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보편적 디자인, 공생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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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에는 시·분침 시계, 말하는 전자시계 등 시각장애인들이 착용하고 다닐 수 있는 특화된 손목시계들이 판매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계들의 기능은 환경과 시각장애인의 장애 정도에 따라 제약이 따르고 잘못 만졌다가는 쉽게 망가지기도 한다. 또 시각장애인을 위해 개발되어 비장애인은 착용하지 않는 ‘장애인용 제품’이라는 한계와 아쉬움이 있다. 그런데 지난해 시각장애인뿐 아니라 비장애인도 패션시계로 착용할 수 있는 시계가 등장해 화제다. 바로 보편적 디자인(Universal Design)으로 고안된 ‘브래들리(Bradley) 시계’가 그것. 이 시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 중 시각을 잃은 뒤 장애인 수영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브래들리 스나이더’라는 미국인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으로, 개발자는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 ‘김형수’ 씨다. 올해 36세인 김형수 씨는 미국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대학원에서 MBA를 공부했으며, 현재 브래들리 시계를 제작, 판매하고 있는 이원(EONE)의 대표를 맡고 있다. 시각장애인 친구로부터 시계 제작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는 김형수 대표. 심리학 전공자인 그가 특별한 시계를 개발하기까지,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좋은 디자인은 일부가 아닌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모두를 담는다”
Q_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착용할 수 있는, 보편적 디자인으로 고안된 시계를 발명하다. 대학에서 만난 시각장애인 친구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하는데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은 2년 반 전인 2011년 9월로, 그 당시 저는 학생이었다. 심리학과 경영학을 전공했는데 우연하게 전혀 맞지 않는 분야의 길로 나서게 됐다. 학우 중 시각장애인이 있었는데, 그 친구와 같은 자리에 앉거나 같은 그룹이 된 적이 많았다. 근데 그 친구가 수업 시간마다 콕콕 찌르며 시간을 물어보곤 했었다. 심지어 시계를 차고 있었는데도 계속 물어봐 왔고, 그때 ‘시각장애인은 시간을 어떻게 알까’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우리 주위에서 보는 시계는 봐야지만 알 수 있는 시계들이지 않는가. 그것을 계기로 시각장애인들이 사용하는 시계가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기 시작했고, 시각장애인을 위해 개발된 시계들이 불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후 새로운 시계를 만들어 보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이다.
Q_ 시각장애인 친구를 만나기 전에도 보편적 디자인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건가
특별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또 사업을 해보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처음 시작한 의도도 시각장애인을 도와줘야겠다는 것보다 ‘이런 제품이 없나’하는 놀라운 생각, 만들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우선 들었고 바로 실행에 옮긴 것이다.
Q_ 디자인이나 공과계열을 전공하지 않아서 제품을 개발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디자인을 접해본 것도 아니고, 공대생도 아닌 제가 하려고 했던 게 기존에 없는 완전히 새로운 제품이었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필요한 역량이 디자인과 엔지니어링 두 가지인데, 저는 둘 다 배경지식도 없었기 때문에 직접 100명이 넘는 시각장애인들을 만났다. 그 당시는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의견을 듣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시각장애인 단체를 찾아갔고, 나중에는 소문을 듣고 직접 연락해온 시각장애인분들도 있었다. 먼저 찾아와서 사용자 테스트를 해보고 싶은데 괜찮겠냐고 물었고, 직접 방문해서 테스트를 해보기도 했다. 그때는 그 방법이 아주 오래 걸렸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했기 때문에 시각장애인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것, 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한 분 한 분 찾아뵙고 소비자 테스트를 하고 의견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제가 만약 디자인도 뛰어나게 하고 공대쪽 공부를 했다면 머리로만 생각했을 것 같고, 지금까지 나온 것처럼 시각장애인용 제품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시각장애인들이 많은 아이디어와 영감을 주셔서 그분들께 참 감사하다.
