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새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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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싫은 게 사진 ‘찍히는’ 거라 했다. 그래서일까? 그동안 촬영했던 장애계 행사 그 많은 사진들 중 어디서도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현장에선 늘 마주치는데도, 그는 항상 카메라 렌즈가 향하는 방향에서 몇 걸음 비켜서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정말 싫은 또 한 가지는 마이크를 붙잡고 얘기하는 거란다. 그렇기에 그가 지금까지 한 적이 없었던 게 바로 인터뷰라고 했다. 장애계의 지난한 운동사(史)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겨왔으면서도, 한 번도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는 점은 그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런 그가 <함께걸음> 지면으로 세상에 처음 자신의 모습과 언어를 드러낸다. 그런데 장애인운동 활동가가 아닌, 이번엔 ‘가수’로서 등장한다. 10년의 준비 끝에 얼마 전 첫 음반을 발표한 늦깎이 신인이 됐기 때문이다. 장애계 언론 비마이너 편집장 출신이고, 현재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집행국장인 김종환 씨를 만났다. 그의 CD를 반갑게 받아들고 보니, 첫 작품집 표지에도 그는 뒷모습으로 앉아 있다. 그 중요한 촬영에서도 여전히 ‘찍히는’ 게 싫었던 모양이다.
기억 속의 기억
“지금은 서울 성동구 옥수동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성공했다고 하죠. 예전에는 옥수동에서 떠나는 사람이 성공했다고 했는데…. 예전에 살던 지역을 찾아보려 했는데도, 너무 달라져서 이젠 못 찾겠더라고요.”
동네 전체가 완전히 재개발돼서, 예전의 모습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지역을 그는 뒤늦게 둘러봤던 모양이다. 서울 안에서도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만 살았다던 옥수동과 금호동, 응봉동 일대가 그의 첫 30년의 생활 터전이었단다. 완전 산동네의 빈터에 말뚝을 박고 울타리를 쳐서 ‘여기는 내 땅!’이라고 계속 우기면, 무허가라도 20여 년 후엔 소유가 인정되던 당시에 그의 어린 시절이 존재했다고 했다.
“지금은 한강을 따라 강북 방면으로 달리는 노선을 경의중앙선이라고 하죠. 예전에는 용산과 왕십리, 청량리 사이를 화물열차들만 다니곤 했습니다. 높은 산동네 집 창문에서 내려다보며, 오가는 열차들이 몇 량인지를 일일이 세던 게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남아 있네요. 서른네 량짜리 아주 긴 열차를 셀 때면 뭔가 신기록을 세운 듯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지요.”
1960년부터 62년까지, 1966년과 67년 사이에 출생했던 아이들한테 소아마비가 집중됐단다. 일정한 ‘음모론’까지 대두됐을 만큼 특정 시기에 소아마비가 창궐하긴 했지만, 그는 ‘전염병이 심하게 돌았던 거’라며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대신 저의 다리 상태를 조금이라도 낫게 하려고, 어머니는 용하다는 침술사를 찾아다니셨어요. 저를 업고 서울 성동구에서 경기도 김포까지 대중교통으로 왕복하셨으니까요. 아버지는 어떻게든 걷는 훈련을 시키려고, 제게 동네 한 바퀴를 걷게 하셨습니다. 사회생활로는 불가능한 걸음 자세였지만, 그렇게라도 아버지는 목발 없이 걷게 하려고 노력하셨어요. 비 올 땐 혼자 우산이라도 들어야 하지 않겠냐는 말씀도 하셨었죠. 결국 초등학교 입학 전에 제겐 목발이 처음 생겼습니다.”
시, 나를 적는다
소아마비 장애가 있고, 게다가 양쪽에 짚은 목발에 의지하는데도 체육시간 100미터 달리기를 16초에 주파했다? 그가 그랬단다. 어린 시절 운동신경이 유난히 발달해서, 그는 정말로 중학교 2학년 즈음 100미터 최고기록이 16초였다고 한다. 두 목발을 지렛대 삼아 내달렸을 그의 뛰는 자세 먼저 연상하기 전에, ‘16초’라는 숫자는 당시 소년 김종환의 성격과 삶의 자세가 어땠는지를 반증하는 증거가 아닐까 싶어진다.
