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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부모운동이 자식사랑의 지름길이죠"

정신지체장애우 아버지 임용욱씨

본문

[사람사는 이야기]

 

"부모운동이 자식사랑의 지름길이죠"


정신지체 장애우 아버지 임용욱씨

 

  장기화한 경제불황으로 위기의 아버지들이 늘어나고 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아버지의 애환을 그린 소설 "아버지"가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예전에는 없던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 등 각종 아버지모임이 결성돼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것은 우리 시대 아버지들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반증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최근 아버지의 위기가 경제불황에 직접적인 원인을 두고 논의되고 있는데 반해 경제불황과 상관없이 늘 위기에 처해 있는 아버지들이 있다. 바로 장애우를 자녀로 둔 아버지들이다.

  특히 정신지체 장애우를 자녀로 둔 아버지는 위기 그 자체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안그렇겠는가, 정신지체 장애우들의 인권이나 복지문제에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정신지체 장애우들 문제는 온전히 가정, 그 중에서도 부모가 알아서 해결해야 할 몫으로 자리매김된 지 오래다. 그래서 부모들은 젊어서는 자녀가 어떻게 하면 제 앞가림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라는 문제로 전전긍긍하고, 늙어서는 자신의 사후에 자녀가 어떻게 살까라는 걱정 때문에 잠 못 이루고 있다.

  이런 실정에서 그나마 정신지체 장애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이는 어머니였다. 아버지는 늘 뒤쳐져 있었고 소극적이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들도 자녀 문제로 고통을 받기는 매한가지다. 언젠가 텔레비전에 장애우 자녀에 대한 걱정으로 멍하니 넋을 놓고 앉아 있는 아버지 모습이 비쳐진 적이 있다. 이런 모습이 우리 시대 정신지체 장애우 아버지의 상징적인 모습이라면 지나친 속단일까?

  여기 근래 열린 장애우 관련 정책토론회나 심포지엄장에서 늘 보게 되는 한 아버지가 있다. 바로 임용욱(55세)씨다. 그이는 올해 스물네 살이 된 정신지체 장애우 세훈 씨를 자녀로 두고 있다. 장애우 관련 각종 모임에 참석해 목청 높여 정신지체 장애우 문제해결을 촉구하는 것을 자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고 인정할 수 있다면 그이의 존재는 좀 뜻밖이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아직까지 그나마 자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고 있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어머니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이는 어떤 연유로 어머니들 틈에서 홀로, 외롭게 목청을 높이고 있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하나 있는 정신지체 장애우 아들 때문에 겪는 그이의 고통이 누구 못지 않게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아버지처럼 고민만 하지 않고 직접 전면에 나섰다는 것이 다를 뿐, 그이는 특별한 아버지가 결코 아니다.

  그이는 현재 정신지체인권익실천을 위한 성남 부모회 이사라는 명함을 가지고 있다. 그이의 이름에 다른 직함은 없다. 그이는 직장도 다니지 않는다. 조금 과장을 섞어 얘기한다면 그가 눈만 뜨면 하는 일은 오로지 정신지체 장애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뿐이다.

  다행히 경제적인 문제는 한때 운영하던 침대공장을 세 놔 거기에서 나오는 임대수익금으로 해결하고 있다. 그런 그이를 두고 먹고 살만 하니까 부모운동을 하는 것이라고 얘기한다면 그건 잘못된 판단이다. 부의 속성은 또 다른 부를 쫓게 돼있다. 그런데 적어도 그이는 부를 축적하기 위해 노심초사하지는 않는다. 그이의 지금 화두는 오직 아들 문제를 해결하는 것뿐이다.

  아들과 자신을 위해 정신지체 장애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멀고 험한 길 위에 그이는 서 있는 것이다.

  그이가 외아들 세훈이의 장애를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십팔 년 전이다.

