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지옥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본문
‘왜 지금에 와서 형제복지원을 거론하는가?’를 질문하기 이전에 멀쩡한 대한민국 국민이, 이 땅의 서민들이 3천5백 명이나 한데 갇혀 12년 동안 구타와 인권유린의 지옥을 겪어야 했다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지금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를 되묻기 전에, 국가가 인정한 공식 사망자만 531명이고 비공식적인 인권말살의 범죄는 얼마나 더 많았을까를 낮은 자세로 겸허하게 헤아려야만 한다.
‘그래서 어떡하자고 20년, 30년 전의 일을 지금 공론화 하겠다는 건가?’를 묻는다면, 진정 그렇게 질문한다면 단 하나의 반론을 내놓게 된다. ‘그 피해당사자가 바로 당신이고 당신의 가족이며, 당신의 지인이자 이웃들이었다는 것’, 거기에 덧붙이자면 그런 전무후무한 지상최악의 지옥을 겪은 이들의 결말은 미쳐버린 정신이상과 온 몸이 부러진 지체장애, 인생 자체의 강탈이었다는 점이다. 지금 이 <함께걸음>을 읽는 독자 여러분 중에서도, 분명 당시의 피해자가 적지 않게 계실 거라는 추론과 믿음이 떠오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도 그 모든 만행을 주도한 가해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재벌 수준의 재력을 유지하면서, 해당 지역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경제력을 과시하며 거물 행세를 하고 있다 한다. 피해자들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아니, 피해를 당했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채 30년 가까이 나락의 낭떠러지로 내몰리고 있는데, 가해자는 오히려 더 화려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니, 이게 과연 제대로 된 국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세상 모두에게 되묻고 싶어질 뿐이다.
이번 ‘만난사람’의 주인공은 ‘그 지옥’에 끌려간, 그것도 어른의 입장이 아니라 초등학교에 잘 다니던 9세의 나이로 난데없이 끌려갔던 1인이다. 아수라의 지옥을 온 몸으로 체험한 9세 소년의 인생을 앞에 놓고, 대한민국 정부는 무어라고 설명하며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아야 할 것인가? 가족과 함께 그 지옥에 매몰됐던 9세 소년은 38세가 되어 <살아남은 아이>라는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던져놓으며, 잠든 우리의 양심에게 깨어날 것을 외치고 있다. 형제복지원 피해당사자인 한종선 씨를 ‘만난 사 람’으로 만났다. 그의 처절한 고백을 이 자리에 옮긴다. 이 고백은 이 지면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진실을 향한 긴 싸움의 시작이 될 것임을 믿는다.
Q _ 출간하신 저서 <살아남은 아이>를 너무 심각하게 읽을 수밖에 없었고, 믿기지 않는 잔인함에 거부감 같은 것 또한 지워지지 않았다. 내내 인상을 찌푸리면서 한 권의 책을 읽어야 했다는 건, 정말 처음 겪는 고통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한종선 씨를 오늘 처음 만나 첫 대화를 나누는데, 첫인상이 너무 밝다는 점은 무척 의외의 모습이었다
아픈 기억을 또 아프게 얘기하면, 듣는 사람 또한 더 아파지게 되지 않겠나. 그래서 가급적 편한 자세로 말씀드리려 한다.
Q _ 말씀하신 그 표현이 참 가슴에 와 닿는 것 같다. 그 모든 아픔의 기억을 책으로 적는 동안 정말 힘드셨던 것 같은데, 이렇게 다시 언급해야 할 자리를 만들었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하지만 많이 힘드시더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내용이니까, 당사자 입장의 의견을 진솔하게 전해주시면 고맙겠다
힘들어도 할 수밖에 없는 건, 힘들어도 고쳐질 거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하는 거다. 희망마저 없었다면 아예 안 했을 것이다.
Q _ 당시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엄청난 규모인데, 지금까지 공개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건 한종선 씨밖에 없는 것 같다
지금 저하고 연락이 되는 이들이 열다섯 분 정도 된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정책적으로 변화된 게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 당시 강제적으로 잡혀갔던 분들이기에, 또 다시 불합리한 처사를 당하지 않을까 주저하는 게 거의 100% 그 분들의 입장이라고 본다.
