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 사람 사는 이야기


나는 원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삼성전자 산재피해 당사자 한혜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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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이야기’의 존재이유는 ‘그 사람’의 실제 인생을 듣는 것이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당사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초(超)대기업의 부조리를 언급해야 한다는 점을 민감해하는 우려의 목소리가오랜 기간 주변에서 들려오곤 했다. ‘그 주제’ 이외의 다른 사람 이야기도 많지 않느냐는 조심스러운 반응이 주를 이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당사자와 어머니는 “있는 대로 쓰세요. 다 사실이니까요.”라고 했다. 주저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 그대로 팩트(fact, 사실)라는 확인이자 강조였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들은 그대로의 내용을 이 지면에 옮겨놓는다. 세계 최고를 지향하는 대기업에 근무하다가, 산재피해로 뇌병변장애 1급 판정을 받은 한혜경 씨가 이번 호의 주인공이다. 일상의 발음마저 힘들어진 그의 곁에서, 어머니 김시녀 씨가 부연설명을 덧붙여줬다. 촛불의 광장에서 널리 울려 퍼지는 ‘No More Death!(더 이상의 죽음은 안 된다!)’의 의미가 독자 여러분과 함께 공유되리라 기대한다.

 

어머, 혜경이가 웃네?

서울 광화문 촛불 현장에서 종종 마주치던 얼굴, 지하철 2호선 강남역 8번 출구 앞 농성장에서도 존재하던 그 사람. 그런 그를 만나려 했는데, ‘다음 주에 수술을 해야 한다’는 당장의 현실 때문에, 그의 고향이자 삶의 본거지인 강원도 춘천시의 그의 집이 만남의 장소가 됐다.

“어서 오세요!”, “멀리 못 나가서 죄송해요!” 한혜경 씨가 늘 하는 인사말이라 했다.

집에선 외부인과 만난 적이 없기도 했겠지만, 그동안 그를 마주했던 언론의 시선이 얼마나 일방적이었던가를 먼저 직시해야 했다. ‘인간 한혜경’은 없고, 오로지 ‘피해자’라는 관점 하나에 모든 판단이 집중돼 왔다는 것이다.

그의 긴장을 풀어내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서 월간 <함께걸음>이 어떤 책인지, ‘사람 사는 이야기’가 어떤 의미를 담는 지면인지를 하나씩 또 하나씩 설명했다. 앞에 앉은 방문객이 ‘우리 편’임을, 좋은 만남의 시간이 될 것임을 확인한 이후에야 그의 표정이 편해졌다. 그리고 입을 열며, 오랜 기억 속의 자기 자신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옛 이야기를 털어내는 딸을 바라보던 어머니의 시선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미소까지 띠는 그의 표정을 본 어머니의 두 눈이 더욱 커지며, 이런 한마디를 눈동자로 말했다. “어머, 우리 혜경이가 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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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랜드에서 회사 동료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1997년 9월의 한혜경 씨.
(가족 앨범 안에 보관되고 있던 인화된 사진을 꺼내놓고 촬영함)

나의 가장 큰 꿈, 행복한 가정을 꿈꾸다

“어릴 때는 춘천 소양로…, 조그만 길, 네, 아주 조그만 길이었어요. 골목에 목욕탕 있고, 할머니 집이 있는…, 그 좁은 골목길 앞에 어떤 아줌마가 호떡을 구워서 팔았어요. 그 아줌마가 파는 호떡을 할머니가 잘 사주셨어요.”

한혜경 씨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직접 언급한다는 거, 그건 사실 기대하지 않았던 반응이었다. 그 놀라움은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정말 오랜만에 딸의 입을 통해 듣는 옛 이야기였기 때문인지, 방문자의 질문에 앞서 어머니의 질문이 먼저 추임새를 넣기 시작했다. ‘진짜?’, ‘그래서 어땠는데?’, ‘그 사람이 누군지 기억 나?’ ‘어머, 넌 그걸 아직도 기억하는구나!’