Q_ 어떤 것을 중점적으로 생각하고 제품을 고안한 건지
시각장애인들이 쓰는 제품은 특별하고 달라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저에게도 있었고, 처음부터 비장애인과 시각장애인 모두를 포함하는 제품을 만들려는 생각은 못했다. 그래서 애당초 시각장애인만을 위한 디자인으로 개발하려고 했고, 점자시계를 만들려고 했었다.
그런데 시계를 만들기 위해 막상 시각장애인들과 인터뷰를 해보니 그 발상을 굉장히 싫어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놀랄 만한 일이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시각장애인분들이 디자인과 색상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 같던 요소들이 가장 신경 쓰는 요소라는 것을 알고 무척 놀랐다.
시각장애인들이 멋을 부릴 욕구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남들과 똑같은 물건을 쓰고 싶어 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고 너무나 당연하다. 그분들의 욕구는 시각장애인용도 필요하지만 누구나 쓸 수 있는 물건을 함께 쓰는 것이다. 또 그런 제품들이 보편화되길 바라는 게 그분들의 요구사항이다.
Q_ 막연한 상상력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 실제 시각장애인들의 필요를 듣고 적용했다는 점이 매우 고무적이다. 그런데 모두를 위한 시계인 만큼 비장애인들의 의견도 중요했을 것 같다
개발 초기 당시 점자시계를 만들려고 했지만, 비장애인도 초청해서 브레인스토밍을 했었다. 그 와중에 시각장애인들에게서 영감을 얻었는데 시각을 만질 수 있는 시계가 있다면 독특하면서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비장애인들도 중요한 모임이 있거나, 저녁 식사 때 시계를 쳐다보면 실례가 될 때가 많다. 그럴 때 시간을 만져서 알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Q_ 기존의 장애인을 위한 시계와 브래들리 시계가 작동원리나 디자인, 실용성 면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점이 있나
시각장애인용 시계가 현재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버튼워치라고 해서 버튼을 누르면 소리가 나는 시계다. 그런데 그 시계는 다른 사람들이 주위에 있으면 쓰기가 불편하다. 수업 시간, 미팅, 저녁 같이 먹을 때는 쓸 수가 없고 혼자 있을 때만 쓸 수 있는 시계이기 때문에 굉장히 불편함이 크다. 두 번째는 바늘시계인데, 유리 뚜껑을 열 수 있게 개조를 해 놓은 시계다. 뚜껑을 열고 분침과 시침을 만져서 시간을 알게끔 되어 있어 고장이 나거나 시침, 분침이 부러지는 경우가 많고, 만졌을 때 침이 돌아가는 단점이 있다. 무엇보다 시각장애인분들 중에서도 촉감이 좋지 않은 분들이 많고, 중도장애를 갖게 된 분들은 기존의 촉감시계는 알기가 어렵다. 반면, 브래들리 시계는 소리가 안 나고 만져서 쉽게 알 수 있고, 구슬 두 개가 시침과 분침처럼 돌아가는데 구슬이 자석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구슬을 만졌을 때 구슬이 움직이더라도 시간이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무엇보다 기존 시계는 특수용품을 파는 매장에 가야만 살 수 있는 것이었고, 브래들리는 패션시계이기 때문에 장애인용이라는 꼬리표가 붙지 않아서 모두가 사용할 수 있다.
Q_ 브래들리 시계를 영문으로 표기할 때, ‘Watch’가 아닌 ‘Timepiece’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Watch’라는 단어가 ‘보다’라는 뜻이라서 손목시계를 지칭하는 단어가 된 것 같다. 그러나 브래들리 시계는 보는 것으로 시간을 알 수 있는 틀을 깬 것이기 때문에 가치에 중점을 둔 ‘타임피스’라는 단어를 쓰기로 했다.
Q_ 현재 미국과 그 밖의 나라들, 특히 최근 한국에서도 판매되고 있는데 브래들리 시계에 대한 반응이 어떤지 궁금하다.
