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난사람] 기타리스트 이병우 > 함께 사는 세상


[만난사람] 기타리스트 이병우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 ‘평창 스페셜올림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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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영화 배경음악(OST)이 아닐까. 음악이 영화를 완성하는지, 영화가 음악을 만드는지 정의 내리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영화의 스토리로 음악이 살아나고, 음악으로 영화의 감정과 장면들이 생생하게 살아난다는 것이다. 지난해 흥행한 영화 <관상>의 화제가 됐던 수양대군의 등장 장면. 이 장면을 음악을 빼고 위풍당당하게 걸어오는 수양대군의 모습으로 상상해보자. 아마도 그 위엄과 웅장함은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을 것 같다. 이처럼 영화 흥행에 한몫하는 것이 바로 영화음악이다.
이번 4월호 만난사람은 영화 <관상>을 비롯해 국내 흥행작 수십 편의 영화음악을 제작해 흥행몰이에 일조한 영화음악의 거장, 기타리스트 ‘이병우’ 씨다. 이병우 씨는 영화음악 감독 외에도 평창 스페셜올림픽 예술감독으로 올림픽 무대와 부대행사 등을 기획 지휘했고, 성신여대 현대실용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또한, 기타 디자이너로서 기타 바(Guitar Bar)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기타를 개발해 몸이 불편하지 않고, 많은 사람이 기타를 접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여러 직함을 가진 그이지만, 무엇보다 ‘기타리스트’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어울릴 만큼, 기타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인터뷰 내내 느껴졌다.

 

   
 

Q_ ‘영화음악의 거장’, ‘천재 기타리스트’ 등 다양한 호칭이 선생님의 이름 앞에 붙곤 합니다
그건 다른 사람들의 얘기고요, 제가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나 의아할 뿐이에요. 천재는 쉽게 하는 사람을 천재라고 하는데, 저는 그렇지 않아요. 곡을 많이 쓰지만, 곡을 써야 하는 기한이 있어서 해내는 거고…. 그냥 재밌어서 하고, 때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서 하는 거죠. 저 스스로 타고난 재능을 찾아본다면, 그저 제가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과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는 거예요. 기타 만드는 것, 카메라도 좋아하고, 뭔가 사물을 보고 다시 만들어보는 것을 좋아해요.

Q_ ‘어떤 날’ 1집이 1986년에 나왔는데요, 그 당시면 20대 초반이셨을 텐데 일찍 음반을 내셨습니다. 이미 학창시절부터 준비된 곡들이었나요
그렇죠. 곡 같지도 않은 것을 끄적거린 것은 중학교 때고, 그때부터 많이 만들었어요. 사실 초등학교 때도 많이 만들었는데, 기타 치며 친구한테 들려주니까 그 당시 유행가들과 비슷하다고 하더라고요.(웃음)

Q_ 그럼 언제부터, 어떻게 기타를 만나게 됐는지, 그 첫 느낌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11살 때. 형 누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 형 누나가 치던 기타가 집에 있었고, 집에 혼자 있을 때 기타를 만지곤 했어요. 그 모습을 보신 어머니가 기타를 치는 게 그렇게 좋으면 학원을 가보라고 했어요. 한두 달 다녔나…. 다니면서도 잘 빠지고 충실하지 못했지만 그때부터 하게 된 거죠.
중학교 2학년 때 기타가 매우 좋았고 기타리스트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기타를 많이 쳤고, 록 밴드들의 곡을 많이 들었을 때인데, 기타 치는 사람이 멋있게 보이고 자유로워 보이고, 반항적으로 보이는 게 멋있었고 동경했었죠.

Q_ 어릴 적부터 기타를 좋아하시고 창작활동을 많이 해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혼자 있는 시간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어릴 적 모습은 어땠는지 궁금하네요
그렇지는 않았고요, 혼자서 음악이나 창작활동에 깊이 빠진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무릎 관절 수술을 했을 때에요.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는데, 수술이 잘못돼서 학교를 1년 쉬게 됐죠. 1년을 집에서 쉬니까 좋아하는 음악도 많이 듣고 기타도 치면서 보냈어요. 그때가 어리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음악과 창작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거죠.