“지금은 초등학교잖아요. 제가 다닌 건 국민학교였거든요. 지금의 다리 아닌 옛 소양강 다리를 따라서 친구들하고 소풍을 다녔어요. 어릴 때 문구점에서 파는 과일주스 가루 있잖아요. 그걸 주전자에 넣고 섞은 채로 들고서, 친구들이랑 자주 소풍 갔던 거도 생각나고요. 저는 어릴 때 종이인형 자르는 걸 무척 좋아했어요. 어렸을 때 제일 좋았던 거는요. 저는 친구들하고 있었던 게 가장 좋았어요. 같이모여서 지냈던 거, 그게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오래 전 기억을 떠올리는 딸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던 어머니가 대화의 답을 이었다. ‘혜경이’는 어렸을 때부터 무척 깔끔하고 활동적인 아이였단다. 어디서 놀든 흙먼지가 옷에 묻는 걸 싫어하고, 동네 아이들을 이끌며 총괄하는 역할을 늘 담당했다는 것이다. 당시 살던 동네에 수출용 뜨개질 제품을 만들던 한 여성이 있었는데, 혜경 씨는 그를 고모라고 부르면서 잘 따랐다고 한다. 금전적인 수입도 괜찮았고 동네 이웃에게 일감도 나누던 그 고모를 바라보며 지내던 어린 혜경 씨의 장래희망은 ‘고모 같은 사람’이 되는 거라 했다.

혜경 씨가 남달랐던 건 바로 ‘조숙함’이었단다. 용돈을 쓰지 않고 늘 모아놓는, 엄마의 설거지를 대신하겠다고 나서는, 남동생의 입장을 항상 먼저 생각하는 아이였다고 기억하며, 어머니는 아득한 시선을 어딘가의 빈 공간으로 던졌다. 이런 대화 분위기에 젖어드는 것 또한 너무 오랜만이라는 의미 같았다. 그런 느낌을 나름의 완곡한 의견으로 전달하니까, 어머니의 반응 역시 같은 의미로 되돌아왔다.

“사실… 혜경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저는 아빠하고 이혼을 했거든요. 엄마가 아빠 앞에서 힘들게 당하는 모습을 오랜 기간 봤던 혜경이는 그게 큰 상처로 남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마음을 다잡은 것 같아요. 가족의 행복이 우선이라는 거, ‘나는 엄마랑 살겠다’는 거, 이런 게 혜경이의 마음속엔 쌓였던 것 같거든요.”

 

열심히 살고 싶었던 소녀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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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요, 여상(여자상업고등학교)에 가서 정말 좋은 친구를 만났어요. 셋이서 정말 친해졌어요. 매일 학교에서 만나면서도 또 집에 와서 음식 만들어 먹고, 오죽하면 엄마가 못난이 삼형제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셋이서 정말 ‘쿵짝’이 잘 맞았어요. 그땐 먹는 걸 정말 좋아했거든요.”

혜경 씨는 중학교 때까지 공부를 참 잘하는 학생이었단다. 그랬던 그가 상업계 고등학교를 간다고 하니까, 학교 선생님들도 그 이유를 물으며 다들 말렸다고 한다. 당시의 관점으로는, ‘상고’에 가면 대학은 못 가고 취직부터 해야 한다는 선입견이 우선이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혜경 씨의 의견은 단순하면서도 직접적이었다고 한다.

“남자는 그래도 대학을 나와야 취직을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그래서 남동생의 학비를 자기가 보장하겠다는 누나의 입장을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이미 결정한 거예요. 혜경이는 그렇게까지 가족을 먼저 생각하던 아이였거든요.”

중학교 당시라면 사춘기 시절일 테고, 스스로의 푸르른 미래를 얼마든지 떠올릴 수도 있었을 게 아닌가. 그런데 동생을 왜 먼저 생각하며 자신의 미래를 결정지었던 걸까? 혜경 씨의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어쩌면 ‘그 단순함’이 이 모든 문답의 결론일지도 모를 일이다.

“엄마가 너무 힘들었던 걸 항상 옆에서 봐 왔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걸 엄마와 함께…, 아빠하고의 시끄러운 싸움은 없어졌으니까, 엄마랑 조그만 가게 하나 차려서 같이 살고 싶었어요. 떡볶이 같은 아주 작은 가게로도 우린 행복할 수 있으니까요.”

혜경 씨는 다른 대화가 잠시 오고 간 다음에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저는 큰 욕심은 안 부리고 살았던 것 같아요.그래야 했어요. 그게 지금 제 머리에 떠올라요. 제가 잘났다는 게 아니고요. 엄마가 고생을 해서 이만큼 저를 키웠으면 저는 뭐예요. 제가 잘났다는 식으로 살면 안 되죠. 엄마가 있었으니까 제가 지금까지 살았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엄마한테 잘해야 돼요.”

