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 사람 사는 이야기


꿈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 : 사진작가 장종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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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과거를 회고하는 드라마가 최고 인기라고 한다. ‘현재’가 재미없다는 의미가 된다. 사는 거나 대인관계, 당면한 생계나 생활을 위한 모든 게 불만이고 불안하다는 증거 아닌가. 국민을 즐겁게 만드는 정부가 없고 국민을 기쁘게 할 정치마저 없으니, 서민들은 현실의 암담함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과거’의 추억에서 위안 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긴 휴대전화와 스마트폰으로 인생을 시작한 이들한테 공중전화의 추억을 언급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십여 분 넘게 줄을 서며, 급한 통화를 하기 위해 묵묵히 순서를 기다려야 했던 공중전화의 애환과 설렘에 새삼 젖어드는 이유는 단순하다. ‘살아있다는, 사는 맛’이 그때 있었다는 거다. 이웃이 있었고 ‘동네’라는 공동체가 있었다. ‘1등만 기억하고 인정하겠다’는 오늘날에 그런 회상만 되씹고 있어야 하는 대한민국이 됐다는 거, 왜 갑자기 이런 나라가 되어버렸고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도 모를 현실은 모든 게 난망할 따름이다.
이런 시절에 카메라의 ‘필름’이란 의미를 언급하는 이를 만나게 돼서 정말 반가웠다. 이번 만남의 주인공 장종근 씨의 입에서 필름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수십 년 시공간을 단번에 넘나드는 느낌이 밀려들었다. 디지털 세대가 당연히 받아들이는 사진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필름’이라는 거, 이건 잠시나마 심적인 휴식 공간이 등장했다는 의미와 같았다. 이번 ‘사람 사는 이야기’는 그 쉼표처럼 천천히 과거와 오늘을 둘러보고자 한다. 청각장애를 가진 그를 위해 대화의 손짓을 함께 나눠준 수화통역사 김미희 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이 지면으로 대신 전한다.


기억으로 떠올리는 ‘소리’

“태어난 이후로 열병과 같은 후천적인 요인은 없었다고 하니, 저의 청각장애는 선천적인 게 맞는 거겠죠. 부모님께서도 제가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런 상태였다고 하시니까요.”
그렇다면 ‘소리’라는 개념은 알고 있을까? 장종근 씨는 청력이 갑자기 안 좋게 된 2년 전까지의 과정을 먼저 설명했다. 그러니까 그 이전까지 ‘최소한의’ 소리 정도는 들을 수 있었다는 뜻이 된다.
“어릴 때의 꿈은 자동차나 비행기 같은 분야를 만드는 쪽으로 관심이 많았어요. 초등학교 당시도 친구들과 잘 어울렸거든요. 그런데 당시의 보청기는 목에다 매다는 모양새였어요. 아이들은 그걸 라디오라고 불렀죠. 그런데 그게 보청기라는 사실을 애들이 알게 된 후부터는 애들이 저를 따돌리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저를 부르는 호칭이 달라졌죠. ‘벙어리’라고요.”
그 이전까지는 보청기를 통해 듣는 게 가능한 청각장애 4급이었는데, 2년 전 어느 날 새벽에 잠을 자던 중 귀가 몹시 따가워졌단다. 씻다가 물이 들어간 건가 싶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너무 늦었다고, 그렇게 갑자기 안 들리는 상황이 되어버린 거란다. 현재는 청각장애 2급으로 등급도 변경된 상태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젠 아예 아무것도 안 들린다는 건가?
“네, 이젠 아예 안 들립니다. 진동 정도만 느낄 수 있죠. 기차 지나가는 소리, 비행기 소리, 차량의 경적 소리 정도는 접하고 있습니다. 소리를 직접 듣는 게 아니라, 진동으로 소리의 느낌을 느끼는 거죠. 일상의 소리들은 전혀 들을 수가 없고요.”
좀 민감한 질문인 것 같아 양해를 미리 구했는데, 그렇다면 마음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소리는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노래란다. 아주 크게 울리던 그런 진동소리. 다른 사람들한테는 소음이라고 느껴질 수가 있겠지만, 자신한테는 소리로 들렸던 많은 노랫소리들이 기억에 남아 있다고 한다. 기억으로 소리를 떠올려야 한다는 거…, 안타까운 일이다.


