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느낌이 오늘의 나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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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발성 경화증(Multiple Sclerosis)’이라고 했다. ‘sclerosis’라는 단어는 솔직히 처음 봤다. 열심히 공부를 안 했던 탓일까? ‘동맥경화’를 ‘sclerosis of the arteries’라고 표현하는 걸 보니, 모르는 단어라 치부하며 그동안 무덤덤하게 넘어갔던 모양이다. 중추신경조직을 구성하는 신경세포들 끝에 있는 수초들에 염증이 생겨서 손상이 발생했다가 회복되기를 반복하는 증상인데, 점점 악화되는 과정으로 흘러가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 그 증상의 악화로 이젠 얼굴을 제외하곤 왼손 하나만 움직임이 가능하다는 이를 만났다. 시집을 출간한 시인으로, 지역사회 안에서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는 추천의 언어들이 <함께걸음> 편집부에 연이어 찾아들었다.
그 주인공인 시인 황신애 씨가 이번 ‘사람 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의 표현을 빌린다면, ‘살아있는 왼손’ 하나로 그 많은 작품들을 적고 그렸다고 한다. ‘살아 있는 왼손’이란 묘사가 긴 여운을 남긴다. 글과 그림을 향한 오랜 꿈을 실현시키고 있는 그의 삶과 마주대하기로 한다.
아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발성 경화증 중에서도 저는 10%에서 15% 안에 들어가는 소수의 진행성이기 때문에, 일상생활이 가능한 다른 환우들과 달리 몸이 서서히 굳어가고 있어요. 이젠 왼손 하나만 남았네요. 하루하루의 변화는 아주 미미해서 항상 느끼는 무력증의 증상인가 보다 하지만, 한 달 전과 한 달 후를 비교하면 확실하게 드러나요. 제 몸이 얼마나 더 경직되고 증상이 심해졌는지를 제 몸 자체로 느끼게 된다는 거죠.”
황신애 씨와 만난 자리는 광주광역시였다. 서울 용산역에서 고속철도(KTX)를 타고 광주송정역에 내려서 지하철로 열두 개 역을 일단 이동한 뒤, 밖으로 나와서 택시를 타고 6천5백 원 가량의 비용을 치러야 하는 거리였다. 멀었다는 뜻이 아니다. 목적지를 향해가는 길 자체가 하나의 여행 같았다는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다. 만남에 대한 기대가 컸음을 의미한다.
활동보조를 담당한 분이 아파트 현관문을 열어줬고 안방 쪽에서 황신애 씨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는데, 뭔가를 계속 힘겹게 노력하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몰래 살피듯 안방을 살짝 들여다보니까, 손님이 왔는데 일어나서 맞이해야 한다는 긍정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황신애 씨 앞으로 다가가서 단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가장 자연스러운 자세가 가장 편안한 대화를 이끌어갈 수 있다고, 그러니까 평소 모습 그대로 누워계시라고 말이다.
그래도 괜찮겠느냐는 조심스러운 질문에 대답할 언어는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물론 ‘OK!’였다. “일반적인 사회생활은 다 하며 지냈죠. 너무 건강했고 그래서 훨훨 날아다니는 느낌 하나로 살았으니까요. 그런데 2003년 무렵부터 어지럼증이 찾아들고 몸이 너무 피곤해지기 시작했어요. ‘과로에 따른 스트레스인가 보다’ 그 정도로만 생각했었죠. 그런데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져서 동네병원에서 진료를 받다가, 한강 건너편의 서울아산병원으로 갔어요. 그때는 서울에서 살았거든요. 중증근무력증이래요. 그래서 3,4개월 동안 약을 먹으며 검사를 계속했는데, 제 느낌에도 이건 아닌 것 같은 거예요. 제가 병명이 빨리 드러나지 않는 체질이라는 의사들의 말을 믿기가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정밀검사를 해달라고 했죠.”
지금처럼 무한대의 인터넷 정보가 넘쳐나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황신애 씨는 나름의 노력으로 각종 자료를 찾고 모으면서 자신의 증상을 확인하고 또 확인해 봤단다. 그런데 의사의 진단과 자신의 증상은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고 한다. 구토가 일어나고 자꾸 쓰러지는 건 뇌종양에 가깝다고 판단한 환자 스스로의 요구에 따라, 입원을 다시 하고 재검사가 이뤄진 셈이다. MRI 등 정밀검사를 통해 드러난 건 왼쪽 뇌에 백 원짜리 동전만한 두 개의 흔적이었고, 의사들의 토론과 각종 검사를 통해 최종 확진이 내려졌단다. 희귀난치성 질환인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것이다.
“스테로이드가 유일한 처방인데, 대부분의 다발성 경화증 환자들은 일상생활이 가능해요. 정기적으로 약을 투여하면서, 겉으로 드러남 없이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불치’의 개념이 아니라 ‘난치’라고 하는 거예요. 극소수의 중증 환자들이 문제인 건데, 진행의 양상은 백이면 백이 다 다르다고 해요. 저 같은 경우는 몸이 굳어가는 거죠. 서서히 몸 한 부분씩 굳어가고 있어요. 아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젠 왼손 하나만 남았네요.”