Q _ 1980년대 당시 형제복지원은 구걸을 일삼는 부랑자들 위주로 수용됐다고 알려져 있다. 그 사실관계부터 정리해 주시면 좋겠다
부랑자는 아마 극소수였을 것이다. 일상생활을 하던 일반인들이 불심검문에 신분증이 없다는 이유로 대부분 붙잡혀 왔다. 당시 형제복지원 내부에서 덤프트럭 차 한 대가 천막 비슷한 걸 위에 친 상태에서 나갔다. 그리고 단속반원들이 완장을 차고 다니면서, ‘저거 부랑자 같다’ 하면 무조건 검문을 해서 잡아들였다고 알고 있다.
Q _ 공식적인 확인 과정이나 신원 조회 같은 것도 없었다는 건가
경찰과 같이 하는 거니까, 또한 부산시와 경찰이 합동으로 했기 때문에 무조건 잡혀가야 했다. 이러니 누구한테 하소연을 할 데도 아예 없는 게 아닌가.
Q _ 그렇다면 거기에 잡혀온 사람들은 주로 어느 지역 거주자들이었는가
주소지를 보면 전국이다. 서울에 살던 분이 사업 때문에 내려왔을 수도 있고, 여행처럼 놀러왔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신분증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무조건 잡혀서 들어온 거다.
Q _ 한종선 씨는 9살 때 입소됐다고 알고 있다. 아니, 그렇게 어린 아이들까지 수용하겠다고 잡아들였다는 건가
한 소대 당 80명에서 120명 정도 수용됐다. 아동소대는 24소대 27소대 28소대 그리고 23소대는 여자아동소대, 25소대와 26소대는 여자 처녀들이 있는 거주 소대였다. 제가 아는 소대는 그 정도였다. 그 많다는 성인소대들이 어디 있는지, 그런 건 그때는 몰랐다. 일단 제가 있던 소대들이 6개동이었으니까, 100명씩만 계산해도 600명이 된다.
Q _ 그 어린 아이들한테도 어른들과 똑같은 체벌을 가했다는 건가
새벽 4시에 기상해서 두들겨 맞는 건 똑같다. 제 입장에서는 아동소대에 있었던 기억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아동소대가 그 정도였다면 성인소대는 어느 정도였겠나.
Q _ 책을 읽으면서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될 정도의 가혹한 일상만 반복이 됐다. 새벽 4시 기상 이후의 일과는 어떻게 진행됐나
새벽 4시에 기상나팔이 울린다. 그럼 깨어나자마자 이불정리부터 재빨리 끝낸 다음에, 침대 앞에 나란히 일렬로 서야 한다. 120명이 나란히 서는 것이다. 인원점검을 한다. 그 점검은 2분도 채 안 걸린다. 그 다음 4열종대로 세면장 앞에 가서 앉는다. 그리고 손바닥에 굵은 소금을 받는다. 그걸로 칫솔 없이 손가락으로 양치질을 해야 한다. 그 다음 4명씩 세면장에 들어가, 조장들이 퍼주는 3번의 바가지 물로 세면을 끝낸다. 120명의 세면이 20분 내외로 다 끝난다.
Q _ 그런 상황에서 질서가 안 지켜지면, 바로 몽둥이질이 이어졌다고 했는데
그렇다. 바로 날아왔다.
Q _ 몽둥이질이라는 게 어느 정도의 세기로 맞게 되나
야구선수들이 야구방망이를 힘껏 휘두르듯 가격한다고 생각하시면 되겠다.
Q _ 그 어린 아이들한테도 그렇게 했다는 건가
그렇다. 예외는 없었다.
Q _ 그럼 그 몽둥이라는 게 어떤 재질이었는지 궁금하다
나무인데… 우리는 ‘참나무 빳따’라고 불렀다. 그 나무로 몽둥이를 만들어서 소금물에 절인다. 그 다음에 물기를 빼고 말린 다음에 다시 절이고, 그렇게 몇 번 해놓으면 이게 절대 부러지지 않는다. 이걸로 맞는 거다.
Q _ 기상 후 세면한 다음의 일정이 어떻게 되는가
소대 밖으로 나가면, 중대장이 와서 인원점검을 한 뒤 구보를 시킨다. 군가를 부르면서 6시 아침식사를 할 때까지 구보를 해야 했다.
Q _ 아픈 기억만 자꾸 떠올리게 만드는 것 같아 정말 죄송한데, 식사는 어떤 내용의 음식이었나
이름은 소고기국 뭐, 이런 식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는 ‘멀국’이라고 불렀다. 멀건 물에 무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면 말 그대로 이상한 냄새의 된장국, 우리는 그걸 ‘똥국’이라고 불렀다. 꽁보리밥에 생선 썩은 거, 깍두기가 식단의 전부였다.