“중2 때 삼육재활원에서 수술을 잘한다는 소식을 아버지께서 들으시고, 휴학을 한 다음 수술날짜 기다리며 그 재활원 병원에 입원해 있던 적이 있었어요. 수술을 받고 나서 좋아진 건 하나도 없었지만, 보조기를 그때 처음 착용하게 돼서 보행 자세는 일정 부분 도움을 받게 됐죠. 이듬해 동기들은 3학년이 됐고 저는 2학년 교실로 복학하게 됐어요. 그런데 3학년이던 동기들이 학기 초 어느 날 저희 반 교실로 와서, 2학년 아이들의 군기를 단단히 잡은 거예요. ‘야, 너희들 얘한테 앞으로 형이라고 해!’”
단 1년 차이라도 선후배 관계는 완전 하늘과 땅이었던 시절, 동기들의 그 한마디를 그가 지금껏 기억하는 이유는 그때부터 그의 삶이 변화됐기 때문이란다.
“동기 녀석들이야 졸업하면 그만이잖아요. 저만 남게 됐지요. 그때부터 아이들이 ‘형, 형’하면서 눈치를 보며 가까이 안 오고, 그러다 보니까 점점 저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거예요. 어쨌든 장애 때문에 1년을 쉬게 된 건데, 상황이 그렇게 되다 보니까 활달했던 제 성격이 더 조용해지고 대부분 혼자 있게 되더라고요. ‘장애 때문에’라는 비관 같은 게 아니라, 장애로 인해 만들어진 환경과 조건의 결과로 그렇게 된 거잖아요. 그때부터 제 성격이 많이 변하게 됐던 것 같아요.”
그는 어려서부터 독실한 부모님의 종교적 영향을 받으며 컸다. 4남 3녀 중 차남인 그의 남매 중에 가톨릭 신부가 2명이고 수녀가 1명이다. 집안 분위기가 어떤지를 추측하는 게 가능해진다. 조용해진 그의 성격은 자연스럽게 시(詩)를 받아들이게 됐단다. ‘시인이 되겠다’, ‘문인으로 등단하겠다’ 등의 구체적인 목표 같은 것 없이, 그는 시를 쓰는 나날을 길게 보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쓴 ‘노을’이라는 시가 지금도 가슴에 남아 있단다. 적고 나서 얼마 뒤 타인의 실수로 원본을 잃어버려 정확한 글 내용조차 떠올릴 수 없게 됐지만, 정말로 마음에 들었던 시였기에 진한 아쉬움을 여전히 내려놓지 못한단다. 하지만 그때의 습작은 고스란히 그의 내면에 남아, 지금의 그를 만든 원동력이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인의 명함은 갖지 않았지만, 그가 살아온 장애인 활동가의 길은 모든 게 ‘글’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되다
“사실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저를 시설에 넣으려고 알아보신 적이 있으셨대요. 시설의 환경이 어떤지 직접 확인해보려고 아버지는 긴 복도 양쪽이 전부 문이던 실내로 들어가셨고, 그 복도 중간의 어느 문 하나를 열어보셨대요. 그런데 그 인기척에 복도 양쪽의 모든 문이 동시에 열리면서, 방 안에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빼꼼히 밖을 내다보더라는 거예요. 그 모습에 아버지가 큰 충격을 받으신 거죠. 이 시설에 넣고 나선 아무도 안 찾아와서, 사랑에 목마르던 아이들이 사람만 오면 자기 부모인가 하며 전부 내다봤다는 거예요.”
아버지가 받은 충격으로 소년 김종환은 가정생활을 이어가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그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장애인직업재활시설 생활을 1년 동안 했단다. 목공예 조각을 익혔는데, 그 과정을 마친 뒤 경기도 성남에 있던 한 소규모 조각공장에 취직해서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2,30명 근무하던 그 공장 생활이 그의 삶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단다. 일을 마치고 밤에 노동야학에 다니며 노동법 등을 익혔는데, 그때까지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세상을 눈과 가슴으로 직접 체험하게 됐다는 것이다.
“노조를 만들어 임금협상을 시작했는데, 사장이 곧장 본사로 가서 상의하고 오더니 직장폐쇄와 위장폐업을 했어요. 첫 직장에서부터 이 사회의 왜곡된 질서와 구조를 직접 마주치게 된 거죠. 이후 사장은 직원들을 하나씩 회유해서 회사로 복귀시켰고, 저와 또 한 사람만 빼놓고서 회사 이름을 바꾼 업체를 다시 운영하기 시작했어요. 퇴직금도 줄 수 없다는 사장에 맞서 지방노동청까지 가서 퇴직금을 받고 서울에 다시 올라오게 됐습니다.”