 

   
 

 

Q_ 그렇다면 그때부터 장애를 갖게 되신 건가요? 의료사고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렇죠. 의료사고죠. 굉장히 유명한 의사였고, 큰 대학병원을 갔었어요. 그런데 그 의사가 개인병원에 데려가서 수술을 해주더라고요. 나중에 그 의사는 잘렸다고 하네요. 제 사고 때문이 아니라 원래 비리가 많았던 모양이에요. (내가) 운이 나빴던 케이스죠.

 

Q_ 원망도 많이 했을 것 같아요
원망이라기보다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죠. 그때가 19 80년대 우리나라가 잘 살지 못했던 시기인데, 그 당시 친구들이 옆에서 죽은 사람도 많고, 더한 사람도 많다고 위로했어요. 그 의사는 수술을 해야지 돈을 버나보다 생각했죠. 그 사람 입장에서는 항상 성공적인 수술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사람이니까….

Q_ 장애를 갖게 되면서부터 장애에 대한, 장애인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을 것 같아요
다른 것보다도 저는 장애는 누구나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인간을 반으로 딱 쪼개서 그 안을 들여다보면 너무나 복잡한데 안 아프다는 게 오히려 기적인 것 같아요. 제일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이 아파하는 사람들, 장애가 있는 사람 중에서도 통증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인 것 같아요. 장애가 있어도 통증이 없으면 그나마 좀 괜찮을 것 같은데….
제 생각에 우리나라가 잘 산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배려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거죠. 아직 답답한 면들이 많아요. 다른 인식보다는 장애인에 대해 배려를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아직 없다는 얘기예요. 나 살기도 힘든데 어떻게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의 필요까지 채워주느냐는 거죠. 그런데 결국에 우리는 다 서로 도와서 사는 거지,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은 없잖아요. 경제적으로 잘 사는 나라에 가보면 숨은 배려들이 굉장히 우리에 비해서 잘 되어 있어요. 아마 우리나라도 이런 부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할수록 점점 좋아질 거라고 생각됩니다. 

Q_ 어렵고 부담되는 질문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장애인의 인권 신장을 위해 사회지도층이나 선생님 같은 유명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그런 것에 대해서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예를 들어, 장애를 가지고 있는 학생들을 위해 특별전형으로 우리 학과의 입학 기회를 열어줄 수 있을 것 같고요, 또 악기를 하니까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악기로 다가가면 행복해 할 것 같아요. 연주가들한테는 직업병 같은 게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보통 악기를 다루면서 사람들이 장애를 갖게 되기도 해요. 그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저는 기타 바(Guitar Bar) 같이 몸에 무리를 주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악기를 만들기도 하죠.
그리고 현재 한국근육병재단에 이사로 있고, 오랫동안 기금행사 때마다 연주도 하고 봉사활동을 하고 있어요. 그분들이 잘 움직이지 못하고 손만 움직이고 있으니까 그 상태로 어떻게 하면 악기를 다룰 수 있을지, 그분들을 위해 어떤 모양으로 악기를 만들어야 하는 지 등을 연구하고 있고요. 또 스페셜올림픽 지적장애인 관련해서 평창에서 하는 음악페스티벌에서 음악감독을 맡고 있으면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어요. 이 외에도 비장애인들을 위해서도 어떻게 하면 기타를 쉽게 치도록 도울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연구하고 있죠.

