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장애청년 신홍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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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한 인물과의 만남을 소개할 때마다, 독자들의 반응은 매번 다른 온도로 전해진다. 그런데 유독 강한 호응이 한데 모이며 뜨겁게 다가올 때가 있다. 좋은 분의 인생 이야기를 정말 잘 읽었다는 호평이 여기저기서 일제히 찾아드는 것이다. 지난 1월호의 주인공이었던 한빛맹학교 교사 안승준 씨의 경우가 그랬다. 그런데 그 안승준 씨가 제안 하나를 꺼냈다. 자신이 이 지면에 꼭 추천하고 싶은 인물 1인이 있다는 것이다.
진지한 인생 이야기를 들어야 하기에, 가급적이면 일정한 연령대가 된 인물들을 선택하는 게 평소의 방식이었지만 이번은 예외가 됐다. 대학을 두 번이나 연속으로 다닌다는 28세의 청년이기에 나름의 이야기도 충분할 듯 보였지만, 무엇보다 안승준 씨의 적극적인 추천의 의미를 알고 싶어 오히려 호기심이 일기도 했다. 어떤 인물일까? 지난해 말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40%가 넘는 지지를 받고도 당선의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대학가를 뛰어넘어 이 사회에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던 신홍규 씨가 이번 호의 주인공이다. 첫인상이 정말 좋았던 사람과의 시간, 그 만남의 기록을 여기 이 지면에 옮겨놓는다.
진지한 가치를 인생의 선물로 받다
신홍규 씨. 28세이고 대학 마지막 학년을 남겨놓은 상태에서 휴학 중인 남자. 몇 마디 첫인사와 함께 나눈 눈빛만으로도 이 인물의 첫인상은 합격점을 받을 만했다. 아무리 멋지게 포장하려 해도, 감출 수 없는 건 눈빛으로 전하는 인생의 깊이다. 내면이 아주 단단하게 다져진, 목표의식과 실천의지가 확실한, 긍정의 힘을 믿는, 배려와 겸손의 삶을 사는 인물임이 분명함을 그는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주대한 이들에게 드러냈다.
“승준이형은 제가 재작년부터 형님으로 모시고 지냅니다. 공모전을 같이 준비했거든요. 한국장애인재활협회에서 팀을 만들어 외국으로 연수 보내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제가 9기로 참가했을 때 승준이형이랑 같은 팀으로 진행했었어요. 형이 멘토처럼 정말 많이 도와주셨거든요.”
이미 사회학 전공으로 대학을 다니고 졸업했는데, 다시 수능을 치르고 대학에 또 들어갔단다. 그것도 같은 사회학을 연이어 전공하면서 말이다. 두 차례의 대학생활, 같은 전공의 연속, 이건 무얼 의미하는 걸까?
“아무런 포장도 없이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애초엔 정치학도 뜻을 두고 있었는데, 여러 가지를 따져보면서 현실적으로 제가 맞춰볼 수 있는 게 무엇이고 어떤 부분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제가 대학을 새로 갔던 게 공부를 더 하겠다는 의미보다는, 사회적인 제 역할을 어떤 면에서 더 찾아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을 계속 끌어안은 결과였던 거죠. 물론 공부가 다 된 게 아니었기에, 저 나름의 길을 찾아내고 싶어 계속 사회학을 전공하게 됐습니다.”
스무 살 나이에 처음 대학생이 됐을 때, 많은 선배들이 그에게 학생회 활동을 권해줬단다. ‘너는 많은 일을 해보는 게 좋겠다. 어렵게 대학에 왔고,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나 얘기들이 있지 않은가. 앞에 나서서 누군가를 위해줄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게 네게도 좋을 것 같다.’ 그런 의견과 권유가 진지하게 전해졌기에, 신홍규 씨는 당시 학부 학생회장까지 맡아 일을 하면서 정말 많은 걸 얻는 경험을 하게 됐다고 한다.
“지금 갖고 있는 저의 존재 하나가 누군가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많은 영감을 만들어낼 수 있구나 하는 것들을 정말 많이 느끼게 됐어요. 제가 봉사나 도움만 받는 걸로 보이는 장애인이 아닌, 앞에 서서 누군가를 위하는 삶을 살며 그들을 위해 함께할 방법들을 찾아내는 과정들이 제겐 굉장히 큰 보람으로 다가왔거든요. 또한 저의 그런 모습과 활동을 보면서 주위의 학우들이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많이 느끼고 배웠다는 얘기를 많이 해줘서, 그 모든 경험이 제 안에 너무나 소중한 가치로 남게 됐던 거예요. 저 자신과 타인을 위한 영감을 얻고 만들어내는 삶, 거기에 대해 제 인생이 진지한 집중을 하게 된 것이죠.”