성남에서 다닌 야학의 교사 중 한 사람이 장애계와 연결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장애계 한 언론사에서 기자를 뽑는다는 소식을 그에게 전하며 지원해 보라 권했단다. 당시 장애인 언론으로는 꽤 진보적인 언론사였는데, 고졸 학력이던 그는 이력서와 함께 가상의 기사 한 편을 추가로 써서 제출했다고 한다.
“2년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 기자로 일했어요. 생각해 보면, 제 인생에서 만난 모든 사람의 절반 정도는 그때 다 만났던 것 같아요. 기자 생활 당시의 인연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죠.” 김종환 씨는 기자 생활을 발판으로 삼으며, 진보 장애인운동의 세계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게 됐다고 한다. 그가 자세하게 설명한 당시의 과정은, 이 땅의 진보 장애인운동이 어떻게 씨를 뿌리고 어떻게 싹을 틔워왔는지의 운동사(史) 내용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의 설명 중에 유의미한 표현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1987년부터 시작한 청년장애인운동은 ‘동아리 형태를 벗어나자’고 제안하며 활동 범위를 넓혔단다. 그 다음 설명 중엔 ‘대중 속으로 들어가자’가 나왔고, ‘이동권투쟁을 시작하자’ 다음엔 ‘전국조직의 단체를 만들자’로 연결됐다. 장애인운동이 작은 씨앗에서 커다란 열매로 맺어지는 과정에, 그의 존재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일정 부분 역할을 담당했다는 의미가 된다.
“익산, 부산, 대전 등 당시 전국적으로 청년조직들이 각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어요. 서울보다 더 진보적인 지역도 있었죠. 저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도 노동운동과 장애인운동을 결합하겠다는 나름의 큰 의지를 품고, 전국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 주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는데, 한 3개월 정도 하다 보니 기자 생활과 도저히 같이 못하겠는 거예요. 원고 마감 때문에 일주일에 세 번은 집에 못 들어가고 신문사에서 자야 할 정도였는데, 준비위원회 활동과의 병행은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하나만 선택을 해야 해서, 기자 생활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장청’이라고 줄여 부르던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 사무국장, 장애계의 제 첫 직함은 그것이었죠.”
30여 년 경력의 신인
1990년 말에 기자 생활을 시작했고 장애인운동의 중심에 들어선 건 92년의 일, 이후의 과정은 ‘정립회관’,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노들야학’과 같은 익숙한 명칭들 속에 그의 활동이 녹아 들어가 있다. 어느 직함과 어느 조직에 소속돼 있든, 김종환 씨가 담당한 주된 분야는 편집, 홍보, 선전, 이 세 가지가 중심이었단다. 단체의 기관지 발행은 항상 그의 몫이었고, 문화와 관련된 활동 또한 그가 일정한 역할을 맡았다. 이 대목부터 ‘늦깎이 가수’ 얘기가 본문 안에 들어가야 한다. 늦은 나이에 첫 음반을 냈는데, 그의 삶을 둘러본다면 그 CD 안에 달콤한(?) 대중가요가 들어 있을 리는 만무하다. 예를 들어본다. ‘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는 대중집회에 참석하는 활동가들이라면 모르는 이들이 없다. ‘점거하라’ 또한 반드시 현장에 울려 퍼지는 노래이고, 장애해방열사 합동추모곡인 ‘봄날’은 열사들의 기일마다 빠지지 않고 모두의 가슴을 적신다. 위에 언급한 3곡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동안 발표됐던, 바로 김종환 씨의 곡이라는 점이다.