 

   
 

 

Q_ 전 세계 지적장애인들의 스포츠 축제인 ‘2013 평창 동계 스페셜올림픽 세계대회’ 개・폐막식의 예술감독으로 활약하셨는데, 어떤 계기로 하게 되신 건지요. 평소 지적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지난 2013 평창스페셜올림픽은 아주 아름다웠어요. 참가 선수들과 가족들이 다 같이 오는 것이 참 좋았어요. 그리고 어떤 선수들이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데 너무 느리게 내려오는 거예요. 그 느린 모습에 가족들이 다 응원하더라고요. 그리고 또 어떤 선수는 너무 어렵게 얼음 위에서 한 바퀴를 돌기도 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진한 감동을 줬어요. 그 사람에게는 난이도가 높은 거잖아요. 각자의 난이도의 문제지 절대적이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속도를 내서 경쟁하는 보통의 경기에서도 우리가 많은 감동을 받지만, 스페셜올림픽은 또 다른 감동이었던 거죠.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스페셜올림픽 개폐막식을 준비하고, 개막식 때 돔에 처음 불이 들어왔을 때, 열악한 상황에서도 준비했던 그런 것들에 많은 사람이 감동했을 때였어요.

 

Q_ 기존의 경기나 올림픽이 아닌, 한 편의 영화처럼 만들고 싶었던 건가요
저는 스페셜올림픽에서 코미디같이 모두 웃게 만들고 싶었어요. 입장할 때 기존 틀에 맞춰진 팡파르를 쓰는데, 저는 올림픽 음악을 전부 제가 만든 영화음악으로 했어요. 그래서 올림픽 구성이 다 영화 같았고 낭만적이었죠.(웃음) 저희 주제가도 굉장히 발라드 같잖아요. 욕먹을 각오하고 전체적인 컨셉을 다 바꾼 거죠. 역대 다른 스페셜올림픽과는 다르게 하고 싶었어요.
방송 편성에서 잘려서 잘 전달이 안 됐지만, 무용이나 스토리도 재밌는 게 많았어요. 예를 들어, 한 도둑놈이 불을 훔쳐 갔다가 나중에 그 불을 되찾아서 성화 봉성을 한다는 스토리로 무용을 만들었어요. 또 감을 따다가 개한테 쫓기는 영상도 있었는데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그 영상을 너무 좋아해서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죠. 사실 뭔가를 만들었는데 그것에 다 좋게 반응한다는 게 쉽지 않거든요. 청와대에서도 따로 가져가서 상영해달라고 했어요. 그때 너무 행복했죠. 제작비가 적었지만 다른 스페셜올림픽보다도 더 좋은 평가를 받았고, 슈라이버 국제스페셜올림픽위원회(SOI) 위원장도 전체적인 내용이 다른 때랑 많이 달랐다고 극찬하기도 했어요.

Q_ 최근 불거진 염전노예 사건, 시설에서의 인권침해 등 우리 사회가 장애인들의 삶의 수준이나 인권의 수준이 여전히 인간다운 삶에 미치지 못하고 있고,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만연합니다. 장애인의 인권에 대해 고민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너무 마음 아픈 일이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아직 그런 때가 아니라서 그런 것 같아요. 전체적으로 이런 문제들이 나타나면서 수정이 돼야 하는 기간이겠죠.…
저는 사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나서 상당히 즐거워요. 너무나 많은 격변의 일들이 일어나니까…. 저 어릴 때만 해도 가난했던 때였고, 이제 경제적으로도 부강한 나라가 됐는데, 바로 몇십 년 전만 해도 힘들었던 때를 겪어서인지 배려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배려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노력해야 하겠죠.

Q_ ‘해운대’, ‘마더’, ‘괴물’, ‘왕의 남자’ 등 20편이 넘는 국내의 수많은 흥행 영화들의 OST를 만드셨습니다
그렇죠. 처음 작업한 영화음악이 임순례 감독의 ‘세 친구’와 임종재 감독의 ‘그들만의 세상’이라는 작품이었어요. 지금 작업하고 있는 작품은 ‘국제시장’이라고 영화 ‘해운대’를 만든 윤제균 감독의 작품으로 겨울에 나올 것 같은데, 또 한 번 많은 분이 좋아할 만한 영화가 탄생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영화음악 작업은 영상에 음악이 들어가고, 영화 전체를 음악으로 정의해주니까, 요즘처럼 비주얼이 강한 시대에 매력적인 작업인 것 같아요.