▲ 시집에 담긴 황신애 씨의 그림 중 하나. 호주의 사회사업가이며 전도사인 닉 부이치치의 얼굴이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
자연스럽게 순응하기, 자연스럽게
처음 확진 판정이 났을 때는 우리나라에 300명이 안 되는 걸로 들었단다. 중증 다발성 경화증이 그만큼 희귀질환이라는 뜻이다. 그 다음에 들어보니까 500명 정도 된다고 했고, 의학이 하도 세부적으로 파고들다 보니까 지금은 1천 명 정도 된다고들 말한다고 한다. 어찌됐든 간에 다발성 경화증은 10만 명에 두세 명 비율이란다. 통계상으로 봐도, 전 세계 어디든 비슷한 비율의 희귀질환으로 분류되고 있다고 한다.
“다발성 경화증은 새로운 증상이 나타나면, 곧바로 신속하게 병원으로 가야 해요. 원래 몸에 있던 증상이 아닌 게 등장하면, 그게 바로 다발성 경화증이 재발했다는 신호인 거죠. 갑자기 뒷목이 아프다든지, 손이 무감각하게 저린다든지, 시력이 갑자기 흐려진다든지 하면, 즉시 가까운 응급실에라도 달려가서 주사액으로 스테로이드 처방을 받아야 해요. 재발이 시작되는 그 시점을 놓치면 새로운 파괴가 진행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스테로이드로 얼른 잡아야 해요. 얼른 잡아서 일단 정지시킨다고 표현해야 할 것 같네요.”
황신애 씨는 1년에 두 번 정도 재발이 일어났단다. 그만큼 더 나빠지고 심각해졌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사람의 몸이라는 건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적응해가는 것일까? 그는 2007년이 시작되자마자 고향과 가까운 광주광역시로 내려왔단다. 그리고 다짐을 했다고 한다. 재발하더라도 절대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말이다. 할 만큼 해봤고 더 이상의 약물도 싫었으며, 그 약물들의 심한 부작용에서 벗어나 그냥 자연스럽게 순응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란다. 대신 스스로의 몸에 직접 주사를 놓는 자가주사를 7년 맞았는데, 이젠 그것마저도 끊어버렸다고 한다. 모든 게 부작용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이 가능한 경증 환우들은 저 같은 중증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죠. 이 증상에 좋다는 식이요법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하는 게 낫다’는 조언 아닌 조언을 전하는데, 활동이 가능한 90%의 환우들한테는 저 같은 모습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지겠죠. 외출을 생각 안 한 지가 7,8년 됐네요. 그렇게 제 마음이 딱 정해지더라고요.”
그를 두고두고 떠올릴 강렬한 인상은 가장 단순한 부분에서 등장했다. 두 시간 정도 진행된 대화의 시간 내내, 황신애 씨는 단 한 차례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상대의 눈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눈을 똑바로 본다는 건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선을 피할 만한 둘러댐도 없다는 확인과도 같은 것이다. 누운 자세였던 그의 입가에 짧은 경련이 일어나고 눈가가 젖어들 무렵, 이즈음에서 화제를 돌리자는 제안을 던졌다. 아픈 얘기만 나누러 만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제안을 그가 반겼다.
“좋아요. 저는 쾌활한 걸 좋아해요. 밝고 쾌활한 얘기가 훨씬 좋잖아요.”
▲ 황신애 씨의 첫 시집 <모로>의 표지. 자화상 같은 표지 그림 또한 그의 작품이다. |
사랑하는 이들에게
나를 여전히 마주친 눈동자로 그는 어린 시절을 얘기했다. 고향인 완도가 등장했다. 청해진으로 더 유명한 곳, 바다가 보이는 그 곳 바닷가 가난한 마을 집에서 부모님과 언니와 여동생인 세 자매가 함께 살던 어린 시절이 펼쳐졌다. 글을 쓰고 싶고 그림도 너무 그리고 싶었던 소녀…. 어쩌면 지금 이 순간 황신애 씨는 마주보는 눈동자 안에서 그 시절을 투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스스로도 정말 오랜만에 떠올리는 기억이었던 모양이다. 혼자만의 독백을 하듯, 그의 어린 시절은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의 삶으로 세상을 옮겨갔다. 글을 쓰고 그림 그리는 걸 간절히 희망했지만, 가슴속 막연한 꿈으로만 간직해야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몸이 너무 안 좋으셨던 엄마가 중3 때 돌아가신 게 사춘기 최대의 상처로 남아버렸기 때문이다. 엄마의 떠나심은 아빠의 과도한 술로 이어졌고, 간경화로 쓰러지신 아빠는 8년이라는 세월을 고생하시다가 엄마 곁으로 떠나셨다고 한다.