“투쟁의 현장에서 모두가 함께 부르는 노래들이죠. 그 노래를 쓰고 직접 불렀으니, 혹시 집회 현장에 제가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라도 스피커 안에 저는 항상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진 ‘찍히기’도 싫어하고 마이크 잡고 말하는 것도 싫다면서, 모두의 투쟁의지를 불타오르게 만드는 강렬한 발성은 어떻게 가능한 걸까? “성남에서 공장 생활을 했다고 했잖아요. 거기 야학에 노래패가 있었어요. 그 노래패 활동을 하면서, 그때까지 살면서 불렀던 노래 아닌 진짜 노래를 알게 됐어요. 노동가요를 접하게 됐다는 거, 당시 제겐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런 노래도 있구나. 이게 정말 노동자들의 삶을 대변하는, 장애인들의 절규를 대신하는 노래들이구나’라는 실감을 그때 받게 됐던 거죠.” 당시 노래패 활동에 참여하면서 제작한 노래 테이프가 있었단다. 노동자들이 정말 피땀을 흘려 만든 테이프였다고 그는 기억한다. 평일 현장 근무에 녹초가 되면서도 밤마다 모여 연습을 했고, 토요일마다 도둑고양이처럼 서울의 한 대학교 녹음실에 모여 3개월에 걸친 작업 끝에 제작한 노동가요 테이프였단다. 완성된 그 테이프가 ‘꽃다지’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인 유통망과 연결되면서, 전국적인 판매와 지명도를 얻게 되는 기대밖의 성과도 얻게 됐다고 한다. “95년에 노둣돌이라는 노래패 활동, 2000년대 들어서 장애인문예창작단 활동도 7년여 이어졌죠. 그때부터 저의 음반 기획은 시작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정식으로 만들자!’하는 시점을 잡는 게 어려웠죠. 장애계 활동 자체만으로도 꽉 채워진 나날이었고, 음반 작업이라는 게 혼자 전담하거나 손쉽게 진행되는 일이 아니었거든요. 기획부터 작사, 작곡, 편곡, 연주, 녹음, 편집 등, 뛰어난 프로듀서를 만나지 않고선 어느 것 하나 진행되기 힘든 작업이라 시간만 계속 지체되고 있었던 셈이었죠.” 그러다가 ‘이렇게 해선 안 되겠다. 도저히 못 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믿고 대화할 수 있는 음악활동가들과 논의를 하게 됐고, 믿음직한 프로듀서를 만남으로써 본격적인 음반 제작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2년 전인 2015년의 일이다. 음반 안 해설지 한 면 ‘함께한 분들’에 가득 새겨진 이름만 2백 명이 훌쩍 넘을 정도로, 김종환의 첫 음반 ‘새 길을 간다’는 그 개인의 작업이 아닌 수많은 이들의 응원과 축복 속에 탄생한 보석임이 분명해 보인다. 2백 명 넘는 그들 모두가 ‘김종환’의 증인이 돼 줬기 때문이다.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일반적으로 대중 음반이 나오면, 속칭 ‘가장 뜰 만한’ 한두 곡 중심으로 홍보와 광고가 집중된다. 모든 게 적자생존의 승부이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신자유주의의 생리가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다. 그런데 ‘늦깎이 신인’의 첫 음반 수록곡들이 공영방송 가요차트를 목표로 하며 만들어졌을 리는 없다. 제목부터 다르고, 노랫말도 느낌 자체가 다르게 다가온다. 복잡다단한 일상의 틀을 벗어나, 잠시 ‘거울 속의 나’를 마주 대하는 실감이라고 할까? 김종환 씨한테 가장 잘 알려지기를 바라는 그런 노래가 아닌,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곡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자신의 이름 석 자로 만들어진 음반의 수록곡은 물론 열 손가락 깨물기와 같겠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짠한’ 곡이 있기 마련 아닐까 싶었다. 그가 선택한 곡은 ‘소풍날’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들뜬 마음으로 엄마한테 김밥 싸달라고 하던 때였죠. 제가 생각할 때는, 전혀 부담감 없이 다른 애들하고 제가 비슷하다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저의 장애를 본 당시 담임선생님은 제가 부담스러웠나봅니다. 장애인을 보기도 힘들고, 저 정도의 지체장애인이면 굉장히 중증장애로 보이던 시절이었어요. 왜냐, 정말 중증인 사람들은 아예 밖으로 나오지 못하니까, 그 당시 외부생활이 가능한 장애당사자들 중에는 저의 상태가 중증으로 비쳤던 거죠. 그때 선생님이 ‘종환이는 부모님 모시고 와’ 하셨던 그 말씀의 의미를 그때는 몰랐어요. 그날의 제 얘기인 거죠.”
12곡이 수록된 ‘새 길을 간다’가 <함께걸음> 독자 여러분을 포함한 아주 많은 이들에게 환영받는 음반이 되기를 기대한다. 하나하나의 곡들이 다 다른 의미를 담고 있고, ‘나’의 얘기이자 ‘너’와 ‘우리’의 얘기들로 가득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2년 동안 이 음반 작업을 이유로 다하지 못했던 현장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야겠다는 계획 속에 다시 빠져드는 김종환 씨, 그의 한마디를 그의 노랫말과 함께 마무리 인사로 남긴다.
“장애인운동의 가장 진보적인 단체에서 일하는 활동가로서, 조직이나 중증장애인 당사자들한테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이바지할지, 그런 것들을 늘 고민하고 있죠. 해야 할 일은 끊임없이 계속 제 발등 위로 떨어질 겁니다. 벌써 시작된 게 있고, 이미 진행 중인 과업들도 있으니까요. 이젠 다시 현장에서 뵙겠습니다. 늘 함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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