Q _ 무슨 특별한 날에 음식 메뉴가 달라진다거나, 그런 건 없었나
일주일에 한 번인가? 자장밥 비슷한 게 나왔다. 그런데 그건 더 먹지 못했다.
Q _ 특별한 메뉴인데 왜 먹지 못했다는 건가
그런 날은 조장들이 ‘선착순’을 시켰다. 식사를 빨리 하고 와서 집합하는 순서를 30명 정도로 잡는다. 보통 20명을 기준으로 삼았다.
Q _ 그게 밥을 빨리 먹는 건가, 아니면 다른 걸로 선착순을 요구하는 건가
식판을 드는 순간부터 식사를 마치고 선착순 안에 도착하는 시간을 의미하는 거다. 한 소대의 120명 중에서 20명 안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나. 당시 우리들 표현대로 ‘흡입’을 했다. 밥판(식판)을 드는 순간부터 그냥 대여섯 숟가락 막 퍼먹고 입에 넣은 밥을 통째로 삼킨 다음, 다 못 먹은 밥판의 음식을 잔밥통에 버린 다음 선착순에 뛰는 거다.
Q _ 그 어린 나이에 그만큼의 폭행을 당했다는 건 믿기지가 않은데, 책을 읽다 보니까 잘못 맞아서 장애를 얻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기술된 것 같다
조장들이 때리다 보면, 자기가 지쳐서 잘못 때리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골반의 뼈가 깨지고 무릎 인대가 나가는 건 흔한 일이었다.
Q _ 한종선 씨도 그런 경우를 당했나
저 역시도 지금 MRI를 찍어 보면, 골반이 깨져 있는 모습이 그대로 나온다.
Q _ 잘못 맞으면 정말 아플 텐데
그날은 아예 걷지 못한다. 그런데 걷지 못한다고 또 두들겨 맞는다. 치료 같은 건 없다.
Q _ 의무실이라는 게 분명히 있었다는데, 수용된 원생들은 흙으로 치료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건 무슨 얘기인가
의무과소대라는 게 있기는 한데, 그건 말 그대로 외부인들이 찾아왔을 때 보여주는 장소밖에 안 된다. 우리는 상처의 고름 위에 흙을 발라서 말리며, 그 상처가 딱지가 되어 떨어지도록 치료하는 방법이 더 빨랐다.
Q _ 같이 있던 소대원이 갑자기 안 보이면 ‘죽었다’는 건 무슨 말인가
소대 안에서 정신없이 두들겨 맞아서, 정말 정신을 잃게 맞아서 실려 나간 다음에 다시 안 돌아오면 죽은 게 맞다. 왜냐하면 아무리 정신이상이 되거나 장애가 되더라도, ‘빨간약’만 발라주는 치료 즉시 소대로 복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팔 다리를 못 쓰거나 몸 자체가 이상해지면, 일단 소대로 복귀한 뒤에 다른 소대로 격리가 됐다. 그런데 심하게 다쳐서 나갔던 사람이 안 돌아왔다면, ‘죽었다’고 보는 게 맞았다.
Q _ 그렇다면 심하게 다친, 달리 표현해서 장애를 얻게 된 이들은 소대 안에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가
똑같다. 앉아서 맞아야 한다. 발이 사용 안 되면, 앉아서 차렷 열중쉬어를 해야 한다. 비정상적인 각도로 팔이 꺾여 휘어 있는 분들이 많았다. 그 분들 대부분은 몽둥이 타작을 견디다 못해 몸으로 막으려다가, 팔로 막으려다가 그 팔을 몽둥이로 맞아 그렇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Q _ 구타만 있는 게 아니라, 얼차려도 엄청나게 심했다고 책에 적혀 있다. 군 생활을 했던 입장에서는 ‘대가리 박아’ 내지는 ‘원산폭격’ 정도는 이해가 된다. 그런데 ‘원산폭격’을 하면서 잠을 잤다는 대목에서는 정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도대체 어떤 상황을 말하는 건가
우리가 받던 기합 중에서는 그게 가장 쉬웠던 거다. 그걸 매번 2시간에서 3시간 정도 받았다. 그런데 잠을 자기에 가장 좋은 얼차려였다. 그래서 중간마다 코를 골며 자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걸 옆 사람이 조장 몰래 깨워야 했기에 서로 고생을 많이 했다.
