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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농사꾼 정갑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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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 정갑순씨

<"돌파지"의 장한 어머니>
 경기도 안성군 금강면 삼흥리 "돌파지"라는 마을은 서울에 사는 나에게는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다. 안성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세 시간에 한번 정도 오는 조령행 버스를 타고 이십여 분 시골길을 달리는 동안 길 한쪽으로는 맑은 강물이 펼쳐졌다. 다른 한쪽에는 누렇게 익은 벼가 가을볕에 영글고 있었다.
 돌파지에 내려 정갑순(60)씨 집을 찾아가는데 발끝에 자글자글 밟히는 자갈의 감촉이 감미롭고, 양쪽 길가 밭에는 잘 익은 고추가 탐스럽게 달렸는가 하면 감나무는 벌써 주홍빛 감이 바알갛게 매달려 가을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었다.
 이십여호 남짓한 동네는 살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아 보였다. 같은 버스를 타고 내린 아줌마가 같이 걸으면 정갑순씨 집을 가르켜 주는데 눈에 보기에 동네에서 제일 좋은 집이었다.
 다 쓰러져 가는 집이 아니라는 것에 우선 안도감이 들었다 대문 가에 오니 바로 옆에서 땅에 쪼그려 앉아 얘기를 하던 동네 아줌마 두분 중 얼굴빛이 밝은 아줌마가 아는 척을 하며 "아니, 두시 십분 차로 온다고 해서 왜 아니 오나 하고 있었소. 어서 가요"하고 이끈다.
 집은 꽤 컸다. 시멘트를 깐 넓직한 마당에는 거둬들인 콩이 한가득 널려 있었고 한쪽 구석은 시골집답게 수돗가를 만들어 놓았다. 마루에서 아저씨 한 분이 낮잠을 자고 있다가 정갑순씨가 깨우니 방으로 건너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큰아들이었다.
 마주 앉아 정갑순씨를 자세히 보니 무척 적극적이고 잘 웃는 활달한 성격이지만 사실 이런 사람이 고생한 티를 안내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정갑순씨는 올해 "한국장애인부모회"가 주는 "장한 어머니 상"을 받았는데 오남 이녀의 자녀 중 삼남매가 청각장애우고 청각장애우인 장남이 낳은 세 손녀마저 또 청각장애우가 되는 믿을 수 없는 불행을 딛고 자녀를 잘 키우고 손녀딸의 교육에 헌신하고 있다는 공로로 그 상을 받았다.
 지금 정갑순씨가 살고 있는 집은 시집와서부터 계속 살던 허름한 초가집을 구십일년 사월에 뜯어 한달 만에 지은 벽돌집이다. 둘째 사위가 목수라 어렵지 않게 지었는데 집을 짓느라 칠백만원 정도 빚도 내고 해서 삼천만원에 지었다고 한다.
 집을 짓기까지 정씨의 고생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험했다. 일을 안 한다고 하는 요즘에도 논 삼백평과 남의 밭 일천평을 지을 정도로 일이 몸에 밴 삶이다.
 "그래 할아버지(남편)허구 나허구 나가서 벌이 있으면 벌고, 우리 큰아들도 집 짓는데 나가 벌고, 농사지어선 그냥 집에서 먹는 양만 하는 거야. 할아버지는 이 동네 골프장 처음 할 적부터 사년째 관리하러 다니는데 요새 골프장이 안 돌아가서 걱정이야. 가을부터 출퇴근하긴 하는데 그전 같진 않으시지. 오십만원에서 이삼십만원으로 줄어들었어요."

<짧은 행복, 긴 현실>
 충남 음성군 청평리가 고향인 정씨는 삼남 이녀 중 장녀로 네 살 때 식구가 서울로 올라왔다. 친정 아버지는 미군부대 식당 요리사로 일하다 보니 먹고살기 어렵던 그 시절에도 어머니가 집에서 자녀들만 키울 정도로 살기가 괜찮아 내 집 갖고 이태원에서 살았다.