“항상 슬픔이 많았고 생각 또한 많아지는데도,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어요. 울고 싶지 않았어요. 우울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저는 강해야 했어요. 언니와 동생, 우리 셋은 다 항상 강해야 했으니까요.”
23살에 결혼, 두 딸의 출산. 그는 결혼을 계기로 인생을 완전히 바꾸게 됐다고 한다. 그 이전의 삶을 아예 없애버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단절시킨다는 거, 그건 인위적인 노력으로 완성될 리 없는 무모한 도전일지도 모른다. 삶의 뿌리는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 성공한 듯이 보였다. 이렇게 되살리는 당시의 기억이 너무 오랜만이기에, 이제야 삶의 퍼즐을 맞추는 게 몹시도 새삼스런 상황이라는 듯 그의 눈동자는 더욱 크게 반짝였다.
“2014년 봄 세월호 참사 때였어요. 티브이(TV)를 통해 세월호를 보고 있으면서, 저는 제가 물에 잠기는 듯한 실감을 갖게 됐어요. 30분도 앉아 있지 못하는 몸이 됐기 때문에, 2,3개월 동안 누운 채로 세월호를 보면서 정말 물에 잠기는 느낌만 받은 거예요.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이러다 죽겠구나. 내 인생이 가겠구나. 내가 바라던 바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냥 이렇게 가면 안 되겠다’는 절실함이 떠올랐던 거죠.”
그래서 정말 진지하게 내면을 파고들며 고민했단다. ‘내 주변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만 남겨준다면, 나는 뭘 남겨주고 가야 할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상실감만 남겨질 무렵, 그는 사랑하는 이들의 가슴에 남겨줄 건 결국 자신의 가슴속 이야기라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정말 하고 싶었던’ 오래 전 꿈을 끄집어내게 됐단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 말이다.
꼭 지키게 될 새로운 약속
“아주 조그만 책자라도 만들어 선물로 남겨두고 싶었어요. 삶이라는 게 2,3년 정도밖에 안 남은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억지로 앉아서 마음속 활자들을 글로 적고 그림을 그렸어요.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30분도 견디기 힘들었던 제 몸이 한 시간 두 시간을 앉는 게 가능해진 거예요. 그렇게 몇 달 동안 적고 그리기를 계속하다가, 어느 순간 답 하나가 확 다가왔어요. ‘진짜로 만들어 보자!’ 그리고 ‘모로’라는 제목이 뒤따르듯 떠올랐어요. ‘모로’는 항상 모로 누워 있는 저 자신의 삶을 의미하는 거죠.”
‘정말로 만들어 보자. 만들어서 내 사람들한테 주고 가자. 죽기 전에 주고 가자. 지금 안 만들면 나는 절대 못한다.’ 그 심정 하나로 적고 그리기에 전념한 결과, 출판사를 만나게 되고 정식 출간작업이 진행되게 됐단다. 일주일에 한 번씩 출판사에서 찾아와 밤 12시까지 작업을 계속했는데, 이 모든 과정이 실제 이뤄진다는 건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고 한다. 2015년 5월 29일, 시인 황신애의 첫 시집(시화집) <모로>는 그렇게 세상에 태어났다. 시집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눠진다. 1부는 시 작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2부는 그의 인생에 마음의 인연으로 남겨졌던 인물들의 초상화로 마지막 면까지 이어진다. 그의 음성 중 가장 큰 여운으로 남겨졌던 “왼손 하나만 남았네요”의 그 왼손이 이 모든 걸 완성한 것이다.
“<모로>는 ‘1’이라고 생각해요. ‘2’도 준비해야겠다 마음을 먹었거든요. 원래는 그 한 권으로 마무리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모로>를 만들다 보니까, 제가 저 자신을 완전히 다 끄집어낸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제가 살아 있잖아요. 살아 있으니까 이 ‘살아 있음’을 새로 적고 새롭게 그려야 해요. 물에 잠겼던 저를 일으켜 세우는 유일한 방법이자 힘은 두 번째 <모로>를 탄생시키는 거예요. 더 깊게, 더 순수하게, 제가 지향하는 모든 걸 담고 싶어요. 빠르면 1년 후에, 아니면 2년이나 3년이 걸릴지도 모르겠네요. 살아 있으면 내겠죠. 반드시 완성할 거예요.”
두 번째 <모로>가 탄생하면 그때는 그 시집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달려오겠다 약속했더니, 그날 봤던 모습 중에서 가장 큰 웃음이 그의 얼굴에 가득 채워졌다. 작별의 배웅은 앉아서 하고 싶다는 그가 힘겨운 과정을 거치며 휠체어에 앉았다. 10년, 20년은 가깝게 사귄 지인처럼, 황신애 씨는 마지막 악수의 순간까지 눈 마주침을 놓지 않았다. 참으로 고맙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느낌, 돌아오는 길 내내 느꼈던 이 감정은 두 번째 <모로>의 탄생을 응원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지면 위에 남겨놓아야겠다. 시인 황신애 씨의 새로운 ‘자기 자신’의 탄생을 모든 독자 여러분과 함께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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