  그이는 나이 서른여섯 살 때 첫 아들 세훈이를 얻었다. 그때 그이는 서울 옥수동에 살면서 성남시에 있는 가구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형편이 어려워 월세방을 전전하고 있었을 때였고, 그래서 아이도 늦게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어려운 형편에서 태어난 아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세훈이는 정신지체 장애 특유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증세를 보였다기보다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늦되었다. 그것뿐 그이는 세훈이가 설마 정신지체 장애를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주위 사람들도 "늦될 뿐이지 조금 지나면 다 따라간다"고 얘기해서 그이는 그 말만 믿었다.

  그러던 그이가 세훈이를 병원에 데려간 것은 세훈이 나이 여섯 살 때였다. 이렇게 늦게 세훈이를 병원에 데려간 이유를 그이는 "어느 병원을 찾아가서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 몰랐어요. 요컨대 부모가 무지했던 거죠. 그리고 또 하나 이유는 내 아들이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던 거죠. 조금 지나면 괜찮을 것이다 라는 희망적인 생각만 갖고 있다가 결국 치료 기회를 놓친 거예요"라고 회상한다.

  세훈이 나이 여섯 살 때, 찾아간 신경정신과에서 세훈이는 정신지체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판정을 받았다. 마침내 아이의 장애를 확인한 순간, 그이의 대응방식은 엉뚱했다. 당시 그이는 절망감에 빠져 허우적대는 대신 "어떻게든 돈을 많이 벌어야 되겠다"는 생각만을 했다고 한다.

  "다른 부모들처럼 절망하지는 않았어요. 자존심 때문이었죠. 아이가 장애를 가졌다고 내가 절망한다면 나는 환경의 지배를 받아서 함몰되고 마는 거였는데 거기에는 내가 동의를 못하겠다는 거죠. 나는 어쨌거나 나다. 아무리 주위 환경이 어렵다해도 나 자신이 지켜야할 내 자아는 지켜야 한다라는 생각을 했죠. 그렇지만 솔직히 아이 문제는 기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이 양육과 치료는 아이 엄마에게 맡기기로 하고 나는 돈을 많이 벌어야 되겠다는 생각만을 했어요. 내가 돈을 벌어 기본적인 아이 문제를 해결하면 나머지는 국가가 어떻게 해주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그때부터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바쁘게 일하다가도 문득문득 세훈이 생각을 하면 그이는 어쩔 수 없이 답답해해야 했다. 세훈이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세훈이는 제대로 자랄 수 있을까. 그런 고민 끝에 그이가 매달린 것은 아이 교육이었다. 그이는 어려운 형편에도 세훈이를 유치원에 보냈다. 다른 아이들과 같이 지내다보면 좀 나아지겠지. 기대를 갖고 보냈는데 돌아온 것은 실망뿐이었다. 일년여 유치원 교육에서 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세훈이 장애를 더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 그이는 직장이 있는 성남에서 살고 있었다. 당시 성남에는 특수학교가 없었다. 그래서 유치원 교육을 마친 세훈이를 어디로 보내야 할지 막막했다. 일반 초등학교에서는 세훈이를 못받겠다고 하고 특수학교는 없고, 결국 고민 끝에 그이는 세훈이를 서울에 있는 한 특수학교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세훈이를 서울로 통학시키면서 그이는 특수학교는 장애우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니까 특수학교에서 교육을 받다보면 틀림없이 아이에게 뭔가 변화가 생길 것이다라는 기대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역시 실망뿐이었다.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까지 합해 십이 년을 특수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세훈이의 장애는 나아지지 않았다.

  "물론 학교 선생님들이 고생은 하셨지만은 결과는 형편없었어요. 저는 세훈이가 고등부까지 마치면 최소한 글은 일고 최소한의 수치 개념은 가질 줄 알았어요. 그렇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죠."

