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게 ‘행복’입니다 > 함께 사는 세상


누군가의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게 ‘행복’입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방송인 윤선아

본문

‘엄지공주’라는 별칭으로 기억되던 그를 다시 만났다. ‘본인 스스로에게 장애는 어떤 의미라고 생각되는가?’라고 물으니까 장애의 의미가 뭐냐고, 벗어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벗어나고 싶다며 당당하게 강변하던 그 모습이 오히려 더 크게 떠오르며, 아주 또렷한 그의 새로운 인상으로 남겨지게 된다.

‘공주’라고 칭하던 용어의 이미지가 그동안 그를 바라보던 인식과 선입관을 너무 크게 규정지었던 탓일까? 직접 마주대하고 나니 얻게 되는 건 ‘당당함’・‘확고함’・‘자신감’처럼, 의지로 가득 채워진 그의 모습이었다. 기존 언론에 비춰진 자신의 삶이 개별 언론의 자의적 해석에 따라 너무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점까지 꼼꼼하게 지적하는 그와 마주앉아 마음의 산책을 함께했다. 방송인 윤선아 씨가 이번 호 주인공이다.

      소중한 아이, 그리고 엄마의 마음

웃는 얼굴이 참 맑다. 나름 심각한 얘기를 하다가도, ‘호호호’ 웃으며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호호호’보다는 ‘하하하’가 낫겠다. 웃음으로 무마시키는 경우는 많지만, 웃음으로 반전시킬 줄 안다는 건 분명한 장점이자 나름의 능력일 것이다. 최근의 인생 얘기 중심으로 대화를 나누겠다 했더니, 알겠다며 곧장 ‘하하하!’가 이어진다. 그런데 집에 간 다음에 얘기를 다 못한 게 떠오르면 따로 연락을 드리겠단다. 다음 날 오전에 정말 연락이 왔다. 그때도 대화의 시작은 ‘하하하’였다.

“저의 아이요? 7살 된 아들인데 아주 ‘시크’한 남자, 시크한 캐릭터예요.”

까칠하고 퉁명스러움을 뜻하는 요즘 용어로 그는 아이 소개를 대신했다.

“어렵게 낳은 제 아이니까 물론 당연히 다 예쁘죠. 오히려 제 몸 상태 때문에 아이한테 못해주는 부분이 많아서 안쓰러운 마음, 애틋한 마음이 많아요. 그 미안함이 많다는 게 제겐 큰 문제가 되죠. 대부분의 엄마들은 아기가 울면 일단 안아서 밀착시키며 토닥토닥 달래주는데, 저는 체력이 안 되다 보니까 아기를 안아서 재울 수가 없었거든요. 아기 마음을 편안하게 안심시켜 주는 게 어려웠을 때가 가장 마음이 아팠죠. 아기가 위험한 곳에 갔을 때 다른 엄마들은 건강하니까 성큼성큼 달려가서 아기를 번쩍 들어 안을 수 있는데, 저는 그게 안 되잖아요. 늘 불안해야 했던 그게 힘들었어요.”

선아 씨가 태어날 때, 이미 그의 가족은 그가 가진 증상을 대략이나마 알게 됐단다. 태어난 아기를 살펴보던 의사선생님이 아기 다리가 휜 것 같다고, 좀 지켜보자고 하셔서 선천적인 장애가 있음을 받아들여야 했고, 자라면서 일일이 세기도 힘들 만큼의 골절을 반복해야 했단다. 그의 장애증상은 골형성부전증. 청소년기 이후로 완화가 됐다가 나이가 들면서 증상이 다시 심해진다고 하기에, 그럼 가장 최근에 골절을 당한 게 언제였냐고 물었다. 2년 전에 어깨 부위 견갑골을 다쳤었단다. 왜? 휠체어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낙하실험을 했죠, 뭐. 하하하!”

      간절한 꿈은 어느 날 갑자기

지금 하는 방송은 MBC의 ‘함께 사는 세상’이란 프로그램이고, 그 안에서 ‘여행의 발견’이란 꼭지를 담당하고 있단다. 그 프로의 내레이션(방송 내용 설명)을 맡으면서, 여행 작가와 같이 여행을 다니며 여러 여행지를 소개하는 코너라 한다. 맛집도 가고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면 따로 소개도 하면서, 그 지역에서 열심히 멋지게 살고 계신 분들과 잠깐의 인터뷰도 진행하는, 한마디로 말해서 세상과의 소통을 나누는 여행을 그가 담당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선아 씨가 ‘방송’이라는 대상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며 지낸 건 언제부터였을까?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다고 한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앵커라든지 리포터에 대해서 ‘야, 저 언니 너무 예쁘다!’ 하는 그런 마음이 늘 있었어요. 그런데 장애라는 벽 때문에…, 모든 조건이 다 ‘신체 건강한’ 남녀인 거예요. 앵커도 그렇고 리포터도 그렇고, 애초 처음부터 벽이 있었고 차단이 됐었던 거죠.”

