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보이지 않아도, 마음의 눈은 더 큰 세상을 이미 바라보고 있다
본문
잠상, 潛像, latent image(영), latentes Bild(독)
디지털카메라 아닌 필름카메라 기준으로, 렌즈를 통과한 빛을 받아들인 필름이 외부의 약물과 섞이는 현상 과정 이전에 필름 통(케이스) 안에서 간직하고 있던 이미지를 뜻함. 약물의 화학작용이 없다면, 빛을 받자마자 사라질 촬영 이미지들을 의미함
시각장애는 보이지 않음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사진 촬영 전문으로 활동하는 ‘시각장애 모임’이 있다고 했다. 그게 가능할까? 그렇다. 그건 가능하다. 모든 걸 눈에 보이는 걸로 판단하는 비장애 입장에서는 떠올리지 못했던 세상이 존재한다. 그 드넓은 세상을 찾아 나선 이들이 있어, 이번 ‘함께 걷는 우리’가 그들 곁에 다가섰다. 시각장애인 사진모임인 ‘잠상’이 이번 만남의 주인공이다.
우리는 느낌으로 세상을 본다
만남의 시간은 이번 겨울 들어 가장 추워지던 날 저녁, 인천광역시 차이나타운 언덕 위의 한 갤러리(화랑) 내부에서 진행됐다. 갤러리 출입구 옆 벽면에 부착된 작은 표지판의 한 구절이 눈에 띄었다. ‘시각장애인/사진/갤러리.’ 일반적인 상식인 양 내세우는 편견은 시각장애인의 사진 촬영이 ‘정말 가능하냐?’는 질문으로 되풀이된다. 그런데 잠상의 회원들을 만나고 난 뒤에 내린 결론은 훨씬 더 단순해졌다. ‘눈으로 보이는 게 전부인가?’라고 되묻는 질문이 가능해진 것이다.
“사진은 시력을 가진 사람들만 찍는다는 당위론 같은 게 과거에는 있었죠. 그런데 ‘눈으로 본다’는 개념이 단순히 시각만 의미하는 게 이젠 아니라는 겁니다. 모든 예술 분야의 변화가 그렇듯이, 사진의 세계도 그 개념을 바꾸고 있잖아요. ‘본다’는 의미가 단순히 ‘눈으로’가 아닌, ‘맛을 본다’와 같이 한 개인의 느낌으로 승화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시각이 아니더라도, 한 개인이 생각하고 있는 또 다른 감각을 통한 느낌을 카메라를 통해 포착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해졌다는 의미가 됩니다. 저희 잠상이 추구하고 있는 세상이 바로 ‘마음으로 촬영하는 세상’이니까요.”
사진모임 잠상의 구성원은 모두 시각장애를 가졌다. 그리고 그 구심점을 이끄는 중심엔 모든 이들이 선생님이라 부르는 한 스승이 존재한다. 시각장애인학교인 인천해광학교 교사로 사진동아리를 이끌던 이상봉 지도교사가 명예퇴직 후 이들과 다시 만난 것이다. 이번 취재를 위한 만남의 자리엔 선생님 1인과 제자 3인이 한데 모였다. 그 대화의 분위기가 마치 벽난로 타오르는 어느 아늑한 여행지의 숙소인 듯 편안하게 느껴졌기에, 이번 글의 진행은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서로의 문답 형식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이상봉 지도교사, 황태경 잠상 회장, 한유림 회원, 임희원 회원이 함께했다.
취미가 아닌 인생의 이름으로 촬영한다
함께걸음 시각장애라는 입장과 손에 카메라를 든 촬영 활동, 이 두 가지가 접목되기 힘든 부분이 일반적인 시선 안에 존재할 것 같다
이상봉 지도교사 학교에 재직하던 당시 이 동아리를 만들고 지도했었는데, 명퇴 형식으로 학교를 그만두게 됐어요. 구심점이라기엔 좀 그렇지만, 그래도 지도하던 선생님이 사라진 상황에서 사진동아리 회원들에겐 일정한 흔들림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촬영에 대한 의욕이 참으로 강했던 학생들이었거든요. 저는 퇴임하기 전에 이 공간을 카페 겸 사진 갤러리로 미리 마련했어요. 그래서 졸업을 한 학생들한테, 다시 사진 활동을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보라고 했죠. 성인이 된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모여 논의한 끝에, 자연스럽게 사진모임을 다시 결성하게 된 거예요.