  어렵게 고등부까지 마친 세훈이, 이젠 정말 갈 곳이 없었다. 그런 세훈이도 문제였지만 이즈음 그이는 국가에 대한 기대가 깨져 심한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그이는 장애아의 경우 아이가 학교 다니는 기간 동안은 부모가 책임지고, 아이가 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에는 국가에서 어떤 식으로든 대책을 세워주리라는 기대를 내내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장애우복지관 같은 곳에서 아이를 맡아주리라 기대했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정말 막막했습니다. 아이가 갈 곳이 없어 집에 있게 됐는데 아이가 어떤 행동을 보이냐면, 하루 종일 장난감 자동차 바퀴를 눈에 대고 굴리고 있다 이겁니다. 무아지경에 빠져서 그러고 있고, 또 비디오 테잎이 되감길 때 나는 칙칙 소리를 듣고 웃고 그러는데 세훈이의 그런 모습을 보게 되면서 정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거 이대로 놔둬선 안되겠구나, 뭔가 대책을 세워야겠다는 절박함을 가지게 됐죠."

  그이가 처음 생각한 대책은 다른 게 아니었다. 국가가 운영하는, 세훈이 같은 정신지체장애우를 위한 재활기관을 찾는 것이었다. "부모가 생업에 신경쓰느라 그런 쪽에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해서 그렇지 설마 없겠느냐, 그런 생각을 갖고 여기저기 알아보기 시작했죠. 하지만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어요. 제가 살고 있는 성남에는 아이가 다닐 수 있는 시설이 단 한 군데도 없더군요."

  한동안 복지관을 알아보다가 벽에 부딪치자 막판에 그이가 생각해낸 것은 수용시설이었다. 생이별을 감수하고 수용시설에 보내서라도 세훈이가 나아질 수 있다면 보내겠다는 생각으로 수용시설을 알아 봤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그렇게 되자 그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가 뭔가 대책을 세워주리라는 기대가 무너지면서 그이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이는 여기저기 세훈이가 갈만한 시설을 계속해서 알아보고 다녔다. 마침 사업도 안정돼서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그이가 수소문 끝에 친구 소개로 세훈이를 보내기 위해 맨 처음 가본 시설은 인천에서 배를 타고 두 시간을 가야 닿을 수 있는 섬에 있는 한 장애우 수용시설이었다. 그때가 구십삼년 연말이었는데 당시를 그이는 이렇게 회상한다. "원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은 마음에 들었어요. 문제는 시설이 자리잡고 있는 위치였는데, 하나 있는 아들을 세상과 격리된 곳에 보낼 수는 없었죠. 도저히 제 양심이 허락되지 않았어요."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그이가 찾아간 곳은 세훈이가 다니던 특수학교였다. 그이는 학교 교장을 찾아가 "우리 아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교장 선생님은 잘 아실테니 대책을 세워주십시오"라고 하소연했지만 교장은 묵묵부답이었다. 대신 교장은 서울에 있는 "한국정신지체인애호협회"를 소개해줬다.

  다음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이는 서울 보라매공원에 있는 애호협회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바로 영구회원에 가입했지만 세훈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특별한 대책은 자문받지 못했다. 그런데 마침 그이가 애호협회를 찾아간 날. 복지부 장애인복지과 사무관이 같은 자리에 있었다. 그이는 가슴속에 쌓인 분노를 애꿎게 그 사무관을 향해 토해냈다.

  "정부 추산으로 우리나라에 장애우가 백만 명이 있다고 그러는데 등록한 장애우는 삼십이만 명밖에 되지 않는 건 뭘 말하는지 아십니까? 등록해봤자 내 자식에게 아무 도움이 안되니까 부모들이 등록을 안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 정부에 있는 당신들이 장애우에게 세금을 받기 위해 등록을 시킨다면 백만 명이 아니라 이백만 삼백만, 아마 그 이상의 숫자도 등록시켰을 겁니다. 제발 말로만 복지정책이 있다고 하지 말고 실효성 있는 복지정책을 내놓고 시행하세요."