맞다. 실제로 그랬다. 아예 정해진 조건들이 당시에는 아주 당연한 듯 내세우던 기본 틀이었다. 남녀 각각 키는 몇 cm 이상, 나이는 몇 살 이하, 대졸(전문대졸) 이상의 학력 등,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참으로 갑갑한 잣대의 세상이었던 거다. 물론 요즘은 더 갑갑한 일들로 가득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런 마음, 혼자만의 끼를 대신 해소시킬 곳이 바로 인터넷방송이었어요. 인터넷방송은 무보수이고 공중파처럼 많이 듣지도 않는데도, 그냥 누군가 방송 관계자가 제 방송을 들어서 마음을 좀 움직였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으로 방송을 그때부터 시작했죠. 그렇게 대리만족을 느끼며 지냈던 거예요.”

2000년부터 시작했다는 인터넷방송은 나름의 호응을 얻으며 진행됐던 모양이다. 그런데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난데없이, 하루아침에 온 세상이 뒤바뀌는 순간이 찾아들었단다.

“제게 장애가 있으니까, ‘장애인’이라는 단어나 뉴스만 나와도 자동으로 클릭을 하곤 했거든요. 그런데 ‘KBS 장애인방송인선발대회’ 뭐, 이런 글자가 눈에 확 띄는 거예요. ‘어머, 이게 뭐야?’ 그때 그 뉴스를 보면서, 저는 마치 저 하나를 위한 그런 대회가 열리는 것 같았어요.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방송인 선발이라는, 그런 역사가 아예 없었잖아요. KBS라디오에서 그런 대회를 처음 개최한다고 해서 나갔다가, 정말 운이 좋게 대상을 받게 됐죠. 그런데 봄 개편 때 ‘네 이름을 건 라디오 프로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어요. 아…, 정말 간절한 꿈만 갖고 있었는데, 꿈은 그냥 꿈이었고 모든 걸 차단당하고 있었는데, 이 세상에 없던 대회가 갑자기 제 눈앞에 나타났고, 공중파방송에 제 이름을 건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됐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죠. 정말 모든 게 거짓말처럼 현실로 이루어졌고, 그때부터 제 이름을 앞에 내세운 라디오방송을 진행하게 된 거예요.”

용기와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선아 씨 목소리는 청아하다. ‘청아’라는 표현이 딱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듣는 이로 하여금 참 맑고 투명하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자신의 목소리가 좋다고 생각한 건 언제부터였냐고 물으니, 그런 생각을 떠올린 적은 없고 특별히 따로 훈련을 받은 적도 없단다. 다만 방송에 대한 갈망을 끝까지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인터넷방송을 하면서 자기 목소리를 모니터링(확인)하는 과정에 조금씩 다듬어진 게 아닐까 싶단다.

그럼 그동안 방송을 진행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청취자나 시청자가 있었을까? 있었단다. 지금이야 홈페이지나 스마트폰으로 양방향 소통이 실시간으로 이뤄지지만, 십여 년 전만 해도 ‘신청엽서’라는 문화가 존재하고 있었다. 예쁜 편지지에 사연을 적어주시는 분들도 계셨고 아주 멋지게 코팅까지 해서 보내주시는 분들도 많았는데, 어느 ‘한 분’의 편지는 지금도 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중증장애를 가졌다는 분이셨어요. 편지지가 아니라 전단지, 그러니까 신문 같은 데 끼워져 오는 ‘OO마트’ ‘OO전자’ 광고용지 같은 그런 전단지의 뒷면에, 그 빈 공간에 사연을 적어주셨죠. 편지지를 사러 나갈 여건도 안 돼서 좋은 편지지를 못 샀다고 하시면서 본인의 사연을 적어주셨는데, 정말 그 어떤 편지지나 예쁜 글씨의 사연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진한 진실감과 진정성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그 분 사연을 더 공감이 갈 멘트와 함께 전해드릴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었죠.”