Q_ 몸통이 없는 ‘기타 바’ 같은 여러 특수한 기타를 개발하셨고, ‘기타 디자이너’라고 불리시는데 어떤 기타들을 개발하셨는지 소개해주세요
직접 만든 것은 아니고 주로 디자인을 했어요. 데모가 될 수 있는 것만 제가 만들어보고 세밀한 것은 전문가에게 맡겼죠. 집에 작업하는 공간도 따로 있어요.
기타 앞뒤로 클래식, 통기타를 붙여서 만들기도 했는데 알고보니 벌써 2003년에 독일에서 어떤 사람이 만들었더라고요. 그것 말고도 집에 가면 웃긴 게 많아요. 개발해서 쓰는 거.(웃음) 뭐가 몸에 제일 편한가 생각해 보면서 기타를 여러 모양으로 만들어 봐요. 보조기구도 정말 좋아하고, 몸에 최적화된 악기로 연주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개발하고 있어요.

Q_ 지난해 제3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시상식에서 영화 ‘관상’으로 음악상을 받으셨을 때 “죽어도 한이 없다”라는 말을 남기셨는데, 그만큼 애착이 간 작품이었나요
거기서 평을 써주셨는데 너무 대단하게 써주셔서 이런 얘기를 들어서 죽어도 한이 없다고 얘기를 한 거예요. 최대한의 평을 해줬거든요.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고요.
<관상>이라는 영화에 애착이 많이 가죠. 거기에는 음악이 굉장히 많이 들어갔어요. 이렇게 많이 넣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 감독이 전체적인 그림을 가지고 있어서 많이 만들게 됐죠. 그런데 다행히 흥행이 잘 돼서 매우 기뻐요. 상업영화는 흥행이 되는 게 최고거든요. 많은 분들이 작품성을 생각하지만, 그건 예술영화 쪽에서 얘기하는 거고, 상업영화는 흥행이 돼야 하는 것이니까요.

 

   
 

Q_ 클래식, 대중적인 음악을 동시에 만드실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보면 ‘기타’라는 악기가 다양한 장르에 어울리는 장점을 가졌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 있죠. 좋은 말씀이시네요. 기타가 두 가지 분야를 넘나들 수 있는 악기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제가 하고 싶은 게 클래식과 팝의 경계를 허무는 거예요. 단지 우리가 분리된 채로 교육 받아왔던 것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음악을 배워야 한다고 하면 클래식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을 하지만, 현재 팝 하는 사람들이 음악적으로 많이 탄탄하니까 앞으로는 이 경계가 없어질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쉽게 기타를 칠 수 있는 방법과 클래식과 팝이 서로 넘나들 수 있는 것에 관심이 있어요.

Q_ 대중들이 기타를 많이 좋아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네요 
왜냐면 기타는 정말 끝내주는 악기에요. 사람들이 카메라를 좋아하는 이유가 추억을 많이 만드니까. 기타도 비슷한 것 같아요. 그리고 요즘 카메라 좋아서 아무나 프로 비슷하게 나오잖아요. 그렇듯이 기타도 아마추어가 막 쳐도 멋있잖아요. 그런 매력들이 있어요.

Q_ 앞으로 음악 외에 해보고 싶은 일이나 계획이 있으신가요
4월 2일 대전에서 공연하고, 몇 가지 프로젝트를 계획 중에 있는데 아직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항상 가을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해왔는데, 올해는 어디서 할지 모르겠네요. 
작년에 법원 주최로 소외계층을 위한 공연을 했는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소외계층을 위해 공연하고 싶어요. 그런데 그런 기회를 갖기가 쉽지 않은 게, 영화음악을 작업하게 되면 영화음악이 스케줄이 왔다 갔다 하는 작업이라 공연이랑 겹치면 상당히 힘들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기타를 쉽게 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싶고, 클래식과 팝의 통합교육을 해보고 싶어요. 클랙식이나 팝이 쓰는 음악적 언어가 굉장히 비슷한데 지금은 교육이 나누어져 있죠. 클래식과 팝이 통합된 새로운 교육 포맷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작성자글 이애리 기자 |사진 이용태  dung7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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