  어디에서도, 그 누구한테서도 세훈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받지 못한 그이. 그이는 다시 원점에서 여기저기 수용시설을 알아봤다. 그이는 당시 해결책으로 수용시설을 고집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선 세훈이가 친구가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세훈이가 혼자서 집에서만 지내다보니 사실상 감옥 생활을 하고 있는 거였죠. 그래서 친구를 찾아주고 싶었고, 또 하나 이유는 수용시설에 보내면 저희 부부가 죽은 다음에 세훈이 장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게 우리 부부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거든요." 결국 그이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구십사년 십일월 어느 날 세훈이는 천안에 있는 한 장애우수용시설에 들어가게 됐다. 그 시설에서는 세훈이를 받는 조건으로 큰 액수의 후원금을 요구했다. 그이는 우선 백만 원을 주고 "세훈이가 원 생활에 적응해 평생 원에서 살 수 있게 되면 나머지 돈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때 그이가 원에 주기로 마음먹은 돈은 이천여만 원이었다.

  이렇듯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이는 원하는 대로 세훈이를 수용시설에 보냈다. 그럼 이제 세훈이 때문에 겪어야 했던 그이의 마음 고생은 끝난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다.

세훈이를 수용시설에 보내고 나서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이가 수시로 원에 찾아갔을 때 겉으로 보기에는 세훈이가 원 생활에 절 적응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생각은 부모 생각일 뿐 세훈이는 원 생활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거부감은 먼저 그이가 세훈이를 잠깐 집에 데려왔을 때 나타났다. "중간에 세훈이를 집에 데려와서 이박 삼일을 데리고 있다가 보냈는데 세훈이가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거예요. 그때는 너 좋게 하려고 그러는데 왜 안가려고 그러느냐고 야단쳤죠. 그런 다음 강압적으로 아이를 원에 보냈어요. 그리고 나서 돌아왔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날 세훈이가 없어졌던 거예요. 세훈이가 집에 가겠다고 걸어서 천안고속도로로 인터체인지까지 갔다가 거기서 붙잡혀서 원에 보내졌다는 사실을 나중에 들었어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부모로서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그때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어쨌든 다시 원에 들어갔다니까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생각만을 내내 했죠."

 

 

 

  그 일이 있고 난 후 그이는 의도적으로 세훈이를 찾지 않았다. 찾지 않으면 세훈이가 원 생활에 더 빨리 적응할 수 있겠지, 그렇게 위안을 하고 지냈지만 솔직히 마음은 편치 않았다. 어쨌거나 세훈이는 그이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세훈이가 잘 지내고 있을까, 그이의 마음은 늘 천안쪽으로 가 있었다.

  가슴이 휑하게 뚫린 날이 지속되던 어느날, 그러니까 구십오년 십이월, 성탄절을 맞아 그이는 어렵게 결심을 하고 세훈이를 다시 집에 데려왔다. 가족들이 함께 지내는 연말연시를 아들없이 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집에 온 세훈이는 오랜만에 가족에게 웃음을 찾아줬다. 그런데 들어가기로 약속한 날 문제가 생겼다. 세훈이가 결사적으로 원에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이었다. "집밖으로 데리고 나오려고 하니까 안나오려고 울고 떼를 쓰는 거예요. 그래서 안아서 강제로 차에 태우려고 했죠. 그랬더니 필사적으로 발악을 하는데 차마 눈을 뜨고 못 볼 장면이었죠. 아마 그렇게 삼십여분을 세훈이와 실랑이를 했을 거예요. 원에 가지 않으려고 미치듯 날뛰는 세훈이를 보면서 저는 결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 보내지 않겠다. 이제는 너를 옆에 두고 아빠가 네 문제를 해결하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떼놓지 않으마, 너를 떼놓으려 한 이 아빠를 용서해라. 세훈아……"

그이로서는 정말 어려운 결심이었다. 세훈이를 집에 데리고 있자니 퇴행만 거듭하고, 보낼 곳은 없고, 사방이 꽉 막힌 상황에서 그이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이가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부모운동밖에 없었다. "이제부터 부모운동을 본격적으로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래야 세훈이 문제가 해결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솔직히 대안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세훈이를 시설에는 보내지 않겠다. 어떻게든 사회 안에서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확고하게 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한 그이가 문을 두드린 곳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였다. 연구소에서 장애우 문제 전문가들을 만나고, 특히 교육프로그램인 장애우대학을 수강하면서 그이는 정신지체 장애우 문제는 부모들이 나서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했다고 말한다.