Q _ 책 내용 중에서 정말 죽도록 맞다가, 실제로 죽은 아이의 얘기가 나온다. 이건 직접 목격한 사실이라 했는데, 어느 정도의 폭력이었는지 책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
그 친구가 그 당시에 간질이 있었다. 두들겨 맞던 도중에 얘가 간질을 일으켰다. 몸을 막 부르르 떨고 게거품을 무니까, 조장이 엄살을 부린다고 두들겨 패면서 복부를 마구 짓밟아댔다. 이 순간에 이 친구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릎에 매달려서 살려달라고 애원했는데,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운 다음에 다시 두들겨 팼다. 그러다가 몽둥이를 휘두를 때 순간적으로 발작이 다시 일어난 것 같았다. 쓰러지는 순간에 몽둥이가 머리에 정통으로 맞았다. 머리가 그대로 터졌다. 얘가 눈동자가 완전히 다 풀린 상태에서 스르륵 쓰러지는데, 바로 제 앞에서 쓰러진 거니까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이다. 터진 머리에서 뇌수와 피가 계속 철철 흘러나왔는데도, 이성을 잃은 조장의 폭력은 다른 조장들이 달려와 말릴 때까지 계속됐다.
Q _ 즉사를 했다는 의미인가
의무대로 실려서 갔는데 안 돌아왔다. 죽은 것이다. 다음 주인가 교회로 줄지어 가는데, 교회 옆 언덕에 새로운 무덤 하나가 생겨 있었다.
Q _ 국가기록원의 공식자료를 보면, 형제복지원 안에서만 12년 동안 531명이 사망한 걸로 나와 있다. 그런데 폭행으로 사망한 이들의 시신들을 병원에 해부용으로 팔았다는 증언이 여럿 있다. 시신 한 구에 3백에서 5백만 원이었다는 구체적인 가격까지 언급되어 있던데, 내부에 있을 때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가
확실한 사실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죽어간 시신들이 팔려나간다는 얘기는 다 듣고 있었다.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대장 입에서 공공연하게 ‘너희들도 말 안 들으면 죽어서 시체로 팔려나간다.’ 이런 얘기가 대놓고 나왔다. 그러니 우리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유언비어라고 했지만,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지고 몇 년 후에 담당검사(김용원 전 검사)가 펴낸 책(<브레이크 없는 벤츠> 1993년 출간) 내용으로 우리가 들었던 소문이 다 사실로 밝혀지지 않았나.
Q _ 외부인사가 방문하면 만국기를 흔들었다는 대목이 있다. 이건 또 뭔가
북한의 뉴스매체 같은 걸 보면, 무슨 행사 같은 걸 할 때 전 주민들이 다 나와서 길가에서 만국기를 흔들며 해맑은 표정을 짓는 게 있지 않은가. 그것과 똑같았다. 누가 올 때만 새 옷과 새 신발을 지급하고, 돌아가고 나면 다시 다 뺏는다. 그러고 나서 잘하면 잘한 대로 맞고, 못하면 못한 대로 맞았다.
Q _ 당시 자료사진들을 보면, 전부 다 정말 앙상하게 몸이 말라 있었다. 수용된 사람들의 영양 상태는 어땠나
전부 다 영양실조였다. 조장에서 소대장 이상은 건강했지만, 나머지 일반 소대원들은 99%가 영양실조에 결핵 같은 거 그리고 피부병은 다 가지고 있었다.
Q _ 조장과 소대장 이상은 건강했다는 건 무엇이 달랐다는 의미가 되는가
그들은 여유롭게 먹을 수 있었다는 거다. 조장 이상의 직급을 갖게 된다는 건, 그런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게 가장 다른 점이다.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성적(性的)인 대목일 것이다. 성욕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있을 게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그걸 분출하지 못하지만, 그 사람들은 분출을 할 방법이 있었다. 젊은 여자소대가 있지 않은가. 소대장들끼리 같이 얘기해서, 젊은 여자애한테 작업을 하고 남들 몰래 관계를 갖는다. 아니면 같은 소대에 예쁜 아동이 있으면 그 아이를 상대로 하면서, 자기들끼리 성적 욕구를 해결하곤 했다. 그게 우리와는 엄청나게 차이가 있는 권한이었던 거다.