반응은 일단 굉장히 좋고, 굉장히 만족스럽다. 한국 같은 경우는 2월말에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품절이 돼서 예비 주문을 받고 있다.(웃음)
단지 아쉬운 것이 가격이 너무 비싼 것 같다. 처음에 목표로 했던 가격은 10만 원 초반이었는데 펀딩을 못 받았고 자금이 워낙 안 좋아서 생산을 하는 물량이 최소 물량만 찍어내고 있는 상태라 단가가 높게 책정이 되고 있고, 판매가가 비싼 편이다. 그래서 만족스럽지 못하다. 좋은 반응을 보이는 분들 중에는 디자인에 대한 칭찬을 많이 해주신다. 저는 사회적인 책임감으로 사는 분들보다도 디자인이 좋아서 사는 분들이 많아지기를 원한다. 모든 사람들이 디자인이 예뻐서 사는 시계인데, 그 시계가 시각장애인도 같이 쓸 수 있는 시계가 되면 좋겠다. 장애인이 항상 도움을 받아야 하고, 약자고, 무능력하고, 비장애인들의 도움 없이는 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 저희의 가장 큰 목표다.
Q_ 대표님께서 추구하는 가치관, 세계관은 무엇인가
유치하게 들릴 수 있고 뻔한 얘기이긴 한데 자기가 즐길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들을 생각하는 요소가 거기에 포함될 수 있다면 훨씬 좋은 가치관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Q_ 보편적 디자인(Universal Design, 유니버설 디자인)이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아주 큰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확신도 있다. 시각장애인들과 얘기해보면, 자기들이 쓸 수 있는 제품이 없는 것 자체에는 오히려 큰 불만이 없다. 정말 시각장애인들이 원하는 것은 남들이 쓰는 물건을 같이 쓸 수 있는 물건, 자기들의 장애에 초점을 두는 제품이 아닌, 조금은 불편해도 남들이 쓰는 물건을 같이 쓰기를 원한다. 왜냐면 시각장애인용, 시각장애인들만 쓸 수 있는 물건을 계속 쓰다 보면 사회로부터 고립된 감정들이 극대화되고, 사회의 약자라는 생각을 계속해서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보편적 디자인 제품이 좀 더 보편화되면 장애인들이 조금 더 사회에 자연스럽게 적응하고 참여하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다. 저희는 단순히 시계 하나를 만들었지만, 이 시계를 보고 디자인하는 다른 분들도 보편적 디자인이 적용된 제품들을 만들어 준다면 사회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Q_ 회사명이 ‘이원(EONE)’인데 그 뜻은 무엇이고, 향후 계획이 궁금하다
‘이원(EONE)’은 ‘Everyone’을 줄여서 만든 이름이다. 모두를 포함하는 디자인이기 때문에 회사 로고도 ‘디자인 포 에브리원(Design for everyone)’이다. 처음에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시작한 사업이지만, 평소에 고려 대상이 아닌 분들을 포함한, 다수를 포함하는 디자인 컨셉으로 가려 한다. 올해 말 정도에 탁상시계를 선보일 계획이다. 알람 기능이 들어가 있고, 손으로 만져서 시간을 알고 알람을 맞출 수 있는 시계로 브래들리 시계의 콘셉트와 원리는 같다.
Q_ 브래들리 시계 같은 보편적 디자인 제품을 개발하려는 독자들에게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린다
제가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가장 중요한 것은 보편적 디자인을 한다고 하면, 디자인 자체를 머릿속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많은 분들을 만나봐야 하고 그분들의 생활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만난다고 해서 10~20분 앉아서 얘기하는 것보다는 몇 시간을 같이 앉아서 얘기하고 생활을 계속 관찰해야 한다. 더 나아가 관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세계에 같이 들어가 보면 훌륭한 보편적인 디자인이 나올 거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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