배우고 또 배우고, 익히고 또 익히고

장종근 씨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는 일반학교에서 생활했단다. 하지만 싸움이 많이 나고 놀림도 계속 받다 보니까, 그 어린 마음이 참고 견디는 데도 한계점에 다다랐던 모양이다. 더 이상 적응할 수 없어, 5학년 때부터는 농아학교로 옮기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마포에 있었던 구화학교를 다니게 됐는데, 어느 정도 발성이 가능했던 그에게 학교에선 수화 대신 말하는 걸 중심으로 교육했단다. 어머니께서도 말하는 연습에 집중해라 하셔서, 수화는 훨씬 늦게 접하게 됐다고 한다.
후천적인 시각장애의 경우는 점자를 익히는 데 너무 많은 노력과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는 점이 난감한 상황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청각장애를 뒤늦게 얻게 됐을 때, 수화를 처음부터 익히는 건 어려움이 없었을까? 그는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고 기억된단다. 구화학교를 졸업하고 목공예기술을 집중적으로 배우는 기술학교에 들어갔는데, 말을 하지 못하는 청각장애인들만 배우는 곳이라서 그쪽 선배들과 대화를 나누던 2년 동안 수화를 익히게 됐다는 것이다. 지금은 물론 자유로운 대화가 모두 가능하단다.
“여러 기술을 배우는 기술학교였는데, 저는 거기서 목공예기술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하회탈 같은 탈을 만드는 거죠. 나무로 오리 같은 동물 모양, 꽃과 화분의 모양 같은 다양한 작품들을 만들었는데, 저는 탈을 제작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탈의 얼굴 모양을 일일이 칼로 파면서, 하회탈과 같은 완성품을 만드는 것이죠. 2년 과정으로 다녔습니다.”
이후 다른 종합직업전문학교에서 선반기술을 배우다가 중도에 포기하기도 했고, 또 다른 장비운전학원에 6개월 동안 다니면서 지게차 기술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생활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이어갔다는 그의 설명이 뒤따랐다. 그 모든 게 지금의 그를 호칭하는 사진작가와는 다른 길들뿐이다. 먼 길을 돌아서 온 건지, 아니면 그 당시에도 사진은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는 건지, 이젠 그 대목을 들을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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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내일을 설계한다