권리는 찾는 자의 것입니다
▲ 학생회장 선거 유세 당시 |
그런데 그 영감을 찾던 진지함이 여물지 못했던 걸까? 그는 졸업 후 이 땅의 구성원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대기업에 입사를 했는데, 막상 현실로 부딪친 직장생활은 그에게 커다란 물음표만 던져줬던 모양이다. 영감의 가능성을 발현시킬 구석 자체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모자란다는 것, 게다가 거대한 기계의 일개 부품이 돼서 일하는 게 일상의 전부라는 것!
신홍규 씨는 대학 내내 간직했던 자신의 가치를 실현시킬 방안을 찾고 또 찾다가 결심한 게 새로운 수능시험이었단다. 짧게 정리한다면 이렇다. 첫 번째 대학에 들어가서 2010년에 학부 학생회장 일을 하며 졸업했고, 2011년엔 대기업의 직장생활, 2012년에 다시 수능시험을 준비해서 2013년에 두 번째 대학 새내기가 됐다는 얘기가 된다. 새 대학의 입학동기들과는 다섯 살 차이가 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명문사학이라는 그 대학의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가겠다는 건 언제 뜻을 굳힌 걸까?
“저만이 할 수 있는 걸 찾게 됐던 것들이 계기라면 계기가 될 수 있을 텐데요. 대학 총학생회 일을 하면서 겪었던 과정들이 저를 더 큰 목표로 이끌었던 것 같아요. 총학생회의 장애인 분야를 맡아 사업을 진행했는데,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든다면 제가 이 대학에 들어와서 가장 놀랐던 대목이기도 한데요. 고연전(고려대와 연세대의 정기 대항전. 운동 분야 중심으로 매년 진행됨)이 학교에서 굉장히 큰 행사인데, 여기에 참여를 해봤던 장애학우들이 하나도 없었다는 거예요.”
고연전, 또는 연고전이라 불리는 연례행사, 이 큰 축제의 마당에 장애학우들이 참여했던 적 없었다는 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신홍규 씨는 당연히 응원전에 참가하려는 마음으로 몇 경기를 볼 거냐 하며 가볍게 주위에 물었는데, 교내 장애학우들의 대답인 ‘우린 한 번도 참여해 본 적이 없다’는 말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얘기를 나눠봤어요. 장애학우들은 표를 구하기도 어렵고, 베리어프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보니까 사람들한테 치이며 줄 서는 것도 어려워서 아예 참가할 생각을 안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총학생회 일을 하는 입장으로 그 모든 입장권을 다 구해서, 장애학우들의 관람석 자리를 지정하고 모두가 함께하도록 만들었어요. 이 대학 총학생회 역사가 50년이 넘어가는데, 언제 이런 가치들을 논해 볼 만한 기회가 만들어질까 싶어서 계속 의견을 제시했거든요.”
그런데 그의 설명을 듣는 와중에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목에 박힌 가시처럼 반복해서 걸렸다. 아니, 사학의 최고 명문이라는 그 대학의 현실이 이 정도라면, 전국 모든 대학교들의 장애인 편의시설과 배려는 도대체 어떤 수준이란 말인가? 신홍규 씨는 단적인 예를 꺼내놓았다. 어느 경기장이나 법적으로 마련되어 있는 장애인 관람석, 그 자리가 그동안 응원단의 음향 앰프를 설치하는 공간으로 활용돼 왔다는 것이다.
“그 자리를 장애학우들을 위한 전용 공간으로 다시 확보했습니다. 처음으로 고연전에 직접 참가하게 된 학우들의 만족도는 정말 높았어요. 그런데 모든 장애인의 일이라는 게 그렇듯이, 이렇게 하나가 개선되고 좋아졌다고 해서 섣불리 만족하긴 어렵잖아요. 하나를 성취하고 나면 더 큰 과제들이 연이어 주어지게 되니까, 그런 문제점들에 관한 대화를 정말 많이 나누게 된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행사 뒤 평가회의까지 하면서, 우리들의 권익과 권리를 위한 수많은 토론을 나눌 수 있었으니까요.”
하나의 밀알을 심었습니다
그런 모든 과정들이 총학생회장 선거 출마로 향하는 길이 됐던 걸까? 그렇단다. 그렇게 하나씩 기존의 판을 바꿔가다 보니까, 총학생회장 선거가 가장 무게감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고 한다. 캠퍼스 내에서 항상 놓치며 넘어갔던 장애인권의 공론화, 외국인 학생들의 배려 문제, 더불어 성소수자 학생들처럼 사회적 약자들로 구분되는 대학 내 구성원들의 권리를 중점적으로 내세우는 공약과 방안들을 찾아 선거에 임하게 됐다는 것이다.