  "장애우대학에 다니면서 정신지체 장애우문제는 부모가 먼저 자식의 장애를 인정해야지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그리고 정신지체 장애우 문제는 장애 당사자와 부모들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이 문제는 사회문제입니다. 그런데 현재 정부는 이 문제를 부모들에게만 책임을 지우고 있어요. 산업이 발달하면 할수록 장애 발생 빈도가 높아지고 있는 실정에서 더 늦기 전에 정부는 제도적인 대책을 세워줘야 합니다. 정부의 대책을 촉구하기 위해 바로 당사자인 부모운동이 절실하게 필요한 거죠."

그이는 부모운동의 일환으로 성남에서 장애우대학과 비슷한 프로그램인 정신지체 장애우 부모대학을 열었다. 그리고 부모대학 수강생들을 중심으로 구십육년 삼월 자생적인 조직인 "정신지체인권익 실천을 위한 성남부모회"가 만들어지는데 기여했다. 이 부모회는 현재 성남의 대표적인 장애우 단체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렇듯 짧은 시간이지만 그이의 노력은 조금씩 결실을 맺고 있다.

  다시 세훈이 얘기를 하자. 지금 세훈이는 올해 삼월 성남 혜은학교에 생긴 전공과에 다니고 있다. 전공과는 쉽게 말해 직업교육 과정인데 그곳에서 세훈이는 제빵기술을 배우고 있다. 그런데 전공과는 일년 과정이다. 일년이 지난 내년 삼월이 되면 세훈이는 다시 집에서만 지내야만 한다. 이 사실이 못내 그이를 답답하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이는 그 희망의 한 자락을 다음과 같이 펼쳐 보인다. "작년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주최한 한일 장애인 교류대회에 참가해서 일본에 갈 기회가 있었다. 그때 왓빠라고 나고야시에 있는 정신지체인들이 일하고 있는 빵공장엘 가봤는데 그곳에서 세훈이보다 장애가 훨씬 심한 장애우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봤어요.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과는 장애우들이 처해 있는 여건이 다르지만 가능하면 왓빠를 모델로 부모들이 중심이 돼 우리도 전공과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제빵공장을 만들어야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선 직장을 확보한 후 그 다음에는 그룹홈을 마련하는 거죠. 그룹홈이야말로 아이들 장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입니다. 이 계획은 시도가 어렵지 시작하면 가능성을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마침 성남시에서도 내년 예산에 그룹홈 설립 예산을 반영하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래서 요즘은 희망을 가지고 삽니다."

  이런 계획말고도 그이가 더 희망에 부풀어 있는 것은 세훈이의 대견한 행동 때문이다. 세훈이는 요즘 혼자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닌다.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대단한 발전이다.

  "나아진 정도가 아니죠. 가히 장족의 발전을 한 겁니다. 지금 세훈이는 무슨 일이든 지속적인 훈련만 시키면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죠."

말 끝에 환하게 웃는 그이, 그이는 정신지체 장애우 문제를 해결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장애우 자녀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부모운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말을 맺었다.

  "부모운동을 하게 되면 우선 아이들을 이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연스럽게 아이들 욕구에 귀 기울이게 되기 때문이죠. 그렇게 들으려고 하면 아이들하고 대화가 됩니다. 아이들도 부모들 말을 들으려고 하고, 그러면 신뢰가 쌓이고 그게 바로 사랑이죠."

 

글/ 이태곤 기자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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