함께걸음 당연한 질문이겠지만, 어떤 방식으로 촬영이 진행되는지가 궁금하다
이상봉 지도교사 학교 시절엔 전맹인 학생과 저시력인 학생이 짝이 돼서, 둘이 같이 대화하면서 촬영하고 결과물에 대한 설명을 나눴어요. 개별적으로는 부모님과 같이 다니면서 촬영하는 등, 각자의 촬영생활도 계속 진행됐죠. 잠상의 활동에서 가장 큰 의미를 갖는 건, 무엇보다도 회원들이 촬영생활을 굉장히 재미있어 했다는 거예요. 촬영한다는 행위에 정말 큰 즐거움을 얻는다는 것, 그래서 사진을 더 많이, 더 열심히 하면서 정말로 작가가 되고 싶다는 욕망까지 간직하게 된 거죠. 스스로 적극성을 갖고 임했다는 점을 저는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함께걸음 학생 시절의 취미활동과 달리, 성인이 된 다음에는 촬영을 대하는 자세나 방식이 달라졌을 것 같다
이상봉 지도교사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정말 전문적으로 촬영하고자 하는 의욕이 강해졌죠. 그래서 대화를 통한 촬영이 아닌, 스스로 이미지를 먼저 구상하고 한 장 한 장에 집중해서 기록하는 방식을 도입했어요. 아마추어의 틀을 벗어나기 위해선, 또한 시각장애라는 조건을 제3의 방식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실제 전문가와의 유기적인 연결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죠. 그래서 만나게 된 게 김정아 작가예요. 독일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돌아온 분인데, 우리의 취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같이 하는 첫 작업을 시작하게 됐죠.
함께걸음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가 진행됐을 것 같다
이상봉 지도교사 우리가 폴라로이드나 인스탁스라고 부르는 즉석카메라가 있잖아요. 그 카메라로 하루에 한 장씩 찍는 작업을 했어요. 백 일 동안 매일 구상하고 촬영하며 확인하는 과정이 이어졌죠. 주제는 어머니였어요. 어머니를 생각하며 하루에 한 장씩의 작업에 집중하다 보니, 기대를 뛰어넘는 정말 훌륭한 작품들이 탄생했어요. 그래서 최종 결과물들을 모아 여기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게 됐죠. ‘당신에게 한 번도 건네지 못한 말들’이라는 제목으로 개최한
전시회였는데 굉장히 성공적이었어요. 여론도 무척 호의적이어서 독일에서 공부한 김정아 작가가 그 작업을 독일의 갤러리에 전했는데, 현지에서도 큰 호응을 얻어 올해 연말에 독일 베를린에 있는 갤러리로 초대가 돼 전시회를 하게 됐어요. 그렇게 가시적인 성과를 유의미하게 얻어가고 있는 것이죠.
성장의 믿음이 모두를 행복하게 만든다
지도교사가 판단하는 유의미한 평가를, 실제 촬영하는 잠상 회원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고등학교 사진동아리였던 잠상은 이제 전문가로 도약하는 성인들의 사진모임으로 재탄생했다. 현재 15명의 회원으로 구성됐고, 세상 속에서 각자의 삶을 직장인으로, 대학생으로 살아가고 있다. 모두가 선천성 시각장애라는 이들에게 무엇보다 궁금했던 건, 자신의 촬영 결과물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지의 여부였다.
황태경 저시력의 2급이라서, 보행이 가능한 수준의 형상 정도만 확인할 수 있어요.
한유림 저시력의 1급인데, 빛의 유무는 판단을 하죠. 아주 밝은 곳이면 앞에 앉은 사람의 얼굴 형태까지는 희미하게 볼 수 있어요.
임희원 저는 전맹이라서 아예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래서 제가 마음으로 생각하는 느낌을 중심으로 촬영하고 있어요.
함께걸음 ‘내게 있어서 사진은 무엇이다’, ‘나에게 촬영은 무엇이다’라는 질문의 답을 모두 가지고 계실 것 같다
황태경 사진은 저한테는 추억이죠. 저는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생각해 왔어요. 저의 성장하는 얼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과 풍경, 그 시대의 특정한 일 같은 것을 남기기 위한 게 사진이고, 즐겁게 촬영할 수 있는 모든 게 추억으로 간직되고 있어요.