“40%라는 득표 수치, 그건 그렇게 많은 지지와 표를 보내주신 학우들이 더 놀랍고 대단한 성과를 내신 거라 판단해요. 지난 1980년대처럼 거대한 시대적 이슈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대학의 총학생회장 선거는 ‘강의실 책걸상을 이렇게 바꾸겠다’ 내지는 ‘어디어디에 자판기를 설치하겠다’는 공약이 훨씬 더 표심에 다가가는 세상이 됐거든요. 그런데 그런 질서 앞에다 대고 전혀 다른 맥락의 공약을 내세우며 선거운동을 했으니, 무모해 보이는 면도 적진 않았죠. 사실은 이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충만할 만큼 당돌하게 선거에 임했거든요. 결과론이지만, 이런 논의와 고민을 학내에 품도록 만들었다는 데 저의 출마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40%의 득표는 엄청난 발상의 전환을 이끌어낸 원동력으로 남게 된 것이기도 하고요.”
비록 선거에선 낙선했지만, 신홍규 씨한테는 어마어마한 자산이 남겨지게 된 모양이다. 100명 가까운 친구들이 선거운동원으로 같이 움직였는데, 더욱이 ‘장애’의 ‘ㅈ’도 모르던 친구들이었는데, 누구 하나 후회하는 이 없이 세상을 바꾸려는 운동에 더욱 매진하겠다는 다짐을 나누게 됐다는 것이다. 그 친구들이 지금 대학과 대학생 문화의 인식개혁을 위한 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고, 그러한 활동의 태동이 선거 출마로 밑불을 놓게 됐다는 점을 그는 정말 따뜻한 심적 자산으로 간직하게 됐다고 한다.
“저는 선거가 끝났다고 선거 과정의 모든 화두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선거 이후에 이 세상에서 더 큰 가치를 키워나갈 수 있는 밀알이 된 거잖아요. 저는 물론 앞으로도 계속 변화와 인식개선을 위한 길을 나아가겠지만, 총학생회장을 비롯한 어떤 임무라 해도 새로운 가치와 희망을 간직한 후배들이 계속 등장하고 도전할 게 아니에요. 저는 제가 밀알을 뿌리고 심어놓았다는 큰 자부심을 간직하고 있어요.”
어머니, 감사합니다
신홍규 씨는 모든 면에서 자신감에 넘쳤고 당당했다. 무엇보다 큰 가치로 느껴진 건 실천과 도전의 힘이었다. 말만 앞세우고 비판만 늘어놓는 게 아닌, 그는 대안을 찾아서 그 대안을 실제 구현할 방안을 드러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게다가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는 자세로 스스로의 의견을 제시했다. 그때까지 그가 가진 장애가 뭔지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그만큼 적극적인 대화가 토론의 형식으로 진행됐다는 의미가 된다.
“뇌병변인데 등록은 지체장애 2급으로 돼 있어요. 지금 등급을 받으라 하면 달리 나올 것 같은데요. 제가 어릴 때 아예 못 걸어서, 재활치료를 정말 죽어라 하고 해서 이만큼이나마 걷게 됐거든요. 원래는 걷는다고 말하는 것도 민망할 만큼 그냥 이동하는 정도였는데, 고등학교 때 수술을 해서 뼈를 맞추고 근육을 자르는 그런 과정을 거친 뒤에 지금의 상태가 됐어요. 물론 끔찍한 재활의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요.”
뇌병변인데 지체장애라고? 태어날 때 의료사고가 있었단다. 멀쩡하게 출산되던 아이를 병원 측이 일정한 아니, 치명적인 과실을 저질러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홍규 씨는 자신의 장애를 말해야 할 때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의 질문에 매번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곤 한단다.
“제가 어릴 때 하도 걷지 못하니까, 저를 데리고 병원에 가셨대요. 아기 걸을 때가 한참 넘었는데도 왜 못 걷느냐고, 그때 처음으로 아시게 됐대요. 얘가 뇌성마비이고 평생 못 걷고 평생 공부도 못할 거라고요. 그때 너무 놀라신 저의 어머니가 정말 별의별 생각까지 다 하셨대요. 극단적인 선택까지 떠올리고 실행하려 하셨다는 거죠. 이건 제가 다 성장한 다음 어머니께 듣게 된 얘기예요. 그만큼 극도의 심란한 과정을 거치신 다음에야, 어머니는 이왕 이렇게 살게 된 거라면 정말 제대로 아이를 키우며 살아보자는 다짐으로 바꾸셨대요. 그때부터 지옥의 재활훈련과 열심히 공부시키는 과정이 뒤따랐죠. 어머니의 기대까지 제가 이뤘는지는 모르겠지만, 뒤늦게 공부해서 대학에 가고 이렇게 활동하며 살게 된 건 모두 다 어머니 평생의 의지가 실현된 거라고 저는 믿고 있어요.”