상고 졸업 후엔 취직을 해서 동생의 대학 졸업까지 책임지겠다는 거, 그 과정이 모두 마무리되면 조그만 가게 하나 열고 엄마랑 알콩달콩 살겠다는 거, 이 모든 다짐은 회사에 입사한 이후로 야근까지 불사했다는 그의 실제 생활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다.

“그때는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엄마가 고생을 많이 하셨거든요.”

혜경 씨는 엄마와 아빠가 갈라서던 당시를 회상하며, 자신의 속마음을 하나씩 또 하나씩 꺼내놓았다. 가끔은 아빠가 생각난다고, 하지만 만약에 지금 들어오겠다면 단호하게 ‘안 돼!’라고 할 것 같다는 대목에선 어머니의 긴 한숨이 뒤따랐다.

“자식이다 보니 가끔은 아빠 생각이 나겠죠. 저도 이 얘기는 너무 오랜만에 듣는 거라서…. 솔직히 저는 아빠가 돌아온다면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어요. 이 모든 상황이 저 혼자선 정말 너무 힘드니까요. 하지만 혜경아, 네가 걱정할 일은 없을 거야. 알았지? 엄마는 혜경이랑 우리만의 행복을 만들 테니까, 알겠지?”

 

엄마, 내 몸이 이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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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는 걸 정말 좋아했고, 한번 책을 붙잡고 읽기 시작하면 다리에 쥐가 나서 못 일어설 정도로 몰두하던 아이, 어머니 기억 속의 중고등학생 딸은 그렇게 간직되고 있었다. 고3 때 삼성전자 기흥공장에 입사하게 된 혜경 씨는 졸업식 참석도 못한 채, 정해진 업무의 틀 하나로 살았단다. 기숙사가 모자라서 4인실의 선배들은 침대에서 자고, 그 방에 추가로 들어간 신입사원 두 명은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는 생활, 처음으로 집을 멀리 떠난 외지 생활이 그에게 순탄했을 리는 없다.

입사할 때 교육을 받았단다. 일과 관련된 내용, 부품 불량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등을 교육 받았는데, ‘극기훈련’이라는 대목에서 혜경 씨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지금도 치를 떨어야 할 기억이라는 의미가 된다. 자세한 내용은 옮겨 적기 힘들지만, 생산라인에 투입될 신입사원들한테 왜 그런 식의 군사교육 같은 걸 시켰는지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며 어머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얼마나 인간성에 모욕을 주는 건지, 왜 그런 극기훈련이란 걸 어린 여직원들한테 강요한 건지 지금도 납득이 안 된다는 것이다.

“입사하고 4주 정도 지났을 때 혜경이가 처음 집에 왔어요. 오랜 만에 집에 왔으니 들뜰 만도 한데, 너무 피곤하다며 내내 잠만 자는 거예요. 그 다음에 왔을 때는 얼굴 전체에 뾰루지가 나 있는 거예요. 그 뾰루지는 갈수록 심해졌죠. 그런데 두 달 정도 지났을 때 얘한테 전화가 왔어요. ‘엄마, 이상해. 왜 생리가 안 나오지?’ 같이 일하던 선배들한테 물어보니까, 다들 똑같은 말을 했대요. 그건 별거 아니라고, 여기는 그런 애들 많고 산부인과 가서 주사 한 방 맞으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요. 그건 그 일을 하던 여직원들이 생리가 없는 걸 예사로 생각했다는 거잖아요. ‘왜 안 나오지? 이건 이상한데?’가아니라, 그 생산라인의 심각한 문제점임을 모두가 몰랐다는 뜻이 되니까요.”

3조 3교대로 24시간 가동되다 보니 직원들의 피로는 쌓여갔는데, 삼성전자 생산라인의 직원들은 같은 그룹 계열인 에버랜드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서, 쉬는 시간은 용인에 갔다가 다시 기흥으로 복귀하는 생활을 반복했단다.

휴일에 굳이 집까지 갔다 올 여력이 점점 줄어들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입사 8개월 차가 됐을 때, 어머니는 딸의 심각한 음성을 전화기로 들어야 했단다. 생리가 아예 안 나온다는 거, 생리불순이 아니라 생리 자체가 멈춰버렸다는 것이다.