“사진을 처음 만나게 된 건 18살 때였어요. 아버지 친구분이 카메라로 촬영을 즐기셨는데, 카메라의 뒤쪽 덮개를 열고 필름을 끼워 넣은 다음 촬영을 하고, 다시 필름을 꺼내 현상과 인화를 거치는 모든 과정이 신기했고 궁금증이 생겨났죠. 그래서 저도 직접 필름을 넣고 촬영을 시작하게 됐어요.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죠. 하지만 무엇이 이상한 건지, 뭐를 잘못한 건지를 곰곰이 따지면서 촬영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까, 저만의 진지한 취미로 받아들이게 됐어요. 더 집중해서 배우게 됐고, 그 생활이 지금까지 27년의 경험으로 쌓이게 됐네요.”
겪어본 사람은 안다. 필름 값과 현상인화비가 얼마나 큰 부담으로 남게 되는지를 말이다. 그렇기에 단 1장을 찍더라도 생각을 반복하게 되고, 구도를 바꾸고 또 바꾸는 작업이 일상이 될 수밖에 없다. 디지털 시대로 사진을 처음 접하게 된 이들은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를 대목이기도 하다. 찍고 지우면 그만인 디지털 이미지로는 경험할 수 없는 세계가 바로 필름카메라의 촬영이라는 것이다.
“한 컷 한 컷 촬영 때마다 집중하는 버릇은 그때 이미 몸으로 익혔던 것 같아요. 당시 산의 풍경을 찍는 게 가장 좋았습니다. 자연의 특이한 꽃들을 찾아 사진으로 담는 것도 좋았고, 여러 행사나 지인들의 모임 등에서 촬영을 이어가다 보니까 아예 사진 작업에 매진하고 싶다는 진지한 고민과 설계를 하게 됐죠. 35살 내외였던 당시부터 사진에 모든 걸 걸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어요.”
그가 여러 자격증을 취득했던 바대로 해당 분야의 직업을 갖고 생활하긴 했지만, 스스로의 적성에는 맞지 않는다는 회의가 많았다고 한다. 하는 일과 기대치가 다를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마음 가는 곳으로 인생의 길이 모아지는 법 아닌가. 그때부터 장종근 씨는 사진 하나에 관심을 집중시켰고, 사진 이외의 것엔 시선을 돌리지도 않게 됐단다.
“가장 좋아하는 촬영은 야경촬영입니다. 도시의 야경, 오가는 차량들의 불빛 모습들, 산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도시의 광활한 모습 같은 걸 즐겨 촬영하죠. 야경에 중심을 두다 보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삼각대는 항상 휴대하며 다니게 됩니다.”
얼마 전부터는 새로운 목표를 설계하게 됐단다. 촬영실과 카페가 한데 존재하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것!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멋진 공간이 머릿속에 연출되는데, 그는 진지한 준비로 꼭 그런 자리를 만들고 싶다고 한다.
“아내가 곧 바리스타가 돼요. 아내와 함께 일을 하는 공간으로 만들 겁니다. 카페는 아내가 담당하고, 한쪽에 촬영의 공간을 만들어서 사진관의 역할도 함께 운영되도록 꾸밀 거예요 카페 벽에는 저의 작품들을 액자에 담아 상설전시회 같은 분위기도 낼 겁니다. 작품이 마음에 들면 손님들이 구입할 수도 있게 할 거예요. 지금까지 이런 구성의 카페는 본 적이 없는 것 같거든요. 단순히 잠깐 대화를 나누고 일어서는 카페가 아니라, 새로운 분위기에서 색다른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쉼터가 될 수 있도록 하나하나 열심히 준비할 겁니다.”
정말 그런 공간이 만들어진다면 단골손님이 아주 많아질 것 같다고 하니까, 장종근 씨는 아주 밝게 웃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데, 실제 그런 자리에 앉아 쉴 수 있다면 얼마나 편안할까. 대화의 분위기가 난데없이 창업 관련 토론으로 뒤바뀔 만큼, 장종근 씨의 마음은 이미 꿈을 실천하는 방향으로 굳게 자리를 잡은 듯했다.
“더 많이 배우고 익히는 게 우선인 것 같습니다. 훨씬 좋은 카메라들은 계속 출시되지만, 신기술에 무작정 따르는 것보다는 촬영기술을 갖추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아주 값비싼 카메라와 렌즈들을 자랑거리로 삼으며 무겁게 휴대하는 이들이 너무 많죠. 그런 이들일수록 초보적인 아마추어인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하지만 기술에 투자하는 게 먼저입니다. 사용하는 제품이야 때가 되면 어차피 바꾸게 될 테니까요.”
그는 등산을 정말로 좋아하는 모양이다. 등산 얘기가 나오자마자 덕유산부터 태백산까지 기억에 남는 대자연의 경험들을 한참동안 풀어놓았다. 여행도 즐기는데, 세계를 두루 돌며 색다른 세상을 촬영하고 싶다는 꿈도 크게 간직하고 있단다. 세계여행은 모두의 꿈이라고 한마디 던지자, 그는 그날 웃음 중 가장 큰 함박웃음을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무엇보다 먼저 가정을 책임지는 남편이자 아빠가 되어야겠죠. 가족과 같은 취미생활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아빠가 되고 싶어요. 제가 장애를 가지고 살면서 당했던 불이익 같은 걸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저의 두 아이들은 좋은 직업을 갖고 멋진 인생을 살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교사의 꿈을 종종 언급하는 딸이 자신의 목표를 이루면 좋겠고요. 아들은 검사가 되면 좋겠는데, 아빠의 욕심이지만 검사 같은 인생을 살기를 기대해요. 무엇보다도 아빠가 먼저 확실한 자리를 잡고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겠죠. 새해엔 좋은 꿈과 목표 설계에 꼭 한 발 더 다가가기를 기원합니다. 다 잘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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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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