장애는 저의 자존감입니다
어린 시절 그는 학교를 오갈 때마다, 마라톤 선수들이나 할 법한 다짐을 한 뒤에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단다. ‘오늘도 한번 해보자!’ ‘오늘도 집까지 걸어가 보자!’ 남들은 십여 분 걸릴 거리를 한 시간 넘게 걸어야 했다는 거, 그런데 신홍규 씨의 어린 인생에서 대반전의 사고방식이 그때 등장했던 것 같다. 그러한 도전의식 내지는 의욕이 매일 쌓이고 반복되다 보니까, 그게 그 누구도 느끼지 못할 성취욕과 보람으로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소풍을 간다, 이러면 소풍 간다는 데 들떠 있는 게 아니라 어마어마한 결의에 차 있어야 했어요. ‘내가 완주하고 만다!’ 무슨 국토대장정을 하는 것처럼, 혼자 이글이글 타오르며 출발을 하고 끝까지 함께하려 모든 힘을 다 쏟았거든요. 그래서 남들에겐 단순했을 그 소풍 하나를 갔다 오면, 저는 거의 절반은 시체가 돼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어요. 그런데요. 그렇게 도전하며 뛰어들다 보니까, 그런 하나하나들이 말도 못할 성취로 제게 되돌아왔던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제 삶 속에서 저의 장애는 뭔가 아픔을 통해 죽어가는 게 아니라, 더 많은 것들이 제 안에 쌓여간다는 긍정의 힘으로 작용하게 된 거죠.”
장애로 인해 긍정의 힘이 쌓여간다? 중요한 화두가 등장하는 것 같아, 같은 대목을 재차 질문하며 반복 확인을 했다. 같은 대답이었다.
“그렇게 쌓이다 보니까 어릴 때하곤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장애를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 덕에 지금 제가 저의 삶을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걸 많이 느끼게 됐어요. 그래서 지금은 장애와 저를 절대 떼어낼 수 없게 됐거든요. 오히려 장애 때문에 지금 제가 살고 있다고 믿어요. 이게 가장 큰 저의 존재감이고 제 삶의 가르침이며, 선생님이자 방향이라고 생각을 하게 됐거든요.”
뭐랄까, 무시무시한 정신력의 발현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이 정도의 판단과 결단은 하루 이틀의 과정 속에서 탄생하는 의식의 생명체가 아님은 분명하다. 대장간에서 시뻘겋게 두드림을 당한 쇠붙이만이 천년의 역사를 견디는 공구나 문화재로써 재탄생되는 법 아닌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걷든 간에 자기 자신만을 위한 길이 아닌 이타적인 방향으로 향할 것 같다고 하니까, 신홍규 씨는 만남의 시간 내내 인상적이었던 겸손의 몸짓과 눈빛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단 한 번도 그런 거창한 표현을 떠올려 본 적은 없고요. 오히려 저는 누군가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렇게 살아가고 판단하며 결정하는 저 자신이 된 것 같아요. 이 말이 맞는 것 같네요. 저는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저는 진짜 막 가슴이 뛰거든요. 제가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그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를 바꿔내고, 그 사람들과 함께 뭔가 더 큰 변화를 고민하며 찾아가는 게 저 스스로도 더 많은 보람을 느끼고 있어서 하는 거예요. 제가 누군가로부터 영감을 받고, 저의 영감을 통해서 누군가가 변화를 이룰 수 있다면, 그렇게 하나씩 세상이 바뀔 수 있다면 그것 이상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요?”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것
길게 적고 싶은 내용이었는데, 지면의 제약 핑계로 짧게나마 꼭 언급해야 할 그의 발언이 있다. 대학생활 내내 단 한 번도 듣고 싶은 강의, 듣고 싶은 교수님의 수업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수강신청을 하려면 비장애학생들처럼 어느 교수의 강의가 어느 건물 몇 층에서 몇 시에 진행되는가를 살피는 게 아니라, 그의 경우는 ‘무조건’ 강의실 이동의 동선을 먼저 살피며 ‘최단거리’를 최우선 조건으로 결정해야 했다는 것이다.