Q _ 그 안에서 여성들을 상대로 엄청난 성폭력이 벌어졌을 거라는 건 충분히 짐작이 되는데, 가해자들은 ‘그 권한’을 가졌다는 자들이었을 것 같다
조장이나 소대장, 중대장 모두 해당될 것이다. 거기에 선도위원들이나 경비를 서던 그런 사람들도 포함됐을 것 같다.
Q _ 민감한 질문일 텐데, 가장 참혹했던 기억이나 장면, 그런 순간이 ‘무엇이었다’고 말씀해 주실 게 있는가. 정말 스스로의 인생에서 이것만큼은 지워버리고 싶다는 게 있다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다
누나가 정신이상자가 되면서도, 제가 있던 소대로 저를 찾으러 오는 것이었다. 무단으로 소대를 이탈했기 때문에, 누나는 제가 보는 앞에서 조장들에게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았다. 그런데도 매번 저를 찾으러 왔다. 그 당시의 제 기억 속에는 ‘제발 누나가 나한테 찾아오지 마라!’ 하는 절규가 포함되어 있었다. 안 오면 제 앞에서 안 맞아도 되는데, 계속 찾아오니까 누나가 두들겨 맞는 모습을 제가 봐야 했지 않은가. 그 기억을 가장 지우고 싶다.
Q _ 남자소대와 여자소대는 철저히 차단이 되어 있었나. 평소에 누나에 대한 소식 같은 걸 접할 기회가 있었는지
아주 짧게나마 자유 시간 비슷한 게 있었다. 그러면 누나 소대에 있던 일반 소대원 누나들이 지나가면서 얘기를 해줬다. ‘네가 종선이냐? 네 누나 이제 미쳐간다.’ 이런 이야기…, 또한 ‘누나가 누구한테 당했다. 누구한테 성추행을 당했다.’ 이런 얘기를 해주곤 했다.
Q _ 그렇다면 작은 누님의 정신이 이상해진 게, 복지원에 들어간 지 얼마 정도 지난 후의 일이었나
1년 정도 됐을 때였던 것 같다.
Q _ 그렇다면 계속 한종선 씨를 만나러 왔다가 폭행당하고, 성폭력 같은 걸 당하면서 그 증세가 악화됐다는 건가
그것도 그것이지만, 이상한 약을 계속 먹였다. 정신과 약이 있었는데, 노란색 빨간색 분홍색 하얀색 등의 4가지 종류 같은 게 있었다. 일단 말을 안 들으니까 이걸 강제적으로 먹이는데, 그러면 사람이 아주 멍해진 상태가 되곤 했다.
Q _ 정신병동 안에서 먹였다는 건가
아니다. 일반 소대 내에서 먹인다. 좀 시끄럽다 하면, 그 약을 받아와서 강제적으로 먹였다. 하루 종일 멍한 상태로 사람이 변했다. 그런데도 계속 저를 찾아오고 하니까, 더 심하게 약을 먹였다. 그러다가 누나를 25소대로 옮겨가게 했다. 나이가 어린데도 관리가 안 되니까, 여자성인들이 있는 소대에서 관리를 하라며 옮기게 한 것이다. 그 소대에서 2,3개월인가 있다가, 어느 날 정신병동으로 들어가게 되어버렸다.
Q _ 지금 실내에 있는데도, 추위를 무척 많이 타시는 것 같다. 혹시 물고문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는 건지 궁금하다
물고문 안 당해 본 사람은 이 추위를 모른다. 당시 열 살 때인가? 아무리 두들겨 맞는다 해도, 한창 놀기 좋아할 나이 아닌가. 어느 한겨울 날에 잠시 빨래더미 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그걸 본 조장이 나를 세면장으로 끌고 갔다. 귀싸대기를 맞자마자 잘못했다 빌었는데, 자기 분이 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옷을 다 벗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 벗고 옆에 접어놓았는데, 갑자기 뺨을 때렸다. 자빠지고 나서 무릎을 꿇고 막 매달리며 살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제가 운다며 ‘이 새끼, 안 되겠네.’ 하며 속옷 찢은 걸로 제 손발을 묶어버렸다. 그리고 꽝꽝 얼어 있던 물을 사정없이 끼얹는데…, 이건 말 자체가 안 나왔다. 한겨울에 시멘트 바닥에 맨몸으로 누워 있었기에 정말 엄청나게 추웠는데, 춥다는 걸 그때까지는 느꼈었는데, 찬물이 쏟아지는 순간부터는 춥다는 걸 아예 느끼지도 못했다. 몸이 찢어진다. 그 정도로 온몸이 탱탱해지며 정말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10분 넘게 계속 들이부었던 것 같다. 숨을 껄떡거리며 호흡이 넘어가려 하니까, 그제야 풀어줬다.