 정씨는 불행히 교육받은 기억이 없다. 집에서 놀면서 동생을 돌보다 열세 살 적에 아버지 친구 소개로 해태 공장에 들어가 캬라멜포장을 했다. 일주일마다 밤낮을 교대로 하는 일이라 졸던 기억만 있지만 친구들하고 여럿이 일해서 힘들기보다는 재미있었다 한다.
 하지만 그나마 행복했던 서울생활도 육이오 전쟁이 일어나면서 끝나버리고 말았는데 미군부대서 일하던 아버지는 인민군이 오면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에 밤중에 몰래 식구들을 데리고 고행으로 들어왔다. 전쟁 중이라 집도 그냥 놔두고, 월급도 받지 못한 채 몇 가지 짐만 챙겨 빈 몸으로 내려온 시골에는 논도 밭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가 오십 년 여름, 한참 밭일에 바쁠 때였다. 고향인 음성에 몇 달 그리고 그 해 십일월 청주까지 피난 갔다 한달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그곳에 뿌리를 내렸다. 정씨는 서울에서 내려온 다음해 열여덟 어린 나이로 친정만큼 어려웠던 지금의 집으로 시집을 오게 되었다.
 시집은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집에 어린 시동생과 시누가 있는 집의 맏며느리 자리로 시아버지는 맘이 착했는데 시어머니는 시집살이를 시켰다고 한다.
 "이 동네는 옛날에 사십호 정도 있었어요. 우물 하나 갖고 동네 사람들이 살았는데 젊은 시어머니(당시 서른 여섯)는 안하고 어린 나를 물 떠오라고 시켰어. 한번은 집안 형님과 물동이에 물을 넣는데 도깨비불이 날아다니는 걸보고 뭔지 몰라 무서워 집안 형님하고 우리 형님 시아버니 집에 가서 밤새고 들어왔더니 내가 시집살이 고되서 도망갔다고 난리가 난거야. 그때 우리 시아버님이 "나이 어린 걸물을 짜러 보내면 어떡하냐고" 시어머니 혼을 냈지."
 밤마다 물을 뜨러 다녔던 기억이 오륙년. 그러다 늦게 잠자리에 들어도 새벽에 보리밥을 지어서 먹을려면 또 일찍 일어나야 했다. 서울서 살다보니 시골 일을 해보지 않아 무척 힘이 들었다고 한다.
 시집은 동네에서도 제일 어려운 편으로 가진 땅이 없다 보니 시아버지와 남편이 남의 집  일을 해주면서 살았다. 그러다 정씨가 시집온 지 다섯 해 만에 시어머님이 돌아가셨다. 요즘은 병원 가서 수술했으면 금방 나았을 맹장염이었지만 옛날이라 시아버님이 귀신 붙었다고 굿판을 벌였을 뿐, 이십여 일을 앓다가 돌아가셨다.
 그 이듬해부터 술만 마시던 시아버지는 십 년 동안 위장병을 앓다 넉넉지도 못한 살림에 빚만 늘려놓고 죽고 말았다. 그때가 정씨 나이 서른 셋이었는데 아이가 벌써 넷이었다.
 그 뒤로 어떡하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집에 얘들만 놔두고 정씨 부부는 낮에는 남의 일 다니고 밤으로는 모를 쪄서 자기 집 모를 심으면서 억척같이 살아야 했다.

<대를 이은 불행>
 상호(40), 연호(38), 근호(33), 기호(32), 길호(28) 아들 다섯에 은자(35), 은순(30) 두 딸을 둔 정씨는 피임법도 없던 옛날이라 아이가 생기는 대로 낳았다고 한다.
 이중 상호, 길호 그리고 은자씨가 어릴 적병을 앓고 난 뒤 청각장애우가 됐는데 다들 세 살에서 다섯 살 무렵 열병을 앓고 난 뒤 말도 못하고 전혀 들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큰아들 상호씨는 세 살 되던 해 열병을 앓고 난 후부터 듣지 못했는데 건강하게 자라 병원 한번 간 적이 없는데 초등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해 일곱 살 때 평택에 있는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의사가 "아주머니 애기는 건강하고 똑똑하니까 가서 잘 키우라고"고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의사가 애가 말 못하는 장애우라고 하면 실망할까봐 그런 것 같단다.