“생리가 아예 멈추고 나니까 몸이 붓는 거예요. 얼굴의 뾰루지는 더 심해졌죠. 회사 측에 무언가 문제점을 얘기하면 돌아오는 답은 하나였대요.

‘그럼 사표 써!’ 자비로 호르몬제를 맞고 산부인과 처방대로 치료를 해도 낫지 않는 채로, 그렇게 5년 8개월을 일하다가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회사를 그만두게 했죠. 직장이야 다른 데를 알아보면 되니까, 일단 가장 중요한 몸부터 챙기는 게 낫겠다 싶었던 거예요.”

어머니는 그때까지는 외견상으로 딸의 몸이 좀 뚱뚱해졌다는 것 이외에, 다른 염려나 의심 같은 건 하지 못했다고 한다. 혜경 씨의 오랜 소망이던 떡볶이 가게를 해도 되고, 결혼을 준비할 수도 있을 테니까, 더욱이 남동생의 학비는 충분히 책임을 졌기 때문에 잠시 쉰 뒤 새로 출발하면 되겠다는 정도의 마음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하나씩 둘씩 이상한 점이 눈에 띄기 시작했단다.

“혜경이의 행동이 갈수록 둔해진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게다가 안 그러던 아이가 걸음걸이를 안짱다리로 걷기 시작하고, 뛰는 자세가 5,60대 아줌마들처럼 뒤뚱거리는 거예요. 그 무렵 제가 밖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저녁에 전화가 왔어요. 저희가 당시 아파트 17층에 살았는데, 혜경이가 집을 못 찾겠다는 거예요. 달려와서 보니까 다른 층의 출입문 앞에서 얘 혼자 주저앉아 울고 있더라고요. 그때까지는 친구들과 만나 술 한두 잔 마신 탓이라고 넘겼는데 갈수록 아이의 상태가 이상해진다는, 뭔가 심각한 게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거예요.”

 

또 하나의 가족? 이젠 진실을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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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는 종합병원의 거의 모든 진료과를 출입해야 할 만큼 몸 여기저기가 아팠단다. 자꾸 넘어지고 매번 감기 증상을 보이면서, 급기야는 엄마로서 믿을 수 없는 딸의 언행까지 마주쳐야 했다고 한다. ‘엄마, 저 장롱 위에 누가 있지?’ 헛것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해결이 안 됐기에 결국 만신집이라는 무당집까지 출입했지만, 아무런 답은 나오지 않고 상태만 점점 악화됐다고 한다.

이 지점에서 참 아쉬운 부분을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전신 모두가 여기저기 아프다고 했지만, 머리가 아프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와 관련된 검사나 치료는 하지 않았다는 건데, 듣고 있던 입장에서도 이 내용은 큰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얼마간의 두통이라도 있어서 보다 일찍 MRI나 CT촬영을 해봤더라면 결과가 어땠을까? 이건 제3자의 아쉬움뿐 아니라, 어머니의 기나긴 한숨으로 남겨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서, 당시 서울대학병원의 과장님 한 분이 춘천에 잠시 내려오신다고 해서 서둘러 예약을 했어요. 어떻게 왔냐고 묻는데, 답을 할 게 없어서 MRI를 찍으러 왔다고 했어요. 병명이 뭔지는 모르겠고, 일단 찍어보고 싶다고 한 거죠. 그 과장님은 혜경이를 죽 살피더니 간호사한테 즉시 촬영 준비를 하라고 지시한 다음에, 얘를 침대에 눕혀놓더니 발바닥을 긁어보더라고요. 그러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혹시 머리에 종양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 과장님의 판단은 곧 현실로 밝혀졌죠.”

혜경 씨의 머리를 촬영한 필름에는 커다란 종양이 있었단다. 그런데 너무 위험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고, 최소한 7,8년은 된 것 같다며 이 환자가 학생인지 직장인인지를 과장님이 물으셨다고 한다.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녹색의 회로기판을 만드는 일을 했다고, 그럼 반도체 회사 아니냐고, 삼성전자의 노트북 라인에 있었다고, 그럼 이건 회사에서 얻은 병 같다고, 아니라고, 삼성 같은 대기업이 직원을 이렇게 만들 리가 없다는 문답이 이어진 뒤에 혜경 씨는 분당서울대병원에서 뇌종양제거수술을 받게 됐단다. 중환자실과 집중치료실을 거치던 과정을 어머니는 자세하게회고하셨다. 눈물과 함께 말이다.