그럼 방송인 이전의 ‘어린 시절 윤선아’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세상을 꿈꾸던 아이였을까? 고등학교 때까지는 부모님 등에 늘 업혀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였단다. 학교와 집, 학교와 집, 그게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의 전부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에는 뭔지 모를 꿈이 계속 꿈틀거리고 있었어요. 저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항상 제 가슴에 내재되어 있었어요. 부모님은 제가 몸이 불편하니까 그냥 엄마아빠와 행복하게, 엄마아빠 속에서 돌봄을 받기를 바라셨는데, 제겐 ‘나 혼자서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용기 같은 게 있었고, 실제 누군가에게 그런 용기와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예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온 선아 씨의 직장은 은행이었단다. 창구에서 늘 마주치는 그 얼굴들 속에 선아 씨의 얼굴도 자리 잡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은행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웃는 얼굴은 셔터가 내려갈 때까지만’이라는 농담반 진담반의 얘기도 있지만, 실제 셔터가 내려간 다음이 가장 힘들단다. 하루의 모든 일을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너무 힘들었는데도 방송을 새벽 2시까지 했던 거예요. 은행에 근무할 때도 인터넷방송을 계속 했던 거죠. 내일 출근해야 하고 오늘 하루 너무 힘들었는데도, 그 안에서 들어주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생겨났고, 팬 카페 회원이 5천 명 넘게 늘어나면서 제 방송을 기다려 주니까, 몸은 힘든데도 마음이 너무 즐겁고 행복했던 거예요.”

      ‘장애인 방송인’이 아니라, 그냥 ‘방송인’입니다

“그러면서 생각한 게 ‘아, 내가, 엄마아빠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할 수 없는 존재인 줄 알았던 내가, 나도 누군가의 존재가 될 수 있구나!’ 하는, 그때 처음 그 경험을 쌓았던 거죠. 그래서 저는 지금도 어디에 있는가 하는 장소의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확실한 동기를 가진 마음자세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아무런 보수도 받지 못하는 인터넷방송이었지만, 열심히 하다 보니까 그게 세상을 향해 나갈 확실한 준비가 됐던 거잖아요. 그랬더니 기회가 왔던 거고, 저는 그 기회를 제 것으로 잡은 거예요. 만약에 제가 인터넷방송도 하지 않고 그냥 ‘나 되고 싶어. 아, 나 앵커 되고 싶어. 나 리포터 되고 싶어.’ 하며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면 절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겠죠. 기회를 잡으려면 스스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요. 기회는 언제 올지 모르지만, 예상도 못했던 시간에 갑자기 온다는 건 분명해요. 꿈을 간직한다는 게 힘든 일이기도 하지만,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간다는 마음으로 꾸준히 기다리면 언젠가는 반드시 기회가 다가올 겁니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다가올 거예요.”

이제 내년이면 초등학생이 되는 아들로 인해 ‘학부모’의 입장으로 바뀔 텐데, 아이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엄마로서 바라는지 물었다. 명문대니 뭐니 하는 것보다는 어떤 일을 하건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 행복한 일을 하는 행복한 사람이 되면 좋겠단다. 선아 씨는 ‘행복한 일’이 뭘까 생각해 본 적이 많았단다. 답은 이렇게 내려졌다고 한다. 힘든 일이 왔을 때 그걸 현명하게 이겨낼 수 있는 면역력이 있는 사람! – 자신의 아이가 그렇게 성장하면 정말 좋겠단다.

“저는 방송인 선발대회를 통해서 정식으로 방송 일을 하고 있잖아요. 몸에 장애는 있지만 나름 방송인에 대한 자부심도 갖고 싶은데, 사실 언론매체나 이런 데서 관심을 갖는 건 ‘방송인 윤선아’가 아니라 저의 장애, 천사 같은 남편, 장애여성이 어렵게 낳은 아이, 그런 쪽에만 일방적인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저는 똑같은 일반 방송인으로서 일을 하고 있는데, 장애를 먼저 강조하는 꼭지로만 사용되고 있는 것 같아 너무 안타깝거든요. 우리나라가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장애를 가진 방송인이 할 수 있는 방송이 너무나 한정적이고 여전히 너무 높은 편견과 벽을 마주해야 해요. 똑같은 사람으로 바라보면 다 똑같아지는데, 저도 남들과 똑같은 호기심과 즐거움을 추구하는데도, 방송에선 장애 때문에 뭔가 말 한마디라도 잘못해서 큰 사고가 날까 봐 조심하는 그런 분위기가 아직도 많거든요. 그런 편견이 정말 어서 빨리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미국의 드라마를 보면 장애인이 주인공 친구로 자연스럽게 출연하며 나오잖아요. 그런 것들이 너무 보기 좋거든요. 우리도 말로만 하는 평등이 아니라, 동등한 인격으로 서로를 바라봐 주는 인식이 하루빨리 자리를 잡게 되길 기대합니다.”

작성자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han0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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