 그 뒤로는 병원에 가본 적이 없고 아들도 건강하게 자라 듣고 말하지 못할 뿐 눈치가 빠르고 외모도 잘생긴 게 사내답게 커갔다.
 열 살이 넘으면서는 밭에 데려다 일도 시키다가 열일곱에 남의 집에 머슴으로 보내 처음에는 일년에 쌀을 한 가마 받다가 나중에는 네 가마씩 받을 정도로 일꾼으로 자랐는데 사년 동안 머슴살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농사를 거들다 스물 여섯에 같은 청각장애우인 안성 처녀 최금순씨와 중매로 결혼을 해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다.
 막내 길호씨도 청각장애로 교육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 어릴 때 시누이 소개로 성남의 가방공장에 들어가 미싱을 배워 십년 넘게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이제는 자리 하나만 만들면 제 밥벌이는 충분히 할 수 있을 정도여서 정씨는 색시감을 구할 걱정이 앞선다.
 맏딸 은자씨도 역시 청각장애우로 열아홉에 고향 근처의 안성군 미양면에 시집을 갔다. 사위 역시 청각장애우였는데 나이가 많아 큰딸이 집에 오면 불평을 한다고 한다. 딸은 공장 다니고 사위는 농사를 짓고 있으며 아들, 딸을 키우고 있다.
 둘째 아들 연호씨는 조령초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서울로 올라가 시누 남편이 하는 기계로 옷 짜는 기술을 익혀 지금은 숙련된 기술자가 되었다. 아직 장가갈 생각이 없어 걱정이라고 한다.
 셋째 아들 근호씨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차 시트 만드는 재봉을 배워 가게를 하다가 작년부터 세를 얻어 세차장을 운영하고 있다. 착한 여자를 얻어 일찍 결혼했는데 아들이 벌써 초등학교 이학 년이다.
 넷째 아들 기호씨는 유일하게 안성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뒤 서울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작은 딸 은순씨는 교육을 전혀 못 받고 집에서 지내다 열아홉에 서울 홍은동에 가서 칠년 동안 식모로 일하다 고향에 내려와  스물 일곱에 안성군 보계면으로 목수인 남편과 중매로 결혼해서 아들 둘 낳고 살고 있는데 이 사위가 정씨집을 지었다. 
 집안이 가난하고 듣지 못하는 자식이 셋이나 되다보니 다들 교육을 시키지 못한 것이 정씨의 한이 되었다. 그래도 자식들은 모두 정씨를 닮아 활달하고 성실해 어엿한 생활인으로 자리잡아 한시름이 놓인단다.

<다섯 개의 장애우 수첩>
 하지만 정씨가 편안한 마음으로 노년을 보낼 여유도 생기지 않았다. 십삼년 전에 큰아들을 장가보냈는데 여기서 본 세 손녀가 모두 청각장애우이기 때문이다. 정씨는 주희(12), 미희(10), 정희(8) 세 손녀와 큰아들과 며느리 최금순(38)씨의 장애인 수첩 다섯 개를 방바닥에 펼쳐 놓는다.
 "기집애들은 똘똘허구 약어요, 애들이 평택에 있는 에바다 학교 다니는데 거기서도 공부 잘한다고 선생이 칭찬허구. 자녀를 못 가르친 게 맨날 한이 되서 조금이라도 혜택이 있을까봐 이걸 해다 놨어요."
 정씨는 장애인 수첩이 뭔지도, 청각장애우를 가르치는 학교가 있는지도 몰랐단다. 손녀 딸 셋이 청각장애우다 보니 너무 답답해서 보청기라도 혜택을 받아 볼까 마을 이장에게 얘기했더니 장애우 수첩을 만들라고 했다. 그때쯤 면에서도 장애우 수첩에 대한 홍보를 한창 하던 때였다.
