군가에겐 이들의 시신마저도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평생 가진 것 없이 헐벗은 상태로 차별과 냉대 속에 생존하다 숨을 거두었는데, 정작 자신들의 육신은 누군가의 금전적 이익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이 기막힌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장례마저도 없죠.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제12조를 보면, ‘무연고 시신 등의 처리’를 규정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반인륜적이에요. 연고자가 없거나, 있다 해도 시체 인수를 거부한 사체의 경우는 처리 규정에 따라 말 그대로 ‘처리’가 돼요. 고인을 위한 최소한의 장례절차도 없이 안치실에서 화장장으로 바로 이동하는, 이른바 직장(直葬)의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지인들마저도 고인을 애도할 수 없는 거죠.”

게다가 무연고 사망자의 공고시점도 기가 막힌다. 일간지 하단 등에 공고되는 시점이 무연고 사망자 화장 및 봉안이 완료된 ‘무연고시신을 처리한 때’로 규정되어 있어, 고인의 지인들은 부고조차 들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이 바로 대부분의 홈리스들이 세상을 떠나는 방식, 홈리스들이 동료들을 떠나보내는 방식인 것이다. 동료를 장례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몇 달 혹은 몇 년이 지나서야 때 아닌 부고를 들어야 한다는 것, 이건 인간이 인간에게 할 짓이 아니다.

“현장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입장에서 가장 모순되고 말도 안 되는 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장제급여’라는 거예요. 그 제도는 수급자의 사망 시 시신 1구당 75만원의 장제급여를 지급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 비용에서 알 수 있듯이, 수급자의 장례절차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복지부는 ‘사체의 검안, 운반, 화장 또는 매장 기타 장제조치를 행하는 데 필요한 금품’으로 규정하여, 빈소 마련과 같은 장례절차를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있다는 거죠.”

 

모두의 존엄이 존중되는 세상을 향해

연고자가 있든 없든, 가난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존엄하게 살고 존엄하게 떠나는 일은 공평하게 보장돼야 한다. 돌봐 줄 이 없다고 누군가의 사체가 제3자의 손에 넘겨져서는 안 되며, 가난하게 죽었다 해서 애도하고 위로 받을 기회마저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영장례제도의 도입, 장제급여의 현실화로 존엄한 죽음과 남은 이들의 애도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에 사회적 연대의 힘이 모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홈리스행동의 홈리스야학이 커다란 무게감을 갖게 된 건 아주 긍정적인 일이에요. 저희는 홈리스 대중을 조직하고, 그 조직 안에서의 운동이 만들어지는 것을 지향하고 있거든요. 누구든지 이 빈곤의 문제, 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고 해결을 지향하는 분들, 또한 배움을 갈망하고 동료들과의 관계를 만들고 싶은 분들은 누구나, 정말 어느 누구나 찾아오셔도 됩니다. 가장 손쉬운 연결이 바로 홈리스야학이니까요.”

황성철 상임활동가도 야학의 컴퓨터 선생님으로 활동하고 있다는데, 지난 학기 기준으로 13명의 교사들 중에 7명이 자원활동교사로 함께했단다. 직장인도 있고 대학생도 있고 시민단체 활동가들도 자원활동교사로 참여하고 있다는데, 그들이 해당 분야에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물으니까 아주 의미 깊은 대답이 황 활동가에게서 돌아왔다.

“저희 야학의 교과 자체가 전문성을 요하는 내용은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교사들은 ‘알고 있는 만큼’ 나누고, 4,50대에서 8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인 학생들은 ‘인생의 지혜’와 ‘생활의 경험’을 함께 나누는 것이죠. 교사와 학생 간에 지식을 전하고 인생을 전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재기의 꿈과 동료애를 하나씩 찾아가는 겁니다. 그 교감이 가장 중요한 대목이죠.”

멋진 표현이다. ‘지식을 전하고 인생의 지혜를 서로 전하는’ 교감이라는 것! 홈리스야학이 단순히 ‘없는 자’, ‘낮은 자’들의 집합체가 아닌, 굳건한 공동체의 내실을 갖추게 됐다는 건 내적인 교류와 교감이 충실하게 녹아들고 있다는 반증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사자의 입장은 어떨까? 야학인 만큼 분명히 존재해야 할 직책이 ‘학생회장’이다. 홈리스야학도 학생회장‘님’이 계신다. 정승문 씨가 그 주인공이다.

“2011년 10월에 여기하고 인연이 닿게 됐죠. 사업을 하다가 안 좋아져서 일주일 정도 노숙을 하게 됐는데, 오갈 데 없던 상황에서 우연히 홈리스행동의 존재를 얘기 듣게 됐어요. 구제를 해준다고, 도움을 준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저 혼자 여기로 찾아온 케이스예요. 당시 규모는 작았지만 굉장히 알찬 활동을 하던 단체였는데, 개인적으로는 정말 큰 도움을 받게 됐죠.”

정승문 씨가 ‘정말 큰 도움’이라고 강조한 건, 홈리스행동의 행정적인 지원을 통해 두 차례에 걸친 목디스크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게 됐다는 점이다. 자신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홈리스행동에서 지자체의 수술비 지원까지 받아내며 ‘다 알아서’ 해결해줬다는 것이다.

“야학에서 여러 과목들을 배우지만, 저는 컴퓨터를 배운 게 정말 큰 힘이 되고 있어요. 하지 못했던 걸 남들만큼 이해하고 할 수 있게 되니까, 더 재미를 느끼고 의욕도 생기는 것 같아요. ‘나도 할 수 있구나!’ 이런 자부심인 거죠.”

‘무명남’ ‘무명녀’가 홈리스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표현법이었다면, 이젠 ‘이수일’과 ‘심순애’라는 당당한 자신의 이름 석 자로 활동하는 게 훨씬 뚜렷한 긍정의 힘을 불러들이지 않을까 싶다. 아직은 힘겹지만, 아직은 열악하지만, 그래도 열정으로 뛰고 있는 활동가들과 동료들이 곁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소중하다. 모두의 존엄이 존중되는 세상을 향해 더 힘차게 휘날릴 홈리스행동의 깃발을 기대해 본다.

채지민 객원기자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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