한유림 자신감을 주는 에너지랄까? 몇 년 간 사진동아리 활동을 해왔지만, ‘자신감을 주는 에너지’라는 확신은 김정아 작가님과 멘토링 작업을 하면서 보다 더 구체화된 것 같아요. 지금도 그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데, 사진을 찍고 하루하루마다 그 느낌을 글로 쓰고 있어요. 제가 살아가는 생활, 인생, 삶, 그 보편적인 느낌을 기록하는 게 제겐 가장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임희원 저는 사진이 마음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사진은 시간이 지난다고 닳아서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계속 꿈을 찾게 도와주기도 하고, 그 꿈을 이룰 때까지 계속 간직할 수 있는 게 저는 사진이라고 봐요.
함께걸음 각자 자신 있는 촬영 분야가 있겠지만, 도전하고 싶은 분야도 분명히 있을 것 같다
황태경 저는 화려한 야경 촬영을 좋아해서, 저의 집 옥상에서 저녁거리의 풍경을 계속 촬영하고 있어요. 그런데 비슷비슷한 집과 건물들이 주로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기존 건물이 사라지고 높은 빌딩들이 들어서고 있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사라져가는 풍경들을 주로 기록하고 있어요. 도전하고 싶은 건, 아직 해보지 않은 일출촬영을 꼭 해보고 싶어요.
한유림 저는 일본의 교토와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을 꼭 가보고 싶어요. 교토의 유적지에 가면, 정말 멋진 촬영을 할 만한 곳을 만나게 될 것 같아요. 그랜드캐니언은 그 자체로도 감동의 촬영이 되겠죠.
임희원 저는 전맹이라서 한 번도 봤던 적은 없지만, 자연인처럼 산 속의 풍경을 더 집중적으로 촬영하고 싶어요. 소설 같은 저의 상상 속의 얘기겠지만, 제가 상상하는 산은 새소리가 일단 많이 나고 풀벌레들이 많이 울 것 같아요. 유원지 같은 데 있는 물 같은 게 흐를 것 같고, 나뭇잎 밟는 소리도 크게 날 것 같아요. 실제의 산 속 모습이 아닌, 제가 생각하는 산 속의 풍경을 사진에 담고 싶은 거죠.
3명의 회원들한테 물었다. 지도교사인 이상봉 선생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이다. 같이 앉아 계신데 어떻게 그런 말을 꺼낼 수 있겠느냐며 웃음과 야유가 잠시 뒤섞이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모두 같은 의견을 꺼내놓았다. 무엇보다도 선생님은 생각이 깊으시다고 한다. 자신들이 나름의 재미있는 방식으로 이상한 구상을 떠올리며 촬영을 해도, 선생님은 그 방식을 지적하거나 다그치지 않고 모두를 받아주신단다. 그렇게 기록하는 것도 좋은 촬영이라고 말이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모든 결과물은 모두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격려를 먼저 해주시기 때문에, 자신들이 지금까지 오게 된 것 같다는 의견에는 선생님도 고개를 끄덕이셨다.
함께걸음 오랜 인연으로 회원들과 함께하고 계신데, 활동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부분은 무엇인가
이상봉 지도교사 점점 반대가 되어가는 것 같아요. 우리 회원들은 정말 즐겁게 지내거든요. 정말 꾸밈없고 식구처럼 형제같이 지내는데, 그 속에 저도 같이 포함돼 있잖아요. 그래서 같이 존재하는 그 자체에 제가 도리어 더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게 돼요. 그리고 하고자 하는 목표에 다들 열심히 하는 자세, 무엇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집중하며 도전하는 모습을 항상 보여주니까 저는 행복한 사람이에요. 십 년 정도 지나면 정말로 우리 회원들 중에서 뛰어난 전문 작가들이 탄생하고 활동할 거라는 기대와 믿음 또한 저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15명의 회원들이 정말 훌륭한 작품을 남기며 성장할 거라는 선생님의 기대와 믿음을 함께 나누고 싶어진다. 멋진 활동, 좋은 결과물, 그리고 탄탄한 성장을 일구어낼 15인의 잠상 구성원을 단체 사진 아래에 기록해 둔다. 회원들의 각오와 독자 여러분의 응원이 함께 어우러질 소중한 명단이 되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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