“소뇌하고 숨골 사이에 아주 얇은 막이 있대요. 보통 종양은 위에서 아래로 생기는데, 얘는 극히 예외적으로 아래에서 위로 생겨났대요. 그러면서 이게 너무 오래 되다 보니까, 그 얇은 막을 뚫고 소뇌부위와 숨골이 붙어 있는 지점을 파고 들어갔다는 거죠. 종양을 다 제거하지도 못했어요. 필름으로 보면 일곱 군데에 제거하지 못하는 종양들이 남아 있어요. 그것까지 손을 대면 신경손상이 너무 커서, 수술 이후의 결과를 장담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항암치료와 방사선을 마흔두 번이나 받았어요. 방사선 마흔두 번은 암환자가 받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래요. 멀쩡히 두 발로 걸어 들어가 입사를 했던 아이가…, 우리 혜경이가 이렇게 된 거잖아요.”

수술 이후의 혜경 씨 몸 상태는 정말 심하게 망가져 있었는데, 정말 죽을 만큼 운동을 하고 몸을 추스르는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이나마 만들어놓게 됐단다. 두 모녀의 눈물겨운 재활훈련 모습을 오랜 기간 바라보던 병원의 사회복지과 담당자가 두 사람을 따로 부른 뒤 혜경 씨와 면담을 나눴고, 그 담당자는 어머니한테 하나의 메모를 전했다고 한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자 모임으로 당시 막 활동을 시작했던 ‘반올림’의 활동가 이름과 주소를 알려준 것이다. 같은 회사를 다니던 건강한 젊은이들이 그 회사 안에서 종양과 암과 백혈병을 동시다발로 얻었다는 건 무얼 의미할까?

4시간 가까운 대화의 시간 동안 어머니는 눈물조차 메마른, 더 이상 꺼낼 것도 없는 분노를 삭이며 하나씩 하나씩 설명을 이어주셨다. 혜경 씨는 일하던 당시를 떠올리며, 자신이 하던 작업공정의 과정을 그대로 재연해 보이기도 했다.

잘 펴지지 않는 양손 손가락으로, 당시 자신이 다루던 기판의 크기와 모양이 어땠는지까지 묘사했다. 어머니도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하는 모습은 처음이라고 했다. 납을 녹이고 그 냄새를 계속 흡입하면서 눈으로 직접 기판의 상태를 확인해야 하는 작업, 매년 건강검진을 했다지만, 결과는 단 한 번도 알려주지 않았다던 회사는 무얼 이미 알고 있었으며 무얼 지금껏 감추고 있는 걸까?

“최소한의 안전교육만 있었다면, 그렇게 위험한 작업환경을 개선이라도 해놓았다면, 얘들이 이렇게 병을 얻고 죽어가겠어요? 혜경이는 지금도 큰 불만을 토로해요. 최소한의 안전교육만 해줬으면 내 몸은 내가 지킬 수 있었을 거라고요. 스스로 알아서 최소한이나마 위험을 방지할 방법은 찾았을 게 아니에요. ‘우리 생산라인에서 너희들이 쓰는 화학물질과 독극물 같은 게 네 몸에 위험할 수 있으니까 이렇게 저렇게 주의해라.’ 이런 교육 한마디도 없었던 삼성에서 혜경이를, 우리 젊은이들의 인생을 죽음의 길로 내몬 거예요. 그렇다면 분명한 책임을 져야 마땅한 거 아닌가요? 소박한 행복을 꿈꾸던 혜경이의 원래 인생, 그걸 저는 어떻게든 되찾아주고 싶은 거예요. 얘의 인생은 지금 아무것도 없는 거잖아요. 청문회에 나와서 ‘미흡하고 송구스럽다, 제대로 하겠다.’던 삼성의 최고책임자는 두 아이의 아빠로서 마음이 아프다고 했죠. 분명하게 말하지만, 이건 사람 생명의 문제예요. 언제까지 피해자 갈라치기와 회유만 반복할 건가요? 그룹 차원의 공식사과와 피해보상, 책임자 처벌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곁에도 또 하나의 혜경이가 있을지 모르니까요.”

 

작성자글과 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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