“정말 안타까운 수강신청 포기라는 거,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뭔지 어느 하나만 언급하진 못하겠어요. 안타까운 정도가 아니라, 이젠 아예 체념 상태의 단계가 되어버린 거죠. 강의 내용이나 어느 교수의 명성 같은 걸 따질 필요 자체도 없이, 강의 중간의 짧은 쉬는 시간 동안 이동이 가능한 거리의 강의실인가, 이것만 최우선으로 따져야 한다는 거죠. 외국처럼 당당하게 아니, 미리 알아서 배려 차원의 조치를 받는 문화 자체가 없으니, 알아서 체념을 해야 한다는 건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에요.”
지금도 길을 걷다 보면, 거리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의 거의 전부는 ‘신홍규’라는 인물을 갖가지 표정으로 ‘빤히’ 쳐다본단다. 힐끔힐끔, 쑥덕쑥덕, 킥킥 웃는 비웃음과 함께 아이들과 지나친 다음 뒤돌아보면, 십중팔구 아닌 100% 자신과 눈이 다시 마주친다고 한다. 장애를 가진 한 인물을 웃음의 소재로 바라보는 어린 눈동자들이 매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가 걷는 몸자세를 흉내 내면서 깔깔 웃고, 눈길이 마주쳐도 거리낌 없는 욕설을 남기며 뛰어가는 게 21세기 대한민국 어린 새싹들의 공통된 자세라는 점은 몹시 씁쓸한 현실이다.
“그런 제가 독일에 갔을 때의 일인데요. 일행들과 동떨어져서, 나름 아주 급하게 뛰어갈 일이 있었어요. 저의 몸동작이 얼마나 엉거주춤한 상태였는지는 상상으로 떠올리셔도 될 텐데요. 한국 아이들로 인해 갖게 된 마음의 상처가 워낙 깊기 때문일까요? 그렇게 제가 급하게 뛰어가고 있는데, 저 앞에서 독일 아이 하나가 다가오고 있는 거예요. 너무 급한 상황이라 안 뛸 수는 없고 제 눈에는 그 아이만 보이는데, 정말 난감한 상태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그냥 허겁지겁 뛰는 동작을 계속했어요. 그런데 그 아이는 저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거예요. 너무 이상해서 지나친 다음 뒤돌아보니까, 그 아이는 그냥 자기 갈 길을 가고 있는 거예요. 제가 너무 놀라서 이후 십여 번을 같은 상황에 도전해 봤어요. 똑같았어요. 아무도, 정말 단 한 명도 저를 쳐다보지 않는 거예요.”
한국에선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 독일에선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이 된다는 거, 그는 정말로 많이 놀랐단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생각 자체가 국민성 차원에서 다르구나’ 하는 현실을 아주 깊게 체험했다는 것이다.
“저는 대한민국 사회에선 이방인이 아니죠. 저는 우리 국민의 일원으로서, 같은 사람으로서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땅에선 이방인이 되어 있어요. 저의 어떤 ‘다름’으로 인해서요. 그런데 정작 제가 이방인으로 갔던 독일에서는 제가 이방인이 아니었어요. 아예 그냥 자연스러운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는, 피부색과 인종과 외모가 모두 다른 이방인인데도, 독일에선 동양의 한 장애남성을 일상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는 거죠.”
혹시라도 ‘익명성’이란 부분 때문에 동양인이라는 ‘어느 이방인’을 그들이 아예 무시했다고 판단하실 독자가 계실 것 같아, 마무리 차원에서 부연설명을 덧붙여야겠다. 물론 신홍규 씨의 발언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다.
“독일은 반성하는 문화가 굉장히 깊게 자리 잡고 있잖아요. 지금 유대인들에 대한 존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한 나치가 장애인들을 모두 학살했던 과거의 역사 때문에, 지금도 장애인들을 대하는 반성의 자세가 아예 국민성으로 자리를 잡고 있어요. 그런데 그걸 실제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게 됐다는 건 정말 놀라운 문화적인 충격이 되는 거죠.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시내버스에 전동휠체어 3대가 동시에 탑승하는 장면이 가능할까요? 그런 시도를 하려 하면 어떤 반응부터 나올까요? 그런데 독일은 달랐어요. 버스를 세우고 운전기사가 내려와서 탑승에 필요한 경사로를 만들어주고, 전동휠체어 모두 자리를 잡도록 실내의 모든 승객들이 도와줬어요. 내릴 때는 운전기사의 도움은 물론, 일반승객들이 모두 함께 움직이며 이방인일 뿐인 대한민국 국민들을 안전하게 하차하도록 도와줬고요. 이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갈 길이 먼 이 땅의 현실을, 또한 우리가 무엇을 요구하며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뚜렷한 지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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