Q _ 아니, 아무리 생지옥이라 해도, 열 살짜리 아이한테 한겨울에 얼음물로 고문을 한다는 건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그때부터는 찬물로 샤워하는 것 자체가 안 된다. 손이나 얼굴까지는 어떻게 하겠는데, 지금도 몸에 찬물이 한 방울이라도 튀면 몸서리를 친다. 엄청 질겁하게 된다. 이건 지금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Q _ 물고문 말고 다른 가혹행위를 당하거나 목격한 게 있었나
그 ‘가혹’이라는 기준이 어느 기준을 가지고 말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일단 형제복지원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은 죽을 고비를 평균 3번씩은 다 넘겼다고 보면 된다. 맞는 건 신체적인 거지만, 정신적인 충격으로 남는 건 성폭행 부분이 많을 것이다.
Q _ 그 조장들의 연령대는 어느 정도였나
제가 처음 24소대에 있을 때는 나이가 열여섯에서 열여덟 정도 됐던 것 같다. 그리고 27소대로 넘어갔을 때는 열여덟에서 스물하나 정도였다고 기억된다.
Q _ 연령대가 생각보다 많이 낮은 것 같은데
성인의 눈으로 볼 때는 낮은 것 같지만, 제가 12살까지 있었으니까 당시의 저보다는 엄청나게 많았던 거다.
Q _ 혹시 조장들은 소대장이나 중대장한테 맞는 일이 있었나
맞기는 해도 빳따 정도였다. 하지만 조장들이 그렇게 꾸중을 들었거나 두들겨 맞았다면, 그게 우리한테는 고스란히 10배가 되어 돌아왔다. 그런 날은 거의 죽는다고 봐야 했다. 사람의 직감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오늘 같은 날은 왠지 누구 하나 죽을 것 같다 하면, 실제로 누구 하나는 반(半)병신이 되거나 실제로 죽었다. 팔다리가 완전히 부러져서 질질 끌고 다니게 되는 것이다.
Q _ 그렇게 가해를 한 자들은 최소한의 죄책감 같은 것도 없다는 건가
사람을 죽여도 ‘에이, X 밟았네. 기분 X 같네.’ 하며 넘어갔던 것 같다. 아무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인근 원장이 재판 과정에서 보여줬던 바와 같이, 자기는 떳떳하게 법대로 했을 뿐이라고 하지 않았나. 죄의식 자체가 없다. 그 안에 갇혀서 우리를 다뤘던 조장들도 마찬가지다. ‘원장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이게 왜 죄가 되느냐?’는 것이다. 똑같은 거다.
Q _ 그 원장이라는 사람은 당시에도 자주 보였나
그렇다. 우리가 뭘 하든 간에, 기합을 받든 노역을 하든 뭐든 간에 원장이 저 멀리서 보인다 하면, 보이는 순간에 무조건 달려가서 거수경례를 해야 했다. 이거 안 하면 정말 죽는다. 무조건 달려가야 했다. 원장이 지나갈 때는 항상 좌우로 중대장과 경비와 선도원 같은 사람들이 호위를 하며 같이 움직였다. 그러니까 그 누구도 덤빌 수가 없는 구도였다.
Q _ 아까도 잠시 언급된 바 있지만, 당시 부산형제복지원 사건을 수사했던 울산지청 소속 김용원 검사(현 변호사)는 1993년에 출간된 자신의 저서 <브레이크 없는 벤츠>에서, 이 사건의 의미가 다른 사건들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복지원이라는 이름의 이 처절한 인간유린은 원장이 개인적으로 저지를 비리가 아니라,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대통령의 정부 아래서만 저질러질 수 있는 비리였다.’고 말이다
알고 있다. 그 검사가 처음에는 무기징역을, 그 다음에는 징역 20년을 구형하려 했는데, 윗선 고위층의 계속된 압박으로 재판과 항소가 진행될수록 형량은 말도 안 되게 줄어들지 않았는가. 징역 2년 6개월까지 줄어들더니, 급기야 마지막 대법원에서는 특수감금죄마저 무죄로 확정해 버렸다. 이렇게 극악무도한 패륜적 범죄를 솜방망이 형량으로 최종 결정한 1988년 11월의 그 대법관이 도대체 누구였나. 바로 박근혜 정부 초대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다가 자진사퇴한 김용준 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이 그 최종판결의 주인공이라는 거다.