 그래 큰아들 부부와 손녀딸 셋을 이끌고 평택에 있는 병원에 장애판정을 받으러 갔더니 간호사가 다섯 명이나 되는 장애인을 보고 웃더란다. 정씨는 어찌 화가 나는지 막 대들고 싸우니까 원장이 나와 간호사를 데려다 놓고 야단을 쳐서 간호사가 미안하다고 사과한 적도 있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팔십팔년 십이월 이십육일 다섯 개의 장애우 수첩이 만들어졌다.
 장애우 수첩은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수첩 때문에 사년 전 평택에 있는 청각장애 학교인 에바다 학교에서 돌파지를 찾아와 소녀를 가르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여기 말 못하는 애기들이 있어서 왔다고 그러드라고. 어휴, 그러시냐고. 우리 손주딸들이 그렇다고, 내가 걔들을 가르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못가르친다고."
 그랬더니 찾아온 선생님이 정시가 나이도 많고 넉넉지도 못하고 아들 며느리도 그러니 다 그만 두고 한 아이당 일만원씩만 갖고 오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그 해에 아홉 살이던 주희와 일곱 살이던 미희를 같은 학년에 넣고 막내 정희는 작년 에바다 학교 유치원에 넣었다가 올해 에바다 학교에 보냈다.

<간절한 소원>
 요즘 정갑순씨는 세 손녀의 뒷바라지로 자주 에바다 학교에 간다. 그럴 때마다 그동안 벌어둔 돈으로 옷이며 신발 공책을 사고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온다. 세 손녀가 밝고 깨끗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던 처음 보다는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지난 구월 이십육일에는 일박 이일로 손녀딸과 함께 대전 액스포 구경을 다녀왔다. 자식이 장애우기 때문에 손녀딸들의 어머니 역할을 하고, 집안 안팍 살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마음  놓고 딸네, 아들네 집에 놀러 가지도 못한다.
 지금 정갑순씨의 소원은 정희 밑에 본 막내 손자 준삼(7)이가 할머니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고등학교 갈 때까지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준삼이는 세 손녀가 청각장애인이라 너무 분하고 속이 상해 무당에게 가 보니 "옛날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가 잘못돼서 장애우가 됐다"는 얘기를 듣고, 화장을 한 다음에 태어난 손자라고 한다.
 그 때문인지 종교가 없던 정씨지만 손자가 별 이상 없이 무럭무럭 자라고 명이나 길게 해달라고 기도하러 절에 다닌 지 칠팔년이나 되어 간다.
 자녀와 손녀가 청각장애인이다 보니 혹 부부간에 갈등의 없을까 궁금하여 여쭤봤더니 숱한 인고의 세월을 사는 동안 결혼식 날 혼례 지내며 처음 얼굴을 봤던 할아버지(남편)는 조용한 성격에 마음이 착해서 서로 아이들 때문에 심하게 다퉈본 적이 없다고 한다.
 정씨는 자신의 자식과 손녀들이 청각장애우다 보니 장애우를 자식으로 둔 부모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보면 장애우라고 자식을 버리는 사람이 많더라구요. 그렇게 하지말고 나를 생각하고 아이들 잘 키워줬으면 하는 바람이지요."
 이곳 돌파지는 시골이라 해도 안성군과 불과 20여분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정씨가 청각장애우 자녀를 위해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았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저 모든 게 내 운명이거니 하고 참고 살아왔을 뿐이다.
 정씨의 간절함 바람을 뒤로하고 안성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황금빛 벼 물결이 빗겨 가는 저녁 햇살을 받고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정씨가 청각장애인 자녀를 위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시골이란 환경 덕에 아들, 며느리 두 부부가 자식도 낳고 농사일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이제 시골사람의 무지와 정부의 소홀한 장애인 정책으로 정씨 자녀의 개발되지도 못하고 묻혀버린 가능성은 누가 되찾아 줄 것인가.
 정씨의 부지런함과 씩씩함, 그 활달한 성격으로 장애의 아픔을 버텨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오숙민(함께걸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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