Q _ 초대 국무총리 지명자를 낙마시킨 초유의 사태에, 한종선 씨의 역할도 포함됐다고 들은 바 있다
김용준이라는 이름이 나오기에, 트위터에 당시의 그 재판관이 지금의 이 김용준 씨가 맞느냐는 질문을 올렸다. 트위터 안에는 분야별로 전문가나 지식인들이 많지 않은가. 일일이 다 대조하는 과정을 밟더니, ‘그 김용준 대법관이 지금의 김용준 총리후보자가 맞다’는 답이 올라왔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아니었다면, 김용준이라는 이 사람은 병역비리와 재산축적 같은 걸 그냥 끌어안고 총리가 됐을 거다. 그런데 자신의 대법원 기록만큼은 스스로 덮을 수가 없었던 게 아닌가.
Q _ 사회적 약자 성공담의 가장 모범사례처럼 거명되던 인물이었는데, 실상이 밝혀진 다음의 여론은 상당히 악화됐던 바 있다
자신이 사회적 약자의 상징인 양 부각되면서 지금껏 화려하게 살아왔는데, 정작 법의 이름으로 사회적 약자의 권익을 뒷전으로 내팽개친 당사자라는 걸 부인하지 못한 게 아닌가.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철저한 기득권자였다는 게 밝혀지자, 결국 후보자의 자리를 스스로 포기해 버렸던 것 같다.
Q _ 김용준 총리후보자의 인사청문회가 진행된다면, 한종선 씨가 그 증인으로 출석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들었다. 거기서 어떤 발언을 할 생각이었나
엄중하게 묻고 싶었다. 그 당시에 판결했던 게 아직도 옳다고 생각하는지, 옳다고 발언한다면 그 사람은 법에 대한 해석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대법관을 하고 있었다는 거다. 부랑자가 아닌 국민이 잡혀갔고 철저히 격리된 채 학대를 당했는데, 그게 감금이 아니라는 게 말이 되는가. 그 사건이 터졌을 때, 그 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전부 다 사회로 내보내졌다. 불법감금이 인정됐으니까 그 사람들을 다 풀어준 것 아닌가. 그는 그것이 불법감금이 아니었다고 판결했다. 531명의 죽음이 징역 2년 6개월로 무마될 만치의 가벼움이었다는 말인가. 당시 대법관이었다는 그 사람의 대답을 듣고 싶었고, 반드시 직접 듣게 될 날이 올 거라고 믿는다.
Q _ 국회 앞에서의 1인 시위 그리고 <살아남은 아이>를 통해, 끄집어내기도 힘겨울 과거의 기억을 공론화했다는 건 정말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다
누군가는 해야 될 일 아닌가. 직접 피해자들만 3천5백 명이다. 그 중에서 단 한 명도 이 사실에 대해 말을 안 하고 침묵한다는 건 엄청나게 잘못된 일이다.
Q _ 오늘 말씀 정말 감사드린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많이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맞다. 많이 부족하다. 제가 그 안에서 겪었던 게 3년 6개월이었고, 지금까지 묻혀 있었던 게 26년이었다. 그걸 이 짧은 시간 안에 다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 아닌가.
Q _ 마지막으로 독자 여러분께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전해 달라
독자 여러분뿐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께 간절히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다. 이런 사건을 알게 됨으로 인해서 ‘쯧쯧쯧’ 하며 동정하기보다는, 이 무겁고 엄중한 사건의 진상을 더 자세히 알고 더 널리 알려달라는 것이다. 진실을 알아야 한다. 모르는 채 지내고 계속 눈을 감아주다 보니까, 이런 범죄들이 계속해서 터지는 게 아닌가. 그럴수록 더 꼼꼼하게 진실을 읽고 이해하며, 이 만행이 아직까지도 피해자들한테는 현재진행형임을 함께 공유해 주셔야 한다. 가해자는 여전히 지역의 왕으로 지내고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26년 전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천인공노할 사건인 것이다.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